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W : 믿음 BIW : 축복하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축복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호떡 이야기
호떡하면 추운 겨울에 먹는 음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어느 지역에 가면 뜨거운 열기가 풀풀 날리는 무더위에도 호떡을 파는 곳이 많습니다.
아기 호떡과 엄마 호떡이 있었습니다.
아기호떡이 불에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아기 호떡이 소리쳤습니다.
아기호떡 : “엄마. 뜨거워!!!”
엄마호떡 : “호떡의 인생이니 참아야 한단다.”
잠시 후, 아기호떡 : “엄마 나 못 참겠어!!!”
엄마호떡 : “그래도 참어!”
잠시 후, 아기호떡 : “엄마. 나 정말 더 이상 못 참겠어!”
엄마가 하는 말 : “그럼 뒤집어!”
호떡은 호떡의 일생이 있습니다.
호떡은 뜨거운 불에 잘 구워져서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안겨다 주는 것이 사명입니다.
우리들은 성령의 불에 잘 구워져서 하나님께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안겨다 주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호떡이 뜨거운 불을 견디지 못하고 화덕에서 도망가면 호떡의 맛을 낼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뜨거운 성령의 불을 견디지 못해서 교회에서 떠나버리면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인들은 성령의 뜨거운 불에 우리들의 죄악을 태워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성령의 뜨거운 불에 우리들의 못된 성격, 성질머리를 태워 죽여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성령의 뜨거운 불을 잘 이겨내면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지팡이로 거듭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새롭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서 주님의 몸된 교회의 신실한 일꾼으로 세워지는 축복이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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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일과를 마치고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온종일 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녀도 돌아갈 집이 없는 나그네들이 너무 많다.
공기가 너무나 무덥고 습하고 무더워서 열대야를 지내야 하는 한여름에도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추운 엄동설한인데도 마땅히 돌아갈 집이 없어서 기나긴 추운 겨울밤을 홀로 지내야 되는 이들이 너무 많다.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챙겨 먹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들이 같이 숨 쉬며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라는 세상에는 다이어트하기 위해서 일부러 안 먹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그런데 배불리 먹고 싶은데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 한 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그러니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챙겨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너무너무 행복한 사람이다.
밥을 먹는데 양쪽 이로 씹어 먹을 수 있는 사람들도 행복한 사람이다.
양쪽 치아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가를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한 쪽 치아만으로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아예 치아가 없어서 이 없으면 잇몸으로 먹는다 해서 이 대신에 잇몸으로 음식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어떤 이들은 그나마도 먹을 수 없어서 코에 호수를 끼워서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니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운이고 행복인지 모른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들 주변에 보면 일하고 싶은데 아무도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일을 할 수 없는 이들도 부지기수로 많다.
병실에 가보면 질병 때문에 고생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
사지육체가 멀쩡하여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돌아갈 집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고, 공부할 수 있고, 일할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느보산에 올라간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어떻게 하도록 감동을 주시고 계시는가?
느보산 정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선포한 메시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말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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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각 지파에 합당하게 축복하도록 하시는 하나님.
1절에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라고 소개하면서 모세가 모압 땅에 있는 느보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축복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축복하면서 지파마다 각각 다르게 축복하고 있다.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바라보면서 하는 축복도 미래지향적인 성격으로 축복한다.
야곱이 12아들과 요셉의 두 아들을 위하여 축복할 때도 미래지향적인 성격으로 축복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축복할 때도 미래지향적인 성격으로 축복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축복은 미래지향적으로 축복하는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위하여 축복할 때, 각각 다르게 축복하신다는 말씀은 각지파마다 축복받을 분량이나 그릇이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축복하기 전에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경배를 올려드린다.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사랑하심과 율법으로 언약을 맺어주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축복은 모세가 하는 것이지만, 그 축복을 책임져 주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세는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차례대로 일일이 거론하면서 축복한다.
르우벤지파, 유다지파, 레위지파, 베냐민지파, 요셉지파, 스불론지파, 잇사갈 지파, 갓지파, 단지파, 납달리지파, 아셀지파를 거론하면서 축복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각 지파마다 사람이 다르고, 쌓아온 업적이 다르고, 미래의 세계로 나아갈 분량이 다르기 때문에 모세는 각 지파에게 합당하도록 하나님의 감동으로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다.
축복의 근거는 과거와 현재까지 살아온 업적에 따라서 차등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축복의 방향은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해 나갈 능력과 은혜의 세계를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축복의 목적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 신실하게 믿음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키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실존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든 신앙인들을 향해서도 각 사람에게 맞는 축복의 메시지가 따로 있다.
나라와 민족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교회가 다르고, 하고 있는 일들이 다르고, 앞으로 쓰임 받아야 할 분야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 합당한 축복의 메시지를 각각 다르게 주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이 섬기는 교회와 가정과 생업터전에는 어떤 축복의 메시지를 주실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런 메시지를 주시더니 나에게는 요렇게만 주셨구먼.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기하고 있지는 않는가?
신앙인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감동으로 주신 메시지이기 때문에 투기하지도, 시기하기도 말고, 하나님께서 감동으로 주신 메시지에 감사하며 받아야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목사님께서 대심방을 할 때, 각 가정마다 주시는 말씀이 다를 수 있다.
어느 집에는 이렇게 좋은 말씀을 주시더니 우리 집에는 이렇게 하찮은 말씀을 주셨다고 하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들이 생기곤 한다.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에게 감동으로 주신 메시지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그 메시지를 잘 받아야 하는 것이다.
목사님의 설교를 가지고 트집 잡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행위는 그 목사님에게 감동을 주신 성령 하나님을 향하여 트집 부리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꼴이 된다.
신앙인들은 어떤 말씀이든 감사함으로, 은혜로 받을 수 있어야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② 축복에서 예외된 지파의 고통을 헤아려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위하여 축복하는 가운데 축복에서 빠진 지파가 있다.
바로 시므온 지파가 빠져 있다.
모세가 다른 지파들은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축복의 메시지를 따라서 축복하셨지만, 어찌하여 시므온 지파는 빠져 있을까?
왜 시므온 지파가 빠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 저 멀리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거룩한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에 시므온이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어떤 이유로 인하여 축복의 메시지가 빠져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축복의 메시지에서 빠진 시므온 지파 백성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저려올까?
무엇에든 잘했든, 못했든 제외되어 빠지게 되면 그 소외됨에 대하여 큰 상처와 아픔을 당하게 된다.
토라는 이스라엘의 12지파, 모든 백성들이 읽고 듣고 배우고 지키면서 살아야 할 삶의 원리요 원칙이다.
시므온 지파 백성들도 다른 지파 백성들처럼 똑같이 토라를 읽고 듣고 배우고 지키면서 살아야 할 원리요 원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므온 지파에게는 신명기 33장을 읽고 듣고 배우고 지키면서 살아야 메시지가 없는 것이다.
시므온 지파 백성들은 이 부분을 대할 때마다 “왜 우리만 축복의 메시지가 없는 거지.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백성, 도리어 하나님께서 내리는 저주만 받아야 하는 백성인가?” 하는 자괴감과 열등감과 아픔과 쓰라림을 가지고 외톨이마냥 살아가는 민족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유가 어찌되었든 시므온 지파에 대한 메시지는 없다.
신앙인들이 모이는 곳에 어찌하다 보면 시므온 지파처럼 종종 이름이 빠져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일부러 제외시키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해서 제외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아예 처음 계획할 때부터 이름이 빠져 있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빠져 있는 이들은 뭔가 알 수 없는 소외감, 자괴감, 열등감이라는 정서와 심리적인 아픔과 고통을 당할 수 있다.
더더욱 모두가 축복의 메시지를 받아서 너무너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좋은 잔치인데, 자신들만 빠져서 소외당했다고 여겨진다면 빠진 이들이 당하게 될 고통이 얼마나 클까?
이들의 아픈 마음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가능하면 소외되는 이들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도 히브리파, 헬라파로 나뉘어서 구제받는 일에 소외 되는 헬라파 사람들이 분노를 일으킴으로 교회에 큰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군가가 소외되면 그 소외됨으로 인하여 큰 시험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소외되는 이들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③ 행복한 사람이라고 선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셀 지파를 향하여 축복하는 메시지 가운데 29절에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라고 축복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단호하게 선포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너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너는 뭔가 부족한 장애인, 불구자, 가난뱅이, 못난이, 얼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들의 생김새가 어떻든, 우리들이 비록 행색이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우리들에게 “넌 그것 때문에 넌 못난이야. 넌 바보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처한 상황이나 처지가 어떤 경우이든, 어떤 상황이든 상관하지 않고 “너는 행복한 사람이야.”라고 선언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언해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내가 반드시 너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고야 말겠어.”라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강직한 결단, 하나님의 각오,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있는 선언이다.
우리들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들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고야 말겠다. 라고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여 이 땅으로 찾아와 주셨다.
그러면 행복한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은 무엇일까?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 영생을 주시면서 구원을 베풀어주신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라고 질문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신앙인들에게 세상에서 누릴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구원을 받을 사람은 세상에 신앙인들밖에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지구촌에 그렇게 많고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신앙인들만 뽑아서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인 영생의 삶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겠는가.
하나님은 “그는 너를 돕는 방패”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을 끝까지 지켜주시는 방패가 되어주신다.
방패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막아내고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은 마귀, 사탄, 그들의 졸개들인 악한 영들, 귀신들이 시시때때로 먹이를 찾아 헤매며 울고 있는 사자들처럼 신앙인들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고 절망 가운데로, 포기하게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튼튼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시면서 우리들을 끝까지 완전하게 지켜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
그러니 아무리 마귀가, 사탄이, 귀신들이, 악하고 더럽고 추한 영들이 우리들을 넘어뜨리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더라도 염려할 것이 없다. 두려워할 것이 없다. 걱정할 것이 없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붙들고 있는 한, 우리들은 결코 세상에게 지지 않는다. 세상의 악한 영들에게 지지 않는다.
성령 하나님께서 온갖 질병의 권세에서, 가난과 험담과 시기와 질투와 온갖 죄악의 사슬에서 우리들을 능히 건져주시고 승리케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하여 공격해 들어오는 온갖 종류의 원수들과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영광의 칼이 되어주신다.
방패는 공격을 막아주고 지켜주는 무기라면 칼은 공격하여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는 무기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면서 공격하려는 마귀, 사탄, 귀신들을 공격해서 무저갱으로 보내버리고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담겨있는 말씀이다.
신앙인들이 세상의 영들과 맞서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성령의 뜨거운 감동을 입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영적인 전쟁에서 백전백승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영광의 칼이 되어주신다는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찾아와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의 표출이다.
예수님을 유일한 주님으로, 구세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신다.
요한복음16:33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선언하신다.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이 임재하신 것처럼,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재하신 것처럼, 에베소교회에 성령이 임재하신 것처럼 신앙인들에게도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온갖 더럽고 추하고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온갖 종류의 미혹과 죄악과의 싸움에서 승리케 하신다.
낙담하고 좌절하고 실망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죄악과 죽음과 시험과의 싸움에서 당당하게 승리할 수 있는 영권과 인권과 물권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대적들로 하여금 신앙인들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어버린다.
전에는 원수들, 대적들이 이기양양하여 신앙인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고, 기죽게 만들고, 움츠리게 만들고, 아무런 반항도 못하게 만들었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큰 방패와 칼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신앙인들 앞에서 납작 엎드리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그들이 주인 노릇하고 왕노릇하면서 마치 신앙인들을 자기 종처럼 부려 먹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주인이 되어서 그들을 종으로 부려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신앙인들이 당당히 주인이 되어서 물질들도 종으로 부려먹을 수 있다.
건강도 종으로 부려먹을 수 있다. 지식들도, 지혜도 얼마든지 종으로 부려먹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가장 높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우뚝 세워주신다.
하나님은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라고 선언하고 계신다.
아무리 세상의 높고 높은 지위, 권세, 권위, 명예가 있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우리의 발아래 두겠다고 하신다.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서 하나님의 장자와 상속자로서의 권위와 지위와 권세와 명예를 주시겠다는 선언하고 계신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상속자가 되어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寶庫)를 활짝 열어서 그 보고에 담겨 있는 신령한 축복의 메시지를 선포해 주신다.
이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상속자가 되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겠다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언제나, 누구 앞에서건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야.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하나님의 사람이야.”라고 선포하고 당당하고 굳건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소망한다.
L4 & B4
모세가 느보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엉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축복하셨듯이, 신앙인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삼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사람답게, 신앙인답게, 사명자답게, 하늘의 신령한 은사를 받은 사람받게 살아가는 것일까?
①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기에 도전하라.
우리나라가 일제의 36년 식민 통치에서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을 건국할 때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에 한 나라이었다.
전국에서 굶주림으로 아사당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던 나라이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죽고 나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300만 명 이상의 백성들이 아사당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조선시대에도 그랬다고 보면 된다.
1948년8월15일에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사재를 떨어서 유능한 사람들을 뽑아서 국비유학생을 보냈는데, 방글라데시라는 나라로 유학을 보냈다고 한다.
방글라데시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잘 살았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에 방글라데시라는 나라가 포함된다.
하지만 행복지수 세계 1위는 바로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방글라데시 국민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세계에서 잘 산다는 서구 지역에 있는 나라들은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자살한다.
우리나라도 못 살 때는 자살율이 높지 않았다.
그렇지만 급격하게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잘 사는 나라가 되어서 선진국 대열에 올랐기 때문에 지금은 완전히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나라이다.
그러면 더 많이 행복할 것 같은데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자살율은 OECD회원 국가들 중에서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라고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불행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생리적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다.
인간이 가진 욕구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말로 불행한 사람은 구원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셔야만 되었는 지,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집도 없이, 누울 곳도 없어서 나귀 구유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불행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에게 근본적으로 행복하게 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주시고는 행복의 동산인 에덴동산을 만들어주신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불행한 영혼들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여 오시기까지 하신다.
하나님은 신앙인들에게 행복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셨다.
하나님은 불행하게 살라고 우리들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난 행복한 사람이야, 우리 가족은 행복해, 우리 성도들도 행복해”라고 날마다 선포하면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따라서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가실 것이다.
날마다 ‘오늘은 가장 좋은 날이야. 오늘은 가장 좋은 일, 행복한 일로 가득할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꼭 행복하게 살아야 할 것 같아져서 마음을 새롭게 가지게 된다.
그러면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생겨도 “괜찮아. 오늘은 가장 좋은 날이잖아. 오늘 좋은 일이, 행복한 일이 있을거야.”라고 생각하면서 기분 좋지 않은 일도 쉽게 넘어갈 수 있다.
신앙인들은 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에 도전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② 축복의 메시지를 가지고 살아가기에 도전하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말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다.
흔히 말을 못하는 농아들도 수화(手話)라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다.
만국통상언어라고 불리는 바디랭귀지(body language)를 주셔서 지구촌 어디를 가든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형태로든 언어, 말을 통해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을 주셨는데, 신앙인들의 언어에는 누군가를 저주하는 언어가 아니라 축복하는 언어를 사용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욕이 아니면, 저주가 아니면 말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욕과 저주로 시작해서 욕과 저주로 끝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신앙인들은 저주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사람이 아니라 축복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소망한다.
입을 열어 말할 때마다 누군가를 조롱하거나 비난하거나 저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칭찬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병은 무엇을 담았는가에 따라서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술을 담으면 술병이 되는 것이고, 참기름을 담으면 참기름병이 되는 것이고, 간장을 담으면 간장병이 되는 것이고, 물을 담으면 물병이 되는 것이고, 식초를 담으먼 식초병이 되는 것이다.
무엇이든 그것을 담을 때, 그것의 이름이 다르게 불리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과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입을 열 때마다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축복의 메시지를 가슴에 담아서 품고 살아야 한다.
저주를 품고 살면 저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축복을 품고 살면 축복이 나오게 마련이다.
축복을 품고 살아야 축복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고,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고,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신앙과 인격이 성장하고 성숙하여 잘 익은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나이만 들어서 어른이 되었지, 신앙이나 인격이 짐승보다도 못한 이들이 너무 많다.
나이와 연륜과 경륜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잘 익은 과일처럼 당분도 있고 물도 많고 시원한 신앙과 인격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할 수 있어야 한다.
③ 축복의 메시지를 가지고 중보기도하는 신앙인의 반열에 올라가자.
신앙인의 꽃은 누군가를 위해서 중보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각 기관을 위해서, 생업터전을 위해서, 가족들을 위해서, 동료들을 위해서, 지인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한다.
누군가를 위해서 중보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사람이 신앙인이다.
중보기도할 때, 중보기도하는 대상을 그리면서 축복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어야 중보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저주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 않은가?
그러니 중보기도 하는 이들의 이름만 불러도 그 부르는 이름 속에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축복하는 하늘의 신령한 메시지를 지니고 그 이름을 부르면서 중보기도하기를 소망한다.
모세나 야곱이나 사무엘이나 다윗이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이 지상에서의 삶을 마무리하면서 자손들을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축복으로 중보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서 영원한 본향인 천국으로 돌아간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은 나이가 점점 들어가고 늙어서 어르신의 반열에 들어가면서 누군가를 위해서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중보기도하면서 사랑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저 천국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인생의 마지막을 잘 준비하여 웰빙(Well-Being)하면서 웰다잉(Well-Dying)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선포하며 축복한 그 축복이 우리 신앙인들을 향한 축복의 메시지가 되기를 주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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