지혜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잠9:1-6)
지혜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잠언9:1-6
찬송가 528장에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는 찬송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죄 있는 자들을 다 오라고 부르는 찬송입니다.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주님께 나아오면 ‘사망의 그늘이 너와 내 앞에 둘리며 가리 우고, 죄 많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주님께서 영접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를 부르는 또 하나의 음성이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지혜는 물론 우리를 부를 수 있는 인격체는 아닙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인격화해서 지혜가 우리를 부른다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여러 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혜가 우리를 부른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지혜의 부름뿐 아니라 미련한 여인의 부름이 또 있습니다.
이 부름을 13절 이하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부름은 지혜의 부름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절수도 똑같이 여섯 절에 해당하고 부르는 곳도 성중 높은 곳으로 같습니다.
부르는 소리도 똑같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서로 내게로 오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부름의 결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지혜의 부름에는 생명을 얻고 명철의 길을 가게 되지만 미련한 여인의 부름에는 죽은 자들이 들어가는 스올에 있게 됩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여러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음성은 자기가 제일 명철하고 자기를 듣고 따르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그럴듯한 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름의 결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어떤 부름은 명철과 지혜를 가져다주고 생명을 가져다주지만 어떤 부름은 멸망과 실패를 가져다주고 영원한 파멸을 가져다줍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쓴 스티븐 코비는 ‘일상이 행복해지기 위한 세 가지 선택’을 말합니다.
먼저는, 행동의 선택인데 뚜렷한 목표를 위해 계획을 세워 스스로 움직이는 능동적 선택을 하라고 합니다.
주어진 상황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수동적 선택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목적의 선택인데 같은 일억을 벌어도 목적이 무엇이냐? 구제가 목적이냐 자기 소비가 목적이냐에 따라 행복도 달라진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원칙의 선택인데 살면서 만나는 불법과 부조리에 대해 반응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법을 어기고 남을 넘어뜨리면서라도 빠른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은 행복과는 점점 멀어진다는 말입니다.
살아가면서 늘 직면해야 하는 선택의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 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게 됩니다.
예전의 상업광고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만 영적인 선택은 10년이 아니라 영생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음성을 듣고 따르느냐 하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제일 중요한 결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솔로몬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지혜가 부르는 음성을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지혜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1.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떤 방향으로 어떤 길을 가느냐? 살아가는 방향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그것은 실패의 길을 재촉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는 데 마차를 만났습니다.
나그네는 너무 다리가 아파서 태워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마부는 기꺼이 타라고 허락하였습니다. 나그네가 마부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예루살렘까지 가는 데 예루살렘까지는 여기에서 얼마나 되나요?”
마부는 “이 정도 속도라면 30분 정도 걸리지요”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조금 자고 일어나 보니 30분 정도 지났습니다.
“예루살렘에 다 왔지요?” 그러자 마부는 “여기서는 한 시간 거리입니다.”라고 합니다.
“아니, 30분 걸린다는 데 30분 왔으면 다 온 것 아닌가요?”
그 때 마부가 말합니다. “이 마차는 예루살렘과는 반대로 가는 마차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방향은 생각하지도 않고 아무 길로나 갑니다.
빨리 가는 것만 생각하고, 편히 가는 것만 생각하고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마차를 타는 것도 좋지만 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돌이키라는 말입니다.
지혜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거기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사는 삶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얼마 있지 않아 그 삶은 실패로 돌아가고 아들은 거지 신세가 됩니다.
얼마나 가난한 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해도 그 마저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미련한 여인의 소리를 좇다가 결국 이런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신세에서 벗어나 그가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아버지께로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허락하지도 않고 뵐 면목도 없었지만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살 수 있었고 죽음에서 생명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살 수 있는 길은 ‘이리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지혜로 돌아가고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가롯 유다는 누가 더 잘못했느냐? 경중을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잘못을 범한 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죽을 지언 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막상 위험이 닥쳤을 때는 어린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아가 저주까지 했습니다.
이 죄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은 죄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회복되었고 가롯 유다는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여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며 회개하고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돌이키지 못하였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하면 죄를 지었을 때 빨리 돌이키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행3:19)
감사한 것은 우리는 지혜가 부르는 길로 이미 들어섰다는 사실입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비틀거리며 절며 바른 길을 가는 것이 꼿꼿이 서서 그릇된 길로 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길이 어려울 수도 있고 비틀거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길을 가는 것이 생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걷는 자세를 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가는 방향을 봅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길이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바른길을 가는 자입니다.
빨리 가려고 애쓰지 말고 바른 방향으로 가려고 애쓰시기 바랍니다.
한 번 믿음으로 정한 길을 바꾸지 말고 바르게 하늘나라를 향하여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길을 갈 때 많은 미련한 여인의 유혹이 있겠지만 잘못된 유혹에 이끌리지 마시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생명의 길을 가실 수 있기 바랍니다.
2. 두 번째 지혜의 음성은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길에서 지혜가 부르는 길로 돌이켰다고 하면 이제는 지혜와 함께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셔야 합니다.
중동 지방에서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우정을 나눈다는 의미가 있고 우리가 하나다,
특히 남녀가 함께 식탁에 앉는다는 말은 몸을 섞는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사랑하고 아꼈을 때는 그와 식탁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을 미워하고 적대시할 때는 식탁에서 쫓아내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과의 우정을 생각하여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사랑했을 때 므비보셋은 다윗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게 됩니다.
지혜의 부름에 응답하여 돌이켜서 함께 식물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하나님과 지혜와 깊은 교제가운데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을 예수님의 식탁 속에 초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였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는 잔치는 최고의 잔치입니다.
양이 아닙니다. 염소가 아닙니다. 늙은 소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살진 송아지는 최고의 맛을 의미합니다.
최고로 맛있는 고기 잔치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이치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 보다 누구하고 먹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가끔 좋은 사람들과 만나서 식사를 나누고 좋은 대화를 하게 될 때 참으로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과 우정을 맺고 싶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실 줄 아는 사람이 지혜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식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대화하는 시간은 가장 귀한 시간이요 행복한 시간이요 축복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기뻐 찬양하고 하나님의 좋으신 생명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이 예배의 교제를 절대 소홀히 하시면 안 됩니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예배하는데 드려야 합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또한 하나님과 교제하며 주님의 은혜를 힘입는 시간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나와 주님과 일대일로 교제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셨습니다.
때로는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고 때로는 철야하며 기도하셨고 때로는 산에 올라가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주님을 만나는 것도 너무 좋은 교제의 시간입니다.
예배로 찬양으로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는 이 시간 주님의 즐거움과 기쁨과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3. 세 번째로 지혜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고 명철의 길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지혜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길을 돌이키며 지혜의 식탁에서 교제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6절 말씀을 보면,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고,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명철의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명철의 길을 걷는 것이 무엇입니까? 10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잠언서에는 이런 말씀이 18번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잠언서를 삶의 지혜를 얻는 일종의 도덕책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여러분, 잠언서는 도덕책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 하는 생명의 책입니다.
여호와를 알고 섬기며 구원을 얻게 하는 생명의 책입니다.
그러기에 지혜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며 주님을 알고 섬기는 자는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명철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해서 어리석은 여인의 말을 듣고 지혜의 길에서 멀어진 자들은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칠레 북쪽 아타카마 사막은 매우 건조한 곳으로 이곳의 연평균 강수량은 15㎜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2015년 3월 어느 날 12시간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엄청난 양의 비가 한꺼번에 쏟아진 것입니다.
비가 그치자 척박한 땅 곳곳에서 싹이 돋아나기 시작하더니 꽃망울이 맺히고 몇 주 후에는 흙먼지뿐이던 사막이 온통 분홍색 꽃들로 뒤덮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 기적 같은 일을 보려고 찾아왔습니다.
많은 사진작가가 멋진 절경들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눈으로 보면서도 마음으로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그 후 비가 내리지 않자 꽃은 사라지고 다시 황량한 사막이 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충분한 비만 내려준다면 아타카마 사막은 언제라도 아름다운 꽃들로 뒤덮일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 2:7)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황량한 사막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그 사막 같은 마음에 예수님의 은혜의 단비가 쏟아지면 그 마음도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하게 될 줄로 압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아타카마 사막같이 황량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치권은 이념 분쟁으로 하루도 싸우지 않을 날이 없습니다.
분쟁의 골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고 각자의 진영을 따라 반대편의 사람들을 악마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국가와 사회뿐 아니라 우리 마음도 덩달아 황폐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땅을 생명이 충만한 옥토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생명의 근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지혜가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생명의 길로 축복의 길로 구원의 길로 나갈수 있기 바랍니다.
(2024.08.18.)
잠언9:1-6
찬송가 528장에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는 찬송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죄 있는 자들을 다 오라고 부르는 찬송입니다.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주님께 나아오면 ‘사망의 그늘이 너와 내 앞에 둘리며 가리 우고, 죄 많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주님께서 영접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를 부르는 또 하나의 음성이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지혜는 물론 우리를 부를 수 있는 인격체는 아닙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인격화해서 지혜가 우리를 부른다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여러 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혜가 우리를 부른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지혜의 부름뿐 아니라 미련한 여인의 부름이 또 있습니다.
이 부름을 13절 이하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부름은 지혜의 부름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절수도 똑같이 여섯 절에 해당하고 부르는 곳도 성중 높은 곳으로 같습니다.
부르는 소리도 똑같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서로 내게로 오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부름의 결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지혜의 부름에는 생명을 얻고 명철의 길을 가게 되지만 미련한 여인의 부름에는 죽은 자들이 들어가는 스올에 있게 됩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여러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음성은 자기가 제일 명철하고 자기를 듣고 따르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그럴듯한 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름의 결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어떤 부름은 명철과 지혜를 가져다주고 생명을 가져다주지만 어떤 부름은 멸망과 실패를 가져다주고 영원한 파멸을 가져다줍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쓴 스티븐 코비는 ‘일상이 행복해지기 위한 세 가지 선택’을 말합니다.
먼저는, 행동의 선택인데 뚜렷한 목표를 위해 계획을 세워 스스로 움직이는 능동적 선택을 하라고 합니다.
주어진 상황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수동적 선택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목적의 선택인데 같은 일억을 벌어도 목적이 무엇이냐? 구제가 목적이냐 자기 소비가 목적이냐에 따라 행복도 달라진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원칙의 선택인데 살면서 만나는 불법과 부조리에 대해 반응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법을 어기고 남을 넘어뜨리면서라도 빠른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은 행복과는 점점 멀어진다는 말입니다.
살아가면서 늘 직면해야 하는 선택의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 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게 됩니다.
예전의 상업광고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만 영적인 선택은 10년이 아니라 영생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음성을 듣고 따르느냐 하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제일 중요한 결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솔로몬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지혜가 부르는 음성을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지혜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1.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떤 방향으로 어떤 길을 가느냐? 살아가는 방향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그것은 실패의 길을 재촉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는 데 마차를 만났습니다.
나그네는 너무 다리가 아파서 태워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마부는 기꺼이 타라고 허락하였습니다. 나그네가 마부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예루살렘까지 가는 데 예루살렘까지는 여기에서 얼마나 되나요?”
마부는 “이 정도 속도라면 30분 정도 걸리지요”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조금 자고 일어나 보니 30분 정도 지났습니다.
“예루살렘에 다 왔지요?” 그러자 마부는 “여기서는 한 시간 거리입니다.”라고 합니다.
“아니, 30분 걸린다는 데 30분 왔으면 다 온 것 아닌가요?”
그 때 마부가 말합니다. “이 마차는 예루살렘과는 반대로 가는 마차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방향은 생각하지도 않고 아무 길로나 갑니다.
빨리 가는 것만 생각하고, 편히 가는 것만 생각하고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마차를 타는 것도 좋지만 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돌이키라는 말입니다.
지혜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거기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사는 삶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얼마 있지 않아 그 삶은 실패로 돌아가고 아들은 거지 신세가 됩니다.
얼마나 가난한 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해도 그 마저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미련한 여인의 소리를 좇다가 결국 이런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신세에서 벗어나 그가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아버지께로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허락하지도 않고 뵐 면목도 없었지만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살 수 있었고 죽음에서 생명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살 수 있는 길은 ‘이리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지혜로 돌아가고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가롯 유다는 누가 더 잘못했느냐? 경중을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잘못을 범한 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죽을 지언 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막상 위험이 닥쳤을 때는 어린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아가 저주까지 했습니다.
이 죄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은 죄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회복되었고 가롯 유다는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여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며 회개하고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돌이키지 못하였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하면 죄를 지었을 때 빨리 돌이키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행3:19)
감사한 것은 우리는 지혜가 부르는 길로 이미 들어섰다는 사실입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비틀거리며 절며 바른 길을 가는 것이 꼿꼿이 서서 그릇된 길로 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길이 어려울 수도 있고 비틀거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길을 가는 것이 생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걷는 자세를 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가는 방향을 봅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길이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바른길을 가는 자입니다.
빨리 가려고 애쓰지 말고 바른 방향으로 가려고 애쓰시기 바랍니다.
한 번 믿음으로 정한 길을 바꾸지 말고 바르게 하늘나라를 향하여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길을 갈 때 많은 미련한 여인의 유혹이 있겠지만 잘못된 유혹에 이끌리지 마시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생명의 길을 가실 수 있기 바랍니다.
2. 두 번째 지혜의 음성은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길에서 지혜가 부르는 길로 돌이켰다고 하면 이제는 지혜와 함께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셔야 합니다.
중동 지방에서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우정을 나눈다는 의미가 있고 우리가 하나다,
특히 남녀가 함께 식탁에 앉는다는 말은 몸을 섞는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사랑하고 아꼈을 때는 그와 식탁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을 미워하고 적대시할 때는 식탁에서 쫓아내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과의 우정을 생각하여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사랑했을 때 므비보셋은 다윗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게 됩니다.
지혜의 부름에 응답하여 돌이켜서 함께 식물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하나님과 지혜와 깊은 교제가운데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을 예수님의 식탁 속에 초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였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는 잔치는 최고의 잔치입니다.
양이 아닙니다. 염소가 아닙니다. 늙은 소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살진 송아지는 최고의 맛을 의미합니다.
최고로 맛있는 고기 잔치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이치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 보다 누구하고 먹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가끔 좋은 사람들과 만나서 식사를 나누고 좋은 대화를 하게 될 때 참으로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과 우정을 맺고 싶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실 줄 아는 사람이 지혜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식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대화하는 시간은 가장 귀한 시간이요 행복한 시간이요 축복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기뻐 찬양하고 하나님의 좋으신 생명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이 예배의 교제를 절대 소홀히 하시면 안 됩니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예배하는데 드려야 합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또한 하나님과 교제하며 주님의 은혜를 힘입는 시간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나와 주님과 일대일로 교제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셨습니다.
때로는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고 때로는 철야하며 기도하셨고 때로는 산에 올라가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주님을 만나는 것도 너무 좋은 교제의 시간입니다.
예배로 찬양으로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는 이 시간 주님의 즐거움과 기쁨과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3. 세 번째로 지혜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고 명철의 길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지혜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길을 돌이키며 지혜의 식탁에서 교제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6절 말씀을 보면,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고,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명철의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명철의 길을 걷는 것이 무엇입니까? 10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잠언서에는 이런 말씀이 18번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잠언서를 삶의 지혜를 얻는 일종의 도덕책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여러분, 잠언서는 도덕책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 하는 생명의 책입니다.
여호와를 알고 섬기며 구원을 얻게 하는 생명의 책입니다.
그러기에 지혜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며 주님을 알고 섬기는 자는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명철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해서 어리석은 여인의 말을 듣고 지혜의 길에서 멀어진 자들은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칠레 북쪽 아타카마 사막은 매우 건조한 곳으로 이곳의 연평균 강수량은 15㎜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2015년 3월 어느 날 12시간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엄청난 양의 비가 한꺼번에 쏟아진 것입니다.
비가 그치자 척박한 땅 곳곳에서 싹이 돋아나기 시작하더니 꽃망울이 맺히고 몇 주 후에는 흙먼지뿐이던 사막이 온통 분홍색 꽃들로 뒤덮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 기적 같은 일을 보려고 찾아왔습니다.
많은 사진작가가 멋진 절경들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눈으로 보면서도 마음으로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그 후 비가 내리지 않자 꽃은 사라지고 다시 황량한 사막이 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충분한 비만 내려준다면 아타카마 사막은 언제라도 아름다운 꽃들로 뒤덮일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 2:7)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황량한 사막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그 사막 같은 마음에 예수님의 은혜의 단비가 쏟아지면 그 마음도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하게 될 줄로 압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아타카마 사막같이 황량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치권은 이념 분쟁으로 하루도 싸우지 않을 날이 없습니다.
분쟁의 골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고 각자의 진영을 따라 반대편의 사람들을 악마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국가와 사회뿐 아니라 우리 마음도 덩달아 황폐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땅을 생명이 충만한 옥토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생명의 근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지혜가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생명의 길로 축복의 길로 구원의 길로 나갈수 있기 바랍니다.
(202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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