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교회에 침투한 이단 (골로새서 2:16-23)
골로새교회는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였습니다.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회심한 에바브로는 골로새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한 후 교회를 세웠습니다(1:7). 골로새 교회는 가정을 중심으로 모이는 조그만 교회였으나(4:15,16), 비교적 믿음의 질서를 유지하고 복음의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던 교회였습니다(1:4-6 ; 2:5).
그런데 이처럼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 한창 자라고 있는 교회에 복음을 위협하는 이단 사상이 교회에 침투하게 된 것입니다(2:8). 골로새 교회의 개척자인 에바브로는 이 문제를 가지고 바울을 방문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바울은 본 서신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즉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이단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 골로새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이단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이단의 정체를 알아보고,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바울은 8절에서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이단 사조에 대해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8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이단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단이란 끝이 다르다는 뜻으로, 그들이 말하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보이나 마지막을 점검해 보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귀에는 타당한 논리로 전개하지만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 이단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고 정의를 내리면서, 이러한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쫓는 것일 뿐 그리스도를 쫓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8절). 골로새 이단들이 가르치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사람들이 듣기에는 그럴듯하게 들려도 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한 구원의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16-23절에서 골로새 이단 풍조들에 대해 언급하며 그 해악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이단에 대해 세밀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바울의 진술에 기초하여 그 이단 풍조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유대 율법주의적 요소입니다.(16,17절)
그들은 할례를 비롯하여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월삭, 안식일 등의 율법 조항들의 준수를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였습니다(13,16절).
먼저 ‘먹고 마시는 것’을 준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먹고 마실 때 지켜야 하는 유대의 정결 규례를 가리킵니다. 유대 의식법에는 먹어야 될 음식과 먹지 말아야 될 음식이 분명히 구별되었고(레 11장), 마시는 것에 대한 금지 규례도 있었습니다(레 10:9). 더럽고 때 묻은 그릇에 있는 음료를 먹을 수 없었고(레 11:34), 나실인과 같이 여호와를 경외하기로 맹세한 자는 술을 일절 금했습니다(민 6:3,4).
당시 골로새 교회 율법주의자들은 새 언약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척하고 여전히 이러한 것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니, 모든 식물이 깨끗하다’라고 말씀하심으로(막 7:18,19)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공포하셨습니다.
다음에는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대해서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 왔던 모든 성일(聖日)에 대한 총체적인 표현입니다.
이 가운데 ‘절기'는 유대인이 1년 동안 살아가면서 지키는 여러 절기들, 즉 유월절(레 23:6), 칠칠절 혹은 오순절(출 23:16 ; 레 23:16), 장막절 혹은 초막절(레 23:34,39 ; 민 29:12), 나팔절(레 23:24,25), 수전절(요 10:22) 및 부림절(에 9:17.22,26) 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월삭’은 새로운 달이 시작되는 날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은 달의 기울기를 관찰하여 그믐을 지나 새로운 달이 올라올 때에는 나팔을 불면서 봉화를 들어 백성에게 알리고(민 10:10), 매 월삭에는 평시와 달리 특별한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규례를 지켰습니다(민 28:11-15).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일주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기리며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7일에 쉬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입니다(창 2:2,3).
이러한 유대인들의 절기 준수는 늘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습니다. 절기 준수의 가장 큰 핵심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구속사의 흐름 가운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베푸신 그 은혜를 늘 기억하면서 그분께 예배드리는 삶에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이러한 절기에 내포된 의미보다는 절기 의식과 형식 자체만을 강조하는 오류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고(막 2:27,28), 바울 사도 역시도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촉구했었습니다.
이러한 율법적인 요소를 지키고 못 지키느냐는 문제로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 즉 율법적인 요소는 장래 일의 그림자이며,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과 같은 것들은 실체 그 자체가 아니라 실체를 나타내기 위한 상이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림자 뒤에는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실체가 있기 마련입니다. 율법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 다가올 일들에 대한 그림자로서 자신이 투영하고 있는 바로 이 실체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체는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속죄를 위해, 은혜를 얻기 위해 더 이상 구약의 규례와 동일한 절기 준수나 제사와 같은 의식법을 의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히 10:18).
둘째, 천사 숭배적 요소입니다.(18,19절)
그들은 자신들이 본 신비적 환상에 집착하고, 또 그것을 과장하여 천사들을 숭배하는 단계로 나아갔습니다(18절).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던 천사 숭배자들은 율법주의자들보다 더 강하게 골로새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심판자의 위치에 올려놓고서 자신들의 체험을 기준으로 골로새 교인들에게 천사 숭배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천사를 경험하거나 천사를 숭배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정죄하였습니다. 그들을 위협하고 미혹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지금 그런 위협과 미혹을 받고 있던 골로새 성도들에게 그런 것에 굴복함으로써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상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천사숭배자들은 자신의 체험을 중요시하여 죄악된 마음으로 자신의 체험을 과장하고 있으며,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하여 신앙을 성장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각자의 체험을 중요시하는 것에 오류가 있습니다.
‘꾸며낸 겸손’이란 ‘나는 하나님을 직접 경배할 만한 자격이 없으므로 중보자인 천사 숭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한다.’라는 위선된 겸손의 논리로써 자신들의 천사 숭배를 정당화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육신의 생각에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한 것입니다.
몸의 각 지체인 성도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어야 하며, 이러한 연합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자라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몸이 머리와 떨어져서는 성장은 물론이거니와 생존할 수조차도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일단 성장에 앞서서 필요한 것은 머리와 연합하여 온전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많은 성도들이 각 지체가 되어 하나로 연합하는 것이 성장의 전제 조건인 것입니다.
천사숭배자들은 신비 체험으로 경험한 천사들을 더 중요시하여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았습니다. 몸의 각 지체인 성도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어야 하며, 이러한 연합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신앙을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금욕주의적 요소입니다.(20-22절)
그들은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21절)는 식으로 육체의 욕구들을 극도로 억압하여 몸을 괴롭게 하였습니다(23절).
골로새 교회에 있었던 금욕주의자들은 영지주의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금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과 육을 철저히 분리하여 영은 거룩한 것이고 육은 악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악한 것은 육의 더러운 생각과 정욕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여 육체의 욕망을 죽임으로써 거룩에 이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과 고행으로 육체의 정욕을 죽임으로써 거룩에 이를 수 있고,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욕주의자들의 시도는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되어도 온전히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23절).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해 살아있는 자들처럼 금욕주의적인 법령에 굴복하여 산다면 그것은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고 돼지가 씻었다가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과 일반입니다(벧후 2:22). 또한 이러한 태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현저히 욕보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의 짧은 지식으로 뒤엎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초등학문인 규례에 세상 사람들과 같이 얽매이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21절의 “붙잡지도 말아라. 맛보지도 말아라. 만지지도 말아라."는 금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3대 표어로서, 특히 금욕주의자들이 주로 경계하던 고기와 술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붙잡다’는 손으로 어떤 물건을 접촉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술과 고기 등의 음식에 매달려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술과 고기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여자와의 결혼까지도 금지하였는데(딤전 4:3)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금욕주의 이단자들은 주로 술과 고기 동의 음식에 대해서만 경계를 했던 것 같습니다.
‘맛보다’는 술과 고기 등의 음식을 먹는 것뿐만 아니라 맛보는 행위조차도 금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육체는 너무도 약하기 때문에 어떠한 작은 유혹거리라도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그들의 엄격한 규율을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만지다’는 부정한 음식을 만지지 말라고 명령할 때 사용되는 동사로서, 술과 고기 등의 음식을 맛보는 행위에 앞서서 그것을 만지는 것조차도 금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 및 가르침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인간이 만든 유전과 전통을 가리킵니다. 21절에 나오는 음식에 대한 금욕적 규례는 인간의 선입견과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 속에서 만들어진 인간적 교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금욕주의적 가르침이 그리스도인의 성결한 생활 및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인간적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바울의 진술을 통해 추정해 보면, 골로새 교회 안에 침투한 이단들은 지혜와 지식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이며(2:2,3), 충만(fullness)에 대해서도 강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1:19 ; 2:9,10).
[ 결론 ]
이를 통해 종합해 볼 때,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이단 사조는 유대주의적 요소와 헬라 사상의 요소가 결합한 일종의 종교적 혼합주의(religious syncretism)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당시 골로새 일대의 주민들이 브루기아 원주민, 헬라 이주민, 디아스포라 유대인 등 여러 종족들이 섞여 구성된 것처럼, 당시의 유행하는 문화적 · 사상적 흐름들이 한데 섞여 종교적 특색까지 띠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종교적 혼합주의는 2세기에 교리와 사상 면에서 고도로 체계화되어 기독교의 가장 큰 적대 세력이 된 바 있는 영지주의(Gnosticism)의 발아(發牙) 형태이며, 그런 점에서 원시 영지주의(proto-Gnosticism)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사를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2세기에 영지주의가 얼마나 기독교 복음의 근간을 뒤흔드는 위협적인 세력이었는지를 잘 알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지주의는 일시적인 물리적 핍박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동서양의 각종 철학과 종교가 결합하여 이루어낸 고도로 정교하고도 심오한 사상적-종교적 체계로서, 기독교 복음의 가르침을 능가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기독교회는 영지주의의 공격에 대응하여 거의 사활을 건 영적 싸움을 싸워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비록 발아기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바울 당시의 이러한 이단 사조가 이제 막 생겨나 성장하기 시작한 골로새 교회에 얼마나 치명적 위해(危害)를 가할 수 있었겠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 골로새 교회는 비교적 복음 신앙을 잘 지키고 있는 편이었으나(1:3-6 ; 2:5),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의 복음 신앙에 치명적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이단 사상의 위협을 간파하고 엄중히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원시 영지주의라고 할 수 있는 골로새 교회의 이단이 ‘종교적 혼합주의’의 산물이었다고 하는 점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종교적 혼합주의는 비록 시대와 문화적 배경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각종 이단 사상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냅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초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 역시 종교적 혼합주의의 산물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간 관용과 포용이라는 그럴 듯한 명목으로 기독교 복음의 근본을 훼손하는 일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까? 소위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는 한마디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상을 신봉하는 자들 중 적지 않은 자들이 기독교회 내에서 ‘선생’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종교라고 주장하거나,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이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흘러간 옛 시대의 고리타분한 유물에 불과합니다.
성도들이 붙들어야 할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몸인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능력과 영적 양분을 공급받아 자라갑니다(19절). 진정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어찌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는 세상의 헛된 가르침을 따라갈 수가 있겠습니까?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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