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스크랩 전쟁들(wars)과 전쟁들의 소문들 (마가복음 13장 7절)

열려라 에바다 2024. 12. 2. 15:05
전쟁들(wars)과 전쟁들의 소문들 (마가복음 13장 7절)
 
백대영추천 0조회 1724.12.02 09:29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크라이나”라는 국호는 고대 동슬라브어 표현에서 나왔습니다. “우크라이나”에는 “변방의 지대”, “변방의 땅”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동슬라브어로 국가, 땅, 영토, 변방, 끝자락 등의 의미를 의미합니다.1)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튀르크 민족들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주요 도시로는 키이우, 드니프로, 하르키우, 오데사 등이 있습니다.2)
18세기 후반에 폴란드 분할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우크라이나의 중부와 동부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게 되고, 서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게 되었습니다.3)


1. 우리는 전쟁들과 전쟁들의 소문들을 들은 때를 삽니다.

마카복음 13장 7절에 “너희가 전쟁들과 전쟁들(wars)의 소문(rumor)들을 들은 때에 너희는 놀라게 함을 받지 않도록 하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국 개역 성경에 “난리”라고 번역된 말은 “전쟁들(wars)”을 뜻하는데 복수형 명사가 한국어로 번역된 때는 자주 단수형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하지만 원어로는 복수형인 까닭에 저는 “전쟁들”이라고 직역하였습니다. 소문도 복수형인 까닭에 같은 방식으로 “소문들”이라고 직역하였습니다.
19세기까지 대다수의 우크라이나 영토가 러시아 제국에 통합되었으며 나머지 부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제 아래 있었습니다.4)
법적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고 대부분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지만, 대부분 동부 인구는 러시아어 사용자이기도 합니다.5)
1914년에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화에 휘말렸고 우크라이나 서부는 오스트리아에, 그 동부는 러시아에 속해 있은 까닭에 우크라이나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동서가 적이 되어 싸웠습니다.6)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중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이 발생하면서 독일에 유리하게 국경선을 내준 후 휴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역시 패배하면서 공중분해 되었습니다.7)
러시아가 휘청거리면서 우크라이나에도 독립 국가가 들어설 뻔했는데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으로 각각 분리독립을 이루었습니다.8)
1922년에 다시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소련의 영토가 되었습니다.9)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의 한 구성국이 되는데, 이 과정은 복잡합니다.10)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같은 나라로 생각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러시아 일부이자 변방의 하나쯤으로 생각하였으며 현재의 블라디미르 푸틴도 마찬가지입니다.11)
이상으로 본다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복잡하며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도 서쪽과 동쪽은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닌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나라에 종속되기도 하고 통일되기도 한 것입니다.
소련 치세에서 우크라이나 탄압은 스탈린 치하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특히 스탈린의 집단농장화 정책 때문에 소련 전역에서 아사자가 생겼고, 그 피해는 특히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 집중되었습니다. 이것은 현대 우크라이나의 반러감정의 직접적 연원이기도 합니다. 가장 반발이 심했던 지역이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이었습니다. 기근의 피해가 바로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 유독 집중되었으므로 소련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을 굶겨 죽인 것으로 의심할 만하였습니다. 동부 우크라이나는 제정러시아 시절부터 석탄의 주산지였습니다. 스탈린의 무자비한 공업화 몰방으로 엄청나게 산업화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지역에 러시아인 인력 다수가 이주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니키타 흐루쇼프도 이주한 광부였습니다.12)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소련은 폴란드를 침공해 우크라이나 서부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일부분으로 만들었습니다.13)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독소 불가침조약에 따른 폴란드 분할 당시에, 소련이 폴란드에 속하던 서우크라이나 지역을 합병하였습니다. 서우크라이나가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은 계획적 대량학살(genocide)을 벌였습니다.14)
소련은 1939년 병탄한 폴란드령 서부 우크라이나 영토를 확정하였고, 대신 폴란드는 독일의 동부 영토를 할양받았습니다.15)
우크라이나인들은 처음에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여겨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우크라이나인 민간인들을 죽이거나 강제로 추방하였으며 그러므로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의 지배가 포악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갈리치아에서 폴란드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이 서로 학살하였습니다. 독일과 전투에 소련 사망자 중 270만 명이 우크라이나계였습니다. 우크라이나 민족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매우 컸습니다.16)
서부의 우크라이나인들은 1943년 봄부터 600년가량 함께 살아오던 갈리치아 일대에서 폴란드인들을 상대로 대량학살을 벌였고 서우크라이나 지역의 폴란드인이 깡그리 현 폴란드 영내로 옮기게 되며 결과적으로 서부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전체 국토에서도 우크라이나인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되었습니다. 물론 서부인들은 소련의 지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17)
서부 우크라이나에 살던 사람들은 원래부터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인데 폴란드를 벗어났으나 소련 지배를 받는 것도 좋지는 아니하였습니다.18)
상류층은 폴란드인이, 의사처럼 전문직은 유대인들이 모두 해 먹었고 현지 동슬라브계 우크라이나인들은 주로 농노 취급을 당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서부 우크라이나에 살던 사람들은 반폴란드 성향이 강합니다.19)
1945년 우크라이나 국민위원회가 독립을 얻지만, 명목상의 독립이고,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은 소련에 격파 분쇄되고 다시 점령되고 맙니다.20)
폴란드인들은 2차대전 이후 대부분 현재의 폴란드 영역으로 쫓겨났고 게다가 우크라이나의 폴란드계 자체가 가장 우크라이나에 동화한 집단입니다. 이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완전히 소련 영토로 들어왔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들에게 러시아는 철저하게 외부세력일 뿐입니다.21)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확장되어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는 땅을 대부분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1954년에는 크림반도가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령으로 넘어갔습니다. 니키타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우애를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할양한 것입니다.22)
몰도바 남쪽의 해안지대는 이 당시에 우크라이나의 영역이 된 것이고,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받았으며 크림반도의 인구는 110만 명을 차지합니다.23)
이렇게 소련에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로 이관했던 이유는 단순한데 우크라이나 주변의 땅이었으니 행정 편의상 관리를 쉽게 하려고 주었고, 우크라이나 관할구역으로 넘겨도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고 생각하였으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나서는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24)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와 러시아에 맞서고 탄압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지역마다 매우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서부 우크라이나와 동부 우크라이나는 그 민족과 언어가 다릅니다. 서부 지방은 러시아에 이질감이 심한 반러시아 성향을 지니고 있지만, 동부 일부 지방은 러시아어를 많이 쓰고 있고 친러 성향인 편입니다.25)
크림반도만이 유일하게 러시아계가 50%를 넘는 지역(58%)인 것이며, 나머지 지역은 우크라이나계가 다수입니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시 하리코프도 우크라이나계가 48%고 러시아계가 40%로 반반입니다.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일부는 자신을 러시아인으로 생각합니다.26)
독일 및 폴란드와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친하게 지내는 편이지만,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서부를 잃어버린 자기 땅으로 여기고 있는 까닭에,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를 견제하고 있습니다. 폴란드는 소련 지배에서 벗어난 우크라이나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였고 여기는 동부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보다 갈등 여지가 적은 편입니다. 서우크라이나 지방에 거주하던 폴란드인들이 독일 쪽으로 이주하여서 크림반도처럼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킬만한 이유도 없으며 민족 구성을 이유로 이웃 국가가 침공할만한 여지도 없습니다.27)
벨라루스는 동족이면서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였고 친러인 까닭에 벨라루스는 친러 성향이니 우크라이나와 사이가 나쁩니다.28)
1980년대 후반에 소련이 개혁개방에 나섰습니다. 그러자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련의 경기침체가 지속할수록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세력 세는 켜졌고 우크라이나 최고 소비에트 선거에 의석을 확보하며 약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 소련 해체는 서부와 키이우에서만 지지를 받았을 뿐, 동부에서는 우크라이나 독립에 대해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국민투표 때까지도 소련에 남자는 의견이 더욱 지지를 보였습니다.29)
옐친이 대통령이 되어 중앙정부와 따로 놀려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도 더 독자적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점점 더 지지받게 됩니다. 그러던 도중 8월 쿠데타가 벌어졌습니다. 중앙정부가 무력화되어 독립을 막을 힘이 없고 경기침체는 지속하여 독립의 목소리는 높아지게 되고 동부 지역에도 서방 지원을 받으려면 독립이 낫다는 여론이 대세가 되어 우크라이나 독립투표에서 당초에 독립반대가 높을 것이라고 예상되었던 동부에서도 독립찬성이 많은 수를 얻었고 크림반도 정도만이 독립 찬반에 접전을 기록한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독립투표는 고르바초프의 재기할 발판을 완전히 제거하였습니다.30)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란 이름의 구성국이 되었다가 1991년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선언해 소련의 해체를 촉진한 것입니다.31)
1994년에 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도네츠크 지역 광부의 파업이 터졌고 외환 위기 기간 후 우크라이나의 경제성장률이 고공 행진하기 시작한 후 우크라이나의 경제난을 종식하였습니다.32)
그 이후 야누코비치가 동부 및 러시아계 주민 대상으로 지지세를 늘려 정권 재창출이 가능할 정도의 지지세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렌지 혁명을 통하여 유셴코가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010년 대선 때는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습니다.33)
2010년대 이후 우크라이나의 안보는 점점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2013년을 기점으로 외환 위기가 닥쳐와 경제가 악화할 조짐을 보이자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들이려고 했다가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야누코비치는 그간의 업보로 2014년에 탄핵으로 축출되었습니다. 동부에서는 친서방 정치인들을 믿을 수 없다는 여론이 여전히 다수를 차지했고 거기에 더해서 친서방 세력들이 동부를 자극하는 발언까지 보도되게 됩니다.34)
크림반도의 크림 자치 공화국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러시아로의 편입을 추진하였습니다. 2014년 3월 18일 합병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35)
유럽연합과 미국 등 서방 진영은 이 합병을 불법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서방 진영은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크림반도의 러시아 합병을 인정하지 않으며, 돈바스 지역을 비롯한 동부 지방에 군사적 행동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현대에도 미국과 유럽연합은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을 경계하고 있습니다.36)
크림반도는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하여서 다시 러시아에 편입되었으며 돈바스에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는데, 이른바 돈바스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포로셴코 정권은 친서방, EU 및 나토 가입을 지향한 정책을 추진했고 젤렌스키 정권도 같은 정책을 이어가자 러시아가 반발하였습니다. 러시아는 결국 2022년 2월 24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습니다.37)

 

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