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열려라 에바다 2024. 10. 2. 11:31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는 인자하게도 자기 자신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계시하셨다. 그리고 성경 속에 내포되어 있다. 가령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는 거룩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거룩함이야말로 하나님의 속성이다. 왜 그러냐 하면 거룩이야말로 하나님께 적용 할 수 있는 특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타낸 계시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명칭과 그의 속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명칭은 그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는데 반하여 그의 속성은 그의 인격의 여러 가지 면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하나님 같이 위대한 존재에 대하여 기술할 바가 있다면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해보고 나면 하나님에 관한 설명도 훨씬 용이해 질 것이다.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일을 마치 컵으로 태평양의 물 전체를 담아보려는 것과 같은 노릇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이 그를 알 수 있는데 족할 만치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

 

다음과 같은 분류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절대적 속성 : 피조물을 떠나 하나님 차체로서 절대적인 것. 이와 같은 절대적 속성은 모든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주고 있다.

-활동적 속성 :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

-도덕적 속성 : 하나님과 그의 도덕적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

 

1. 하나님의 내적 성격 (절대적 속성)

 

1)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하나님은 인격을 갖고 계신 영이시다. 그는 생각하며 느끼며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과 직접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육체의 지체와 감정과 물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연적 존재의 조건들에 굴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육안과 육체적 감각에 의하여 그를 인식할 수는 도저히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공허하고 비현실적 존재로서 살아 계시다는 말은 아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모습'에 관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5:37참조). 하나님은 참다운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러나 본질상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써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서 그를 적절히 설명할 도리가 없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요 1:18,출 33:20).

그러나 우리들은 성경이 볼 수 있는 형체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마 3: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또한 그의 무한한 인격을 유한한 인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하여 기술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손과 발과 눈과 귀를 갖고 계신 존재로서 볼 수 있고 감촉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후회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찾아 낼 수 없고 알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 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권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욥11:7)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도리 밖에 없다.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요4:11).

2)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인간의 제한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무한성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면에서 고찰해 볼 수 있다.

 

(1) 공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광대무변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왕상 8:27). 곧 하나님의 본질은 어디에나 안 계신 곳이 없는 무소부재의 원리 속에 있다. 그의 임재와 능력과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한 곳도 없다. "그의 중심은 어디에나 있으나 그의 주변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느 특정된 곳 곧 하늘에 영광스러운 모양으로 그가 존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시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영원하시다(출 15:18, 신 33:27, 느 9:5, 시 90:2, 렘 10:10, 계 4:8-10). 그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할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그에게 있어서는 현재이다.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는 불변이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이 진리가 신자들에게는 하나의 위안이 된다. 신자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라는 말씀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신 33:27).

3) 하나님은 하나이시다(출 20:3, 신 4:35,39, 6:4, 삼상 2:2, 삼하 7:22, 왕상 8:60, 왕하 19:15, 느 9:6, 사 44:6-8, 딤전 1 :17)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은 구약 시대의 종교의 근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거짓 신들을 섬기는 이방인의 세계를 향한 이스라엘의 독특한 메시지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이와 같은 가르침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가르치는 신약과 모순되는가? 우리들은 두 가지 단일성 즉 절대적 단일성과 복합적 단일성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한 인격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 단일성의 사상을 전달해 주고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 2:24)라는 성경 구절을 읽을 때 이는 복합적 단일성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한 몸으로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 3:1과 겔 37:17도 '하나'를 뜻하는 동일한 말 '에카드'가 사용되었다(창 22:2,12, 암 8:10, 렘 6:26,슥 12:10,잠 4:3,삿 11:34).

신 6:4에는 어떤 종류의 단일성이 언급되어 있는가? "우리 하나님"이라는 말이 복수형 '엘로힘'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아 복합적 단일성을 가리키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영원하고 본질적인 단일체 속에 결합되어 있는 성삼위를 포함한 복합적 단일성으로서의 하나님의 단일성을 가르쳐 주고 있다.

 

2. 우주와 관련을 맺고 계신 하나님 (능동적 속성들)

 

1) 하나님은 전능하시다(창 1:1, 17:1, 18:14, 출 15:7, 신 3:24, 32:39, 대상 16:25, 욥 40:2, 사 40:12-15, 렘 32:17, 겔 10:5, 단 3:17, 4:35, 암 4:13, 5:8, 슥 12:1, 마 19:26, 계 15:3, 19:6).

하나님의 전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하나님의 본성과 모순되지 않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그의 능력과 자유 "하나님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물론 이 말은 그의 본성에 위배되는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가령 예를 들면 거짓말을 한다든가 물건을 훔치는 일을 하실 수 없는 것이다. 곧 자가당착의 모순 가령 삼각형의 원이라든가 마른 물을 만들어 낼 수는 도저히 없다.

둘째,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지배하시는 그의 주권과 지배력.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행하여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 의지를 침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는 악이 작용하도록 허용 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사단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욥 1장과 2장을 참조하라).

인간의 존재는 마치 오르간의 소리와 같이 하나님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 머물러 있는 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은 무소부재이시다.

 

즉 다시 말하면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창 28:15,16, 신 4:39, 수 2:11, 시 139:7-10, 잠 15:3,11, 사 66:1, 렘 23:23,24, 암 9:2-46, 행 7:48,49, 엡 1:23).

 

광대무변과 무소부재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광대무변은 공간과의 관련 하에서의 하나님의 실재인데 반하여 무소부재는 피조물과의 관련 하에서 본 하나님의 실재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에게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나타나신다.

 

●영광 가운데서 만군의 여호와가 나타나심(사 6:1-3).

●효과적으로 자연의 질서 가운데 나타나심(나 1:3).

●섭리에 의하여 인간의 여러 가지 일 가운데 나타나심(시 68:7-8).

●주위 깊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 에게 나타나심(마 18:19,20).

●심판하시려고 악한 사람들의 양심에 나타나심(창 3:8).

인간은 우주의 어느 구석에서나 그의 창조주의 법을 피할 도리가 없다.

●육체로 그의 아들 속에 거하신다(골 2:9).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거하신다. "

●신비하게도 교회 속에 거하신다(엡 2:12-22).

●공식으로 그의 일꾼들과 함께 계신다(마 28:19,20).

하나님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계신 한 편 어디에나 거주하시지는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 단체와 인격적 관계를 맺을 때에 그들과 더불어 함께 거하신다고 일컬어진다.

3)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곧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시다(창18:18,19, 왕하 8:10,13, 대상 28:9, 시 94:9, 139:1-16, 147:4,5, 잠 15:3, 사 29:15,16, 40:28, 렘 1:4,5, 겔 11:5, 단 2:22,28, 암 4:13, 눅 16:15, 행 15:8,19, 롬 8:27, 고전 3:20, 딤후 2:19, 히 4:13, 벧전 1:2, 요1서 3:20).

하나님의 지식은 완전하다. 그는 추리하거나 점차적으로 학습 할 필요가 없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그의 지식은 동시적인 것이다. 이 속성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들은 크게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온갖 시련 가운데에서도 신자들은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어려운 점이 대두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가 타락할 것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타락함으로부터 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이 자기의 자유의지를 상용하는 것을 강제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지하시나 미리 고정시키지 않는다.

4) 하나님의 현명하시다(시 104:24, 잠 3:19, 렘 10:12, 단 2:20,21, 롬 11 :33, 고전 1 :24,25,30, 2:6,7, 엡 3:10, 골 2:2,3).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전지와 전능의 결합에서 온 것이다. 그는 그의 지식을 최선의 수단에 의하여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목적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다.

 

하나님은 항상 올바른 일을 적당한 때에 올바른 방법으로 행하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또 모든 사건의 과정을 자기 자신의 선한 목적을 위하여 지배하실 때에 이 행위를 섭리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특수한 섭리는 인간 생활의 사소한 일들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5)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피조물을 다스리고 처리할 절대적 권리를 갖고 계시다(단 4:35, 마 20:15, 롬 9:21). 그는 그의 무한한 우월성과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절대적 소유권과 모든 만물이 지속하기 위하여 그에게 의존하는 절대적 의존성에 의하여 이와 같은 권리를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길을 비판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악한 것이다. 클라크 (D.S. Clarke)의 다음과 같은 글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는 가장 유용하고 격려의 힘이 되는 교리이다. 만일 우리들이 다음과 같은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즉, 좀더 자세히 말하면 맹목적인 운명이나 변덕스러운 우연이나 변경할 수 없는 자연법칙이나 근시안적이고 왜곡된 자아나 무한히 현명하시고 거룩하시고 사랑하시며 능력이 있는 하나님 중에 어느 하나에 의하여 지배되기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우리들은 어느 것에 의하여 지배되기를 선택해야만 될 것 인가?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 이외에 다른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도덕적 피조물과 관련을 맺고 있는 하나님 (도덕적 속성)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된다.

1) 하나님은 거룩하시다(출 15:11, 레 11:44,45, 20:26, 수 24:19, 삼상 2:2, 시 5:4, 111:9, 145:17, 사 6:3, 43:14,15, 렘 23:9, 눅 1:49,약 1:13, 벧전 1:15,16, 계 4:8, 15:3,4).

 

하나님의 성결은 그의 절대적 도덕상의 순결을 의미한다. 그는 죄를 범치 않으실 뿐만 아니라 죄를 허용치도 않으신다. '거룩'의 근본적 의미는 '격리'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격리되어 있는가? 공간적으로 그는 인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들은 지상에 있다.

본질과 인격에 있어서 그는 인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하다. 하나님은 신성을 지니고 계시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성을 갖고 있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다. 그러나 인간은 죄악되다. 그러면 우리들은 성결이야말로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짓는 속성임을 깨닫게 되었다.

성결은 단순히 하나님의 속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신성으로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그는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겔 36:22, 38:23).

곧 그는 자기 자신을 거룩한 자로 계시하신다. 스랍들이 보좌에 앉아 계신 여호와로 부터 광채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라고 부르짖었다(사 6:3)

인간들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서 경외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거룩케 하는 것이다(민 20:12, 레 10:3, 사 8:13).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함으로써 그를 모욕할 때에 그들은 그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의 반대는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마 6:9).

하나님만이 홀로 거룩하시다. 거룩한 백성이라든가 거룩한 건물이라든가 거룩한 목적이라고 할 때에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거룩'이라는 말을 사람이나 물건에 적용하였을 때 이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곧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따로 구별해 놓은 것을 말한다. 이렇게 따로 구별된 물건들은 깨끗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렇게 구별된 사람들은 거룩한 법을 쫓아 살려고 헌신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사실들로써 성결의 교리에 기초를 이루고 있다.

2)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의와 거룩의 차이는 무엇인가? 의는 행위로 나타난 거룩이라" 고 대답할 수도 있으리라. 의는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함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의는 옳은 표준과 일치하는 것이다.

 

곧 의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옳은 행위를 말한다. 언제 하나님께서는 이 속성을 나타내시는가?

(1)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의 결백함을 증명하고 악한 자를 벌하실 때에 정의가 실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재판관들이 다른 사람들이 그들 앞에 제시한 증거에 의거하여 재판하듯이 판단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증거를 발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메시야는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고" 정의로써 판단하신다(사 11:3).

 

(2)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는 용서할 때 그의 정의가 나타난다 (시 51:14, _5.1서 1:9, 히 6:10).

 

(3)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징계하고 심판하실 때에 그의 정의가 나타난다(사 8:17, 암 3:2).

 

(4)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에 그의 정의는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간섭하시는 것을 그의 의라고 칭한다(사 46:12, 45:24,25).

 

구원이 소극적인 면이라고 하면 의는 적극적인 면이다. 그는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와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신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마음의 의가 되는 것이다( 60:21, 54:13, 61:10, 51:6).

(5) 하나님께서 그의 진실한 종들에게 승리를 주었을 때에 그의 정의는 나타난다(사 50:4-9).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악한 자들을 심판하신 후에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의를 좇아 살게 될 것이다(벧후 3:13).

하나님께서는 올바르게 처리하실 뿐만 아니라 의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범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그는 회개하는 자를 은혜스럽게도 의로 여겨주신다(롬 4:5). 이것이 칭의의 교리의 근본이 된다. 하나님 본질은 인간과 그의 관계의 기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행동하신다. 거룩하신 분은 신성하게 하며 의로우신 분은 의롭게 하신다.

3)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그는 절대적으로 믿을 만하며 그의 말씀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은 그의 약속을 굳건히 믿을 수 있다(출 34:6, 민 23:19, 신 4:31, 수 21:43-45, 23:14, 삼상 15:29, 렘 4:28, 사 25:1, 겔 12:25, 단 9:4, 미 7:20, 눅 18:7, 롬 3:4, 15:8, 고전 1:9, 10:13, 고후 1:20, 살전 5:24, 살후 3:3, 딤후 2:13, 히 6:18, 10:23, 벧전 4:19, 계 15:3).

4)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하나님의 자비심은 그의 피조물의 비참에 대하여 표명된 하나님의 선과 그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만일 그들이 개과천선의 가망이 있는 죄인들이라면 그들을 구제하려고 오래 참으신다(딛 3:5, 애 3:22, 단 9:9, 렘 3:12, 시 32:5, 사 49:13, 54:7). 하나님의 자비심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 중에 하나를 시 103:8-18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자비심에 대한 지식이 소망의 근거와(시 130:7) 신뢰의 근거(시 52:8)가 된다. 하나님의 자비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일 가운데 현저하게 나타났다(눅 1:78).

 

5)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 특별히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창조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신 7:8, 엡 2:4, 습 3:17, 사 49:15,16, 롬 8:39, 호 11:4, 렘 31:3).

6) 하나님은 선이시다.

 

하나님은 선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의 피조물들에게 생명과 그밖에 다른 축복들을 주신다(시 25:8, 나 1:7, 시 145:9, 롬 2:4, 마 5:45, 시 31:19, 행 14:17, 시 68:10, 85:5). 어떤 사람들은 악과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를 창조하셨는가.'라고 그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하나님은 악에 대하여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만일 조심성 없는 직공이 부주의하여 아주 섬세한 기계 속에 모래를 집어넣었다면 그 기계를 제작한 사람이 책임을 짊어져야 하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망쳐놓았다.

이 세계 가운데서 인간들이 고의로 범한 죄악에 기인된 모든 고통을 제거해 버리고 나면 남는 고통이 많치 않을 것이다.

 

(2)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악은 그의 허락을 받아 존재 한다.

왜 하나님께서 악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허락하시는지 그 이유를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의 길은 찾지 못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나치게 사색적인 사람에게는 '게 사색이 너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의 길의 일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과오를 범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3) 하나님은 대단히 위대하시기 때문에 선을 위하여 악을 억압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제들과 바로와 헤롯과 그리스도를 못 박은 사람들의 죄악을 어떻게 억압하셨는가를 기억하라. 어떤 고대 ·학자는 다음과 같은 매우 지당한 말을 하였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업에 악이 조금이라도 개입하도록 허락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악도 선으로 만들 수 있다. "

 

많은 기독교인들은 고통과 시련의 불길 가운데서 인격을 정화 시켰으며 믿음을 공고히 하였다. 고통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더욱 더 하나님의 품속 깊이 안길 수 있게 되었다. 고통이란 불로 연단된 인격을 사는데 필요한 대가이다.

(4) 하나님은 이 우주를 자연법칙에 의하여 조정하셨다.

그런데 이 자연 법칙 속에는 우발적 사고의 가능성이 게재되어 있다. 가령 예를 들면 만일 어떤 사람이 부주의로 인해서 또는 고의로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게 되면 그는 중력의 법칙을 범한 결과로 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와 같은 법칙이 있음을 대단히 고맙게 생각 한다. 그것은 만일 이와 같은 법칙이 없다면 이 세상은 온통 혼란 상태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5) 우리들은 항상 이 세상이 완전한 질서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것도 주관하신다. 하나님께는 "하늘나라의 표준시(Heavenly Standard Time)에 의하여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가 지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속히 풀어주실 것이다(눅 18:7,8).

 

이 세대라는 극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막이 내릴 때까지는 결코 하나님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이때에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이루어주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은 불가해한 존재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감추어져 있는 심연 속에 계시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그를 알 도리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영만이, 하나님의 깊은 곳을 찾아 낼 수가 있는 것이다(고전 1:10).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나님 보다 더 위대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욥의 다음과 같은 질문은, 무한자를 이해하려는 인간능력에 대한 신랄한 거부였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욥 11:7). 한편 인간은 자기의 개인적 욕구에 합당한 한도 내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식마저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즐겨 계시하시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은폐하셨던 자신의 베일을 벗으시고,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인간에게 자신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여, 이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아 주셨다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고찰을 한 후에는 그 기원이 되는 계시에 대하여 고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다면 종교는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알리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가질 수 없으며, 인간 그대로 버려두신다면 하나님을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다.

이 계시는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로 구별할 수 있다.

물론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은 계시를 믿지 않는다. 범신론자들은 그들의 사상체계 속에 계시를 허용하지는 않지만 가끔 계시에 대하여 언급하기는 한다. 자연신론자들은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인정하나, 성경에 나타난 특별계시의 필연성과 실재성, 심지어는 특별계시의 가능성까지도 부인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다 믿는다.

 

1. 일반계시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시간상으로 특별계시보다 앞선다. 일반계시는 인간에게 구술적 전달 형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 사건과 자연 세력과 자연법칙을 통하여 오는 것이다. 성경은 일반 계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다(시 19:1, 롬 1 : 19-20, 2: 14-15).

 

1) 일반계시의 불충분성

 

펠라기우스파와 합리주의자들과 자연신론자들은 일반계시만으로 현재 인간의 요구에 적합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반하여, 로마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는 일반계시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본다.

이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에 남아있는 죄의 암영에 의해 희미하게 되고 말았다. 창조주의 솜씨가 완전히 지워진 것이 아니라 흐려지고 희미해진 것이다. 일반계시는 하나님에 관한 충분한 지식과 영적인 일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전달하여 주지 못하므로 인간이 영원한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확고한 기초를 제공하여 주지 못한다.

종교를 순수하게 하나의 자연적 근거에만 세우려는 자들의 현재의 종교적 혼란이 바로 일반계시의 불충분성을 분명하게 증명하여 준다.

일반계시가 일반적 종교에도 합당한 기초를 제공하여 주지 못하므로 참 종교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심지어 이방 민족들은 어떤 가상적 특별계시에 호소한다. 결국 일반계시로서는 죄인들의 영적인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능력에 관한 다소의 지식을 전달하여 주지만,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못한다.

(1) 죄는 일반계시와 이 계시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을 모두 변화시켰다.

(2) 일반계시는 하나님과 영적 사물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

(3) 일반계시는 대체로 종교를 위한 충분한 기초도 주지 못한다.

(4) 일반계시는 그리스도교의 기초로서도 전혀 불충분하다.

2) 일반계시의 가치

 

그러나 위에 언급한 내용이 일반계시가 전혀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일반계시는 아직도 이교의 진정한 확립 요소를 설명 해 주는데, 이 계시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후손임을 깨닫고(행 17:28),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고(행 17:27),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고(롬 1:19-20),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게 되었다(롬 2:14). 또 그들은 죄와 무지의 암흑 속에서 생활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곡해하지 만, 말씀의 조명(요 1:9)과 성령의 일반적 작용(창 6:3)에는 참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그의 특별계시의 배경을 형성해 주므로, 특별계시는 일반계시 없이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과학과 역사는 성경 기록에 대해 빛을 던져주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2. 특별계시

 

자연과 역사 속에 나타난 일반계시와 함께, 우리는 지금 성경에서 구체화된 특별계시를 받아들이게 된다. 성경은 탁월한 특별계시의 책으로 이 계시에서 말씀과 사실은 서로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씀은 사실을 해석하고 사실은 말씀에게 본질을 제공하여 준다.

 

1) 특별계시의 필요성

 

죄가 세상에 들어오므로,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흐려지고 부패 해졌다. 그리하여 자연과 인간구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솜씨는, 처음 창조되었을 때처럼 분명하게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더욱이 인간은 암흑과 무지, 오류와 불신앙의 권세에 종속되고 말았다. 그리고 자기의 맹목과 왜곡 속에서, 인간은 현재 그 최초 계시의 흔적까지도 바로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심지어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를 허위로 바꾸어 놓는데 기뻐하고 있다. 이리하여 일반계시는, 이 이상 더 하나님과 영적사물에 관한 믿을만한 절대적인 지식을 인간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또한 인간에게 올바르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과의 친교 상태에까지 회복시킴에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네 가지 목적을 수행할 특별한 영적사역이 필요하게 되었다.

(1) 일반계시에서 수집한 진리들을 정정하며 해석할 것

(2)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솜씨를 인간이 다시 한 번 읽을 수 있도록 계명할 것

(3)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의 계시를 인간에게 마련해 줄 것

(4) 죄의 권세에서 인간을 구속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생명의 친교를 갖도록 하여 인간의 영적상태를 전적으로 변화시킬 것 등이다.

2) 특별계시의 방법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방법은 대략 세 가지 종류로 구별된다.

(1) 하나님의 현현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또한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상징적으로는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그룹(CheruMbim) 사이에 임재하셨다(시 80:1, 99:1). 하나님의 임재는 불과 연기의 구름 속에서 보여 졌으며(창 15:17, 출 3:2, 19:9, 16이하, 33:9, 시 78:14, 99:7), 폭풍우 속에서 보여졌고(욥 38:1, 40:6, 시 18:10-16), 또한 미풍 속에서도 보여졌다.

이것들은 모두가 그의 임재의 표상으로, 이 가운데서 그는 영광의 얼마를 계시하셨던 것이다. 구약에서는 "주의 사자"의 현현이 특수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사자는 분명히 창조된 사자가 아니었다. 한편 이 사자는 하나님과 구별되었으나(출 23:20-23, 사 63:8-9), 다른 한편, 그는 하나님과 동일시 되기도 하였다(창 16:13, 31:11, 13, 32:28).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그는 삼위 중의 제 2위라고 한다(말 3:1 참조). 하나님의 현현은 그리스도의 성 육신에서 그 최정점에 달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격의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임재하셨다(골 1:19, 2:9).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성령의 전이 된다(고전 3:16, 6:19, 엡 2:21).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고,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 사이에 쳐질 때, 하나님과 인간과의 가장 충만한 동거의 실현이 있게 될 것이다.

 

(2) 직접적 전달

하나님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인간에게 그의 사상과 의지를 전달하셨다. 하나님은 가끔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계시의 대상에게 말씀하셨다(창 2:16, 3:8-19, 9:1, 8, 12, 32:26, 출 19:9, 신 5:4,5, 삼상 3:4). 어떤 때는, 하나님은 제비와 그리고 우림과 둠밈과 같은 방법을 쓰기도 하셨다(삼상 10:20, 21, 대하 24:5-31, 느 11:1, 민 27:21, 신 33:8). 꿈은 계시의 통상적인 방법이었다(민 12:6, 신 13:1-6, 삼상 28:6, 을 2:28). 또한 이스라엘 백성 이외의 사람들에게 계시하실 때에도 꿈이 사용되었다.

계시의 친밀하고도 보다 숭고한 형태는 환상이었으며, 이것은 선지자들의 경우 극히 통상적인 것이다(사 6장, 21:6 이하, 겔 1-3장, 8-11장, 단 1:17, 2:19, 7-10장, 암 7-9장).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계시의 영을 통하여, 내적조명의 방법을 써서 선지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는 지고자, 진리,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하신 예언자로 나타나고 계시다. 그는 계시의 조명의 영이기도 하신 그의 성령을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신다(막 13:11, 눅 12:12, 요 14:17, 15:26, 16:13, 20:22, 행 6:10, 8:29).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거룩 한 분의 기름부음을 받게 되며, 따라서 우리 주님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게 된다(요일 2:20).

(3) 이적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또한 이적을 통해서도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적은 하나님의 특별권능의 현현이며 특별임재의 상징인 것이다 그리고 이적은 가끔 영적진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앞으로 올 신국의 현현으로서의 이적은 위대한 구속사업을 돕게 된다. 따라서 이적은 자주 악인을 벌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돕고 구원 하는데 사용된다.

이적은 예언의 말씀들을 확증하고, 하나님께서 수립하고 계시는 새 질서를 강조한다. 성경의 이적도 또한 성육 신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으며, 이것은 모든 이적 중에서 최대의 것이요 가장 중심적인 이적이다. 절대적인 이적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만물은 회복되며, 창조물들은 그 원시적 美에로 환원되는 것이다(행 3:21).

3) 특별계시의 특성

 

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구원의 계시인데, 죄인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이 구원계획의 실현 방법을 보여주는 계시이다. 이 특별계시야 말로 인간의 마음을 조명하여 그의 뜻을 선한데로 이끌어 주며, 거룩한 사랑으로 채워주고, 그에게 하늘나라의 집을 준비케 하는 계시인 것이다.

특별계시는 우리에게 구속의 메시지를 전해 줄 뿐 아니라 죄인을 성도로 변하게 하며 우리 생활을 변화시켜 준다. 그리고 이 계시는 분병히 진보적이다.

속죄의 위대한 진리가 처음에는 희미하게 나타나고 점진적으로 분명해지고 마침내 신약에 와서 이 진리의 충족함과 아름다움이 현저해진다.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창조 사업은 모든 계시의 시작이요, 기초이며 모든 종교생활의 근원이다. 창조란 말은 성경에서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엄밀한 의미로 정의하자면 창조란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 내시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먼저 있었던 물질을 사용치 않고 창조하시고 한편으로는 본질상 불충분한 물질로부터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산출해 내신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창조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나타나 있다(창 1:2, 욥 26:13, 33:4, 시 33:6,사 40:12,13,요 1:3, 고전 8:6, 골 1:15-17). 우리는 범신론과는 반대로 창조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행위임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엡 1:11, 계 4:11). 또 우리는 자연신론에 반대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므로, 이 세상은 항상 하나님을 의존함으로 존속한다는 것을 주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을 나날이 유지해 나가신다(행 17:28, 히 1:3).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곧 현 물질세계의 시작을 가르쳐준다. 이 태초 전에는 끝없는 영원이 존재한다고 본다.

 

창조사역의 첫 부분은 엄밀히 무(無)서의 창조이며, 기존 재료를 사용치 않은 창조이었다(창 1:1). 무에서의 창조란 표현은 성경에서는 직접 찾아볼 수 없지만, 외경 중의 한 책에서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마카비 2서 7:28).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다음의 성구에 분명히 잘 나타나 있다(창 1:1, 시 33:9, 148:5, 롬 4:17, 히 11:3).

어떤 학자들은 창조의 궁극적 목적을 인간의 행복에서 찾으려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자신에게서 충족함을 가지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물의 찬양을 받기 위해 벌려놓은 하나의 허황한 구경거리로서 꾸며진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안녕을 촉진시키고, 피조물들로 하여금 창조주를 찬양하도록 이끌어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사 43:7, 60:21, 61:3, 겔 36:21,22, 39:7, 눅 2:14, 롬 9:17, 11:36, 엡 1:5,6,12,14, 3:9,10, 골 1: 16).

창조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그릇된 이론을 주장한다.

 

첫째, 이원론이다.

어떤 학자는 본래의 물질은 영원한 것인데, 이 물질로부터 세상이 우연히 또는 고도의 직접적인 힘에 의해 발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두 영원 자가 함께 존재할 수 없는 즉, 두 개의 무한자가 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유출설이다.

다른 학자들은 하나님과 세상이 본질상 하나라고 주장하며, 세상은 신이 존재할 때 필연적으로 생겼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에게서 자기 결정의 능력을 박탈하였으며, 인간에게서는 그들의 자유와 도덕적 책임의 특징을 빼앗아 버리게 되고 말았다.

또 이 이론은 하나님을 세상의 모든 악의 책임자로 만들고 말았다.

 

셋째, 진화론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진화론을 주장하는데, 이 이론 역시 분명히 잘못된 견해이다. 왜냐하면 진화란 우주의 기원에 대한 타당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이미 기존 물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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