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진심으로 교회를 섬기면서 살아요 = 빌레몬서1;1-25(241103)

열려라 에바다 2024. 10. 31. 08:12
진심으로 교회를 섬기면서 살아요 = 빌레몬서1;1-25(241103)
 
한상원목사추천 0조회 824.10.31 05:55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PW : 믿음             BIW : 진심으로 섬기라                 AG : 압비아
TS : 믿음이란 진심을 다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면서 사는 것이다.


엿 먹어라!’의 유래

엿 먹어라라는 욕이 있지요.
지금이야 중고등학교까지 의무 교육제도에 의하여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모든 학생들은 공부할 수 있는 의무와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초창기에는 국민학교, 곧 초등학교만 의무교육이었고, 중학교부터는 입학시험을 봐서 합격해야만 중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1965년도 중학교 신입생을 선발하는 시험 문제 가운데 엿과 관련된 문항이 있었다고 합니다.
엿기름 대신 엿을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정답은 디아스타제(Diastase)였다고 합니다.
디아스타제는 아밀라제(Amylase)’의 약명입니다.
아밀라제는 녹말을 분해하여 소화하는 효소로써, 우리 침 속에도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보기 중에 무즙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무에는 디아스타제가 들어 있고,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무즙 역시 정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소위 치맛바람이 불기 시작한 때로,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매우 높았던 시절입니다.
문교부(현재의 교육부)에서 무즙을 오답처리 하자, 무즙을 정답으로 써서 낙방한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심하게 항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문제 하나가 당락을 좌우할 만큼 입시경쟁이 치열했던 시절입니다.
학부모들은 무즙으로 무엿을 만들어 관련 기관을 찾아다니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엿 먹어라! 무엿 먹어라! 무로 만든 무엿 먹어라!”
중학교 입시 문제 하나로 온 나라가 난리법석을 떤 것입니다.
결국 입시 당국은 무즙을 정답으로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당시 최고의 명문인 경기중학교는 정원과 관계없이 38명의 신입생을 더 입학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엿 먹어라!’ 혼 좀 나 봐라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 엿 먹지 말고 예수 엿 먹고 예수 엿으로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 엿을 맛있게 먹어봅시다. 아멘.


P4


빌레몬서는 사도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혀 있을 때 골로새교회의 빌레몬이라는 사람에게 보내는 극히 개인적인 서신서이다.
바울은 로마감옥에서 2년 동안 재판을 받기 위해서 갇혀 있었는데, 로마감옥에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를 기록하게 된다.
 4개의 편지를 바울의 옥중서신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빌레몬서를 기록하면서 수신자를 빌레몬(Philemon)과 압비아(Apphia)와 아킵보(Archippus)와 교회의 성도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빌레몬은 골로새교회의 신실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빌레몬의 가정에서도 주님의 몸된 가정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오네스모(Onesimus)라는 사람을 만나면서 시작한다.
오네시모라는 사람은 빌레몬 집의 노예였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주인의 돈과 물건을 훔쳐서 도망치게 된다.
오네시모는 공교롭게도 붙잡혀서 로마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된다.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만난 바울에게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신앙인이 된다.
바울은 자신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는 오네시모를 복음으로 낳은 아들로 인정하였다.
오네스모를 전도한 바울은 오네시모가 골로새교회의 신실한 신앙인인 빌레몬의 집에서 노예였다는 이야기를 알게 된다.
오네시모가 골로새교회를 신실하게 섬기고 있는 빌레몬의 노예, 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에게로 돌려보내려고 한다.
그런데 로마시대에서는 노예, 종이 죄를 저질렀다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 벌은 죽이는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오네시모가 주인집을 도망쳐 나간 것도 큰 죄이거니와 더더구나 돈과 물건까지 훔쳐서 도망쳤기 때문에 엄청난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오네시모는 본래 주인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오네시모는 주인의 집으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처참한 형벌을 받아야 할 것이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바울이 전하는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듣게 되었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 백성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바울이 써주는 편지를 가지고 빌레몬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네시모의 손에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바울은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권면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11-14절에서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면서 얼마든지 명령할 수 있지만, 명령하지 않고 권면하는 방식으로 오네시모를 널리 용서하고 오네시모가 훔쳤던 돈과 물건에 대해서는 자신과 계산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선처해 달라는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이다.
펜은 총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빌레몬과 그의 가족들과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빌레몬 가정과 골로새 교회뿐만 아니라 온 지구촌의 신앙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영혼의 메아리가 된다.


바울은 빌레몬서의 공동수신자로 2절에서 자매 압비아(Apphia our sister)”라는 여인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빌레몬서를 기록하면서 밝히고 있는 압비아라는 어떤 여인일까?
어떤 여인이길래 이 여인의 이름을 빌레몬서의 공동수신자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D4.


 편지의 공동 수신자로 기록하게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면서 1-2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단순하게 빌레몬에게만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매인 압비아와 아킵보와 교회에게 편지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고고고고고대사회는 남성 중심의 사회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남성을 중심으로 기록한다.
인구조사할 때도 보면 인구수를 여성을 제외하고 남성의 숫자만을 기록한다.
남성중심의 사회는 예수님 시대에도, 초대교회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52어 사건의 기록이나 72어의 사건이나 사도행전에서 등장하는 숫자에도 여성들의 숫자는 빼고 남성들의 숫자만 기록하는 것이다.
분명히 그 자리에는 여성들이 더 많았을텐데도 여성들의 숫자는 생략하고 남성들의 숫자만을 기록하는 것이다.
여성은 본래부터 개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게 속해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여성이란 존재는 남성 안에 존재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여성을 드러내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남성 중심의 사회였음에서도 성경에는 종종 여성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본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엄청나고도 특별한 여인이라는 증거가 된다.
신약성경에만 해도 많은 여성들의 이름이 기록되는데, 이들 여성들은 특별하게 특혜를 받은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사벳, 마리아라는 여러 명의 여인들, 그리고 삽비라, 브리스길라, 뵈뵈, 눔바와 같은 여인의 이름이 성경에는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압비아 여인에게 특별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수신자로 세워주신다.
교회에 헌금을 잘 못 드리다가 죽임을 당한 삽비라처럼 어떤 사건에 휘말려서 기록될 수도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압비아를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록한 4개의 성경 중에서 빌레몬서의 공동수신자로 이름을 올려주고 계신다.
아무나 성경의 수신자로 기록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만큼 압비아 여인은 착실하고 순결하고 순수하게 주님의 몸된 골로새교회를 섬겼기 때문에 이런 은혜와 특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우리의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감사와 격려의 편지를 써 주신다고 가정한다면 그 감사와 격려의 편지 안에 우리들의 이름이 기록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우리들의 이름 석 자가 기록될 수 있는 은혜를 입기를 기원한다.


 슬기롭고 훌륭한 아내가 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


고린도전서 9:5에 보면 바울이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바울은 베드로의 아내를 자매라고 소개하면서 여성을 부를 때 믿음의 자매라고 호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압비아(Apphia)라는 이름은 풍요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압비아라는 여인을 우리들의 자매라고, our sister라고 소개하고 있다.
보통 자매라는 호칭은 일반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여성들을 통칭하여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어떤 남성의 아내를 높여서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사모님, 귀부인, 000댁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자매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이지 않을까 싶다.
고린도전서에서 베드로의 아내라고 소개하는 것처럼 빌레몬서에서도 아내 된 자매라고 기록했다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굳이 아내라고 기록하지 않아도 이 편지를 쓰는 바울이나 이 편지를 수신하는 빌레몬을 비롯하여 다른 신앙인들도 자매 압비아라고 기록하면 빌레몬의 아내라고 인식하지 않을까 싶다.
한 여인으로 태어나서 한 남성의 아내가 되는 것은, 그것도 신실한 신앙인의 아내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 중에 축복이요 은혜 중에 은혜라 할 수 있다.
잠언 19:14에서 보면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슬기로운 여인이라는 말은 지혜로운 여인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지혜와 슬기로운 품성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심성과 은혜를 입어야만 가능해질 수 있다.
압비아 여인은 주님 앞에서 슬기로운 아내가 되어서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슬기로운 여인들이 성막을 제작할 때도 참여한다.
슬기로운 여인들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기도 한다.
나봇의 아내였다가 다윗의 아내가 되는 아비가일이라는 여인도 슬기로운 여인이요 지혜로운 여인이다.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여인들 중에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 브리스길라와 뵈뵈, 빌립보의 루디아 여인, 루포의 어머니,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와 같은 여인들이 지혜로운 여인이요 슬기로운 여인들이 되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온전하게 세워가면서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 받는다.


 주님의 교회를 묵묵히 섬기는 아내로 세워주신 하나님.


빌레몬서의 수신자들 중에서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기록하는 것을 보면 빌레몬의 집에, 압비아의 집에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바울이 압비아 여인을 공동수신자로 기록할 정도면 골로새교회에서 압비아 여인이 얼마나 진실하고 성실하고 순수하고 훌륭하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겼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기 때문에 빌레몬과 압비아 부부는 자신들의 집에서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교회를 세우고 섬기면서 주님의 거룩한 구령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부부가 자신의 집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섬기면서 다른 성도들을 돌아보고 주님의 신실한 일꾼들로 양육해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가족들만 돌아보고 양육하는 일도 너무너무 힘들고 어렵고 벅찬 일인데,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섬긴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다가 한번 손님을 초대하려고 해도 대청소하고 식사 준비하고 어린 자녀들 단속하고, 너무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인데, 주님의 교회를 세워서 섬긴다는 것은 적어도 매 주일 모여야 하는 일이다.
교회로 모이는 가정이기 때문에 어쩌면 매일매일 모여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일을 누가 감당해야 할까?
물론 빌레몬의 집에는 노예들이 많이 있어서 노예들이 잡다한 일들을 수행할 수 있다.
그래도 아무리 노예와 종들이 그런 일들을 수행하더라도 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은 것이 사실이다.
가정에서 교회를 섬기려고 하면 넓은 모임의 장소와 많은 시간들과 많은 경제적인 물질과 이를 바쳐줄 수 있는 건강한 육신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하늘의 아버지께서 하나하나 예비해 주시고, 챙겨주시고 채워주시고 치료하여 주시고 도와주시면서 역사해 주시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일을 수행해야 하는 주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삶이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묵묵히 주님의 몬된 교회를 섬겼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바울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빌레몬서의 공동수신자로 압비아 여인의 이름을 기록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은혜와 축복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


압비아 여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은 여인임에 틀림없다.


 압비아 여인은 하나님의 사자인 사도 바울에게 인정받는 여인이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교회의 지도자에게 인정받는 것처럼 큰 은혜와 축복은 없다.
교회 안에는 교회 지도자의 마음에 대못을 박으면서 고통과 신음을 주는 여성들도 많은데, 압비아 여인은 사도 바울의 사역에 전적으로 협력하면서 도와드렸기 때문에 바울에게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는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이다.
압비아 여인은 사도 바울의 사랑과 기도를 받으면서 신앙생활 한 여인이다.
위대한 신앙의 사도인 바울의 기도와 격려와 위로를 받으면서 신앙생활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임에 틀림이 아닐 수 없다.


 압비아 여인은 성경에 기록되는 은혜와 영광을 받은 여인이다.
빌레몬서는 1장에 불과한 아주 작은 성경이다.
아주 작은 성경이지만, 하나님의 말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는 성경에 기록되는 것은 아무나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여인의 인권이란 것이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남성 중심의 사회에 속한 여인이 생명의 말씀인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은혜와 축복과 영광이 아니겠는가.


 압비아 여인은 후대의 신앙인들에게 두고두고 귀감이 되고 회자되는 여인이다.
압비아 여인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됨으로써 빌레몬서를 읽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여인이 되는 것이다.
교회의 크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많은 신앙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덕을 쌓는 여인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의 걸림돌이 되고, 항상 문제들을 일으키는 여인들도 많다.
그런데도 압비아 여인의 이야기는 어느 교회든지 덕을 세우고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어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지는 여인이 되는 축복을 받는 것이다.


 압비아 여인은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여인, 꼭 필요한 곳에 있어야만 하는 여인이다.
빌레몬과 압비아 가정에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 만약에 압비아 여인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압비아 여인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압비아의 빈자리를 메꾸면서 교회는 운영되고 세워져 갈 것이다.
하지만 압비아의 빈자리는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채우고 메꾼다 하더라도 그녀의 빈자리가 주는 허전함, 어딘가 모르게 서운함의 감정은 누구가 대신 메꿀 수 있겠는가?
압비아 여인의 자리는 오직 압비아 여인만이 채우고 메꿀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인들 중에는 나 하나쯤이야 있으나 마나 하지 않나, 나 같은 사람은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때, 나 같은 것에게는 신경 하나 쓰지 않을걸,...”
너는 우리 교회에 전혀 도움이 안 돼. 차라리 너 같은 놈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게 좋아.”라고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자기 자신을 비하하거나 업신여기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는 나같은 것이란 절대로 없다. 내가 있을 자리에 꼭 지키고 있어야 주님의 몸된 교회가 온전하게 교회로 세워지는 것이다.
두 눈, , 두 코, 두 귀, 양손, 양발을 비롯하여 사지백체(四肢百體)가 온전해야 온전하고 건강한 육신을 지니는 것처럼, 주님의 교회에는 모든 신앙인들이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있어야만 주님의 온전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다.
교회라는 신앙의 공동체는 우리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시고, 몸이 되시고, 모든 신앙인들이 각 지체가 되어야만 온전한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빌레몬과 압비아와 아킵보와 오네시모는 AD 68년 네로의 첫 번째 박해 기간에 골로새에서 순교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들은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들의 생명도 내어놓으면서 순교자의 길을 걸어간 신앙의 위인들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빌레몬과 압비아 여인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인정받고 칭찬받는 신앙과 인격을 지닌 것처럼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에서 인품과 신품이 탁월하고 훌륭하여 신실하고 올곧은 신앙인이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L4 & B4.


압비아 여인이 자신의 집에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를 세워서 진실함과 성실함으로 교회를 섬기면서 사도바울에게서 인정받고 성경에 이름이 기록되어서 모든 신앙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아름다운 신앙의 이야기를 전해지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은 여인이 되었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겨야 할까?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고백하고 신앙생활하는 성도라면 마땅히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도움이 되어 목회의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신앙인들이 그렇게 신앙 생활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개중에는 교회의 지도자를 향하여 비난하고 험담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다.
적어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신앙고백하며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드리고 협력해 나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지혜로운 신앙인, 슬기로운 신앙인으로 세워질 수 있는 신앙인은 뭐니뭐니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충만이라는 삼위일체가 형성되지 않고 어딘가 하나라도 빠지거나 모자라게 되면 뒤틀린 신앙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언제나 완전하고 온전하고 정결하고 거룩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교회로 세워지고 섬기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삼위일체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항상 자기 자신을 체크하고 점검하면서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오직 주님 앞에서 죽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신다.
고린도전서 15:31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씀하신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려고 했던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날마다 주님 앞에서 죽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니 주님 앞에서 신실하고 지혜롭고 슬기로운 신앙인이 되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섬기기 위해서는 주님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음으로 붙들고 매일매일 죽는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몸된 교회와 십자가 복음을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고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신앙인의 자세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오늘 압비아 여인이 교회를 섬기면서 살았던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 신앙인들도 주님의 몸된 교회, 우리들이 신앙생활하고 있는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의롭게 섬기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는 신앙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