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사실인가?
고서 검증법에 의한 검증
예수 믿는 자들의 믿음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정말 믿을만한 책인가요?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 성경은2,000여 년 전에 고대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해서 사람들이 꾸며 쓴 '역사 소설' 내지는 '종교 경전'이 아닌가?
- 다른 종교에도 경전이 있고, 나름대로의 신화적이고 초자연적인 일들이 기술되어 있는데 왜 그것들은 단순히 신화일 뿐이고, 성경만이 실제 사실을 기록한 역사서라고 주장하는가?
- 성경은 단순히 종교 서적이 아니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성경에 기록된 사실과 내용은 과연 역사적, 고고학적으로 타당한가?
성경에는 수많은 기적,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가득합니다.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이런 이야기들을 대체 무슨 근거로 믿어야 하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이제 왜 성경이 신화가 아닌 역사적인 사건이고,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인가에 대해 객관적인 자료로 증명하려고 합니다.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됐다는 단군신화와 같은 고대설화는 왜 믿을 수 없고, 왜 성경만 믿을 수 있는 책인지가 설명될 것입니다.
일단 성경이 어떤 책인지에 대해 몇가지 사실을 말해 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은 BC 1500년부터 AD 100년까지 약 1,600년 동안 40여명에 의해 기록되고, 총 66권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둘째,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주께서 가라사대”, “주의 말씀이 임하여 가라사대” 라는 표현이 구약 성경에만 3,000번 이상 언급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친히 말씀하시거나 영감을 주셔서 기록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성경은 역사의 기록입니다. 성경의 대부분은 이스라엘과 유대민족의 왕과 역사를 지극히 상세하게 다루는 전형적인 역사서의 서술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고고학적,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입증된 실존 인물과 유물, 기타 고대 사료를 통해, 성경에 나온 사건들이 당시의 시대적인 역사와 완벽하게 부합한다는 것이 이미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럼 이 사실을 다음의 4가지 기준에 의해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1. 성경이라는 문서의 신뢰성
- 성경이라는 고대 문서를 신뢰할만한 객관적 근거가 무엇인가?
- 성경은 인위적으로 조작되거나 역사적 사실을 다르게 기록할 가능성은 없는가?
2. 다른 문헌에 의한 증거
-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증거하는 다른 사료가 존재하는가?
- 다른 사료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 성경의 내용과 부합하는가?
3. 고고학적 증거
- 성경에 나오는 사건, 지명, 유적에 관련된 실제적인 고고학적 증거가 있는가?
-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역사적 사실들은 성경의 내용을 지지하는가?
4. 성경 내용의 신뢰성
- 성경 내용에 자체적인 모순이나 오류는 없는가?
-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가?
-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었나?
1. 성경의 본질과 역사성에 대한 증거
2,000여년 전에 쓰인 고대 문서의 사실성과 진위 여부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좀 더 일반적으로 질문한다면, 고대 문서나 어떤 역사 기록에 대한 역사성과 진위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우리가 한일 합방을 겪어보지 않았으면서 1910년에 한일 합방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수많은 역사적 기록물과 증거물이 남아 있고, 또 비록 많지는 않지만 일제 강점기를 몸소 겪어내고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역사의 산 증인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 기록과 증언만 확인된다면 과연 모두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역사 기록이 거짓이거나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증인이 거짓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역사 기록이나 증언의 사실성 및 진실성을 합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고고학이나 역사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과 기준을 적용합니다. 알고 보면 대단히 상식적인 것들입니다.
첫째는, 기록 시기입니다.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한 시점과 그 사건이 기록된 시점 사이의 시간 간격이 짧으면 짧을수록 신뢰도가 높습니다. 기록시점이 사건과 가까울수록 실제 사건에 대한 기억이 왜곡될 가능성이 낮고, 설령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조작을 했더라도 그 사건을 실제로 겪은 목격자들에 의한 비판을 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죠.
둘째는, 기록물이나 사본의 양입니다.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은 역사적으로 항상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짓 주장을 하는 사료의 양은 사실적으로 기술된 사료의 양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일반적입니다. 거짓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으므로 오래 살아남기 힘든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거나 이슈가 될만한 굵직한 이벤트를 기록한 문서일수록 기록물의 양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의 종류가 많을수록 자료의 신뢰도가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건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취하는 세력에서도 동일하게 인정하는 경우, 신뢰도는 훨씬 더 높아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6.25는 남한에서는 남침이라고 주장하고, 북한에서는 북침이라고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지만, 양측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1950년에 일어났다는 점 자체는 동일하게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즉 6.25라는 사건 자체가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임을 강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건의 발생시기와 기록연대의 간격, 기록물 및 사본의 양, 동일한 사건을 보고하는 다양한 기록의 존재 등의 요소가, 고대 문서나 역사적인 사건의 진실성을 가리는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기준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이 모든 테스트를 통과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은 이 모든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했음이 '문서학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그것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말입니다.
이제 '고서 검증법'을 이용해서 성경을 검증해 보겠습니다.
고서 검증법이란 역사적 사료의 객관성과 진실성을 규명하기 위해서 고고학에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원본이 없는 경우, 현재 갖고 있는 사본들끼리 서로 비교해 보아 원본과의 정확성 정도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 방법에 의하면 사본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원본으로부터 사본이 만들어진 시간적 차이가 짧으면 짧을수록, 또 사본과 사본 사이에 오류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것은 원본과 가까운 사본으로 인정됩니다.
3,500년 전에 최초로 기록된 구약성경, 그리고 2,000년 전에 최초로 기록된 신약성경의 원본은 지금까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우리도 성경의 신뢰도를 알아보는 객관적인 방법으로 이 고서 검증법을 이용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경은 이 모든 조건들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면서, 현존하는 그 어떤 고대 문서보다도 정확도와 신뢰도가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의 경우, 원어인 헬라어 (전부 또는 일부)가 5,500여 개, 라틴어 등의 번역본이 18,000여 개로 모두 약 25,000 개의 사본이 현존합니다.
이제 신약 성경과 호머의 일리어드를 대조해 보겠습니다. 일리어드는 사본의 수와 정확도에 있어서 모든 고대 문서 중 성경 다음으로 고고학적으로 신뢰도가 높습니다. 또 성경처럼 일리어드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암기되고 또 비문에 적히기도 하며 후세 사람들에 의해 지금까지 전해 내려왔습니다.
이 두 책을 고서 검증법에 따라 서로 비교하여 만든 표입니다. 신약 성경은 대조 고서인 일리어드에 비해 사본의 수에서 40여 배, 시간적인 차이에서 20 배, 그리고 오류의 정도는 10 배 정도 더 신뢰도가 높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일리어드보다 무려 약 8,000 배 이상 신뢰도가 높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본간 오류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책을 베껴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실수인데, 성경에서 발견된 오류는 단순히 철자상의 실수나 오기, 관사나 정관사 같이 본질적인 내용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소한 것들 뿐입니다.
내용 | 신약성경 | 일리어드 |
사본의 수 | 24,643 | 643 |
원본기록연대 | A.D. 40-100 | B.C. 900 |
최초사본연대 | A.D. 125 | B.C. 400 |
원본 - 최초 사본 시간 차이 | 25년 | 500년 |
사본간 오류 | 0.5% | 5% |
다음은 고서 검증법에 따라서 다른 고서들과 신약성경, 구약성경을 비교 대조해본 표입니다….
"성경의 증거는 다른 어떤 고서의 증거보다 월등하게 많아 그 신빙성을 의심할 수 없다"는 브루스(F. F. Bruce)의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자 (책이름) | 원문연대 | 최초사본 | 간격 | 사본수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
B.C. 340 | A.D. 1100 | 1,450년 | 5 |
줄리어스 시저 (갈리아 전쟁기) |
B.C. 50 | A.D.900 | 950년 | 10 |
헤로도투스(역사) | B.C. 435 | A.D. 900 | 1.350년 | 8 |
호머(일리어드) | B.C. 900 | B.C. 400 | 500년 | 643 |
투키티데스(역사) | B.C. 400 | A.D. 900 | 1,300년 | 8 |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B.C. 360 | A.D. 800 | 1,150년 | 15 |
구약성경 | B.C. 1,400 – 400 | B.C 125 | 200-400년 | 5,000 + |
신약성경 | A.D 125 | A.D 125 | 50년 | 25,000 + |
이제 구약 성경을 살펴 보겠습니다. 구약 성경의 정확도에 대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아왔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이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은 BC 400년 경인데, 가장 오래된 번역 사본인 맛소라 사본은 AD 900년경에 기록된 것이므로 무려 1,300년이라는 긴 시간적인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작 가능성이나 사본의 정확도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의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더우기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사본은 구약이 완성된 이후 1,400년이나 지난 AD 1,008년의 바빌로니쿠스 서판 뿐이어서, 그 때까지 성경학자들은 바빌로니아의 점토판이나 이집트의 파피루스를 유일한 자료로 활용했던 실정이었습니다.
그런데 1947년 베두인 목동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두루마리 성경으로 인해서 구약 성경의 정확성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금세기 최고의 발견으로 일컬어지며 세계의 관심을 모았던 이 사해사본은, 발굴을 계속한 결과 에스더서의 일부를 제외한 구약 성경 전체를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해사본은 BC 125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BC 400년에 기록되었을 원본과의 차이를 275년으로 좁혀 놓았습니다. 더구나 사해 사본과 1,000여 년의 간격을 두고 만들어진 맛소라 사본과 비교해 보았더니, 이 둘은 서로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이로써 구약 성경의 원본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었음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처럼 고서 검증법에서 기준으로 삼는 사본의 수, 사본간의 정확성, 원본과 최초 사본간의 저작 시간 간격 측면에서 볼 때, 성경은 지구상에 현존하는 모든 고대 문서 중 정확성이 압도적으로 으뜸임이 객관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것은 '신학자'들이 우겨대는 것이 아니라,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예수에 대한 검증
이제 성경 속의 중심 인물인 예수가 실재 인물인지, 또한 그에 대한 성경의 묘사가 사실인지를 증명해 보겠습니다.
우선 고대 역사 기록들은 거의 모두가 구전 전승 기간을 거친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 인물의 가르침은 일정한 기간 동안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후대 어느 시점에 문서로 기록된다는 것이지요.
이는 어떤 역사적 인물에 관한 기록이 생존 당시에는 굳이 기록될 필요가 없고 그가 역사적으로 평가받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며, 고대에는 현재처럼 자료의 기록이 수월치 않았던 것을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기간이 짧을수록 그 내용이 변질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과 고대의 다른 인물들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단군 신화는 BC 2333년에 나라를 세운 단군의 이야기가 구전되어 AD 1281년에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에 기록되기까지 최소한 2000∼3000년 이상의 구전 전승 기간을 거쳤습니다. 따라서 역사적 신뢰성이 매우 낮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는 어떨까요? BC 6세기에 살았던 부처의 생애는 대부분 AD 1세기에 기록되었습니다. 부처의 가르침과 생애가 제자들에 의해서 구전되다가 문자로 기록된 것은 부처가 죽은 지 최소한 600년 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하마드는 AD 632년까지 생존하였는데, 그의 생애를 기록한 무하마드의 전기는 AD 767년에 쓰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전기가 그의 사후 약 135년이 지나서야 문서로 기록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공자의 생애는 어떨까요? 공자의 생애에 관한 유일한 책은 사마천의 ‘공자세가’인데, 공자의 생애는 공자가 죽은 지 약 400년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도올 김용옥 교수는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실로 간주될 수 없다. 400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편년체로 세밀하게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헬라 제국을 이룩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생애는 그가 죽은지 약 400년 후에 아리안과 플루타르크에 의해서 쓰였습니다.
예수님과 동시대의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사후 약 80년에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에 의해 기록되었고, 디오 카시우스에 의해서는 사후 190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로마 황제와는 도저히 비교될 수 없는 이스라엘의 무명 청년, 예수님에 관한 것은 언제 기록되었을까요?
사복음서는 예수님이 죽고 부활한 후 약 30년에서 60년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죽음 후 약 18년에서 35년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신약 성경 기록은 예수님의 죽음 후 약 18년에서 60년 사이에 문서로 완성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관한 역사 기록은 가장 짧은 구전 전승 기간을 거쳤습니다. 이 말은 즉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살았던 고대 인물 중에서 가장 확실한 역사적 신뢰성을 갖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른 고대 인물들과는 달리 예수님에 관한 기록 중 일부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본 500명 이상의 목격자 대부분이 살아있을 때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누군가가 예수님의 역사성을 부인한다면 그는 반드시 다른 고대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신뢰성도 모두 다 부인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의 사실성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보다 훨씬 높습니다.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의 역사적 실존과 행적은 믿으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탁월한 신뢰성을 가진 예수님의 실존과 행적을 믿지 않으려는 것은 억측이고 편견이며 역사적 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책이고, 특별히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책인데, 만일 누군가가 조작하거나 거짓으로 기록할 의도가 있었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첫째, 우선 사건을 목격한 최초 기록자가 거짓으로 기록했다면, 당시에 진실을 알고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외면을 당할 것이므로 그 문서가 많이 유포되거나 전승될 가능성이 낮습니다.
둘째, 사건 발생 시점의 조작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사건이 발생한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조작하려 한다면, 원본과 사본간의 시간 간격이 크게 나타날 것입니다.
셋째, 조작이 되었다면 핵심적인 내용에서 사본들 간 많은 불일치가 발견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조작하거나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면, 적어도 이 3가지 테스트 중 어느 하나에서라도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모든 테스트를 완벽하게 통과했습니다. 이는 곧 성경이 조작되어 역사를 왜곡했을 가능성이, 문서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성경은 꾸며내거나 조작된 책이고, 예수는 허구거나 과장된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므로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것은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주장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역사적으로 분명히 믿을만한 문서'이며, 예수는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다음은, 성경 이외의 다른 역사 문서나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사실들이 성경의 사실을 확증하는지 여부를 알아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성경의 내용에 역사적인 불일치가 있는지, 성경에 나온 수많은 예언들 중에 성취되지 않은 것들이 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이런 단계들을 다 통과한다면, 성경은 '정직한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억지로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믿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과연 다음의 테스트들도 다 통과할 수 있는지, 다음 편에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고고학적 증거
앞서, 성경은 어떤 고대 문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신뢰할만한 문서라는 것을 고서 검증법을 통해서 확인했으며, 성경의 핵심인 예수와 관련된 기록도 역사적인 실제 사건이라는 것을 다른 자료들을 통해서 증거했다.
이제 성경의 신뢰도를 확인하는 세번째 방법으로,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이 고고학적인 발견이나 유물로 확인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비평가들은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이야기가 한낱 신화나 전설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가 계속될수록, 성경의 인물, 나라, 도시, 사건들이 실재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이제 몇가지 사례들을 살펴보겠다.
1. 인류 초기의 문명
진화론자들은 초기 인류가 동물처럼 미개한 원시인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초기 인류는 매우 발달된 문명을 갖고 있었다.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은 농사와 목축을 했고, 가인은 도시를 건설했으며, 아담의 7대손인 두발가인은 동과 철을 사용했고, 노아 때에는 대규모의 방주를 만들기도 했다.
“가인이 성을 쌓고” (창 4:17)
“그 (두발가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창 4:22)
고고학자들은 초기 인류가 발달된 문명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성경에 동의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집트와 수메르 등 경이로운 문명의 갑자스런 출현은, 그들이 노아와 그의 자손들로부터 홍수 이전의 기술들을 전수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만일 전 세계적인 홍수에서 파괴되어 버린 문명이 이집트와 수메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가장 단단한 화강암으로 된 피라미드, 스핑크스, 조각품, 조상(彫像)들, 그리고 글을 쓰는 능력, 고도로 조직적인 정부, 모든 종류의 기능과 기술들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그 근거를 오파츠(OOPARTS, Out Of Place ARTifactS) 에 관한 연구에서 찾는다. 오파츠는 고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 있는 유물, 또는 시대와 일치하지 않는 인공물들을 말한다.
고고학자 르네 누어버겐은 이렇게 말한다.
“많은 경우 오파츠의 기술적 정교성은 그들의 유물들이 발견되어지는 고대인들의 발명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인류의 문명이 원시적인 시작에서부터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하는 정통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지금 매우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 반면 초기 조상들이 놀라운 문명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는 날로 커져가고 있다. 오파츠, 고고학, 지질학, 고생물학 등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2. 바벨탑
니므롯의 바벨탑
성경에 의하면, 니므롯은 수메르 지역에 최초로 통일제국을 만든 사람이다. 니므롯은 통일제국을 만든 뒤 여러 이질적인 종족들을 통합해 다스리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하면서 높은 탑을 쌓았다. 탑의 건축에는 자신을 신격화해서 숭배받고자하는 목적이 있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의 나라는 사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창 10:8, 10)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성경 이외에 바벨론 전승에서도 바벨탑은 처음에 니므롯이 축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랍 사람들은 오늘날 까지도 이 탑이 있는 지역을 Birs Nimrud, 즉 '니므롯의 땅'이라고 부른다.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이 니므롯 지역을 발굴한 결과 수많은 장식들로 뒤덮힌 찬란한 고대도시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니므롯이 죽자 그의 아내 세미라미스는 니므롯이 마르둑 신으로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사람들은 니므롯이 변신했다는 마르둑신을 섬기기 시작했다. 마르둑 신은 그 지역에서 숭배받았던 많은 신들 중에서 으뜸신이다.
수메르 시대의 풍요로운 도시국가들은 마르둑 등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구라트를 만들었다. 바빌론, 우르크, 우르와 같은 주요 도시들에서 30여개의 거대한 지구라트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수백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별히 바벨론 지역에 세워진 지구라트는 바벨탑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니므롯이 바벨탑을 세우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들을 뿔뿔히 흩으심으로 완성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기록한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쌓기를 그쳤더라” (창 11:8)
칼데아인(갈대아인)의 비문에 기록된 내용도 성경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 사원의 건축은 신들을 화나게 했다. 한 밤에 신들은 지어진 것을 무너뜨려 버렸다. 신들은 그들은 멀리로 흩어버렸고, 그들의 말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진보로 저지되었다.”
유적에 의하면 바벨탑의 건축에는 벽돌과 역청이 사용되었는데 이것도 성경 내용과 일치한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11:3)
실제로 팔레스타인의 지역 특성 상, 그곳에서는 건축 시에 흔히 사용되는 돌들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돌 대신에 불에 구워진 벽돌이 사용되어 왔다.
느부살네살의 바벨탑
이후에 바벨탑의 재건이 시도됐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며, 미완성의 층탑은 오랫동안 고대 세계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600년쯤 지나서야 바벨탑이 다시 세워진다. 고 바벨론의 초대왕 니므롯이 미완성한 것을, 신 바벨론의 네브카드네자르 왕이 완성한 것이다.
BC 625년 나보폴라사르가 앗시리아를 패망시키고 강대한 바벨론 제국을 이룩하며 신바벨론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의 아들 네브카드네자르 2세(BC 604~ 562년 재위)는 당시 중동, 소아시아, 이집트, 지중해 일대에서 가장 세력이 강대했던 제국으로 현재 이라크를 중심으로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다.
네브카드네자르는 성경의 느부갓네살과 동일인으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과 역사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BC 586년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 수만명을 포로로 잡아 수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그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저가 여호와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으니..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를 사로잡아 가매” (왕하 24:10, 13-14)
그는 자신을 신으로 여겨서 거대한 금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게 하고, 전쟁포로들을 동원해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불리는 바벨탑, 공중 정원, 성벽, 이슈타르 문 등을 축조했다.
느부갓네살이 재건한 바벨탑에는 ‘에테메난키’라는 고유이름이 붙여있는데 '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BC 458년 바빌론을 방문한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 바벨탑을 보고 이렇게 묘사한다.
”네모반듯한 밑그림에 탑이 서 있는데, 탑 위에 탑이 올라붙고 그 위에 또 다른 탑이 올라붙는 식으로 모두 일곱 개의 탑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 맨 꼭대기 탑 위에는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탑은 모두 벽돌을 구워서 쌓은 것이고, 꼭대기에 있는 신전의 지붕에는 파란 유약을 발라 구운 기와와 황금을 씌웠다. 멀리서 도시로 들어서는 나그네의 눈을 눈부시게 했다.”
네브카드네자르는 이런 헌시를 지어 바벨탑에 새겼다.
“내가 발견하고 건립한 영원한 집인 탑이여
나는 은,금, 다른 금속과 돌, 에머럴드 벽돌, 전나무, 소나무로써 그 외관을 완성시켰다. 땅의 기초인 그 집을 나는 바빌론의 가장 고대적인 기념비로 지어 끝을 맺었다. 나는 구리로 싸인 벽돌로 된 끝 부문을 높이 찬양한다. 이 건물은 이 땅의 일곱 빛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볼쉬파, 가장 기릴 만한 것이여 고대 왕이 그것을 세웠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고대에 사람들은 지시하는 그들의 말 표현이 없어서 완성을 포기해야 했다. 그 때 이후로 지진과 천둥으로 태양에 말린 진흙이 다 분쇄되었다. 벽돌은 쪼개지고 내부 흙은 무더기로 흩어졌다.
메로다취, 위대한 신이 나의 마음을 동요 시켜 이 건물을 복원하게 하였다.나는 위치를 바꾸지 않았고 기초를 옮기지도 않았다. 축복된 달에 상서로운 날에 나는 원래 벽돌 뭉치와 타버린 벽돌 주위에 주랑을 세웠다.
나는 둥근 형으로 개조해서 키틸 주랑에 나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나는 끝나도록 손을 쓸 것이고 탑 끝을 찬양할 것이다. 고대에 그랬던 것 처럼 나도 그 완성을 찬양할 것이다.”
(윌리암 로푸터스의 저서 Travels and Researches in Chaldea and Sinai 에서. 호퍼트 교수 번역)
여기서 이교도 왕인 느부갓네살은 "이전의 왕이 이것을 지었으나 그는 그 끝을 완성하지 못했다"라며 성경과 일치하는 내용을 언급한다.
그는 또 바벨탑을 볼쉬파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언어탑’을 의미한다. 그 탑이 완성되지 못했던 이유를 "고대시대에 사람들은 지시하는 그들의 말 표현이 없어서 완성을 포기했다”라고 밝혔는데, 이것도 성경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는 바벨탑을 다시 세우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메로다취, 즉 마르둑신이 나에게 에테메난키의 기초를 지구 중심까지 닿도록 단단하게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래야만 하늘까지 오를 수 있는 건물을 만들 수 있다.”
높이 90m의 7층 탑에는 8천5백만개의 벽돌이 사용되었는데, 유적에서 발견된 벽돌 한장 한장에는 놀랍게도 그들이 섬기는 신 “마르둑”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 이라크 지역에서 이 벽돌들로 지어진 지구라트를 볼 수 있다. 현대의 네브카드네자르라고 자칭한 후세인이 관광목적으로 지구라트를 복원한 것이다.
이 지구라트에는 신을 섬기기 위한 제단이 있었다. 일반인은 1단까지만 접근이 허용되고, 맨 위의 신전은 신관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엄격한 종교의식으로 인신제사가 거행되곤 했다.
수많은 지원자 중에서 엄선된 한쌍의 남녀는 지구라트 위의 신전 앞에서 엄숙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식이 끝나면 부부와 수행원과 가족들은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는 두개의 관이 있는데 이곳에서 신랑과 신부는 성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그들이 관속에 뉘어지면 수행원들도 독약을 마시고 부부를 따라갔다. 곧 가축들을 죽여 제물로 바친 후 무거운 돌문을 닫는 것으로 의식은 끝이 났다. 이들의 성스러운 죽음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신들의 은총이 내려져 풍요와 영원한 삶이 보장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신제사까지 행한 신에 대한 엄청난 헌신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강의 바벨론 제국은 채 100년도 안되어서(BC 625~539년)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니므롯이나 바벨탑 등의 성경 기록은 결코 신화나 소설이 아니라 역사상에 실재했던 인물과 사건이라는 사실이 고고학적인 여러 자료로 밝혀졌다.
런던 대학의 앗시리아학 교수인 도날드 와이즈만 박사는 “창세기 11장의 기록은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설명에 대한 모든 흔적들을 갖고 있다” 고 자신있게 말한다.
언어의 유사성
니므롯이 스스로 하나님과 비기려고 바벨탑을 세우려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합케 해서 흩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인류의 다양한 언어의 기원이 하나라는 것이다.
“온땅에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성과 대를 쌓아 대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니... 그들이 성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하니...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 11:1-9)
언어의 기원을 연구하는 언어학자들은 무수하게 다양한 언어들이 하나의 언어에서 파생해서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지구 전체의 수 천 개 방언과 언어를 고대의 언어 기원에까지 거슬러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알프레도 트럼베티 교수는 모든 언어의 공통적인 기원을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동양언어 학자인 막스 뮬러도 모든 인간 언어는 하나의 기원으로 역추적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헤롤드 스티거 박사도 이렇게 결론내린다. ”어림잡아 3,000 여개의 무수한 언어와 방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두가 모체 언어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은 주요 언어 계보의 경계들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이것은 공통의 조상 언어가 있었음에 틀림없음을 가리킨다.”
3. 수메르 문명
1849년 아시리아의 니느웨 유적에서 약 3만점 이상의 점토판 문서가 대량으로 발굴되면서 수메르 문명이 알려지게 되었다.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진 수메르 문명은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발달한 것인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수메르 문자의 발견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는 수메르 사람들이 쓰던 쐐기문자(설형문자)로 알려지고 있다.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가 평생을 바쳐 설형문자를 연구하여 '길가메시 에픽'에 관한 기록을 해독하게 되었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서사시인데,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내용이 거의 같다.
수메르의 점토판에는 그외에도 성경에서 언급된 에덴동산, 바벨탑, 모세의 율법, 욥의 이야기 등과 유사한 내용이 들어있다.
신화인가 역사인가
수메르 점토판의 기록연대는 BC 2,250 년경으로 추정되고 성경기록은 BC 1,500년 경부터 모세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성경은 수메르 신화를 모방한 것이라며, 고고학의 발견이 성경과 기독교의 허구를 드러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유적과 유물의 발굴이 성경의 진실성을 더욱 분명히 입증해주고 있다.
성경에서 언급된 천지창조, 에덴동산, 노아의 홍수 등은 모두가 역사 가운데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이다.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랜동안 구전되며 이야기들은 각색되고 변형되었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은 각 지역이나 나라의 영웅들의 이름으로 대치되어 마르둑, 엘릴, 브라만, 반고, 단군 등으로 불리우며 각종 신화들이 만들어졌다. 신화들은 지역과 언어에 따라서 각색되어서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실제 사건에서 나온 것이므로 서로 유사한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신화가 각색되고 구전되며 에리두 창세기, 길가메시 서사시, 에블라 창조기록 등이 점토판에 기록되었다. 이 신화들은 천지와 인간이 위대한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며 엄청난 홍수로 인해 멸망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에블라의 점토판 기록에서는 하늘, 땅, 태양, 달이 창조되었다는 순서가 성경과 동일하다.
BC 1500년 경,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서 오래 전에 이 모든 사건들이 있었음을 일러주시고 그 이유도 밝혀주시며 정확하게 기록하게 하셨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것이 성경이다. 신화와 성경에 비슷한 내용이 있다는 것은, 그런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각종 신화들이 이런 저런 모양으로 구전되다가 모세 때에 와서야 비로서 성경으로 기록된 것은,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적절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동안 인간의 입을 통해 전승된 여러 모양의 신화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와 선지자들을 불러 계시로 알려주시고 기록케 하신 성경 안에만 완전한 진리가 있다.
우르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온다. BC 2000년경 우르에 살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75세에 고향을 떠나 명하신 가나안으로 갔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속의 역사가 시작된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창 11:31)
비평가들은 이 이야기를 설화처럼 생각하며 사실로 믿지 않았다. 그러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지역에서 수메르 문명의 유적이 발견되면서 그곳이 우르라는 도시였음이 밝혀졌다.
아브라함 시대에 해당하는 BC 1900년 경의 거주지 우르에서 성경의 사실과 조화되는 여러 유물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세밀한 지도들이 그려진 많은 점토판들을 볼 때, 그들은 아주 정밀한 수로를 만들어 그 지역의 농사를 위해 물관리를 철저히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태양빛에 말린 고운 흙가루로 만든 진흙 벽돌의 이층집, 흙을 구워 만든 도기로 깐 안뜰, 물통과 대야가 놓인 로비, 붉은 도기 배수관을 가진 수세식 화장실, 화로와 맷돌이 놓인 부엌,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식 층계, 10여 개의 방을 가진 이층집의 흔적 등도 발굴되었다.
앞으로도 살펴보겠지만 성경에는 사건뿐만 아니라 지명과 인명들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설화나 신화처럼 어떤 목적으로 지어내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는 말이다. 고고학의 발전과 유적의 발굴은 이런 지명과 인명과 사건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계속 증명해주고 있다.
4. 에블라 문명
1974년 시리아 북쪽에서 에블라의 문명을 알려주는 17,000 개의 점토판이 발굴되었다. 13년에 걸려서 발굴된 이 서판은, 유사시대를 소급하고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밝히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서판에 의하면 에블라는 BC 2,300년경 수도인 하란을 중심으로 매우 큰 세력을 펼치던 나라로 260,000명의 인구가 있었다. 시리아 북부, 터어키 남부에 위치했던 하란은 바로 서판이 묻혔던 곳이기도 하다. 서판에 의하면 하란이 매우 발달한 문명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최신의 고고학에서야 존재가 밝혀진 하란이라는 도시는 이미 성경에 언급되고 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창 12:4)
그외에도 에블라 서판들에 언급된 수백 개의 지명, 역사적 참고 사항, 경제 문제에 대한 설명, 정교한 법령 등을 포함한 종교적, 사법적 관례 등이, 성경의 지명, 인명, 내용과 일치한다.
성경이 여러가지 신화의 복사 내지는 짜깁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신화의 어디에도 성경에서 언급되고 고고학이 밝혀낸 이런 지명이나 인명이 나오지 않는다.
에블라 서판으로 밝혀진 사실들 중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비평가들은 BC 1,500년경의 모세 시대에는 아직 문자가 제정되기 이전이라며 모세가 모세오경을 쓸 수 없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에블라 서판은 모세의 기록보다 약 1,000 년이나 앞서 있다. 에블라 서판은 셈어로 기록되었고, 구약성경은 셈어의 파생어인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 창세기에 나오는 ‘가나안’이라는 지명이나 ‘테홈’ (the deep) 이라는 단어는 모세시대보다 먼 후대에나 쓰였던 단어이므로,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 모세보다 1,000년이나 앞서 기록된 에블라 서판에서 이미 가나안과 테홈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 성경은 노아의 아들 셈이 에벨의 조상이라고 기록한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창 10:21) 셈의 후손이자 아브라함의 6대조인 성경 속의 에벨은, 큰 문명국가를 이룬 에블라 왕국의 왕 에벨과 동일인으로 추정한다.
- 에블라 백성들이 믿었던 유일신의 이름은 '야'로 기록되었다. 아마도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동뿐 아니라 세계 도처의 유물들을 볼 때, 원래 최초의 정착자들은 ‘위대한 신(High God)’이라는 유일신의 존재를 숭배했으나, 이러한 원시의 일신론은 곧 범신론, 다신론, 정령신앙 등으로 타락해 버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에블라 백성이 유일신을 경배하는 히브리인의 조상일꺼라고 추정하는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서판에 기록된 에블라의 법률과 풍습들은 신명기에 기록된 규율들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 서판에는 식량 배급과 재고 명세서, 세금 명부, 곡물과 가축 문서, 특산물인 금속과 섬유류에 대한 국제 무역 명세서 등, 에블라의 행정과 경제에 대한 기록이 아주 많다.
- 학자들은 역사의 초기에 이와 같이 광범위한 교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에블라가 교역했다는 가자, 므깃도, 멜기세덱, 소돔, 고모라 등의 고대도시는 모두 성경에도 언급되고 있다.
- 성경에는 아브라함과 여러 왕들이 연합해서 다섯 왕들과 싸워 이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에블라 서판에도 이 나라들 이름, 왕의 이름, 위치, 풍습, 연대들이 기록되어 있다.
-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창 14:1,2)
5. 아브라함 시대
이름들
메소포타미아 여러 곳에서는 BC 2,000년 안팎의 연대가 쓰인 점토 계약 문서에서 아바라마(Abarama), 아바암라암(Abaamraam) 등으로 불리는 당대의 사람들의 이름이 나타났다. 아브람(창 12:1), 후에 개명된 이름인 아브라함(창 17:4, 5)은 모두가 당대의 구음에 어울리는 실제적인 인명이었음이 입증되었다.
1936년 안드레 패롯이 유프라테스 중부 지역의 마리에서 발굴한 마리 서판에서도 성경에 기록된 인명과 지명들이 발견되었다. BC 1,700년경 마리 왕국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천개의 설형문자 서판에는 도시 하란과 나홀, 하피루 (히브리) , 마리의 왕인 아리육 (아리옥) 등 성경에 나타난 이름들이 보인다. 마리의 한 족속으로 언급된 ‘바누 야미나’ (벤쟈민)은 성경에 나오는 벤야민과는 다르지만, 그런 이름이 그 지방에서 흔히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굽과의 왕래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온 후, 가나안에 큰 기근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때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하고자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창 12:10)
1824년 영국의 고고학자 윌킨슨은 이집트 중부 지방의 베니하산 유적지에서 크눔호텝이라 불리는 한 애굽 귀족의 무덤벽화 여러개를 발견했다. 벽화에는 이집트인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독특한 턱수염과 화려한 무늬로 짜여진 통치마를 걸친 셈족 유목민들이 애굽에 들어오는 장면 등이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BC 1,900년 경으로 추정되므로 성경의 족장시대와 일치한다.
이러한 그림들은 당시에 가나안과 애굽의 왕래가 자유롭게 이루어졌음을 설명한다. 큰 강이 없는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들면 아시아 사람들은 나일 강의 혜택을 누리는 애굽의 동부 쪽으로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는 것은 다른 기록들에서도 밝혀졌다.
결혼과 가족관계
쟈크 모르강이 지휘하는 프랑스 발굴단은 1,901년 페르시아의 옛 수도 수사에서 8피트 높이에 달하는 검은색 섬록암 입석을 발굴했다. 이것은 구 바벨론의 함무라비 왕이 세운 것으로 여기에는 39단 3,624행으로 된 282조의 고대 법문이 새겨져 있었다.
함무라비(BC 1,728~1,686) 법전은 모세의 법보다 200년 정도 앞선 것이다. 이 법전이 발굴됨으로써 아브라함 등 족장 시대의 사회적 배경과 이후에 쓰인 모세의 율법(민법)이 역사적, 사회적, 법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한 예로서, 함무라비 법 145조에 보면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면 남편은 그와 이혼하든지 낮은 신분의 다른 부인을 얻을 수 있으며, 아내 스스로 자기 여종 중의 하나를 택하여 남편에게 첩으로 주라는 규정이 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그의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준 것은 후자를 택한 당시의 사례인 것이다(창 16:1~3). 후에 야곱의 부인 라헬이 자기의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준 것도 같은 사례이다(창 30:3).
6. 소돔과 고모라
최근 소돔과 고모라 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잔해들이 사해 남동지역의 바베드라와 누메이라에서 발굴되었다. 그곳은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각판의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토양은 아스팔트와 유사한 역청 성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데, 역청에는 다량의 유황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지진으로 멸망
성경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이렇게 묘사한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창 19:28)
연기가 났음은 유황같은 유류성 화재가 발생했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옹기점 연기’같은 것은 지하 토양이 거대한 압력으로 인해 갈라지면서 새어 나오는 유황 연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성경에서 묘사한 사건은 이곳의 지질적 특성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토양이 지진으로 심한 압력을 받아 갈라지며, 틈을 통해 유황이 분출되고, 분출된 유황이 대지 표면의 조그만 불꽃 등으로 인해 발화하면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어서 도시들을 덮쳤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유적에서는 지붕부분만 집중적으로 불에 탄 건물들의 흔적들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하늘에서 유황과 불이 내렸다는 성경기록과도 일치한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창 19:24)
소금기둥
성경은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으로 변했다고 기록한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창 19:26)
번영했던 도시를 아쉬워해서 뒤돌아보다가 뒤쳐지며 혼자 재앙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폼페이가 화산폭발로 멸망할 때 주민들이 용암과 떨어지는 화산재에 묻혀서 화학적 대체과정이 일어났듯이, 롯의 아내도 그런 과정에서 소금기둥으로 변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이 지역에는 거대한 소금 구성물이 많다. 사해는 평균 해면보다 훨씬 더 낮다. 그래서 배수구가 없어 물이 계속 증발하므로 염기의 농도가 매우 짙어져 소금바위, 소금기둥들이 생성되는 것이다.
7. 로제타 스톤
1799년 나폴레옹의 원정대군은 이집트 북부 로제타 지역에서 일명 로제타 스톤을 발견한다. 모양이 다듬어지지 않은 길이 114㎝, 폭 72㎝의 검은 현무암의 상단에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중간에는 이집트 속자(俗字)가, 하단에는 그리이스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BC 205~180)의 은혜를 기리는 내용이 세 가지 문자로 표기된 것이었다. 왕의 재위 9년째에 즉위를 기념해서 멤피스 사제들에 의해 씌어진 비문으로 추정된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샹폴리옹은 기념비에 새겨진 그리스어를 읽고 다른 2개의 문자를 비교분석해가며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부호 읽는 법을 알아낼 수 있었다. 로제타 스톤의 비문을 통해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가 해독되면서 이집트 5천년 역사를 규명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마련된 것이다.
이전까지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단지 그리이스어 문헌이나 구약 성서에 의해서만 알 수 있었다. 이후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으로 미이라나 오벨리스크의 수수께끼도 풀리게 되었다.
로제타 스톤은 발굴되자마자,180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에 의해 영국으로 반출되어 지금은 영국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8. 에돔과 페트라
성경에는 에돔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본래 에돔은 이삭의 아들 에서의 땅이었는데, 후에 호리족속이 점령하여 살다가 BC 13세기 경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이 이곳에 나라를 세웠다.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세일의 자손 중 호리 족속으로 말미암아 나온 족장들이요” (창 36:21)
1816년 스위스 탐험가들이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서남쪽에 위치한 세일산 지역에서 BC 4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에돔의 수도였던 페트라의 유적을 발견했다. 에돔은 붉다는 뜻이고, 페트라는 바위를 뜻한다. 실제로 이곳은 ‘붉은 장미빛 페트라’라고 불리우는 것처럼 붉은 바위 속에 세워진 도시였다.
고대 세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넘는 거대한 문명을 이루고 살았다. 고대 도시 페트라도 천연의 요새로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채 극장, 온수 목욕탕,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집트의 피라밋과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불리우는 이곳은,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최근에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 - 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 졌다.
멸망이 예언됨
바위 틈에 있는 천연요새로 외부 침략이 쉽지 않고 또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던 강국 에돔의 수도 페트라였지만, 그러나 교만함으로 패망될 것이 예언되었다. 그 예언대로 에돔은 완전히 패망해 버렸고, 그 유적은 오랜 세월동안 모래 속에 묻혀 있어야 했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옵 1:3-4)
9. 헷 족속(Hittites)
성경에는 헷 족속에 대한 기록이 28번 이상이나 나온다. 그러나 다른 근동지방의 문서에서는 헷족속(히타이트족)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음으로 그것은 상상에서 만들어 낸 지명이라고 비난받아왔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창 15:18-20)
“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 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 (창 23:20)
그런데 1892년 루우샨을 중심으로 한 조사단이 터키의 보가즈코이에서 헷족속의 도시들과 역사적 기록들을 발굴함으로써, 성경에서 언급된 헷족속은 정확한 역사성이 있다는 것이 다시 입증되었다. 헷족속은 강력한 철기 문명을 바탕으로 해서 심지어는 이집트까지도 점령하며 대제국을 형성했음이 밝혀졌다.
이집트 한 무덤의 벽화에서도 상형문자로 기록된 헷 족속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애굽이 헷 족속들과 20여 차례나 전쟁을 했다는 사실까지 기록하고 있다.
10. 요셉 이야기
성경에 나오는 요셉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는 매우 극적이어서 설화처럼 취급되곤 했다. 그런데 속속 발견되는 유물들은 성경의 기록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것이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은 20개에 노예로
성경에 요셉이 은 20개에 팔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K. A. Kitchen의 연구에 의하면, 그 전에는 노예 값이 대략 은 10-15개 정도 였으나, BC 18세기 때는 노예를 파는 평균값이 은 20개였다고 한다. 은 20개에 요셉이 팔렸다고 하는 기록은 시대적 정확성을 갖고 있다.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 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창 37:28)
노예에서 수상으로
요셉이 히브리 노예에서 애굽의 수상으로 올라갔다는 기사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며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고고학자Howard Vos는 나일 지방의 유적을 통해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가나안 사람 Meri-Ra는 왕의 갑옷 드는 사람이 되었고, Ben-Mat-Ana는 통역관의 높은 직위를 얻었으며, Yanhamu는 Amenhotep의 부수상 직위를 얻어 삼각주 지역의 곡창 지대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굼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창 41:41)
7년 풍년과 7년 흉년
성경은 애굽에 7년 풍작에 이어서 7년 흉년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창 41:47, 53-54)
이 기록을 확인해주는 흥미로운 석판이 19세기 사우디아라비아 남동부의 민주예맨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한 성곽의 대리석판에는 요셉 당시 기근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풍년 뒤에 따른 기근과 흉작의 시기에 찾아든 황폐함을 탄식하는 이 기록은 BC 1,800년 경에 씌어진 것으로, 야곱과 열 두 아들에 관한 성경의 기록과 일치한다. 7년이라는 구체적 증언도 성경과 일치한다.
“우리는 오랜 기간 이 성에서 편히 거주하였다.
우리는 욕심도 없었고 포도원의 주인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수 백마리 낙타가 매일 저녁 우리에게 돌아왔고
낙타의 눈에도 이곳은 쉼터로서 매우 좋은 듯 보였다.
우리 양은 낙타 수의 두 배 였고
느리게 이동하는 소도 흰 양과 같이 많았다.
우리는 이 성에서 7년을 아주 안락하게 살았다….
그런 생활을 다시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상황인가!
악마의 해가 스쳐 지나가는 그 때에 황폐한 시기가 들이 닥쳤다.
또 다른 해가 지나갔다.
우리는 다시는 좋은 시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발이 있거나 굽이 있는 동물도 남아 있지 못했다.
하나님께 감사히 여기지 않고 먹는 사람은
삶의 터전에서 몰살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7년 흉년 치리
성경은 요셉이 다가올 기근을 대비하여 풍년 시기에 남은 곡식을 수거해 비축했다고 기록한다.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축하되 각 성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 중에 저장하매…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 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식물이 있더니…” (창41:48, 53)
고고학자 조지 배론은 나일 강가에서 발견된 돌에서 이런 기록을 발견했다. 마치 요셉 자신이 기록한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나는 옥수수를 모아 들였다. 나는 씨를 뿌리는 시기 동안 잘 주시하여 보았다. 기근이 발생하여 여러 해를 계속하였을 때, 나는 옥수수를 나누어 주었다. 나일 강이 7년 동안이나 범람치 않았고, 식물들이 말라붙었다. 창고들이 지어졌다. 그 속에 있는 것들이 다 나누어졌다.”
에븐헤샴은 이 기근 기간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 부유한 예맨 여인의 무덤을 발견했다. 많은 보석들과 함께 발견된 석판에는, 이집트의 7년 기근 시기에 보물로도 양식을 살 수 없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비축된 양식을 처리하는 사람으로 요셉의 이름도 언급한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으로,
함야의 하나님 두쥬 세파의 딸인 나 타야는
나의 종을 요셉에게 보냈습니다.
종의 귀환이 지체되어 나는 내 여종을 보냈습니다.
밀가루를 가져오게 하려고 은을 실려서:
식량을 조달 받을 수가 없어서 나는 금을 실어 여종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받지 못하여 다시 진주를 보냈습니다.
역시 식량이 도착되지 않아 그것들이 밀가루가 되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어서 나는 여기서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누구든지 이 소식을 듣는 사람은 요셉이 나를 불쌍히 여기도록 해주시오.
나의 장식물로 몸치장을 할 수 있는 어떤 여인도
나 같은 죽음으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reported in Niebuhr’s Voyage en Arabie, PL.LIX. Translation by Rev. Charles Forster )
11. 애굽 이야기
국고성 건설과 벽돌만들기
성경에 의하면 요셉의 4대 이후에 히브리인들은 그 시대의 대규모 건축계획에 따라 애굽 새 왕조의 벽돌공장에서 일하는 종이 되었다. 그들의 중노동은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의 건설에서 절정에 달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출 1:11, 14)
애굽의 파피루스에서 성경과 일치하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라메셋 2세의 거대한 신전 건축을 위해 돌을 끌고 일정한 양의 벽돌을 만들었던 아비루 (히브리인)들과 벽돌 만들 짚도 주지 아니한 간역자들에 관한 기록이 있다. 성경이 언급한 애굽의 바로(파라오)는 라메셋2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라메셋 2세가 건설한 동부 삼각주의 유명한 비라메세의 자리에 국고성 라암셋이 위치한다는 사실도 성경의 사실을 확인해준다.
테베에서는 토기 파편에 기록된 ’작업 일정표들’이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노동자들이 일한 날과 쉰 날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그의 아내가 병들다", "감독과 함께 맥주를 만들다", “전갈에 쏘이다" 등등 노동자 개개인의 결근사유가 구체적으로 덧붙여져 있었다. "자기 신에게 제사하는"사람의 명부 혹은 어떤 지방의 종교축제에 며칠씩 단체로 참가한 자들의 명부도 볼 수 있다.
출애굽
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430 년간 노예생활을 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기적적으로 출애굽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삼십 년이라” (출 12: 37, 40)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에서 고대 제사장이며 학자인 메네소와 케레몬의 기록을 인용하며 성경의 역사성을 확인해 준다.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집트 역사에서 요셉과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칭해졌으며, 이스라엘인들은 시리아 남동쪽 (고대 팔레스타인의 이집트식 이름)으로 이주해 갔다. (Flavius Josephus, Josephus Against Apion. I., 26,27,32 )
또 람세스 아들이자 세토스의 아버지인 아메노피스가 제 18왕조 말기를 통치했는데 그의 재위기간 중인 BC 1,500년과 1,400년 사이에 이스라엘이 갑작스럽게 이집트를 탈출했다고 메네소는 기록한다. 이같은 기록은 출애굽 사건이 BC 1,491년 경에 발생했다는 구약 성경의 연대기적 날짜를 사실로 증거해 준다.
BC 80년 사람인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러스 시큐러스의 방대한 저서에서도 성경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는 고대사건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중동지방 전역을 여행하며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들을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그의 책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고대 이집트에 큰 재앙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재앙의 원인을 하나님 탓으로 돌렸다. 그 하나님은 그 땅에 사는 이방인들 때문에 이집트인들을 벌하곤 하였다. 이 이방인들은 자신의 신을 예배할 때 그들의 의식과 예식을 거행했다.
이집트인들은 이방인들이 자신의 땅에서 밀려 나가지 않으면 재앙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집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시대에는 거주지가 아니었던 현재 유대라고 불리는 곳으로 물러난 이런 이주민들을 모세가 이끌었는데 그는 지혜와 전술에 매우 능하였다. 모세는 이들에게 법을 주었고 그는 또 모든 것을 주장하고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유일한 하나의 신만 있다고 하여 신의 어떠한 이미지도 만들지 못하는 법을 제정했다.” ( Diodorus Siculus, Library of History, lib.1., ap Phot )
12. 여리고 성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으로 들어오며 최초로 공격한 성이 여리고 성이다.
1908년부터 시작되어 무려 100여년에 걸쳐 많은 학자들에 의해 진행된 여리고 발굴의 결과가 1999년 브라이언트 우드 박사에 의해 상세하게 보고되었다.
성벽의 파괴는 BC 1400년 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것은 성경에 언급된 여호수아의 정복 연대와 일치하는 시기다.
성경은 여리고성이 견고한 요새와 같다고 기록하는데, 발굴된 유적에 의하면 여리고 성은 외벽 두께가 2m, 내벽 두께가 4m, 높이는 10m 이상 되는 난공불락의 구조를 지닌 이중 성벽이었다. 당시 외벽과 내벽 사이의 제방에서도 사람들이 살았다고 추정된다.
또 견고한 성벽은 급히 무너졌지만, 한쪽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귀중품들이 정복자에 의해 약탈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모두 성경의 내용과 일치한다.
공명과 지진에 의한 파괴
그런데 그 견고한 성벽은 어떻게 급히 무너질 수 있었을까?
견고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지시하신 전술은 ‘성벽 돌기’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 한 차례씩 엿새동안 성벽을 돌고 칠일째 되는 날에는 성을 일곱바퀴 돌며 제사장들에게 나팔을 불고 고함을 지르라는 독특한 전술이었다.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수 6:3-5)
이렇게 순종했을 때 정말로 성벽이 무너졌다고 성경은 진술한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진동에 의한 ‘공명’과 ‘지진’에 의해 여리고성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요단 계곡이 거대한 단층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이미 지질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특히 여리고 성 근처의 땅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2개의 판구조 사이에 끼여 있어 지진 다발지역이다. 이 때문에 발굴팀은 당시 지금의 리히터 규모 6.0의 지진이 발생,여리고 성이 붕괴됐음을 보여주는 지질구조가 발굴됐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공명이 더해질 때 그 위력을 상상을 초월한다. 공명이 일어날 때 미풍으로도 견고한 다리가 무너질 수 있다. 1940년 미국 워싱턴의 타코마교 붕괴나 1831년 영국 멘체스터의 브로스턴교 붕괴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여리고성 주변을 100여만명의 전사들이 하루에 한 바퀴씩 엿새동안 돌았을 때 그 지반은 반복적인 공명으로 서서히 약해졌을 것이라는 것이 과학자들의 추정이다. 일곱번째 되던 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할 때 진동이 극에 달해 마침내 지반이 갈라지면서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무혈상태에서 무너져내렸다는 것이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학자들의 견해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공명과 지진’으로 압축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방법은 ‘성벽돌기’라는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13. 앗수르의 왕들
살만에셀 3세와 예후
살만에셀(샬마네세르)은 다섯 명의 앗수르 왕이 사용한 이름이다. 그중 바니팔 2세의 아들 살만에셀 3세(BC 859-824)의 검은 오벨리스크가1845년 니느웨에서 발견되었다(대영 박물관 소장).
거기에는 그가 조공을 받는 장면이 새겨져 있는데 조공을 바치는 자는 이스라엘의 왕 예후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므리의 아들 예후의 조공. 나는 그에게서 은, 금, 금 사플루 대접, 밑이 뾰족한 금 화병, 금잔들, 금 물통들, 주석, 왕의 지팡이를 받았다.”
성경에는 예후가 조공을 바친 일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예후의 신앙을 볼 때 짐작할 수도 있다.“예후가 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왕하 10:31)
살만에셀 5세와 호세아
성경에 기록된 살만에셀은 살만에셀 5세로서 디글랏 빌레셀 3세의 아들이다.
이스라엘 왕 호세아는 초기에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게 조공을 바쳤으나 이후에 애굽 왕과 동맹하며 앗수르를 배반한다. 이에 살만에셀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침략하여 3년 간 포위하고 왕과 백성을 사로잡아간다. 그러나 그는 포위 기간 중에 죽고, 그 후에 그의 형제 사르곤 2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BC 722년에 사마리아를 함락시킨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올라와서 호세아를 친고로 호세아가 신복하여 조공을 드리더니” (왕하 17:3)
“호세아 7년에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에워썼더라” (왕하 18:9)
사르곤 왕의 이스라엘 함락
성경은 앗수르가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함락시키는 사건과, 또한 앗수르 왕 사르곤이 아스돗을 쳐서 취한 사건을 기록한다.
“호세아 왕 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왕하 17:6)
“앗수르 왕 사르곤이 군대 장관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 (이사야 20:1)
1842년에 봇타는 이라크의 코르사바드에서 사르곤 2세의 궁전을 발굴했다. 궁전의 벽에는 사르곤2세가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또 아스돗을 점령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14. 앗수르의 패배
산헤립의 침공
BC 722년, 앗시리아 왕 사르곤2세는 북 이스라엘을 함락시키고 그 아들 산헤립은 그 여세를 몰아 남 유다를 침공했다. 당시 남방 유다는 매우 연약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 왕을 주축으로 해서 잘 버텨내고, 침공한 산헤립 왕은 패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자녀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취하고자 한지라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대하 32:1-2)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영에서 모은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얼굴이 뜨뜻하여 그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 (대하 32:21)
많은 성경 비평가들은 연약한 유다가 강력한 앗수르의 침공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었냐며 성경의 내용을 의심하고 비평했다.
그런데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서 발굴된 실린더 모양의 비석에는 성경의 것과 똑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산헤립 왕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러 갔다가 실패하고 속이 상한 채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마침 반란이 일어나서 자신의 아들들에 의해 신전에서 암살당하고, 아들 에살핫돈이 왕이 된다는 내용이다.
히스기야의 수로
성경은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공 때 유다 왕 히스기야가 땅을 파고 수로를 만들어서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였다고 기록한다. 히스기야의 수로 건설은 앗수르의 침략시 예루살렘이 포위되더라도 최대한 견딜 수 있는 방비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백성이 많이 모여 모든 물 근원과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고 이르되 어찌 앗수르 왕들로 와서 많은 물을 얻게 하리요 하고” (대하 32:4)
“히스기야의 남는 사적과 그 모든 권력과 못과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중으로 인도하여 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으냐” (왕하 20:20)
1880년 히스기야 터널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히스기야가 성밖 기혼 샘의 물을 성 안 실로암 연못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판 장장 535미터의 지하 터널이다.
현재 이스탄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실로암의 석비에는 히스기야 터널을 공사할 때의 과정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동굴이 뚫리던 날 인부들은 손에 도끼를 든 채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샘물이 연못으로 1,200규빗이나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바위의 높이는 인부들 머리 위로 100규빗이나 되었다.”
히스기야의 성벽강화
또한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의 침공에 대한 대비로 예루살렘의 성벽을 강화하는 작업을 했다.
“히스기야가 세력을 내어 퇴락한 성을 중수하되 망대까지 높이 쌓고 또 외성을 쌓고 다윗성의 밀로를 견고케 하고 병기와 방패를 많이 만들고” (대하 32:5)
이렇게 자주국방을 강화하기 위한 히스기야의 치밀한 행적은 적국의 왕인 산헤립의 기록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히스기야는 46곳의 요새화된 성읍을 갖고 있고 정규군뿐만이 아니라 비정규군 제도도 운영하면서 앗시리아의 침략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15.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경에 니느웨는 가장 초기의 도시로 나와 있다. 니므롯이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고 성읍들과 같이 니느웨를 건설했다고 기록한다.
“그(니므롯)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창10:10-11)
BC 3,000년대 말경의 설형문자 문서나 BC 1,670년 경의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니느웨의 이름이 발견되고 있어서, 니느웨의 거주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앗수르어로 `Ninua` 또는 `Nina`라고 불리는 니느웨는 BC 12세기 경에 이미 앗수르의 중요 도시가 되었다. BC 8세기 경에는 사르곤 2세의 아들 산헤립(BC 705-681 재위)에 의해 앗수르 제국의 수도가 되며 전성기를 맞는다.
앗수르는 매우 잔인하고 강포한 민족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사용해서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을 패망시키지만, 그 앗수르도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아 패망한다.
BC 760년 경 선지나 요나가 앗수르의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자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심판은 일단 중단되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요나 1:2)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요나 3:5)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 3:10)
니느웨의 멸망
그러나 이후 그들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 요나의 메시지가 전해지고 약 100년이 지난 뒤 선지자 나훔과 스바냐는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번성의 극에 달한 니느웨를 `사자의 굴`, `피의 성`이라고 부르면서, 여호와의 심판으로 니느웨가 멸망하지만 그 멸망을 애곡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무하였도다..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너의 병거들을 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화 있을찐저 피 성이여..” (나훔 2:8-3:1)
“여호와가 북방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로 황무케 하며 사막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 (스바냐 2:13-15)
메소포타미아 최고 최대 성읍의 하나였던 니느웨는 BC 612년경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에게 점령당해 멸망하면서 예언이 성취되었다. 티그리스 강이 갑자기 흘러넘쳐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이를 통해 적군이 도시로 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니느웨는 완전한 폐허로 묻혀있다가 1842년 티그리스 강 동쪽(이라크)으로 약 80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잔해로 발견되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궁전의 흔적과 앗수르의 이야기를 담은 수천 개의 묘비가 있었다.
발굴에 따르면, 니느웨에는 약 30m 높이의 성벽이 있었는데 그 벽이 아주 두꺼워서 네 대의 전차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고 또 성벽에는 수백 개의 탑이 있었으며 성벽 둘레에는 넓이 42m, 깊이 18m의 호수가 있었다.
16. 다니엘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야기가 다니엘서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다니엘서에 사용된 세개의 그리스 단어 때문에 이것이 바벨론 시대에 쓰인 것이 아니고 이후 그리스 시대에 쓰인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더구나 다니엘서의 예언이 너무나 정확하게 성취되었기 바벨론 시대의 다니엘이 저자라는 사실을 의심했다. 사건들이 다 이루어진 후에야 기록하고 이름만 다니엘서라고 붙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 자료는, 그리스와 바벨론이 느부갓네살 시대 이전부터 이미 광범위한 무역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언어가 서로 오고 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바벨론의 유물들이 다니엘서의 사실성을 증언해 준다.
포로정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외국의 포로들 중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같은 인재들을 잘 먹이고 갈대아 학문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성경에 있는데 그 사실성에 대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잔인한 나라인 바벨론의 정책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의 몇 사람…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였고” (단 1:3-4)
그런데 그 후에 고대 바벨로니아 지역을 발굴하다가 특별한 건물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건물의 비석에 그 건물의 용도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 비석에는 포로로 잡혀 온 왕족과 귀족에게 갈대아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된 건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풀무불
성경에는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용광로 불 속에 집어넣어졌다는 기록과 함께, 그들이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았다고 기록이 있다.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 이 사람들을 본 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단 3:5-6, 27)
고고학적 조사 결과 거대한 용광로가 발굴되었는데, 그 용광로의 용도에 대해 쓰여진 비석에 보면 바벨론의 신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을 화형시키는데 사용되는 용광로라고 기록되어 있다. 불타는 용광로에 던져진 세 청년의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했음이 밝혀진 것이다.
사자굴
다니엘이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아서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죽임당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단 6:23)
이 사건과 관계깊은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 거대한 웅덩이가 발견되었는데, 이 웅덩이는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떠밀어 넣는데 사용된 웅덩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거기에는 잡아먹힌 사람들 이름까지 다 기록되어 있었는데,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벨사살 왕
성경에는 바벨론의 마지막 왕으로 벨사살 왕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다른 근동의 문서에는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 나보니더스로 나와 있어서 성경 비평가들은 성경의 사실성을 의심해 왔다.
“그날 밤에 갈대아 (바벨론)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단 5:30-31)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발견된 토판에는, 벨사살 왕은 나보니더스 왕의 아들로서 그 당시에 나보니더스왕과 바벨론을 공동으로 통치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이로써 성경의 정확한 역사성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17. 고레스 왕
성경 속의 고레스왕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인해 수없이 경고를 받았다. 결국 멸망당할 것이 예언되었고 북방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남방은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해 포로로 끌려가며 예언은 성취되었다. 그러나 아주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70년의 포로생활 뒤에 다시 회복되어 고토로 돌아올 것이 예언되었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예레미야 25:11)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예레미야 29:10)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일을 행할 자로서 바사왕 고레스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것이다. 고레스의 이름은 그가 태어나기 200년 전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예언되었고, 예언대로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나서는 학사 에스라에 의해 역사로 기록되었다.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될 것이라…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이사야 44:26-28)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전 기명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것이라. (에스라 1:1-3,7)
역사 속의 고레스 왕
바사 (페르시야)의 키루스 대제는 이란인들에게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져있다. 그는 29년 동안 통치하면서 메디아, 신 바빌론, 리디아 등 당대의 제국들을 정복하고,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대부분과 인도에 이르는 지역을 평정하며 대제국으로 성장시켰다. 이때부터 키루스 2세는 자신을 "바빌론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세계의 사면의 왕"으로 칭했다.
키루스 2세는 다른 민족에 대한 배려와 종교적 관용이 뛰어난 관대한 군주로 알려졌으며, 그의 특유의 관용정책은 뒤를 이은 다리우스 1세 등에게까지 전해져서 페르시아 제국의 문화와 문명을 형성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879년 실린더 모양의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키루스의 치적이 바빌론 설형문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고레스가 바빌론을 정복하고, 바빌론에 잡혀와있던 유대인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고, 유대인의 신성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하게 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성경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내용이다.
이방인 왕이 왜?
그런데 고레스 왕은 어떻게 유대인들을 해방시킬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바벨론 성은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그런데 고레스가 이 성을 공략할 때 이사야의 예언처럼 강물이 마르고 놋쇠 문이 열려져 기적적으로 바벨론 정복에 승리할 수 있었다. 더구나 200년전 사람인 선지자 이사야는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이사야 44:27)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내가 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45:1-2,13)
고레스는 이사야의 예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바벨론 정복을 이루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는 유대민족을 값없이 풀어주며 이전의 땅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예언은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결론
이 외에도 성경의 기록을 입증하는 고고학적인 발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도 없이 많이 누적되고 있다. 물론 성경의 모든 내용이 고고학적으로 다 밝혀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고학적인 확증은 그에 해당하는 역사적 유물이 발견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고고학적인 발견 중 성경의 기록과 위배되는 것은 단 한건도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터무니 없기 때문에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주장들도 결국은 고고학적인 발견에 침묵하게 되었다.
다른 종교들과 달리 유독 성경만이 '역사적','고고학적'인 검증과 공격을 집요하게 받는다. 그 이유는 성경만이 시대적,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으로 구체적인 인물, 지명, 국가, 시대를 아주 자세하게 언급한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 서적이나 신화들에 대한 반박은 별로 없고, 유독 성경만 이러한 집요한 포화를 집중적으로 받기 때문에 성경 자체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다른 종교 경전이나 신화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기록 자체부터 성경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역사적 신뢰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나 지명, 인물 자체를 다루지 않으므로 검증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검증할 기본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지, 그 자체의 역사성이나 진실성에 문제가 없어서가 결코 아니다. 진품 명품일수록 짝퉁이 활개를 치고, 진품 명품일수록 소비자들의 요구치가 높고 비판이 많은 것과 같은 원리다. 이 모든 사실은 성경이 역사적 진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고고학자들의 증언
"고고학에 의하면 구약전승의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와 19세기의 중요한 역사학자들은 성경에 대한 과다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 의심들은 지금도 종종 제기되고 있는데, 그러한 의심들이 점차 근거가 없는 것들임이 밝혀지고 있다. 고고학적 발견들이 거듭되면 될수록 성경의 내용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어서 역사적 사실로서의 성경은 점점 더 확실해지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고고학의 권위자W. F. Albright 박사)
“고고학은 여러 사례를 통하여 근대 비평가들의 논리가 가상적이고 실제적이 아니며, 역사적 발전 단계를 인위적으로 적용했음을 증명했다” (예일 대학의 Millar Burrows 박사)
“구약 성경 고고학은 모든 나라들을 다시 발견했으며, 중요한 인물들을 다시 소생시켰다” (Merrill Unger 박사)
“지난 19세기 후반기를 휩쓸었던 성경 회의론자들의 비판에 관하여 고고학이 그 허구성을 증명함으로써 고고학은 그 권위를 확립했다.” (Frederic Kenyon 박사)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의 어느 고고학적 발견이 성경과 상반된 적이 없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소유한 어떤 역사책보다도 가장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다.” (호주 고고학 연구소 소장 Clifford Wilson 박사)
"성경의 기록을 부인한 고고학적 발견은 전혀 없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수많은 고고학적 발견물들이 성경의 역사적 진술들을 개괄적으로, 혹은 세세하게 확증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팔레스타인 고고학의 가장 위대한 권위자Nelson Glueck 박사)
"증거를 탐사할 수 있는 곳은 어느 지역이든지 다 조사해도, 성경은 총체적으로 믿을 만한 것임을 분명히 해준다. 사실상 어떤 고고학적인 발굴도 성경적 참고가 필요함을 부정할 수 없다. 고고학적 탐사를 할 때 성경에서 정확하고 자세하게 언급된 곳이나 명확한 한계를 지은 곳에서 하나씩 결실을 보았다. 게다가 성경기록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따라 진행한 탐사는 자주 놀라운 발굴로 유도해 주었다. 이런 탐사는 거의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한 성경의 역사적 기억으로 구성된 방대한 모자이크를 한 칸씩 구성해 가는 형세였다.” (Nelson Glueck박사의 <Rivers in the Desert>에서)
“성경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고대 초기 이집트의 역사의 일부가 조작/변개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David Rohl의 <The Genesis of Civilization>, Peter James의 <Entries of Darkness>에서)
“세속의 대부분의 역사 문서들은 편견적이거나 부정확하다. 하지만 오직 성경만은 완전히 신뢰할 만하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의 Robert Wilson 교수)
이러한 추세에 합류해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렌프류 교수는 “고고학의 시대 추정에 새로운 혁명이 진행 중이다.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만 할 것이다” 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아무튼 지금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간에는 불신자들까지도, 성경을 토대로 연구하고 탐험해야만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믿는다고 한다.
당신은 성경이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오류없이 기록된 책이라는 사실을 믿는가?
다른 문헌들의 증거
H. 탈루스 (AD 52년)
역사가 탈루스는 AD 30년 4월에 발생한 신비한 일식 현상에 대해 헬라어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망 당시 발생한 3시간 가량의 이상한 어두움에 대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I. 필레곤
역사가 필레곤은 소아시아의 비두니아 지역 니케아라는 곳에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나 먼지와 흙과 나무 부스러기들이 공중에 솟아오르고, 그 검은 구름이 남쪽으로 흘러서 이탈리아, 희랍, 애굽의 하늘이 어둡게 되었던 사실에 대해 언급합니다. 필레곤은 이 일이 희랍 달력 202번째 올림피아드 4년에 일어났다고 했으므로 AD 33년의 예수님의 사망 시점과 일치합니다.
역사가 탈루스도 이 신비한 자연현상을 기록하며 일식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망하실 때, 하늘이 어두워지고 지진이 있었다고 언급합니다.
이 외에 또 기록이 없을까요?
게리 하버마스(Gary R. Habermas) 박사는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라는 책에서 예수의 생애에 관한 고대 자료는 45개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초기 교리적인 자료 19개, 고고학적 자료 4개, 비그리스도인의 자료 17개, 그리고 신약성경을 제외한 초기 그리스도인의 자료 5개를 일일이 소개합니다.
하버마스는 비기독교인들이 기록한 17개의 자료를 면밀히 분석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7개 자료 대다수가 예수의 생애에 대해 언급하고, 12개 자료가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며, 그 중 6개가 예수의 신성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또 하버마스는 예수의 생애에 대한 45개의 고대 자료 중에서 예수의 실제 생애, 인격, 가르침, 죽음, 부활, 그리고 제자들의 초기 메시지 등을 철저히 분석했는데, 그 결과 예수와 관련된 고대 역사의 사건 기록들은 총 129가지나 된다고 밝혔습니다.
이 모든 고대 자료들을 꼼꼼히 분석한 하버마스는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자신에 대한 역사적 자료들을 많이 가졌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분량의 질적인 자료들을 가진 역사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에 대한 자료는 고대에서 가장 공식적으로 언급된 것이며, 가장 입증된 삶을 보여준다.”
또한 보스턴대학의 하워드 클라크 키(Howard Clark Kee)는 신약성경 외의 자료들을 연구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에 관한 전통들이 이 정도로 다양하게 전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우리는 인류사에 그토록 심오한 영향을 계속 끼쳐온 이 인물의 생애, 가르침, 죽음에 대한 내용들이 명료하면서도 놀랄 만큼 일관되게 정돈되어 있다는 증거들을 갖고 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서만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이해관계가 없거나 오히려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지닌 역사가들조차도 '예수님의 역사적 실존'에 대해서 한결같이 그들의 기록을 통해 확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역사의 인물이었냐 아니냐는 '종교적 믿음'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이는 '역사적, 고고학적 사실'에 관련된 문제로서, 여러 방법으로 이미 확증된 사실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거
예수님의 역사적 실존은 인정하지만 그의 십자가 죽음이나 부활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실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거나, 십자가에 달려 사망하기는 했지만 결코 부활은 하지 않았다거나, 이 모든 사건은 예수의 제자들이 짜고 친 고스톱이라는 등의 '음모론'들을 내세웁니다.
물론, 죽은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음모론들에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믿겨지지 않아서 뭔가 의문을 제기한다면, 최소한 왜 그러한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대략 이런 식입니다. “죽은 사람은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부활은 거짓일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도 사실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인데 바꿔치기를 한 것이다. 성경은 제자들이 조작해서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근거'가 있어서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믿지 못하니까 잘못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를 밝혀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다룬 사복음서에는 기독교에 불리한 내용도 여러 개 나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친형제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행적을 뻔히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신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고,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자신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저술한 사도 바울은 기독교를 지독하게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후 부활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이 거짓이었음을 안 순간, 제자들은 여지껏 예수에게 속았던 것을 알고 떠나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많은 기적을 행하기는 했지만 결국 자신의 죽음도 극복하지는 못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고 그를 추종하던 짓을 그만두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의 제자들의 행적은 정 반대였습니다. 성경 이외의 다른 사료들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가 쓴 '교회사'에는 예수님의 12 제자의 순교일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베드로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 박해를 견디다 못해 돌아오던 중 주님을 만나게 된다. 주님을 본 베드로가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질문하자, 주님은 “네가 도망쳐 나온 로마로 네 대신 가노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갔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주님과 같은 모습을 할 수 없다며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
2. 안드레
헬라에 가서 전도하다가 아가야 성에서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순교했다. 안드레의 달린 십자가는 X형이었다.
3. 야고보
예루살렘에서 헤롯의 박해에 칼로 목이 베여져 순교했다.
4. 요한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부탁하신대로 마리아를 끝까지 모시던 요한은 유대 안에서 전도하다가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게 멸망된 후 에베소로 건너가 전도했다. 그곳에서 온갖 박해와 고문을 받다가 끓는 기름 가마에 넣어졌으나 기적적으로 튀어 나오게 된다. 그를 박해하던 무리는 놀래서 그를 밧모섬으로 귀양 보낸다. 그곳에서 홀로 일생을 보내며 묵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자기 수명대로 살다 자연사로 죽었다.
5. 빌립
소아시아 부르기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찢겨 순교했다.
6. 바돌로매
알메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수없는 매질을 당한 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7. 도마
인도에 가서 전도하던 중 현장에서 군인들이 던진 창에 맞아 순교했다.
8. 마태
이디오피아에서 전도하다가 잡혀 질질 끌려 가면서도 전도를 계속했다. 결국 그들의 칼날에 목이 베여 순교했다.
9. 알패오의 아들 야곱
군중들은 시체나 다름없는 그를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밀어 떨어뜨려 죽였다.
10. 시몬
애굽에서 유대로 돌아와 전도하던 중 군인들이 쏜 화살에 의해 순교했다.
11. 야곱의 동생 유다
파사에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순교했다.
12. 맛디아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관중들이 던진 수많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복음을 외쳤다.
예수님의 12제자의 죽음은 성경 이외의 문서에서도, 이와 같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망과 부활 이후 AD 64년부터,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로마황제 네로, 도미티안, 트라얀, 하드리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셉티무스 세베루스, 막시미누스, 데키우서, 발레리안, 디오클레티안 갈레리우스 등에 의해 조직적이고 잔혹한 기독교 핍박이 있었습니다.
예수믿는 자들은 사자의 먹이로 던져지거나 화형, 십자가형으로 살해되었지만 순교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순교'를 불사하는 '광신도'들은 어느 종교에나 있어 왔다. 순교자가 많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떻게 그것이 진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이슬람권이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 중에는 교리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바치거나 전재산을 바치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순교나 헌신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거나 목도한 사실’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직후에 불길처럼 번져갔던 기독교의 순교는, 검증되지 않은 '종교적 교리'에 세뇌된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목격되고 확증된 사실'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믿을만한 고대문서인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의 즉음과 부활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12 제자들 뿐만 아니라 500여명에게 나타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가 40일 동안 이 땅에 살아 계시다가 이후 하늘로 승천하는 것이 역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목격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된 그 그리스도 메시야임을 믿고 싶지 않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마 28:12-15)
인류 역사에 단 한번 일어났던 이 사건은 지금까지 무수히 의심되어 왔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자작극이었다고 주장하는 글이 영국 왕립 의과대학의 저명한 저널에 실린 바 있습니다. “모든 사건들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계획되었다… 십자가에서 일찍 끌어내려질 수 있게끔 죽은 척 연기한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테리 왓킨스는 이렇게 반박한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의 제자들이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증언이 거짓임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거짓 증거를 퍼뜨리고 다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부지중에 속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인 줄을 뻔히 알면서 말이다. 그 거짓 증언을 위해서 투옥되고 죽음까지도 감수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이 얻어맞고 모욕당하고 유죄판결을 받고 신성모독죄로 최고형을 받으며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를 따르던 자들의 모임이 와해되기에 충분한 매우 불리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직접 목격하고는 정반대의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겁을 내어 도망갔던 자들이, 이제는 구타와 위협과 투옥과 죽음을 불사하며 그들이 직접 목격한 것을 증언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신이 예언했던 그의 부활을 실제로 목격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라” (고전 15:14,15)
그린리프 박사는 하버드 대학의 로얄 교수이자 법학계 최고의 석학으로서 그의 저서는 최고의 법학고전으로 꼽힌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허구라고 믿고 그 허구성을 폭로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부활에 관한 자료들을 꼼꼼히 탐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예상과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린리프 박사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법적 증거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상 증거가 가장 확실한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드디어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렸다. 그리고 <An Examination of the Testimony of the Four Evangelists by the Rules of Evidence Administered in the Counts of Justice> 라는 책을 써서 예수 부활의 진실함을 증거했다.
옥스포드 대학의 길버트 웨스트와 로드 리틀톤도 기독교는 말도 안되는 허구의 신화일 뿐이라고 믿고 기독교 신앙을 반박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증거들을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조사하다 보면 기독교 신앙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증거를 조사한 후 그들도 정반대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상 가장 확고부동한 사실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Observations on the History and Evidences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라는 저서를 남겼다.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 주임 교수이자 많은 저서로 유명한 토마스 아놀드 박사는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는 일에 능숙한 석학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은 여러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고 이에 관해 글을 남긴 사람들이 제시한 증거의 신빙성을 가늠하는 일에 다년간 몸담아 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표적, 즉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보다 더 탁월하고 완벽한 증거로 입증되는 사실을 나는 인류 역사상 단 하나도 알지 못한다.”
영국의 재판장 달링 경도 부활의 증거들을 조사해 본 후 이렇게 증언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본질적이든 부수적이든, 부활의 증거는 압도적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러니 최소한의 지성을 갖춘 곳이라면 세상의 그 어느 법정이라도 부활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판결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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