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
나의 피난처 되시는 주님 시32:1-11, 롬8:31-39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오살한 자가 죽은 자의 가족에게 보복 사형을 당하는 것을 보호하여 정당한 회중 재판을 받을 때까지 보호하기 위해 여섯 개의 도피성을 만들게 했습니다.(수20장) 그 도피성들은 예수께서 장차 '죄 값은 사망'이라는 철칙으로 사형수가 된 우리의 피난처가 될 것에 대한 예표요, 그림자입니다. 그 도피성들의 이름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게데스는 ‘성소’라는 뜻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는 성소가 되시는 분이요, *세겜은 ‘어깨’라는 뜻으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오시는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헤브론은 ‘친교’라는 뜻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이 되시어 단절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회복시켜 사랑의 관계로 회복시켜 교제께 해 주신 분입니다. *베셀은 ‘요새’라는 뜻으로 노아의 홍수 때 유일한 구원의 요새는 방주 안뿐이었는데 그 방주는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라못은 ‘높임’이란 뜻으로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높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골란은 ‘성별’이란 뜻으로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세상과 정욕과 사단의 유혹에서 벗어나 구별된 백성으로 성별해 주시는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구약 본문 7절에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라고 했는데, 은신처는 다른 말로 피난처입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께서 어떤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가?’를 상고하면서 “나의 피난처 되시는 주님”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회개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구약 본문 시32:1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고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은 자로서 인생들에게 기원하고 있는 복은 죄 사함의 복입니다. 그가 '사죄의 복'을 말하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죄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입니다. 죄 없는 인간이란 결단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죄 없는 자'의 복을 기원하지 않고, 다만 '죄 사함 받은 자'의 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죄 사함의 은총 없이는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회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에 두 낮말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나함'인데 '슬퍼하다.', '애통하다.'라는 뜻으로 이는 과거의 잘못을 진정으로 슬퍼하며 미워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 '슈브'는 '돌이키다.', '돌아서다.'라는 뜻으로 변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가는 변화이며, 새로워지는 모습입니다. 세상 중심으로 죄악 된 삶으로부터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이키는 결단과 실행인 것입니다. 가인이나 가룟 유다와 같은 인물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음으로 진정으로 죄 사함 받지 못하였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미워하는 마음, 곧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어 U턴하는 것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하며 하나님께 두 손을 들고 항복하고 돌아오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핵심 중 하나가 회개를 통한 죄 사함을 받는 것인데, 어떤 종교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1893년에 '세계 종교 회의'가 시카고 박람회에서 열렸는데, 거기에는 기독교, 회교, 불교, 유교, 힌두교 등등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각 종교의 대표자들은 각자 종교의 좋은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의 순서가 되었을 때 대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종교 중에서 사람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 기독교인 대표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의 죄를 해결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셨기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어떤 죄든지 모두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죄'의 문제는 심각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죄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세상에 어떤 의인도, 재벌도, 권세와 능력 있는 그 누구도 한 사람의 죄의 문제도 해결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은혜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는 내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십자가 공로입니다. 신약 본문 롬8:33-34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했습니다. 믿음으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은 자는 누구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중죄를 짓고 살던 사람이 주님 은혜를 받고 회개하면 훨씬 더 겸손히 뜨겁게 헌신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박해하고,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바울이 그랬고, 우리나라 초기 김익두 목사나, 이기풍 목사 같은 분들이 그랬습니다. 어떤 부인이 사상가 존 러스킨에게 값비싼 손수건을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이 손수건은 최고급 실크로 만든 것인데 누군가가 여기에 잉크를 쏟아 버렸어요. 손수건이 얼룩져 쓸모없게 되어 버렸어요."
그러자 러스킨이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부인, 그 손수건을 며칠만 제게 빌려 주십시오." 미술에도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던 러스킨은 손수건의 잉크 자국을 이용해 아름다운 나무와 숲과 새의 모양을 그려 넣은 뒤 그 부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손수건은 오히려 그 이전보다 훨씬 더 고상하고 우아해 보이는 손수건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죄로 인한 많은 상처와 얼룩이 있지만, 그 상처와 얼룩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회개며 주님께 맡길 때 주님은 더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 회개함으로 주님 안에서 참 안식을 얻는 자가 됩시다.
2.기도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구약 본문 6절에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했습니다.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라는 말은 기도할 기회를 만들라는 뜻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다윗은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는 위기를 만날 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들으셔서 대적의 손에서 그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런 은혜 체험을 통해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주의 지팡이가 그를 안위해 주시는 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이 비록 포로로 잡혀온 몸이지만 뜻을 정하여 하루 세 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창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뛰어난 지혜를 주시어 바벨론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를 시기하여 모함하는 자들에 의해 사자 굴에 들어갈 줄 알면서도 계속 기도하다가 사자 굴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그를 보호하심으로 살아나 오히려 왕으로 하여금 온 백성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말하며 하나님 앞에 떨며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신약 본문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나아가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독생자하고 맞바꿀 만큼 내가 소중한 존재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부모가 자식이 병들어 신음할 때에 “내가 대신 아파 줄 수만 있다면 좋을 턴데” 이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내 자식을 죽여서까지 라도 나는 그 일을 이루고 싶다”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죽게 만들고 우리를 살려내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사랑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가 필요하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왜 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시골의 어느 목사가 성전 건축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딸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간단한 안부와 함께 옷값과 학비를 보내 달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일종의 '청구서'였습니다.
그 날 밤도 여전히 목사는 건축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는데, '너도 청구서를 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깜짝 놀란 목사는 곧 그 음성에 순종하여 공사비 내역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내역서를 펴놓고 기도하였습니다. 다음날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습니다. 교회 건축 문제를 상의하자는 편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얼마 후 아름다운 성전을 완공하였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구체적인 청구서를 작성하게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믿음이 없어서 대충 기도하다가 포기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믿고 믿음으로 구체적인 기도를 드립시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기도함으로 응답받아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주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구약 본문 10절에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여기에 악인과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악인은 많은 슬픔 가운데 살지만,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떠한 경우를 만나든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될 때 강하고 담대하게 될 수 있고, 주님은 그런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갈 때 먼저 각 지파를 대표해서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서 그 땅을 탐지하고 보고할 때 열 명은 그 성의 견고함, 그 백성들의 장대함 등을 보면서 우리는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절망적인 보고를 했을 때 온 백성들이 낙망하며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역사로 함께 하신 것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대로 반드시 그 땅에 들어 갈 것을 믿으며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신약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계속해서 하는 고백이 확신이 넘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31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했습니다. 33절에는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데 누가 택한 백성을 고발 하겠는가’, 34절에 ‘누가 정죄 하겠는가’, 35절에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는가’, 37절에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계시기에 넉넉히 이긴다.’ 38절 이하에 ‘내가 확신한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 말씀들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인해 확신에 넘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무슨 일을 만나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환경을 바라보며 실망하고 낙담하며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한 꼬마가 주일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엄마가 오늘은 뭘 배웠는지 물었습니다. “오늘은 모세가 적들을 어떻게 이겼는지 배웠어요. 홍해에 도착하자, 모세는 다리를 건설해서 사람들을 모두 건너게 했대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건너자 그는 무전기로 본부에 연락을 해서 폭격기 지원 요청을 했죠. 폭격기는 폭탄을 떨어뜨려서 다리를 부쉈고, 애굽 군인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대요.” “애야, 선생님이 정말 그렇게 얘기하셨니?” “사실은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이 얘기하신 대로 말하면 엄마는 못 믿을 걸요?”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인디언들이 아들을 훈련할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숲 속에서 맹수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하면서 아들의 담력을 키운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강조합니다. “무섭거든 아버지라고만 불러라” 시험을 받는 날 밤에 아들은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겠습니까? 그러나 날이 밝아오면서 아들은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지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도록 밤새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도 항상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심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을 신뢰 하는 성도로 삽시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께서 어떤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가?’를 상고하면서 “나의 피난처 되시는 주님”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아멘.
<2024. 08. 21. 호현낙선>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오살한 자가 죽은 자의 가족에게 보복 사형을 당하는 것을 보호하여 정당한 회중 재판을 받을 때까지 보호하기 위해 여섯 개의 도피성을 만들게 했습니다.(수20장) 그 도피성들은 예수께서 장차 '죄 값은 사망'이라는 철칙으로 사형수가 된 우리의 피난처가 될 것에 대한 예표요, 그림자입니다. 그 도피성들의 이름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게데스는 ‘성소’라는 뜻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는 성소가 되시는 분이요, *세겜은 ‘어깨’라는 뜻으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오시는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헤브론은 ‘친교’라는 뜻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이 되시어 단절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회복시켜 사랑의 관계로 회복시켜 교제께 해 주신 분입니다. *베셀은 ‘요새’라는 뜻으로 노아의 홍수 때 유일한 구원의 요새는 방주 안뿐이었는데 그 방주는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라못은 ‘높임’이란 뜻으로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높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골란은 ‘성별’이란 뜻으로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세상과 정욕과 사단의 유혹에서 벗어나 구별된 백성으로 성별해 주시는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구약 본문 7절에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라고 했는데, 은신처는 다른 말로 피난처입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께서 어떤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가?’를 상고하면서 “나의 피난처 되시는 주님”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회개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구약 본문 시32:1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고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은 자로서 인생들에게 기원하고 있는 복은 죄 사함의 복입니다. 그가 '사죄의 복'을 말하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죄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입니다. 죄 없는 인간이란 결단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죄 없는 자'의 복을 기원하지 않고, 다만 '죄 사함 받은 자'의 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죄 사함의 은총 없이는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회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에 두 낮말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나함'인데 '슬퍼하다.', '애통하다.'라는 뜻으로 이는 과거의 잘못을 진정으로 슬퍼하며 미워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 '슈브'는 '돌이키다.', '돌아서다.'라는 뜻으로 변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가는 변화이며, 새로워지는 모습입니다. 세상 중심으로 죄악 된 삶으로부터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이키는 결단과 실행인 것입니다. 가인이나 가룟 유다와 같은 인물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음으로 진정으로 죄 사함 받지 못하였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미워하는 마음, 곧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어 U턴하는 것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하며 하나님께 두 손을 들고 항복하고 돌아오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핵심 중 하나가 회개를 통한 죄 사함을 받는 것인데, 어떤 종교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1893년에 '세계 종교 회의'가 시카고 박람회에서 열렸는데, 거기에는 기독교, 회교, 불교, 유교, 힌두교 등등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각 종교의 대표자들은 각자 종교의 좋은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의 순서가 되었을 때 대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종교 중에서 사람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 기독교인 대표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의 죄를 해결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셨기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어떤 죄든지 모두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죄'의 문제는 심각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죄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세상에 어떤 의인도, 재벌도, 권세와 능력 있는 그 누구도 한 사람의 죄의 문제도 해결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은혜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는 내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십자가 공로입니다. 신약 본문 롬8:33-34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했습니다. 믿음으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은 자는 누구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중죄를 짓고 살던 사람이 주님 은혜를 받고 회개하면 훨씬 더 겸손히 뜨겁게 헌신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박해하고,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바울이 그랬고, 우리나라 초기 김익두 목사나, 이기풍 목사 같은 분들이 그랬습니다. 어떤 부인이 사상가 존 러스킨에게 값비싼 손수건을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이 손수건은 최고급 실크로 만든 것인데 누군가가 여기에 잉크를 쏟아 버렸어요. 손수건이 얼룩져 쓸모없게 되어 버렸어요."
그러자 러스킨이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부인, 그 손수건을 며칠만 제게 빌려 주십시오." 미술에도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던 러스킨은 손수건의 잉크 자국을 이용해 아름다운 나무와 숲과 새의 모양을 그려 넣은 뒤 그 부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손수건은 오히려 그 이전보다 훨씬 더 고상하고 우아해 보이는 손수건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죄로 인한 많은 상처와 얼룩이 있지만, 그 상처와 얼룩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회개며 주님께 맡길 때 주님은 더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 회개함으로 주님 안에서 참 안식을 얻는 자가 됩시다.
2.기도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구약 본문 6절에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했습니다.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라는 말은 기도할 기회를 만들라는 뜻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다윗은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는 위기를 만날 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들으셔서 대적의 손에서 그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런 은혜 체험을 통해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주의 지팡이가 그를 안위해 주시는 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이 비록 포로로 잡혀온 몸이지만 뜻을 정하여 하루 세 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창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뛰어난 지혜를 주시어 바벨론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를 시기하여 모함하는 자들에 의해 사자 굴에 들어갈 줄 알면서도 계속 기도하다가 사자 굴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그를 보호하심으로 살아나 오히려 왕으로 하여금 온 백성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말하며 하나님 앞에 떨며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신약 본문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나아가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독생자하고 맞바꿀 만큼 내가 소중한 존재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부모가 자식이 병들어 신음할 때에 “내가 대신 아파 줄 수만 있다면 좋을 턴데” 이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내 자식을 죽여서까지 라도 나는 그 일을 이루고 싶다”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죽게 만들고 우리를 살려내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사랑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가 필요하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왜 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시골의 어느 목사가 성전 건축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딸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간단한 안부와 함께 옷값과 학비를 보내 달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일종의 '청구서'였습니다.
그 날 밤도 여전히 목사는 건축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는데, '너도 청구서를 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깜짝 놀란 목사는 곧 그 음성에 순종하여 공사비 내역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내역서를 펴놓고 기도하였습니다. 다음날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습니다. 교회 건축 문제를 상의하자는 편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얼마 후 아름다운 성전을 완공하였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구체적인 청구서를 작성하게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믿음이 없어서 대충 기도하다가 포기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믿고 믿음으로 구체적인 기도를 드립시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기도함으로 응답받아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주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구약 본문 10절에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여기에 악인과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악인은 많은 슬픔 가운데 살지만,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떠한 경우를 만나든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될 때 강하고 담대하게 될 수 있고, 주님은 그런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갈 때 먼저 각 지파를 대표해서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서 그 땅을 탐지하고 보고할 때 열 명은 그 성의 견고함, 그 백성들의 장대함 등을 보면서 우리는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절망적인 보고를 했을 때 온 백성들이 낙망하며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역사로 함께 하신 것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대로 반드시 그 땅에 들어 갈 것을 믿으며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신약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계속해서 하는 고백이 확신이 넘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31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했습니다. 33절에는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데 누가 택한 백성을 고발 하겠는가’, 34절에 ‘누가 정죄 하겠는가’, 35절에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는가’, 37절에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계시기에 넉넉히 이긴다.’ 38절 이하에 ‘내가 확신한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 말씀들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인해 확신에 넘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무슨 일을 만나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환경을 바라보며 실망하고 낙담하며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한 꼬마가 주일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엄마가 오늘은 뭘 배웠는지 물었습니다. “오늘은 모세가 적들을 어떻게 이겼는지 배웠어요. 홍해에 도착하자, 모세는 다리를 건설해서 사람들을 모두 건너게 했대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건너자 그는 무전기로 본부에 연락을 해서 폭격기 지원 요청을 했죠. 폭격기는 폭탄을 떨어뜨려서 다리를 부쉈고, 애굽 군인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대요.” “애야, 선생님이 정말 그렇게 얘기하셨니?” “사실은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이 얘기하신 대로 말하면 엄마는 못 믿을 걸요?”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인디언들이 아들을 훈련할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숲 속에서 맹수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하면서 아들의 담력을 키운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강조합니다. “무섭거든 아버지라고만 불러라” 시험을 받는 날 밤에 아들은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겠습니까? 그러나 날이 밝아오면서 아들은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지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도록 밤새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도 항상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심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을 신뢰 하는 성도로 삽시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께서 어떤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가?’를 상고하면서 “나의 피난처 되시는 주님”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아멘.
<2024. 08. 21. 호현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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