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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역사 풍습

열려라 에바다 2024. 11. 6. 15:59

풍습과 성경

봉서방추천 1조회 4224.10.31 02:23댓글 2

십자가형에 대한 기록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갖고 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을 이야기하실 때는 언제나 부활도 함께 말씀하셨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우리 역시 그의 부활에 동참할 것이다. 가령 우리가 사형에 관한 탈무드나 로마법을 이해한다면 마지막 판결로 사형을 언도한 경우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탈무드의 기록에 따르면 사형 언도는 공적으로 낮에 선포하도록 되어 있다. 사형을 언도하기 전에 법무관은 죄인의 죄목을 정리한 내용을 가져왔다. 랍비의 두 문하생들이 서 있으면서 뒤에 선 문하생이 죄인의 죄를 고백하고 왜 그가 사형에 해당되는지를 강조하였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언제나 사형을 내릴 공적인 기록을 남길 대표자를 대동하였다.

 

로마법에 따르면 십자가 사형에 해당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처형 장소까지 짊어지고 가야 했다. 사형수의 죄목이 기록된 명패를 군인이 사형수의 앞서 들고 걸어가 사람들로 하여금 무슨 죄목으로 죽음에 해당하는지를 백성들에게 알렸다. 죄목과 함께 기록된 내용은 사형수의 이름, 그의 고향이 포함되었다.

사형장에 도착하게 되면 죄수의 옷을 모두 벗겼다. 그리고 바닥에 누운 십자가 틀에 사형수를 눕히고는 두께 약 2cm, 길이 약 18cm의 낚시 바늘처럼 끝을 구부린 거칠게 다듬은 못으로 사형수의 손목과 복사뼈 아랫부분을 때려 박았다. 여기에서 사형수의 손목이 찢어져 떨어지지 않도록 못을 나무에 단단히 박았다. 종종 엉덩이와 발을 받치는 버팀목을 두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미리 파 둔 구덩이에 십자가를 세워 고정시켰다. 1968년 예루살렘의 북쪽 Giv`at Ha-mivtar에서 십자가 처형으로 말미암아 죽은 20대 초반의 청년 무덤이 발견되었다. 복사뼈에 박힌 못에는 십자가 사형 틀로 사용된 나무와 버팀목의 흔적이 함께 드러났다. 십자가 사형 틀은 감람나무로 그리고 엉덩이를 받치는 버팀목은 싯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다.

 

그리스인들로부터 전수받은 십자가 사형제도는 사실은 페르시아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이것은 노예들을 처형할 때 사용했던 방법으로써 가장 끔직한 사형 제도라고 키케로(Cicero)는 밝혔다.

 

로마의 철학자였던 세네카 (Seneca)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사형수의 목숨이 한 방울 한 방울 사형수로부터 조금씩 떨어졌다. 가장 오래된 십자가 사형 틀은 T자형이었으며 위에 돌출된 부분은 없었다. 사형 틀은 여러 차례 반복되어 사용되었으며 높이는 대략 2.4m에 달하였다.

 

기독교 박해시대에 많은 순교자들이 십자가 사형에 의해 처형되기도 하였다. 여인들은 얼굴을 십자가 사형 틀에 향하여 달렸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죄수가 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므로 구레네에서 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시몬으로 하여금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하였던 것이다 (막15:21).

 

로마에서는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십자가 처형으로 말미암아 순교하였다고 세네카는 기록하였다. 그의 기록 가운데 63년에 처형된 한 사람의 처형 장면을 본다: 그가 극심한 고통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하여 자비를 구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만면에는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밝은 미소를 머금었다.

 

당일 매장이 유대의 장례풍습

 

유대인 전통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그날 매장한다. 그 이유는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이탈될 때, 빛으로 형성된 또 다른 몸에 의해 감싸이기 전에는 저 세상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시신이 매장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을 경우, 영혼은 고통을 받고 불결한 악령이 시신위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악령은 한밤에 영혼이 없는 시신을 찾아다니기 때문에 가능한 빨리 매장하는 것이 고인을 위한 길이라고 한다.

 

인간이 두개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유대교신비주의자들의 생각이다. 예언자 엘리아가 두개의 몸을 가졌는데, 하나는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의 천사들에게 보이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인들은 보통 사망 다음날 시신을 매장한다. 군 복무 중 사고를 당했을 때도 부모의 확인 절차를 거친 후 다음날 장례를 치른다.

 

또한 유대인의 독특한 장례 풍습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초상집 벽에 있는 거울을 뒤로 돌려놓거나 종이로 가린다. 이는 거울에 영혼이 비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장례식 참가 후 귀가할 때, 대문 앞에서 물로 손을 씻는다. 그 이유는 몸에 붙어왔을지도 모를 악령을 씻어낸다는 취지이다. 유대인들은 화장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메시아 출현 시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키파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통곡의 벽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이 아닌 관광객이라도 머리에 무언가를 얹어야 한다. 가령, 모자를 쓴 사람은 그대로 들어 갈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입구에 비치되어 있는 원추형 작은 종이모자라도 어리에 얹어야 한다. 원추형 작은 모자가 바로 키파 이다.

 

유대인의 복장 상징으로 대명사화되어 있는 작은 빵 보자 키파는 크기가 작고 가벼워서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녀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수하기에 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통곡의 벽뿐 아니라 다윗의 무덤 등 유대 유물을 방문할 때는 이 키파를 착용해야 한다.

 

머리를 가리는 것은 원래 고대 로마시절 노예에 대한 표시였다. 자유인은 맨 머리로 다녔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뜻으로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도 당초에는 신전에서나 여타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되는 축복 또는 예배 때만 지켜졌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평상시에도 하늘에 머리를 내 보이지 않는 관습으로 정착했다. 그러니까 머리를 가리는 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뜻이다. 지금도 이스라엘 종교구역에 사는 정통파 유대인들은 성인은 물론 어린아이들도 어리에 키파를 쓰고 있다. 또한 이들은 모자 속에도 키파를 쓰고 있는데 이는 모자를 벗었을 때에도 머리가 하늘에 보이는 죄를 범치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심지어 잠을 잘 때에도 키파를 벗지 않으며 목욕할 때만(한 여름에는 1주일에 한번 정도)잠깐 벗는다고 한다.

 

검은 유태인

 

유태인과 아랍인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뿌리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그 형제 민족은 생김새가 완전히 다르다. 더욱 기이한 것은 유태인들 중에도 피부색이 검은 흑인 유태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 흑인 유태인을 '팔라샤'라고 부른다.

 

에디오피아 전승에 따르면 '팔라샤'는 시바 여왕과 솔로몬왕의 후예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는 전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으며 '팔라샤'종족의 발생 근거로 이스라엘 북왕국이 멸망했을 때 추방당한 단족의 후예설로 꼽고 있다.

어쨌든 그들은 고대에도 있었던 공동체임이 분명하다. 아프리카 대륙의 북부 에티오피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팔라샤'는 자신들을 '베타 이스라엘(이스라엘 가문)' 이라 부르며 세상에서 마지막 남은 유대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느 유태인들과 같이 히브리어를 간직해 왔으며 고대 유태인 전통을 따랐고 토라의 규정을 지키며 살아왔다.

 

이들은 19세기에 기독교로 개종을 강요받았으나 상당수가 자신들의 유대혈통을 주장하며 이스라엘로 이주를 희망했었다. 결국 1984년의 에티오피아 기근과 1991년의 내전 당시 이스라엘로 대거 이주해왔다. 그러나 그 후 역사적으로 이들이 유대인인 근거가 모호하다는 점이 제기되고 또 언어와 문화, 피부색의 차이 등으로 인해 이들에게 대해 가해지는 유태인들의 심한 인종차별로 현재 밑바닥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의 가치판단 기준

 

유태인들에겐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되는 몇 개의 가치가 있다. 그중 최상의 가치 기준은 '사람의 삶과 생명'이 가장 중시된다는 것. 유태인들은 건배할 때 포도주잔을 부딪치며 '이카임(I' chayim)'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To life"라는 뜻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인간들의 삶은 너무 소중해서 '인간의 생명이 위협 받을 때는 단 3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종교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남자들의 의무사항인 할례도 아이가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아프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이다. 3개의 예외는 우상숭배, 살인, 근친상간이나 강간 등 성적문제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신을 포기하거나 살인을 하거나 강간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가치판단의 두 번째 중요한 기준은 '자유'의 강조이다. 유태 신학자들은 이집트 탈출인 엑소더스는 신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메시지로 해석한다. 이 메시지는 유태교회의 예배에서 아주 많이 예기되는 것 중 하나이다. 특히 유태인들이 일주일에 하루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안식일도 돈이나 일에서 해방된 '완전한 자유'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세 번째는 구원으로 가는 방법으로 '인간의 행동'을 강조한다는 것. 모세의 이집트 탈출 시 모세가 이집트 군사들에 쫓기는 위기 때 기도하고 있을 때 신은 "기도를 중단하고 뭔가를 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유태인들은 그래서 어려서부터 '좋은 행동'을 하도록 교육 받는다. 계곡 되는 신의 창조(진화)의 파트너가 되기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강조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사후'보다 '현세'가 더 중요

 

유태교에서도 사후에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유태교를 설명한 책자 어디에서도 단테의 신곡 같은 두려운 지옥의 모습을 그려놓고 있지 않다. 거의 천당의 모습만 그려놓고 있다. 종교관 자체가 신의 구원을 확실히 믿는 낙관론이 주조를 이루는 탓이다. 실제 유태인들의 욕에도 다른 종교에서 많이 쓰이는 '저주(Damned)'나 '지옥(Hell)'이 란 단어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현대의 자유주의적인 랍비들은 천당이나 지옥개념 대신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설명하곤 한다.

 

대부분의 유태학자들이 죽어서 가는 내세보다는 현실 세계에 더욱 관심을 둔다. 현실세계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구축하려는 데 훨씬 더 많은 종교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유태 회당들이 헌금이나 기부금이 많이 들어오면 기도를 위한 성전신축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가난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우선 돈을 쓰는 이유이다.

 

유대인의 이자 개념

 

유대교에서 돈은 일반적으로 효용적인 상품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것이므로 돈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돈을 빌려주는 대출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돈은 가난한 사람에게 대출해야 한다는 것. 특히 자기 주변에 있는 가난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우선적으로 대출해 줘야 한다. 이들에게 원금에 이자를 붙일 것을 기대할 수 없음으로서 이들에 대한 대출은 당연히 이자를 받지 않는 게 원칙이다.

 

둘째, 사회가 발전하면서 상업적인 대출이 생겨났는데 이 경우에는 이자를 받는다. 이자를 받는 행위 자체가 금융시장의 팽창을 의미하는 사회적 진보인 탓이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수혜 받은 사람들은 그 결과물을 갖고 가난한 사람을 도울 의무가 있다. 유태교에서 돈은 가진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신의 소유물이 그 사람을 통해 거쳐 가는 것으로 '일시적인 보관'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의 뜻대로 좋은 일에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의 부활신앙

 

부활은 유대교의 기본신앙이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을 사두개인 들로 부터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한다. 사두개인은 제사장 사독의 후손으로 알려진 사람들로 성전에서 일하던 귀족들을 말한다. 헬라문명을 받아들여 인본적인 사고를 하므로 부활을 부정했는데 그들이 부활을 부정한 근거는 토라에 부활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성전에서 서기관 등으로 일하던 실무급 인사들로 부활을 인정했다.

 

성전 파괴 이후 더욱 랍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유대교는 랍비 람밤의 부활신앙을 계속 이어갔는데 유대인들이 하루 세 번씩 하는 기도의 두 번째 항목에 부활에 관한 문항이 삽입 되어있다. 이들의 부활신앙은 메시야 시대에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는 것이었다. 메시야 시대를 히브리어로 '올람 하 바'라고 하는데 카발라(유대신비종교)를 통해 중세 유대인들의 부활신앙에 대해 짐작해 보자면 이 '올람 하 바' 때 네페쉬(목숨)는 육체와 다시 결합하고 하늘에 있던 네쉬마(영혼)도 내려와 그 육체를 비추게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토라공부와 선행을 통해 메시아의 날 즉 '올람하 바'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탈무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올람 하바에 받을몫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의로운 자는 어느 누구보다 큰 몫을 받게 되며 악행을 한 자는 그 악행 때문에 자신이 받을 몫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유대인들은 천국 가는 것을 자신들의 삶의 목표로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삶을 어떻게 충실하게 살 수 있는가를 더 큰 목적으로 삼는다.

현재의 삶이 결국 천국에서 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대립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 함께 유다 종교의 중요한 두 축을 이루는 종파였다. 사두개파는 그 명칭이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인 사독에서 유래(삼하 8:17)되었다. 사두개파는 부유한 기득권층으로 유대 제사장 계급을 독점하였으며 성경 중에서도 모세오경만을 인정했다.

 

성전의 장사치들에게 금품을 착취하는 대가로 성전을 장사의 장소로 용인하였기에 나중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치를 쫓아낸 사건에 대해 굉장히 노를 품게 되었다.

 

그래서 바리새파보다 예수님께 대해 격한 중오를 나타냈다고 평가받고 있다. 결국 사두개파는 AD70년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바리새파는 기원 전 200년경에 형성된 가장 엄격한 유대인의 종교적 당파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뛰어난 성결의 생활과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성경 지시를 자랑했으나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외식이라고 책망하신 바 있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성전멸망 이 후에도 랍비를 통해 그들의 신앙을 계승해 오고 있다.

 

이러한 사두개파 사람들과 바리새파 사이의 대립은 바로 구전 율법에 대한 견해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중 가장 주요한 의견 충돌은 부활에 관한 것이었는데 바리새파는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사두개파은 부활을 부인했다. 이뿐 아니라 사두개파는 영, 악마 등과 관련된 전설에 대한 믿음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두개파는 지극히 현실적 사람들로서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현세의 부유한 생활이었다. 실제로 사제 계급을 포함하는 사두개파들은 귀족적이면서도 부유하고 높은 계급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기에 기득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로마의 지배도 평화와 복지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하여 환영 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부활과 종말론에 관한 예수님 가르침은 사두개파보다 바리새파의 더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다

 

속죄일 행사

 

대개 4월 경, 7일간 치러지는 '욤키플'이란 히브리어로 '속죄일'이란 뜻이다. 욤키플은 1년 가장 거룩한 날이요 안식일 중의 안식일로 예배는 전날 해지기 직전에 시작하여 그날 밤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며, 다음날 아침부터 저녁가지 하루 종일 계속된다. 이 기간에는 음식을 먹거나 음료수를 마시지 않는다.(임신부,12세 이하의 어린이는 금식의 의무에서 제외된다). 욤키플 전날 오후 예배 때는 그들의 죄를 고백한다. 해가 지기 전 오후에는 비록 촛불은 켜져 있지 않고 성결예식은 없지만 성일을 위해 진설된 식탁에 둘러앉는다. 이것이 금식 전의 식사며 관습적으로 꿀이 준비된다. 잘 양념한 음식은 금식 중 목마름을 피하기 위해 준비되지 않는다.

 

해가 지기 직전에 촛블은 켜지고 성결 의식이 진행된다. 그리고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랍비, 선창자 등이 순결과 결백을 상징하는 흰옷을 입고 집례 한다. 토라의 두루마리가 흰 망토로 덮여 있으며 궤가 흰 천으로 가려져있다. 궤는 열려 지고 두루마리는 꺼내진다. 회중들은 일어나서 콜 니드레이(모드 맹세)를 시사 하는 특별한 노래를 고대의 곡조에 맞춰 부르게 된다. '콜 니드레이'는 예배자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지킬 수 없었음을 나타내는 서원에 대한 '합법적인 단념' 행위 이다. 지킬 수 없었던 서원에 대해 포기를 하고 하나님 앞에 죄의 고백을 하며 그의 죄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 고백은 저녁에 행해지며 다음날 그것이 반복된다.

 

욤 키플의 마지막 예배를 마감하는 '쇼팔(앙각나팔)'이 불기 전에 회중은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주는 한분이시다" 그 후 다음과 같은 기도를 세 번 반복한다. "그의 왕국의 이름이

다음과 같은 기도를 일곱 번 반복한다. "주님 그 분은 하나님이시다.

 

수다스러운 유대인

 

예수님은 12제자를 유대 각 처로 파송하신 후(눅 9:1-6) 70인의 전도대도 세워 예수님이 직접 가시려는 유대 각처로 보내시며(10:1) 이렇게 말씀하셨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인사는 기본적인 예의가 아닌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절도 없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인가? 사람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우시기까지 하신 예수님께서 왜 70인의 전도 대에게 인사도 하지 말라는 엄중한 명령을 내리신 걸까? 유대인들은 길거리에서 만나면 서로 고개 숙여 인사하고만 지나치는 경우가 없었다. 길을 가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달려가 서로 목을 껴안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서로의 가슴에 오른 손을 오려놓고 입술을 맞춘 후 서로의 손을 머리 위로 올려 꽉 잡아 인사를 나누었다. 이렇게 장황하게 몬 인사를 나눈 후에도 헤어지는 게 아니라 몇 시간이고 잡담을 나누곤 하였다. 이러한 당시 유대 풍습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그들의 인사에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복음을 전하는데 전념하길 바라셨던 것이다.

 

길에서 장황한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려야 할 긴박성을 강조 하신 것이다. 절대로 인사를 하지 말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의 평안을 비는 인사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결혼식 풍습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전에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떠꺼머리총각'이라고 불렀다. 한국에서 결혼은 어른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이며, 사회적 명망과 지위를 향한 하나의 중요한 도약이다. 우리나라 전통 혼례식에서는 혼인 전날 밤, 혼서와 채단을 함에 넣어 신부 집으로 보내는 절차가 있었다. 요즘도 신랑 친구가 예단 넣은 함을 신부 집으로 지고 가는 풍습이 있다. 옛날에는 함이 신부 집에 도착하면 복 많은 어른이 함 속을 더듬어 채단을 꺼냈는데 파랑이면 첫아들을, 빨강이면 첫딸을 낳는다고 믿었다. 또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결혼식이 끝나면 '신랑달기'라는 풍습이 있었다. 대청 대들보에 무명 한필을 풀어 걸고 한쪽 끝에다 신랑의 두 발목을 매고는 한쪽 자락을 쥐고 잡아당겨서 신랑 발바닥을 때렸다.

 

원시시대에는 신부를 폭력으로 빼앗아 갔기 때문에 신랑을 도둑으로 여기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신랑을 호되게 때리는 관습이 근래까지 신랑달기 풍속으로 이어져 온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혼례풍습도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르며 각기 특징적 요소가 있다.

 

이스라엘 결혼식은 신랑과 신부에게 주어지는 축복 문(창세 24,60 참조)을 제외하면 비종교적 행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순수 민간행사였던 결혼을 하느님 언약과 연결시켜 결혼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잠언은 결혼을 '하나님 앞에서 맺은 약조'(잠언 2,17 참조)라고 했다. 이후 이스라엘 결혼식에는 결혼 계약 문을 만들고 신랑 신부가 그것을 서약하는 절차가 혼인예식에 포함됐다. 이런 절차는 오늘날 유다인 결혼식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또 이스라엘 결혼식에서는 결혼예복을 입는 것이 중요한 풍속이었다. 부잣집 잔치에는 손님들에게도 미리 준비해둔 결혼예복이 제공됐다(마태 22,12 참조).

예수님은 혼인예식 예복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회개에 비유하기도 했다(마태 22,2-14 참조). 결혼식 날 신부는 실제로 아름다운 여왕처럼 몸치장을 했다. 신부는 목욕을 하고 가족이나 이웃에게서 보석을 빌려 한껏 멋내 머리를 장식했다. 그리고 신부는 베일로 얼굴을 가렸는데, 이 베일은 결혼식을 올리는 장내에 들어갈 때까지 벗을 수 없었다.

 

전통적으로 신부 베일은 겸손과 존경과 순결의 상징이었다. 베일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신랑 신부가 결혼서약을 하고 결혼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후에만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결혼서약을 하고 남편과 아내가 됐음을 선언 받은 후에야 베일을 걷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 결혼식에서는 결혼행렬도 중요했다. 결혼행렬은 신부 집에서 신랑과 신부, 두 사람이 살 새 집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어두운 길목은 결혼식 손님들이 들고 있는 등잔불로 밝혔다.

 

새 집에 도착한 신랑 신부는 작은 천막 모양의 차양 밑으로 들어간다. 이 차양은 이스라엘 유목민 장막과 신랑 신부가 함께 살게 될 새 보금자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주로 먹고 마시는 일로 이루어지는 결혼잔치를 주관했다. 이 혼인잔치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신랑 신부를 축하하는 행사였다. 여기에 참석한 이들이 공식적으로 혼인 증인 역할을 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한 장소도 가나지방의 혼인잔치에서였다(요한 2,1-12).

 

결혼잔치는 보통 7일간 지속됐으며 때로는 두 주간 동안 계속되기도 했다.

잔치에 참가하는 손님들은 결혼이 성립하는 데 중요한 증인 역할을 했다(창세 29,22-23 참조). 그리고 신부가 처녀라는 증거로 딸의 자리옷을 성읍 장로들에게 가져가 펴 보이기도 하였다(신명 22,13-21 참조). 그리고 참석자들은 결혼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하느님 축복이 부부에게 내리길 기원했다.

나라와 풍습은 달라도 사람들이 결혼식에 부여하는 중요성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