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출애굽 사건

열려라 에바다 2024. 11. 29. 16:03

출애굽 사건

1. 히브리인의 출현

요셉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출애굽 사건으로 이어진다. 요셉이 이집트를 치리 했을 때만 해도 그의 부모 형제들은 이집트에서 잘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요셉이 죽고 요셉을 알지 못한 사람이 이집트의 왕이 되면서부터 히브리인들은 박해를 받고 노예로 전락되었다(출 1:8-11).
요셉이야기의 역사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요셉을 힉소스 족이 한 때 이집트를 다스렸던 시기(1800-1550 B.C.E.)의 인물로 간주한다. 힉소스 족이 이집트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자 그곳에 잔류해 있던 히브리인들이 고난을 받게 되었단다. 성서 역시 이 시기의 이집트 왕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집트 왕 람세스 2세(1290-1224 B.C.E.)는 전국에 걸쳐 건축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히브리인들은 람세스 치하에서 강제노역을 했으며 그 어간에 모세라는 인물을 통해 출애굽을 하게 된다. 당대의 상황을 보여주는 아마르나 문서(주전 14세기)에 의하면 '하비루' 혹은 '아비루'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이 외국의 용병이나 부역꾼으로 널리 활동하고 있었다. '히브리'(이브리)와 발음이 유사한 이들이 곧 출애굽한 히브리 사람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해 왔다. 하지만 그들이 곧 이스라엘을 이룬 히브리 사람들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히브리 사람들도 그들처럼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부역에 종사했다는 것이다.
성서를 통해 히브리 사람들의 정체는 이미 밝혀졌다. 멀리는 아담의 후손이요 가깝게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조상으로 하는 떠돌이 아람 사람들이었다(신 26:5). 그러나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히브리 사람들은 족장들의 이야기와 맥락을 달리한다. 그들은 이전의 족장들을 잘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모세에 의해 비로소 족장전승과 만나게 된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이요 민족적 자각이 눈을 뜬 시발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성을 입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이집트의 역사가 이 엄청난 사건을 전혀 보도하지 않고 있으며, 이집트에서 430여년을 살았다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생활습관이나 유물을 거의 남겨두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오히려 광야생활 중에도 가나안의 삶을 더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이집트는 단지 힘이 강대한 나라이자 먹을 것이 풍부한 동경의 세계였다.


사실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늘 위협적인 존재였다. 사막과 산지 때문에 북쪽 통로를 통해 쳐들어 왔던 바벨론의 세력보다 늘 가까이서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협했다. 그들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이스라엘을 공략했으며, 성서의 사사시대에 해당되는 주전 13세기에는 이집트의 영토가 이스라엘 북쪽의 비블로스 항구에 이르렀다. 그 사이 많은 히브리 사람들과 가나안의 원주민들은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 형태는 강제노역이 되거나 공물의 강제징수 형태였을 것이다.


학자들은 출애굽기의 기록을 토대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한 경로를 추적한다. 그 경로는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 신빙성 있는 것은 시내산 경로가 아닌 지중해 연안을 통과하는 북쪽 통로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경로도 그들의 광야여정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한다. 출애굽 사건은 결국 역사적 사건(historical event)보다는 기억될 만한 사건(historic event)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모세가 이집트의 파라오와 싸우는 장면이라든지 광야생활에서의 여러 가지 이적담(異蹟談)은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적 산물임을 곧 알 수 있게 한다.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가나안의 봉건국가에 의해 고난을 받았던 약소민족의 아픔이 '출애굽'이라는 사건을 통해 결집되었다.
그 사건은 당하는 사람 쪽에서는 자연히 역사적이요 큰 사건이지만 압제하는 쪽에서는 미미한 사건이거나 역사에 기록할 가치조차 없는 사건일 수도 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형성된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족장들의 삶이 수 백년 전에 이미 가나안에서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가나안 땅을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 땅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강대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으며 가나안도 이제는 다시 되찾아야 할 과제의 땅이 되었다. 이 사건은 어떤 사람들이 얘기한 대로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다기 보다는 후대 사람들에 의해 회고록의 형태로 편집되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민족적 정체를 밝혀주는 가장 큰 사건이요 이 사건을 반복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번창하자 이집트 왕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비록 정치적인 힘은 없는 민족이지만 이들의 숫자가 많아지면 큰 일이다. 오늘날은 산아제한을 통해 인구가 증가하는 것을 억제하고 있지만 고대의 삶은 한 사람이라도 많은 것이 유리했다. 전쟁과 기아와 병마에서 살아남아 종족과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우선 사람이 많아야 했다. 수많은 인종이 살고 있는 미국만 해도 그렇다. 생활이 비교적 안정된 백인사회는 산아제한을 비교적 잘하고 있는 만면에, 그렇지 못한 흑인사회나 제3세계 사람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낳아야 할 의무가 있다. 우선 선거권을 획득해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폭을 넓히고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보장 혜택을 더 받아 생계를 꾸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속된말로 약소민족은 우선 "쪽수"가 많아야 살 수 있다. 숫자가 많아지게 될 때 이웃 사람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집트 사람들은 박해를 가한다. 그러나 박해를 가하면 가할수록 이스라엘의 수는 늘어만 갔다.


결국 최후의 방책은 씨를 말리는 것이었다. 이집트 왕은 히브리 산파들을 불러 조산(助産)할 때 사내아이는 죽이고 여자 아이 만을 살리라는 명령을 한다(출 1:15-16). 권력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생명을 훼손하려 하고 있다. 소위 '권력의 무신론' '공포의 무신론'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마치 일제가 대한의 남아를 전쟁의 총알받이로 몰아세운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 땅을 지켜가고 민족의 얼을 계승할 주체자인 젊은 남자를 전쟁으로 몰아 개죽음을 강요한다는 것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권력의 무신론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들은 그 권력과 공포정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파라오의 명령을 듣지 않고 대신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 그 덕분에 사내아이들은 살아나고 모세도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출 1:15-22).


2. 모세의 등장

모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여느 이야기와 유사하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아기 모세를 상자에 담아 강물로 띄우게 되는데 파라오의 딸에 의해 모세는 건져진다(출 2:1-10). 신라의 탈해왕에 얽힌 신화이다. 바다 한 가운데 배가 있었는데 까치들이 그 배를 감싸고 있었다. 배를 끌어 당겨 보니까 배 안에는 큰 궤 하나가 있었다. 하늘을 향해 흉조(凶兆)인지 길조(吉兆)인지를 묻고 그 궤를 열었더니 사내아이와 노비가 그 궤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내는 용왕의 아들이었다. 그가 나중에 왕으로 즉위한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소개되어 있다. 우리의 건국신화에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고대사회일수록 영웅에 대한 신화가 많이 있으며 그것은 그 사회를 이끌어 가는 활력소가 되었다. 신비한 힘을 가진 자 혹은 신의 도움으로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얻게 된 특별한 사람만이 민족의 영웅이 되어 큰 일을 해낼 수 있다.


물에서 건져진 모세는 파라오의 궁에서 자라게 되고 어느덧 성년이 된다. 성년이 되자 모세는 자기 형제를 찾게 된다. 모세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자기의 뿌리를 알고 고난의 길을 택한다. 아니 자신의 출신을 안 모세는 더 이상 적국의 왕궁에서 편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고려시대에 우리는 원나라의 속국이 되어 살았던 적이 있다. 원나라의 몽고풍이 고려의 상류층에 유행했다는 것은 우리의 주체적 역량에 의문을 갖게 한다. 그 와중에서 적국에 붙어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그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세도를 부렸으며 오늘날에도 외국의 눈치만 보는 철새정치인들이 많음을 볼 때 모세는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달리 생각하면 모세는 모르는 척 하고 있다가 자기가 왕이 되어 히브리인을 구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동족의 아픔을 보고 의기를 억누르지 못한다. 동족이 이집트인에 의해 구타당하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인을 살해하게 된다. 나중에 같은 히브리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너희들은 동족끼리 싸우느냐"고 호통을 치자 그를 두려워한 히브리인들이 모세의 살인사건을 폭로하게 된다. 모세는 결국 동족에게 당하는 꼴이 된다. 모세는 할 수 없이 광야로 도망가게 되고 여기서 그의 삶은 다시 시작된다(출 2:11-15). 그 새로운 인생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가능해진다.


3. 호렙산의 야훼

모세는 미디안의 제사장 가문에서 결혼하여 양치는 일을 하다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타지 않는 불꽃을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은 이스라엘의 장래를 결정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을 지닌 야훼(여호와) 신(神)이 처음으로 모세에게 알려지는 순간이다(출 3:14). 독자들은 창조이야기에서 이미 야훼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들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모세는 여태껏 야훼를 몰랐단 말인가? 아브라함을 바벨론에서 인도해낸 그 전능의 하나님(엘샤다이)이 바로 야훼라고 소개된다. 이로써 하나님(Elohim)과 야훼(Yahweh)가 모세에 의해 이스라엘 전승 속에 한 하나님(One God)으로 자리잡게 된다. 사실 신의 기원을 밝힌다든지 종교의 기원을 밝혀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야훼 신앙이 어디로부터 유래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섬기는 미디안 족속의 종교전통에서 유래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으며, 어떤 이들은 야훼와 비슷한 고대 근동의 신의 이름(야후 혹은 야휘) 등을 예로 들어 야훼신앙은 본디 히브리 전통에서 왔다기보다는 주변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신의 기원을 규명하는 것보다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된 사건(事件)에 주목해야 한다.


4. 모세와 파라오와의 대결

그 사건은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통을 '직접 보고 들었다'는 데서 연유한다.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떨어져서 인간에게 명령만 내리는 신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다가선다. 야훼는 모세에게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하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이미 80세가 된 노인 모세는 이 엄청난 임무를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지팡이에 나타난 야훼의 능력을 보면서도 모세는 주저한다.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 4:10).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데 말을 못한다. 이것은 결국 파라오와의 싸움이 물리력을 바탕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말로 싸우는 것임을 의미한다. 말 속에는 진실이 담겨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할 사람은 말을 잘해야 한다. 이 말은 미사여구를 써서 남을 현혹시키는 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과감히 선포하는 용기 있는 말이어야 한다.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예언자들만의 몫이다. 그러나 모세는 말을 못한다. 아니, 말을 못한 다기보다는 파라오와의 입싸움에 자신이 없는 것이다.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그 싸움에 끼여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결국 아론을 세워 모세의 입을 대신하게 한다(출 4:14-17).


모세가 파라오에게 자기 백성을 이끌고 광야에 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절기를 지키겠노라고 말한다(출 5:1).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사흘 길을 가서 광야에 진을 치고 야훼 하나님을 위한 축제를 벌이겠다니 이것은 그냥 넘어 갈 일이 아니다. 모세는 지금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 자기 민족의 신을 자유롭게 섬긴다는 것은 그 민족의 주체성이 확립되었을 경우에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을 경우 그 나라의 신을 섬겨야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이제 자기들의 신 야훼를 섬기러 가겠다는 것이다. 그 신은 이집트의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탈출하여 새롭게 맞이할 광야의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광야생활을 하실 것이다.


싸움은 시작된다. 모세와 아론 단 둘이서 이집트 왕 파라오를 상대한다. 모세와 아론 뒤에는 야훼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면서 승리를 안겨주지만 파라오는 옆에 도움되는 신하 한 명 없이 당하기만 한다. 이집트의 술객과 박사들도 야훼의 권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파라오는 쉽게 항복하지 않는다. 강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등에 의한 재앙이 이집트전역을 무력화시키지만 파라오의 마음은 강팍해지기만 한다(출 7:20-10:29). 마침내 이집트의 장자(長子)를 모두 죽이는 엄청난 재앙이 파라오에게 닥친다. 이집트의 장자가 죽는 동안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장자에게 재앙이 닥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유월절(Passover)제도가 생긴 것이다.


늘 당하기만 했던 이스라엘로서는 이집트에 내린 재앙보다도 더 통쾌한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교회마다 출애굽기 설교가 인기를 누렸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힘으로는 누를 수 없는 제국주의의 횡포를 이렇게 해서라도 무찔러야 시원하다. 파라오는 힘있는 자의 대명사요 하나님은 약자의 친구이시다. 우리는 그 파라오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저 이집트의 왕이라는 사실 외에는. 파라오는 힘과 권력의 상징이요 인간을 억압하는 불의(不義)의 대명사이다. 그 파라오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멸망해야만 한다. 하지만 약자들은 어떻게 하랴! 오직 신의 심판만을 고대할 뿐이다.


나라 간에 싸울 적에도 이와 유사한 기적 담이 유행하게 된다.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백제가 신라에 의해 멸망당하기 바로 전이다. 의자왕 5년에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고 바닷가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해 먹을 수 없었으며 사비수의 물도 핏빛이 되었다. 4월에는 청개구리 수 만 마리가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정신나간 사람들처럼 이리저리 방황하고 재물을 잃는 사람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집트에 내린 재앙과 어쩌면 그렇게 유사한지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나라의 국운이 쇠할 때 발생하는 기이(奇異)한 재난은 이와 유사한 형태로 구전된다. 그것이 후대사람에 의해 문자화되면서 책에 실리게 된다. 백제가 겪은 재앙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사실을 기정사실화하고 있고 백제의 국운(國運)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출애굽 과정에서 발생한 재앙도 이와 유사하다. 파라오의 힘이 아무리 강대하다 한들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요 결국 패하게 된다.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파라오는 결국 심판을 받는다. 동시에 파라오와 같은 강팍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아무리 고집을 부려봤자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드릴 수밖에 없다. 특이한 것은 재앙의 강도가 갈수록 심해지며 그에 따라 파라오의 마음도 강도를 더해간다는 것이다.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나를 보여줌과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도 어디까지 미치는 가를 보여준다.


파라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허락하지만 마지막까지 기득권을 버리지 못한다. 1995년 6월 29일 대낮에 발생한 삼풍백화점의 붕괴를 보라!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사고가 나기 전에 여러 번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건물 곳곳에서 균열이 발생하였고, 사고 당일에는 5층 바닥이 무너져 내렸음에도 부분적인 수리에 머물렀다. 수많은 인명을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이미 주어졌는데도 재물에만 집착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하늘의 음성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리는 재미를 잊지 못해 하나님의 정의를 읽지 못한 파라오는 온 나라를 초토화로 만들고 장자를 죽이며 결국 부하들은 홍해에 빠져죽게 하는 장본인이 된다. 60만 명, 그것도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사람들이 60만에 이르렀다니 모두 합하면 250만 명은 족히 되었으리라(출 12:37). 그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빠져 나올 수 있으며 그것도 홍해를 건너는 일이 가능한 일인가?

5. 홍해의 기적사건

홍해의 기적사건은 우리가 창조이야기를 읽는 심정으로 읽어야 한다. 파라오의 군대는 이스라엘을 해치기 전에 멸해져야 한다. 바다의 신(神)도 이스라엘 편이다. 비록 성서는 바다의 존재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간주하지만 고대인의 사고에는 바다는 여전히 신비하며 그 힘이 강대해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다. 앞에는 바다가 놓여있고 뒤에는 이집트의 군대가 추격해 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진퇴양난의 기로에 선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기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때 신화적인 언어가 필요하다. 인간이 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를 때 인간은 신을 찾게 되고 그것은 당연히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된다. 홍해는 갈라지고 이스라엘을 쫓아오는 이집트의 군대는 홍해에 빠져 죽는다(출 14:1-31). 우리 나라 진도에도 해마다 한 번씩 바다가 갈라지는 진풍경이 발생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홍해가 갈라진다는 것도 이해가 간단다. 그러나 우리는 홍해가 갈라진 사건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밖의 방법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의 이야기이며 고대인의 언어이다. 어떤 이들은 당시의 자연현상을 들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홍해의 기적사건은 기적 자체보다는 기적 이면에 있는 의미가 더욱 중요한 내용으로 다가선다. 왜냐하면 홍해의 사건은 객관적인 역사보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홍해의 어느 지역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으며 홍해의 폭이 얼마나 됐는지 그리고 홍해바다 한 가운데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아니면 연안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알 수 없다. 이 사건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독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 되겠지만 홍해바다는 히브리어 성서에 '갈대바다'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의미는 달라질 것이다. 물론 그 갈대바다가 홍해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모세를 상자에 띄운 강이름과 같은 단어라면 우리는 홍해사건을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다. 그와 유사한 사건이 또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진입할 때 요단의 물이 그치는 이적이 일어나지 않는가?(수 3:14-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단강이 마른 사건보다 홍해 사건이 더욱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홍해사건이 민족의 태동기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후손은 홍해사건을 기억할 때마다 이집트를 보기좋게 물리친 야훼께 감사한다.


<삼국유사>에 소개된 고구려의 주몽신화에도 이와 유사한 경우가 있다. 주몽이 달아나다가 엄수(淹水)라는 바다에 이르러 물(水神)에게 일러 어찌하면 좋겠냐고 묻자, 물고기와 자라 떼가 물위에 떠서 다리를 만들어주어 주몽을 건너가게 하고 그가 다 건너가자 다리를 푸니 쫓아오던 기병들이 건널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하늘의 뜻을 이룰 사람은 이렇게 신기한 경로를 통해 살아 남는다는 것이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이스라엘은 드디어 반역하기 시작한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여지없이 패하고 홍해가 갈라질 때만 하더라도 살 것 같더니 광야에서 굶주리게 되자 불평하기 시작한다. 다시 이집트 생활을 그리며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출 16:1-3). 사람이란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존재인가 보다. 언제는 종살이가 싫어서 이집트를 박차고 나오더니 이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그 종살이를 그리워하다니.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만족하며 살 수 없다. 먹을 것 입을 것도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답게 사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 우리에게 고층 아파트와 번쩍이는 자가용도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맑은 공기 속에서 하루를 상쾌하게 보낼 수 있는 녹지 공간이 더 필요하다. 문제는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면서 문명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더 누릴 것이냐 아니면 인간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 해방된 자아를 실현하느냐에 달려있다.

6. 만나이야기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먹거리가 된 만나에 대한 이야기를 보자. 하나님께서는 불평하는 이스라엘에게 식량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신다. 메추라기는 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며 만나는 빵 대용으로 사용된 것 같다. 만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땅 위에 서리 처럼 쌓이는 하얀 밀가루와 같은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만나를 한꺼번에 많이 거두어다가 쌓아 둘 수는 없다. 오직 하루에 해당되는 분량만 취해야 한다(출 16:12-20). 그렇지 않고 욕심을 부려 많이 가져다가 다음날 아침까지 두면 부패해버리는 것이 만나이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안식일이 되면 일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하루 전에 그날에 먹을 양식을 구해 놓아야 한다. 안식일 하루 전에 구해 놓은 만나는 안식일까지 먹어도 상하지 않는다(출 16:23-31).


이런 신기한 만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과연 그런 식물이 있을까? 늘 그렇지만 우리가 성서이야기를 읽을 때 이해되지 않는 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이 실재로 발생했을까? 아니면 성서말씀이니까 무조건 믿어야 할까? 혹은 아니야, 문자적 의미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파악해야지. 이런 저런 생각을 나름대로 해본다. 그러나 성서해석은 어느 한 가지 방법만을 절대적 표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때에 따라서 문자적 의미를 중시할 때도 있고 상징적인 의미를 중시할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야기 자체 안에 해답이 있다. "만나란 무엇인가"라는 구체적인 질문을 하기 전에 "이스라엘은 왜 만나 이야기를 전했을까"라는 식의 질문을 해야한다. 그리고 난 다음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성서를 통전적(通全的)으로 보아야 한다. 이야기 사이에 놓인 상호관련성을 면밀히 살피고 전체적인 안목에서 개별적인 이야기의 주안점을 찾아야 한다. 만나이야기도 그렇다. 우리는 만나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실재로 그런 신기한 식물이 있는 지 입증할 방법도 없다. 굳이 설명하자면 만나는 하늘의 음식이다. 하루 분 이상의 양을 가져가면 자연히 썩어 버리는 음식이다. 그런데 안식일에는 썩지 않는다. 세상에 그런 음식이 어디 있는가? 결국 만나는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이 주신 음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만나가 신기한 음식이라는데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안식일 준수에 더 신경을 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광야생활일지라도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안식일을 위해 예비해 놓은 만나는 썩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만나이야기는 안식일 준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수단이 된다. 광야에서의 먹거리 이야기와 안식일 준수에 대한 이야기가 결합된 전형적인 이적담(異蹟談)이 만나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물이 없어 고생하다가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이적을 체험하는가 하면(출 17:1-7), 아말렉과 전쟁을 하기도 한다(출 17:8-16). 세월이 흐르면서 광야생활도 어느 정도 질서를 잡아가게 되고 모세는 질서유지를 위해 장로들을 재판장으로 세운다(출 18:1-27). 이전까지 모세가 전권을 행사하며 모든 것을 도맡아 하다가 재판장을 세움으로써 처음으로 업무분담이 이루어진 셈이다. 전체 40장으로 된 출애굽기는 18장까지 제 1막을 이룬다.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 배경과 재앙이야기, 그리고 광야에서의 먹거리 투정으로 이어지는 출애굽기 1-18장은 이로써 막을 내린다.

7. 시내산 계약

출애굽기의 제 2막은 19장에서 새로운 각도로 전개된다. 시내광야에 이른 모세는 하나님의 산(시내산)에 올라가 계명을 받는다. 이 계명을 지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된다(출 19:5). 글자대로라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주종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너희(이스라엘)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는 말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특별한 관계임을 보여준다. 단순한 주종관계가 아닌 이스라엘은 거룩한 공동체이며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제사장 나라라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아직도 광야생활을 벗어나지 못한 앳된 공동체이지만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동안 십계명의 형태가 이스라엘 본래의 것이 아니라 고대 힛타이트 종족과 그 봉신 사이에 맺어졌던 일종의 종속조약과 유사하다고 주장해 왔다. 양편이 관계를 맺게 된 역사적인 배경과, 피정복자는 정복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충성도에 따라 정복자의 자비가 베풀어진다는 고대 힛타이트의 계약문은 이스라엘의 계약법률에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스라엘의 계약법은 인간 사이의 종속조약이 아니라 신과 이스라엘 공동체와의 계약(covenant)이라는 것이다. 이 계약관계는 일방의 강제적인 압력에 의해 맺어진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동의에 의한 부자간의 계약관계와 같다. 이스라엘의 고통을 듣고 그들을 해방시킨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충성을 요구하신다. 그 충성은 따지고 보면 하나님보다는 이스라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신명기에 소개되는 십계명(신 5:7-21) 보다 더 오래된 전승을 반영하는 출애굽기의 십계명(출 20:1-17)은 십계명 자체보다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이 계약으로 말미암아 출애굽을 위한 정치집단이었던 이스라엘이 이젠 야훼신앙 중심의 종교공동체로 결집하면서 보다 강력한 공동체가 된다. 이집트를 탈출한 무리가 야훼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순간이 이른바 '시내산 계약사건'이다.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태도를 지시하며, 다음 여섯 계명은 사람사이의 윤리적 규범을 제시한다. 이것은 일종의 헌법과도 같다. 삶의 기본 정신을 이 십계명에 담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십계명이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모두 반영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일종의 모법(母法)으로써 공동체 모두가 추구해야 할 대전제에 해당된다. 따라서 십계명 외에도 개별사건의 심리에 적합한 상황법이 있게 마련이다. 이스라엘의 법률체계도 바로 이런 구조를 따르고 있다.


고조선의 팔조법금(八條法禁)도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 기자(箕子)의 8조지교(八條之敎)라고도 알려진 고조선사회의 법금은 사실 기자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 사회의 습관법에 해당된다고 한다. 전문(前文)은 전하지 않고 몇 가지 내용만 전해지는데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남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 배상해야 한다>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자 집의 노비가 되거나 은전 50만전을 내야 한다> 등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의무를 제외한다면 고조선의 팔조법금과 이스라엘의 십계명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십계명의 정신은 사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본법에 해당된다. 이스라엘은 거기에 하나님에 대한 경배조항을 삽입한 것이다.


십계명의 전문(前文)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역사적 관계를 명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 야훼라는 것이다(출 20:2). 그러기에 야훼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출 20:3). 이것은 마치 부부관계와도 같다. 한 번 인연을 맺는 사이가 신성한 계약에 의해 지켜져야 한다. 그래서 예언자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사이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묘사하지 않았는가. 종이 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라는 사상은 예언자들의 기본사상이 되어 이스라엘 신앙의 기조를 이룬다. 그들은 틈만 나면 이집트의 종살이를 회상하며 야훼의 도우심에 감사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과거의 일을 너무도 쉽게 잊는다. 일제의 강점이 불과 50여년 전이었는데 우리는 그 일을 그새 잊어버린 것 같다. 우리의 허물을 기억할 때 민족의 소망이 있다. 과거의 허물은 현재의 수치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미래의 거울이 된다. 그렇다고 일본과 계속 원수지간으로 지내자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의 노예로 35년간이나 지내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바로 세우고 신 앞에 겸손하자는 것이다.

8. 히브리인의 율법


모법(母法)인 십계명에 이어 부수적인 법률이 소개된다. 히브리인을 종으로 부릴 경우 육 년이 지나 칠 년째가 되면 안식년이므로 그를 해방시키되 빈손으로 내보내지 말고 아내와 함께 내보낼 것이며, 종이 상전과 함께 살기를 고집하면 그를 영원히 종으로 만드는 절차를 거칠 것을 규정하고 있다(출 21:1-11). 살인에 해당되는 죄 가운데 그 아비나 어미를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을 명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려졌다. 우리 나라는 노인들의 천국이라고 할 정도로 부모를 잘 섬기는 나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기독교인은 전 인구의 1/4을 넘는다고 자랑하면서도 사회는 점점 악해져만 가고 살벌해진다. 아들이 유학생활을 하는 중에 돈을 탕진하고 아버지를 살해하는가 하면, 대학교수가 아버지와의 말다툼으로 존속을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학생이 공부하라는 말이 듣기 싫다고 어머니를 야구방망이로 쳐서 죽이는가 하면, 며느리가 나이 들어 거동하기 힘든 시부모를 멀리 데려다 버리는 일까지 비일비재하다. 하나님의 법은 부모를 잘 섬길 것을 명하고 있다. 부모를 죽인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출 21;17). 그것은 천명(天命)이다. 생명을 준 부모를 죽인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법은 우리가 잔인하다고 여기는 이른바 '보복법'이다(출 21:24-25).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앙갚음하라는 보복법은 규율이 엄했던 유목사회의 잔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보복법은 모든 경우에 한해서 적용된 법은 아니다. 그 배경이 되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를 밴 여인을 쳐서 낙태케 했을 때 아무런 해가 없더라도 남편의 청구대로 벌금을 내야하며, 다른 해가 있다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갚으라는 것이다(출 21:22). 그리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그 생명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이다. 태아의 생명을 해친 사람은 이미 성인이 된 사람도 죽어야 한다. 이 얼마나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법인가? 오늘날 낙태가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다. 생명경시풍조가 만연된 사회는 소망이 없다. 아무리 선진사회가 되어 잘 산다고 한들 생명이 경시되고 무시되는 사회라면 더 이상 어떤 소망이 있겠는가?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 사람의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가 될 때 이 땅은 하나님이 원하는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보복법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람들 간에 발생하는 소유권 문제와 배상에 대한 규정(출 21:26-22:15)에 이어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규정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줄 때 이자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출 22:25). 사람은 누구나 빈 손으로 태어난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본래 자기 재산이 없이 남의 도움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란 말이 있지 않은가? 이웃의 도움으로 재산을 모았으니 이웃이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요 하늘의 가르침이다. 우리의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부수적인 규정이 소개된다. 재판은 공정해야 하며 이스라엘은 추수한 후에 제물을 바쳐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출 23:1-19). 이후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주의할 것이 있다.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 것이며 그들과 함께 범죄하지 말아야 한다(출 23:20-33).


출애굽 하여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나안의 상황을 어떻게 잘 알 수 있는가? 광야생활을 규정한 법들이 지극히 정교하다는 이유를 들어 학자들은 출애굽기에 소개된 법률이 후대 상황을 반영한다고 믿고 있다. 특히 추수한 후에 지키는 맥추절과 수장절은 이미 가나안의 농경생활을 전제하고 있다(출 23:14-17). 모세에 의해 인도된 광야생활은 당시 생활을 기억하는 후손에 의해 회고적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리라. 기록 당시의 필요법을 모세의 말씀과 하나님의 계명으로 간주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 특유의 저술방법이었다. 신성한 공동체의 모든 법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요 모세는 하나님의 종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오경은 창세기를 제외하면 나머지 책에서 일관성 없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출애굽기 24장은 모세가 계명이 적힌 돌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위해 사십 주야를 시내산에서 머물게 된 사실을 보도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과 증거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예배와 성막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소개된다(출 25-27장). 이어 제사장의 옷과 그들이 지켜야 할 규정 등이 설명되다가(출 28-31장), 32장에 이르러 모세가 시내산에 들어간 것을 이야기한다. 왜 이야기를 하다 말고 다른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일까? 모세가 율법이 적힌 돌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다고 보도하는 성서기자는 독자들을 위해 증거궤에 대한 설명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율법이 적힌 돌판을 보관했던 증거궤를 설명하다가 성막과 제사장에 대한 이야기까지 부연하고 있다. 그러다가 32장에 이르러 시내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오경의 모습이다. 창세기의 태고사도 그렇지만 특히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은 여러 전승이 한데 어울려 복잡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일관성 있는 주제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이야기의 단절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결국 오경은 오랜 세월동안 축적된 여러 이야기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재편집된 것임이 확실하다.


9. 금송아지 숭배사건

우리가 잘 아는 금송아지 사건이 출애굽기 32장에 소개된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지도자를 잃은 백성은 다시 불안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론을 불러 금송아지 상을 만들고 그것을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낸 신(神)'으로 경배한다.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한 우상숭배사건으로 볼 수는 없다.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하나님께 선택된 제사장 아론이 왜 금송아지를 만들었는가? 아론은 금송아지를 가리켜 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한 하나님'이라고 소개했는가?(출 32:8) 금송아지를 만든 아론은 과연 우상숭배자였을까? 그렇다면 아론은 야훼를 믿지 않았던 혹은 가짜 제사장이었단 말인가? 백성들은 왜 아론더러 금송아지를 만들도록 했는가? 이런 여러 가지 물음에 응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종교·인류학적인 고찰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형상(形像)이 없는 종교는 거의 없다. 이집트 바벨론 가나안 할 것 없이 고대인들은 신을 섬길 때 그 신의 형상을 지녔다. 그 형상은 성전에 보존되고 사람들에 의해 경배된다. 어떤 이들은 형상이 있는 종교를 우상을 숭배하는 저급한 종교로 간주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 그 형상은 생명력이 없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신의 형상은 일종의 상징(symbol)이다. 상징은 그 안에 본질(本質)을 내포한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상징 안에 본질이 존재하지 않고 빈 껍데기만 있다고 한다면 누가 그 앞에 절을 할 것이며 그것을 신으로 여길 것인가? 그러기에 상징은 생명력이 없는 단순한 기호(記號)와는 구별된다. 길거리의 표지판과도 같은 기호는 그 안에 실재하는 존재가 없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는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상(神像)은 그 안에 신의 본질이 담겨짐으로써 숭배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중세 때 성상숭배(聖像崇拜)의 경우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같다. 예수님의 그림에도 그의 영이 살아 계신다고 믿는 것이 상징의 힘이다. 이런 의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기를 부탁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초월적인 신성을 극대화하지만 단순한 민중들에게는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 불안은 신의 형상화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기독교인이 염려하는 우상숭배로까지 이어진다.


모세가 떠나 있는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안했다. 그 동안 하나님을 대리했던 모세를 볼 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면한 것과 같은 체험을 했다. 그런데 신적인 힘을 소유한 모세가 안보이자 그들은 보이는 신(神)을 찾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이 송아지 형상이라는데 있다. 이 송아지 형상은 이집트보다는 가나안에서 바알의 형상으로 더 숭배를 받았다. 바알은 가나안 사람에게 널리 섬겨졌던 풍요의 신이었다. 이 풍요의 신은 민중에게 거의 절대적이었다. 야훼를 섬기면서도 농사철에는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때론 바알과 야훼를 구별하지 않고 동시에 섬기기도 했다. 이를 본 모세는 바알의 상징인 송아지를 만드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관련된 자들을 처형한다.


10. 중재자 모세

하나님께 속죄하기 위해 모세는 간청한다. "야훼여, 이 백성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시려거든 내 이름을 생명록에서 지워버리소서"(출 32:31-32). 우리는 여기서 모세의 위대함을 본다. 죄 많은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구원받지 않아도 좋다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본다. 이것이 곧 예수의 마음이다. 인류의 죄악을 대속하고 사람답게 사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예시하기 위해 악의 제물이 된 예수이다.
백성들의 죄 때문에 돌판을 깨버린 모세는 야훼로부터 새로운 돌판을 받게 되고(출 34:1-9), 이어 성막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전개된다(출 36:8-40:38). 성막(聖幕)은 광야시절에 사용되었던 일종의 이동식 성전이다. 성막은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자 구원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 성막이 후에 예루살렘 성전의 원형이 된다. 모세만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었으며, 하나님은 성막 위에서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현현 하신다(출 40:38). 이렇게 해서 출애굽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하나님이 거하는 성막에 대한 기사로 종결하는 출애굽기는 성막에서의 제사규정을 소개하는 레위기로 이어진다.

맺음말

출애굽기의 정신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주권과 성막에 나타난 신의 현현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계약 사건으로 영원한 계약을 맺는다. 이 계약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축복의 약속을 실현한 것이며, 다윗과 맺은 언약에서 구체화된다. 이 정신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탱하는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된다. 동시에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이루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야훼신앙을 중심으로 모인 의식 있는 집단이 되었으며 가나안에 안주할 저력을 갖게 된다. 이 점에서 볼 때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을 낳았으며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유다관계를 분명하게 해 준 사건이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