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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전쟁 ( 남방왕 VS 북방왕 )

열려라 에바다 2024. 12. 10. 11:02

시리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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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3. 제1차 시리아 전쟁(BC.274 ~ BC.271)

4. 제2차 시리아 전쟁(BC.260 ~ BC.253)

5. 제3차 시리아 전쟁(BC.246 ~ BC.241)

6. 제4차 시리아 전쟁(BC.219 ~ BC.217)

7. 제5차 시리아 전쟁(BC.202 ~ BC.195)

8. 제6차 시리아 전쟁(BC.170 ~ BC.168)

9. 이후

 

1. 개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두헬레니즘 제국의 거성인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코엘레-시리아와 레바논,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6차례의 전쟁. 이거 말고

 

2. 배경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원으로 바빌론을 점령하고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한 셀레우코스 니카토르는 입소스 전투 이후 안티고노스가 가지고 있던 동방 영토를 차지하고

이후 프톨레마이오스와 함께 안티고노스의 아들인 데메트리우스를 공격하여 기원전 287년에 데메트리우스를 죽였다. 기원전 282년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죽자 그의 차남인 필라델포스가 파라오에 즉위하고 장남인 케라우노스와 딸 리산드라가 셀레우코스에게 투항하여 리시마코스를 공격할 것을 종용했다. 이를 받아들인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281년에 벌어진 코루페디움 전투에서 리시마코스를 전사시켰으나 리시마코스가 죽자 셀레우코스를 암살한 케라우노스가 마케도니아 왕좌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케라우노스는 그리스와 아나톨리아로 이주하는 켈트족에게 살해되고 셀레우코스 니카토르의 장남인 안티오코스 1세가 갈라티아를 격퇴한 데 이어 그리스에서 근근히 버티던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켈트족을 격퇴하면서 안티고노스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라는 3왕국 체제가 성립된다.

 

3. 제1차 시리아 전쟁(BC.274 ~ BC.271)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우세하의 무승부셀레우코스 제국의 세력 확장을 도모한 안티오코스 1세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지배하고 있는 시리아 해안과 아나톨리아 남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오코스가 빼앗은 영토를 모두 되찾았고 오히려 카리아와 시리아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프톨레마이오스가 시리아에 가있는 동안 키레나이카의 마가스 왕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안티오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휴전이 성사된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4. 제2차 시리아 전쟁(BC.260 ~ BC.253)

셀레우코스 왕조의 우세하의 무승부기원전 261년, 안티오코스 1세Antiochus I Soter(BC.324 ~ BC.261)가 사망하면서 그의 차남인 안티오코스 2세Antiochus II Theos(BC.284 ~ BC.246)가 즉위한다.[1]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2세는 에게 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안티오코스 2세에게 함대를 지원하였으며, 마케도니아 해군이 기원전 261년의 코스 해전(Cos of Battle)에서 이집트 함대를 괴멸시키자 해군력을 상실한 이집트는 팜필리아와 이오니아 지방을 잃고 안티오코스 2세는 밀레투스와 에페수스를 점령한다. 그러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코린토스와 칼키스를 선동하여 마케도니아에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고 안티고노스가 그리스로 철수하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안티오쿠스2세에게 빼앗긴 소아시아의 영토를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제해권은 회복할 수있었다, BC253년 프톨레마이오스2세는 안티오쿠스2세와 화친을 맺고 소아시아 해변에서 시리아의 우위를 인정 했다. 이평화보약의 일환으로 기원전 253년에 이집트와 강화를 체결한 안티오코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인 베레니케와 결혼하였다. 안티오쿠스2세는 이결혼으로 위하여 전부인 라오디케와 이혼 하였다,

베레니케1세는 시라아 남부를 지참금으로 가져갔고, 안티오쿠스2세는 베레니케2세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후계자에게 왕의흫 계승하기로 약속하였다,

5. 제3차 시리아 전쟁(BC.246 ~ BC.241)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결정적 승리안티오코스 결혼한 의 딸 베레니케는 안티오코스Antiochus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게 된다. 기원전 246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겨우 39세의 나이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안티오코스 2세와 함께 에페소스에 있던 라오디케 1세Laodice I[2]가 프톨레마이오스 2세 사후 안티오크에 있던 베레니케와 베레니케의 아들인 안티오코스를 살해한다. 같은 해,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죽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가 즉위하였다. 안티오키아로 와서 안티오코스를 왕위에 앉히게 도와달라는 베레니케의 요청을 받은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여동생인 베레니케가 라오디케 1세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티오코스 2세와 라오디케 1세 사이의 장남인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포스를 고용하여 시리아와 아나톨리아의 셀레우코스 세력을 공격하였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인 안티오키아까지 함락시킨 기세를 몰아 바빌론까지 진격했지만 안티고노스 2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해군과 벌인 안드로스 전투Battle of Andros(BC.246)에서 키클라데스 제도를 빼앗긴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셀레우코스 2세에게 절망적이었는데 정작 제3차 시리아 전쟁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라오디케 1세가 셀레우코스 2세의 동생인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를 앞세워 아나톨리아에서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결국 기원전 241년의 강화 조약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인 안티오크의 외항 셀레우키아를 비롯한 시리아 북부 지역을 차지한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치세에 전성기를 맞게 되었고 셀레우코스 2세는 이집트와의 종전 이후 어머니 라오디케 1세와 동생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를 상대로 내전을 벌이게 된다.[3]

 

6. 제4차 시리아 전쟁(BC.219 ~ BC.217)

셀레우코스 왕조 우세하의 무승부기원전 235년에 벌어진 앙카라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2세에게 승리한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아나톨리아 영토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29년에 하르파소스 전투에서 페르가몬의 왕 아탈루스 1세에게 패전한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자신이 도주한 트라키아에서 살해되었고 셀레우코스 2세 또한 2년 뒤인 기원전 225년에 사망한다. 셀레우코스가 죽자 그의 장남인 알렉산드로스는 즉위 후 셀레우코스Seleucus III Ceraunus로 이름을 개명하고 페르가몬의 아탈루스 1세를 정벌하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진군했으나 기원전 223년에 셀레우코스 3세가 암살되면서 마침내 그의 동생인 안티오코스 3세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여섯 번째 왕으로 즉위하였다.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반란을 진압한 안티오코스 3세는 간신 헤르미아스를 죽인 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사후(BC.222) 파라오가 된 프톨레마이오스 4세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안티오코스 3세의 등장으로 시리아를 되찾은 셀레우코스 왕조와 달리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불신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간신 소시비오스가 이집트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탓에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왕권은 미약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시리아로 진군한 안티오코스 3세는 제3차 시리아 전쟁에서 상실한 영토를 탈환한 뒤 이집트를 침공하였으나 라피아 전투에서 의외로 선전한 이집트군에게 패전하면서 이집트의 영웅이 된 프톨레마이오스 4세와 강화를 맺는다.

7. 제5차 시리아 전쟁(BC.202 ~ BC.195)

셀레우코스 왕조의 승리라피아 전투 이후 소아시아에 남아있는 반란자 아카이우스4]를 죽이고 동방 원정을 감행한 안티오코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 사후 다시 내분에 빠진 이집트를 침공하였다그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어 이집트 이외의 영토를 정복하고 공유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요르단 강 인근의 파니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에 개입하기 시작한 로마가 필리포스 5세와 안티오코스 3세에게 이집트 자체를 침공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로마가 이집트에서 많은 곡물을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딱히 이집트 본국을 침공할 생각이 없던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의 요구를 받아들인 뒤 이집트가 점령한 카리아와 킬리키아 해안으로 군사를 돌린다. 내분으로 혼란을 겪던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안티오코스가 코엘레-시리아를 차지하고 안티오코스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1세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는다.

▲ 여기5차 전쟁서 유대지역이 북방왕에게로 넘어간다.

 

8. 제6차 시리아 전쟁(BC.170 ~ BC.168)

▲ 셀레우코스 왕조의 승리, 로마의 간섭으로 무용지물안티오코스 3세가 마그네시아 전투의 패전으로 아나톨리아 영토를 상실한 뒤,

그가 안정시킨 동방 영토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섭정인 에우라이우스와 레나이우스는 셀레우코스 4세(BC.218 ~ BC.175) 사후 왕위에 오른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에게 전쟁을 선포하였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6세가 공동 통치자로 임명된다.

그런데 정작 안티오코스 4세가 이끄는 셀레우코스군이 키프로스와 멤피스를 함락시키고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까지 진격하는 기염을 토하자 이집트인들은 전쟁을 일으킨 에우라이우스와 레나이우스를 전복하고 새로운 섭정으로 코마누스와 키네아스를 선출했다.안티오코스 4세는 그의 조카인 프톨레마이오스 6세로 하여금 이집트를 속국화하려고 했으나 이에 반발한 이집트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유일한 통치자로 선포했고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한 안티오코스 4세는 겨울이 되자 군사를 물린다. 안티오코스 4세가 물러나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서로 화친하였고 이렇게 되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꼭두각시로 삼아 이집트를 통제하에 두고자 했던 안티오코스 4세는 다시 이집트를 침공한다.

그러자 이집트는 동맹국인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고 원로원은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를 외교 사절로 파견한다. 그런데 라이나스는 안티오코스 4세에게 즉시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철수하라며 모래 위에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원을 그릴 때 까지 철수할 것인지 로마와 전쟁을 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강요하였고 로마와의 전쟁을 원치 않았던 안티오코스 4세는 울분을 삼키며 결국 자신이 점령한 영토를 토해내고 물러나야만 했다.

9. 이후

제6차 시리아 전쟁을 마지막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전쟁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이집트는 사실상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유대의 마카베오 반란 이후 파르티아 원정을 떠난 안티오코스 4세가 죽자 셀레우코스 왕조는 기나긴 내전에 휘말리고 메소포타미아와 메디아를 탈환한 안티오코스 7세의 죽음을 끝으로 완전히 몰락한 셀레우코스 왕조는 주변국들의 완충지대가 되어 명맥을 이어가다가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면서 멸망하고 만다.

[1] 안티오코스 1세의 장남인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267년에 역모혐의로 처형되었다.

[2] 셀레우코스 니카토르의 차남이자 안티오코스 1세의 동생인 아카이우스Achaeus의 딸

[3] 라오디케 1세는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4] 셀레우코스 니카토르의 차남인 아카이우스의 손자.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셀레우코스 제국의 황제 안티오쿠스 3세 대제가 기원전 203년에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으면서 그리스와 엮이게 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안티오쿠스와 필리포스는 상호 협력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어린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땅을 정복하고자 했다.

기원전 200년, 〈크레타 전쟁〉에서 필리포스와 싸우고 있었던 두 동맹국인 페르가몬과 로도스가 로마에 도움을 청하자 로마는 처음으로 그리스의 내정에 개입하게 되었다. 이 요청에 응하여 로마는 그리스에 군대를 보내어 마케도니아를 공격했다.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기원전 196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아이톨리아 동맹을 포함한 로마와 동맹국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필리포스를 물리쳤다. 조약의 내용에 따라 필리포스는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로마 동맹이 되었으며 로마는 그리스의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한편, 안티오커스는 제5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01년 – 기원전 195년)에 코엘레-시리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와 싸우고 있었다. 안티오쿠스의 군대는 기원전 201년에 〈파니움 전투〉에서 이집트 군대를 격파하고 기원전 198년에 코엘레-시리아는 안티오쿠스의 손에 들어갔다. 안티오쿠스는 그 때 실리시아, 리키아 및 카리아에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재물을 약탈하는데 집중했다. 소아시아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재물을 약탈하는 동안, 안티오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해안 도시를 점령하고 필리포스를 지원하기 위해 함대를 보냈다. 로마 동맹군이자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가진 로도스는 놀라서 안티오쿠스에게 특사를 보냈다. 그의 함대가 시칠리아의 켈리도나이를 지나친다면 필리포스가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안티오쿠스는 그 경고를 무시했고, 계속 해군을 이동시켰지만, 로도스는 필리포스가 키노세팔라이에서 패하여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행동하지 않았다.

기원전 195년, 안티오쿠스의 딸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결혼으로 평화가 찾아왔다. 안티오쿠스의 손은 이제 아시아 문제에서 벗어났으며 그는 유럽으로 눈을 돌렸다.

 

한편,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와 싸운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은 카르타고에서 티레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로마와 전쟁을 벌이려고 하는 에베소에 있는 안티오쿠스의 궁전으로 피난처를 옮겼다.[1]

그리스에서의 계속된 로마의 영향력은 아이톨리아의 반감을 샀다. 친헬레니즘파 집정관인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이하 플라미니누스)가 ‘그리스의 자유’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자신들이 그리스 지배의 핵심지역이라고 주장한 칼키스와 데메트리아스에 주둔해 있었다. 그들은 또한 이전에 동맹의 일부였던 에키누스와 파르살로스를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재통합을 막은 것에 분개했다. 기원전 195년, 로마가 스파르타를 침범하기로 결정했을 때, 아이톨리아는 로마가 그리스를 떠나길 원했고, 스파르타와 거래를 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이톨리아의 힘이 커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아카이아 동맹은 거부를 했다.[2] 현대의 사학자 에리히 그루엔은 셀레우코스의 왕인 안티오쿠스 3세가 그리스를 침공할 때 스파르타와 아이톨리아 동맹이 그와 결탁하지 못하도록 로마가 그리스에 군대를 주둔할 명분으로 전쟁을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195년, 스파르타를 물리쳤으므로,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이듬해 그리스에서 철수했다. 기원전 192년, 세력이 약해진 스파르타는 아이톨리아에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아이톨리아는 이 요구에 1,000명의 기병 부대를 보냄으로써 응답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한 후에, 이 병사는 나비스를 암살하고 스파르타를 장악하려했지만, 오히려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군사적 충돌

기원전 192년, 전쟁이 발발한 에개해

셀레우코스 제국과 동맹

로마 공화정과 동맹

중립 도시

아이톨리아 동맹의 도시를 중심으로 그리스에서 반로마 정서가 조성되었기 때문에, 안티오쿠스 3세는 군대를 이끌고 헬레퐁트를 건너 ‘해방’을 계획했다. 안티오쿠스와 아이톨리아 동맹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아카이아 동맹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로마는 테모필리에서 안티오쿠스를 물리친 군대를 그리스에 보냄으로써 침공에 대응했다.

이 패전은 치명적이었으며, 아티오쿠스는 그리스에서 철군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에게 해를 가로 질러 그를 추적했다. 로마–로디아 연합 함대는 〈에우리메돈 전투〉와 〈미오네수스 전투〉에서 한니발이 지휘한 셀레우코스 함대를 격파했다. 소아시아에서 몇 번의 교전 이후, 셀레우코스는 마그네시아에서 로마와 페르가몬과 교전을 벌였다. 로마-페르가몬 육군은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안티오쿠스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그네시아에서의 승리와 시리아 전쟁이 끝난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동안, 집정관인 만리우스 벌소는 트라키아에 있는 사이프셀라 근처에서 곤경에 처했다. 로마군과 조력군들이 길고, 협소한 나무가 우거진 숲을 따라 행진할 때, 약 1~ 2만 명에 이르는 트라키아 부족에게 공격을 당했다. 그들은 마차가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후속군이 나타나기 전에, 공격대를 공격하였고, 행렬 중앙의 수화물을 약탈했다. 마차를 탄 병력과 후속군이 중앙으로 달려오면, 혼전을 계속했으며, 해질녘 철수할 때까지 기습을 가했다.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다.

 

아파메아의 평화[편집]

아파메아 조약 이후의 영토 변화

셀레우코스 제국

페르가몬

로도스

전투는 셀레우코스에게 재앙이었고, 안티오쿠스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파메아 조약〉의 조항들 가운데, 안티오쿠스는 전쟁 배상금으로 은 15,000 달란트(450톤 / 990,000 파운드)를 지불해야했으며, 타우루스 산맥 서쪽의 영토를 포기해야 했다. 로도스는 카리아와 리키아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페르가몬은 리키아 북부와 소아시아의 안티오쿠스의 다른 모든 영토를 얻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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