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열려라 에바다 2024. 8. 25. 08:11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진리의증인추천 1조회 10124.08.22 08:02댓글 0
 
메시지241(마태6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9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예수 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9-13)


서론: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의인보다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은 의인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냐?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인은 진짜 의인이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자칭 의인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은 “나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칭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겸손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에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죄인으로 멸시받던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9절에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직업이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稅吏)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거둔 세금은 로마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로마제국은 그들의 식민지에서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 지역을 분할해서 징세권을 경매에 붙였습니다. 경매에서 가장 많은 금액을 써낸 조세업자가 징세권을 받았는데, 징세권을 받은 조세업자는 로마제국에 바치기로 한 금액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그들의 배를 불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세리는 강도와, 살인자와, 창기와 함께 가장 불의한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죄인으로 멸시받던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마태는 즉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본문과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5:28,은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면, 눈 딱 감고 그 길로 나가야 합니다. 또 마태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직업과 안정된 생활을 버린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버리고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목사나 선교사처럼 하나님 일에 전념하는 사람은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목회와 선교의 일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전념해야 합니다. 군인이 개인적인 사정이나 세상일에 얽매이면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없습니다. 마라톤 선수는 몸에 걸친 것이 적어야 잘 달립니다. 양복에 구두 신고 정장을 하고 달리는 마라톤 선수는 없습니다. 달리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천국을 향해서 달리는 신앙의 경주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버리고 포기해야합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우직하고 단순한 믿음이 최고의 지혜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너무 영리하고 너무 계산이 빠른 사람 그리고 하나님 말씀보다 인간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거나, 인간이나 돈이나 세속적인 것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태처럼 예수님이 따르라고 하면 따르고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안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멸시받던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마태처럼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셔야 복을 받고, 신앙과 인생에 승리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세상인심은 죄인이나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은 피하고 멀리합니다. 또 힘이 없고 가난한 사람도 피하고 외면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법적으로는 계급과 신분이 존재하지 않지만, 많은 문제가 존재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관행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차별과 편견이 행해지고 있지만, 2,000년 전 이스라엘은 차별과 편견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차별과 편견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누구도 차별과 편견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두꺼운 차별과 편견의 장벽을 깨뜨리고 타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마태가 그의 집으로 예수님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자, 마태의 직업이 세리였기 때문에 식사자리에는 많은 세리들이 참석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정통 유대인들은 세리나 죄인들과는, 함께 앉지도 않았고 식사도 같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을 깨뜨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는 정통 유대인과 보통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직업적인 종교인을 정통 유대인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들은 율법의 사소한 계명까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이 사람들은 겉으로는 완벽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람들을 ‘하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일반 백성들인데 이 사람들은 그들의 직업과 경제적인 사정으로 율법의 사소한 부분까지는 지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절대다수가 여기에 속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람들을 ‘땅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하늘의 아들이란 정통 유대인들은 땅의 아들과는 물건을 사고팔거나, 손님으로 초청하거나, 식사를 같이하거나, 교제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면서, 유대인들의 부당한 편견과 차별을 타파하신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비난했습니다. ‘예수가 훌륭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부정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느냐?’고 비아냥거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죄가 없다는 교만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겸손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반 유대인들과는 상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서기관들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은 병든 자와 죄인을 멸시하고 정죄는 했지만, 병자나 죄인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는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인간의 영혼을 치료하는 영혼의 의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병자를 돌보고 치료해야 할 의사의 사명을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더럽고 불결하다고 병자와 가까이 하지 않았고 건강한 사람과만 교제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죄인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죄인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데만 열을 올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을 정죄하고 자신들의 거룩성을 과시하는 데만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종교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그 사회의 문제를 가지고 고뇌하고, 도덕적으로 탁월한 가치관을 역설하며, 앞장서서 그것을 행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종교가 사회적인 문제와 소외당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도덕적 우월주의나 영적 자만에 빠져 정죄와 비판만 일삼는다면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종교가 그 사회의 빛이 되지 못하고, 그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외면을 받습니다. 종교의 사명은 비판과 정죄가 아니라, 불의하고 타락한 사회를 개혁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야 하며, 병든 영혼을 치료하는 영혼의 의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종교는 낙심하고 지친 자들에게 사랑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희망의 메신저(messenger)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은 다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로마서 3:10). 이 세상에는 구원받은 의로운 죄인과 구원받지 못한 불의한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의로운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죄인의 친구가 돼야 합니다. 죄인과 유유상종하는 타락한 친구가 아니라 죄에 빠진 친구를 구원하는 의로운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인의 친구로 오신 예수님처럼 영혼이 병든 자와, 낙심 중에 있는 자와,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자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죄인의 친구가 되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은 형식적인 예배나 율법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원하십니다.
성경은 요한복음 3:17,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사자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그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사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고 비난하는 서기관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 호세아 6:6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긍휼이 없는 제사보다 사랑과 자비를 베풀기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없는 종교행위는 위선자나 우상숭배자들이 더 잘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없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증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23,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요구하지 않는 박하와 회향의 십일조까지 드리면서 열심을 냈지만, 그보다 중요한 의로운 행실이 없고 사랑을 행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은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겉으로는 거룩거룩을 외치고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동기와 목적은 하나님 영광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광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경건을 자랑하고,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영광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고 의를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고난에 처한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고 돌보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셔서 33년 동안 죄인들과 함께 사시다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보다 큰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멸시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은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자칭 의인이라는 죄인과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겸손한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칭 의인 99명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때에 더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형식적인 예배나 율법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행하고 실천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멸시받던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마태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직업과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한 세리 마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가 되었고, 불의한 인간의 대명사로 통하던 세리 마태가, 정의와 진리의 사도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세리 마태처럼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불의하고 악한 인간도 존귀한 자가 되고, 천국과 영생이 보장되지만, 예수를 거절하고 반대하면 사망과 지옥 형벌을 받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인간의 최후의 운명이 예수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처럼 예수님의 부름과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셔서 신앙과 인생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4,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