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빈 들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살아봐요 = 누가복음01;67-80(250119)

열려라 에바다 2025. 1. 17. 13:16

한상원목사추천 1조회 4925.01.16 11:28댓글 

 

PW : 믿음            BIW : 빈 들에서 살라             AG : 신앙인

TS : 믿음이란 빈 들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폭풍우 속의 평안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평화를 주제로 그림을 그려오도록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학생들이 그려온 그림 중에서 두 작품이 우수한 작품으로 뽑혔습니다.

한 학생이 그린 그림은 쳐다보기만 해도 평안을 느끼게 하는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풍경이었습니다.

마을 앞에는 잔잔한 시내가 흐르고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진돗개 한 마리가 초가집 마당에서 한가로이 졸고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그 그림은 슬쩍 보기만 해도 아주 평화스러워 보이는 반 면에, 또 하나의 다른 그림은 아주 다른 평안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폭풍우가 무섭게 몰아치는 높은 벼랑의 모습이 이 그림의 배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깎아지는 벼랑의 틈바구니 속에 깊이 패어진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어미 새의 품 안에서 새록새록 잠들어 있는 아기 참새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바로 이런 평안입니다.

세찬 폭풍우 속에서도 고요하게 잠을 잘수 있는 평안은 하나님께서만이 줄 수 있는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로 이런 평안을 주고 싶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엄동설한처럼 추운 계절에 온갖 거짓 소식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고 우리 후손들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나라를 물려주어야 할 자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태풍과 같은 위기 속에 있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든든하게 지켜주시고 막아주시고 건져주셔서 지금의 위기를 또 다른 성장의 기회로 세워주시리라 굳건하게 믿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P4

 

어린 시절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고 자라고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는 것이다.

사람들마다 자라는 환경과 여건은 같을 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각자 처한 여건이나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천차만별로 다른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요한은 어떻게 자랐을까?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계획하시는 구령의 꿈과 비전이라는 사역에 사용하기 위하여 이 땅으로 보낸 요한은 어떻게 자랐을까?

요한의 어린 시절은 어떻게 지냈을까?

 

D4.

 

 성령 충만을 입혀주시는 하나님.

 

67절에서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라고 소개하고 있다.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령에 충만함을 입혀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사가랴에게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고 충만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사가랴, 엘리사벳, 요한, 마리아, 요셉, 예수님을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할 수 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자신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을 사용하셔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주권과 섭리하심을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신 것처럼, 성령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의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인의 전 인격적인 모든 것들을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의 손과 발, 귀와 코와 입, 가슴과 마음과 영혼, 피부 하나하나까지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의 오감(五感)을 사용하셔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온전하게 세워가며,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자신의 모든 것들을 주님의 나라와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내어드릴 수 있도록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추진하는 구원의 세계를 펼쳐가시는 하나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가랴의 입에서 68-75절에서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가랴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언약한 메시야가 찾아오시는 시기가 가까이와 있음을 선포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주신다고 수없이 말씀하신다.

이제 구약에서 예언하셨던 메시야가 곧 찾아오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메시야가 찾아오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펼쳐나가시는 구원의 세계가 활짝 열리고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메시야가 찾아오신다는 것은 빼앗겨 버린 하나님의 나라,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가 메시야가 오심으로 인하여 회복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하게 회복되고 세워지고 완전케 되어간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하게 회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케 된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빼앗기고 잃어버린 근본적인 원인, 곧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씀이다.

결국은 메시야가 찾아오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지도록 만들었던 근본적인 문제, 죄의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된다는 말씀이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도 회복되고, 잃어버린 생명나무도 회복되고, 잃어버린 행복도 회복된다는 의미이다.

메시야가 찾아오심은 죄와의 싸움을 선포하는 것이다.

메시야가 찾아오심은 마귀, 사탄, 악한 영들과의 싸움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펼쳐가시는 구원의 세계는 메시야가 찾아오심으로 죄악과의 싸움, 악한 영들, 마귀,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승리를 주시는 것이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돈으로도, 권력으롣, 명예로도, 학벌로도, 탁월한 재능으로도 절대로 구입할 수 없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전 세계 49억의 인구들이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누가 때리기를 하나, 욕을 하나, 집에서 쫓아내기를 하나, 죽이기를 하나, 직장에서 쫓아내기를 하나, 아무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구박하거나 핍박받는 일이 없다.

하지만 지구촌 곳곳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위쪽 동네 북한에만 해도 예수님을 믿으면 죽는다.

중국에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죽는다.

이슬람국가에서는 코란에 예수 믿는 자는 죽여도 된다.”라는 조항이 있다.

그래서 이슬람국가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코란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너무나 쉬운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천국 간다고 하면 너무나 값싼 복음인 것처럼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고 구원받아서 천국 간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해야 하는 일이다.

예수님을 믿겠다고 고백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기적 중에 기적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면 온 몸이 뜨근뜨근하게 달아오르고 벅찬 감격, 감동 가운데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아들의 사역을 예언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가랴의 입을 통하여 75-79절에서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사가랴의 입을 통하여 요한이 어떤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예언하게 하신다.

일반적으로는 요한은 아버지 사가랴 제사장직을 상속받아서 제사장직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한이 아버지의 제사장직을 상속받아서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엘리사벳을 통하여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일반 제사장직이 아닌 선지자직의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를 통해서 이 땅으로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일반적인 선지자들이 감당하는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메시야이신 구원자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보내시면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메시야 사역의 길라잡이 역할을 감당하는 선지자로 세우기 위해서 이 땅으로 보내신 것이다.

요한이 감당해야 할 사명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돕는 자의 사역을 맡기기 위해서 이 땅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은 주인공이 아니다.

요한은 구원자 예수그리스도께서 펼쳐나가시는 구령 사역에 등대, 나침판, 그림자 역할을 수행 해야 할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뿐이다.

어쩌면 요한은 진짜 구원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면 소리소문없이 사라져야만 하는 그림자에 불과한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늙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통하여 요한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요한은 철저하게 구원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돕는 자의 사명이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사역하다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야 할 그림자이다.

실제적으로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신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어 주면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세상에 공포한다.

요한은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 감당하고 헤롯 안디바에 의해서 오늘날 요르단에 있는 마케루스 헤롯의 여름별장에서 순교 당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사가랴는 자기 아들이 앞으로 어떻게 자라서 어떻게 쓰임받고 어떻게 떠나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아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사라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명확하게 예언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고 그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분수를 잃어버리거나 망각하면 그때부터 교만의 굴레에 빠져서 허덕이게 된다.

사람이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에게 할당된 분수대로 사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시지만, 자기 분수도 모르고 망각하여 교만의 틀에 빠져서 허덕이는 자에는 반드시 징계와 심판의 회초리를 사용하시는 분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절대로 교만의 늪에 빠지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절대로 교만할 자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작자들은 자기가 대단한 능력자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교만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아서 자기가 마치 전능한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기를 좋아한다.

마귀, 사탄의 꾀임임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대단한 위인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절대로 교만의 늪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잠시 잠깐이라도 착각하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의 틀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갇혀버린다.

그러면 자기 자신은 절대로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기처럼 겸손한 사람이 없다고 떠벌리면서 교만의 늪에 빠져서 허덕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심판과 징계를 받는 어리석은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하나님께서 항상 자기에게 맡겨 주신 분수를, 처지를, 여건을 잘 헤아리면서 겸손하게 오직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과 뜻을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빈 들에서 직접 양육해 주시는 하나님.

 

80절에서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이는 태어나고 자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특별히 성장 장애가 없는 한, 아이는 태어나고 자라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이다.

어린 요한도 태어나서 자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요한이 몇 살 때까지 살아계셨을까? 하는 것이다.

사가라 부부는 요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늙은 사람들이다.

사가랴 부부가 늙었는데도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은혜를 베풀어서 요한을 낳은 것이다.
유대인 남자아이들은 만 13살이 되면 성인식을 하고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가서 어른들과 살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익히면서 성장한다.

요한도 다른 유대인 남자아이들처럼 만 13살이 되었을 때, 성인식을 거행하고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가서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요한은 사가랴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제사장직을 이어받기 위해서 제사장직에 대하여 배우고 익히면서 자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사가랴 부부는 이미 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요한이 몇 살 때까지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셨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요한이 성인식을 거행할 때까지는 사가랴 부부가 살아계시지 않았을까 싶다.
사가랴 부부가 언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한이 세상에 나타나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때까지 사가랴 부부가 살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간 부모님의 케어를 더 이상 받으면서 자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한은 부모 형제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혼자서 자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80절에서 요한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전까지 빈들에 있으니라.”라고 기록하는 것이다.

 

요한은 엔 케렘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본문에 기록한 빈 들이라고 하는 곳은 엔 케렘 지역에 있는 광야를 말한다.

엔 케렘은 해발 600m의 높은 산과 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에 마을을 형성한 지역이다.

요한은 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빈 들이라고 기록하는 단어는 광야라는 단어와 같다.

헬라어 직역성경에서는 빈 들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광야라고 번역하고 있다.

빈 들에서 자랐다고 하는 말이나 광야에서 자랐다는 말이나 같은 맥락이라는 의미이다.

요한은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하게 태어난 사명자이기 때문에 빈 들에서, 광야에서 자라는 것이다.

요한이 빈 들에서, 광야에서 자랐다고 기록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 하늘의 신령한 영적인 세계를 가르치면서 영적인 훈련을 시키셨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심령이 강하여지며라고 부연 설명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정서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빈 들로, 광야로 나아가라는 격언이 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의식주 문제, 안전의 문제와 같은 모든 것들을 공급받고 생활하면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자는 반드시 광야에서, 빈 들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해 주시는 영적인 양식, 육적인 양식을 비롯하여 모든 것들을 공급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명자로, 선지자로 훈련받고 세워져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금식 기도하면서 하늘 아버지를 만났고, 사도바울도 아라비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엘리야 선지자, 엘리사 선지자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하늘의 신령한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는 것이다.

52어의 기적이나 72어의 이적을 베풀어주셨던 지역도 빈들이나 광야나 외딴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빈 들이나 광야나 외딴 곳이라는 환경은 나쁜 환경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황량하고 허허벌판이고, 돌맹이들만 뒹글고 있고 세찬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환경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빈 들에서,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주시고 직접 그를 양육하시고, 든든한 하나님의 사명자로 훈련시키고 세워가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마치 너무 힘들고 어려운 빈 들처럼, 광야처럼 여겨진다면 좌절하고 실망하고 원망하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좋아하고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빈 들에서, 그 광야에서 전능하신 엘샤다이의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 영의 세계를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빈 들에서, 광야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가장 좋은 처소에 신앙인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빈 들에서, 광야에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면서 깨우쳐 주시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사명자로 세움을 입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신앙인들에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L4 & B4.

 

세례요한이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고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신 후에 빈 들에서 홀로 지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지자로 세움을 입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어떤 빈 들, 광야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을 입어야 할까?

 

고린도후서11:23-27의 말씀에서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바울이 세상 일을 하다가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 아니다.

순전히 예수님을 전하다가, 선교하다가 이런 몰매를 당하면서 산 것이다.

바울이 세상일을 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의 꿈을 쫓아서 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호되게 징계받아서 이랬다.’라고 하소연하고 푸념이라도 할텐데, 순전히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삶, 우리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도의 삶을 살다가 이런 몰매를 당하면서 산 것이다.

사도바울의 삶이야말로 인간적으로 보면 허허벌판과 같은 빈 들에서의 삶이요 광야에서의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바울은 자신이 그런 몰매를 당하면서 살았어도 우리 주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묵묵히 주님을 향하여 기도하면서 어찌하든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온 몸을 불사르듯이 내어주기를 갈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5:9-10에서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말씀하면서 자신이 살아가는 것은, 순전히 하늘 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는 힘도 하나님께서 전폭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은혜라는 힘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빈 들이라는 짐들이 너무나 무거워 보일 수 있다.

사명자라는 빈 들, 선지자라는 빈 들, 목회자라는 빈 들, 사모라는 빈 들, 회장이라는 빈 들, 장로라는 빈 들, 권사라는 빈 들, 집사라는 빈 들, 교사라는 빈 들, 직분자라는 빈 들, 지도자라는 빈 들, 중재자라는 빈 들 등등 갖가지 빈 들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신앙인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빈 들 때문에 너무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그 빈 들 때문에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붙들어 주시고 이끌고 가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서 만나주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허허벌판과 같은 빈 들과 같고 광야와 같이 형편없이 사는 것처럼 여겨져서 한탄하고 주저앉아 있다면 다시 한번 더 오뚜기처럼 칠전팔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들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서 만나주시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빈 들과 같은 삶, 광야와 같은 삶을 주셨다고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가정과 교회와 생활 터전이 마치 빈 들과 같다면 전능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만나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 절호의 기회임을 확신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