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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죄

열려라 에바다 2025. 3. 14. 13:41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죄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교훈으로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요, 기독교인까지도 여기에 유념하지 않는 교훈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는 교훈인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교훈인지를 잘 해득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은 것 같다. 비판은 재판하는 것이다. 사람의 옳고 그릇됨을 정하는 것이다. 그 선악을 단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좁게 말하면 남의 행위에 대해서 이것저것 소문을 내는 것이다. 그것을 크게 말하면 자기 자신의 증오나 애정에 따라서 남에게 법률상의 재판을 선고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특히 신약 성경은 몇 번이나 이 일에 대해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남(하나님)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4)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1-12)

 

이외에도 이같은 내용을 가르치는 성경 구절은 많이 있다. 이렇게 성경은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을 강하게 금하고 있지만, 기독교인으로서 남의 행위를 판단하는 것은 그다지 죄악 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많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부들이, 목사들이 신자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변화시켜 세상을 화평케 하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하고, 정치에 뛰어들어 좌파 아니면 우파 진영에 편승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들의 논리를 가지고 통수권자를 비판하고 정부를 비판하고 정당을 비판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임에도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다. 따라서 더 가관인 것은 사람들은 이러한 성직자들을 하나님의 충직한 사역자라고 박수를 보내는 사실이다.

성경에 “간음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기에 간음하는 사람은 교회가 추방한다. 성경에 “도둑질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기에 도둑은 신자로서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명백히 금하고 있지 않은 음주, 끽연조차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은 신자 가운데서 소외당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죄악에 이르러서는 성경이 명백하게 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계명만은 거참없이 자행하고 있는데 그들을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신부나 목사나 신학자들까지도 이것만은 죄악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듯하며, 보통 신자들이 이 죄를 범해도 깊이 꾸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자유로이 이 일을 즐기며 조금도 죄책감이 없다. 이것은 참으로 기괴하기 그지없는 일이어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사람들은 성경에 적용해 볼 때, 자기 눈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즐겨 남의 눈에 있는 티끌만을 빼내려 하는 자들로서 추잡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실상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이어서 그는 남의 잘못을 비판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나 자기의 잘못을 남에게 씌워서 비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행위는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판단하며 사는 행위로써 반드시 자기 영혼이 죽는 행위임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생명 나무 열매만을 먹고 자란 사람은 선악 개념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 나무의 열매만 먹으시므로 선악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정결한 사람은 남의 죄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제자인 디모데에게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딤전 5:22) 하였다. 그런데 사도들의 교훈을 전승할 기독교 성직자들은 왜 남의 죄에 관심을 가질까?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듯이 성직자가 되었어도 거듭나지 못했기에 평생 남의 죄만 지적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사람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절대로 이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

남의 악한 일을 듣고 그것을 신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사실은 같은 악이 자기 마음속에 있음을 알고 항상 거기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잠 29:27) 하였다. 사람은 남의 재물을 질투할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어진 덕도 질투한다. 자기의 재물을 자랑하려는 사람은 남의 빈곤을 듣고 기뻐하듯이, 자기의 덕을 자랑하려는 사람은 남의 타락을 듣고 기뻐한다.

세상이 모두 조금이라도 이름이 있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려고 하는 건 죄악 속에 잠긴 인간의 이러한 습성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회가 전적으로 타락한 증거는 많이 있지만, 가장 명백한 건 사회 일반이 남의 타락을 듣고 기뻐하고, 또 설교자나 신문이나 방송이나 평론가들이 사회 개선을 명분 삼아 기꺼이 죄악의 폭로에 종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지한 민중들은 이러한 진영논리에 편승해서 덩달아 독기를 뿜어낸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은 왜 잘못을 말하는 것이 나쁜 것이냐? 한다. 사실은 사실이니 그것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왜 나쁘단 말인가? 사람들은 말하기를 만일 비판받기 싫다면 잘못을 범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 한다. 이것은 정말 타당한 이론인 것 같다. 이러한 이론은 세상의 비평가뿐만 아니라, 훌륭한 기독교 성직자에게서도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문학가, 정치가, 혹은 어떤 한 파의 교계 명사의 설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이것과는 반대되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제 간단히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보아 사람은 왜 남을 비판하면 안 되는가에 대하여 말해보겠다.

첫째, 우리가 남을 비판해서는 안 되는 것은, 우리 자신도 같은 잘못에 빠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완전무결한 존재라면 남의 행위에 대하여 비방하고 심판해도 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누구든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우리는 남의 결점을 지적하고 심판할 권리가 없다.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0-18)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의 속성을 이보다 리얼하게 증언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 7:3-4) 하신다. 만일 세상에서 자기 마음을 잘 감찰하여 그 속에서 하나의 티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면 미친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소경이 아니면 벙어리들이다. 벙어리들이 아니면 귀머거리들이다. 결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우리가 서로를 비판하는 것은 마치 귀머거리가 소경의 결점을 들추어내는 것 같아서 참으로 부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둘째, 비록 세상에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단순히 연민의 정으로 그 단점을 말하면 안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6-37) 하셨다.

한번 생각해 보자. 만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 깨끗하신 눈으로 우리 개개인의 마음을 보시고 사정없이 우리의 단점을 들추어내신다면 어떻겠는가? 도저히 우리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를 어린이나 장애인을 대하는 것과 같은 불쌍한 마음으로 하신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이신 것은, 성경이 자주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또한 우리보다 못한 사람을 볼 때 똑같은 관용으로 보아야 한다.

셋째, 우리는 남의 잘못을 말하는 사이에 얼마나 큰 죄악을 범하고 있는지 스스로 모른다. 비판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성경의 교훈은 무의미한 말일까?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얼핏 보기에는 너무 과격한 말 같이 생각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혀는 참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다. 많은 사람이 참으로 혀를 잘못 놀려서 죽었다. 칼로 하듯이 육체의 생명을 빼앗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무서운 죽음을 죽었다. 혀는 영혼을 죽이는 독이다. 만일 육체의 생명을 빼앗은 사람이 지옥에 떨어진다면, 영혼의 생명을 빼앗은 사람은 얼마나 더 큰 형벌을 받겠는가?

선량하고 티 없는 사람이 죄가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불리어서 드디어는 진짜 죄인이 된 예를 당신들은 모르시는가?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고 있던 젊은 전도사가 선배 목사의 차가운 비판을 받고 아예 전도를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드디어는 그 신앙까지도 버려 극악한 세속인으로 타락한 예는 허다하다. 개인에 대한 욕이나 비방은 절대로 그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악에 빠뜨리는 것이다. 특히 대면하여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헐뜯는 것은 이러한 두려운 결과를 가져오는 데 가장 큰 힘이다.

기독교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몇 사람의 영혼은 그 교인들의 무자비한 비난에 못 이겨 지옥으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가장 완고한 무신론자는 기독교회가 만든 것이다. 가장 교활한 상행위는 성직자를 양성하는 곳에 있다. 아마 미래의 심판에서 제일 무거운 살인죄의 형벌을 받을 사람은 기독교의 신부나 목사 중에서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넷째, 그러나 그것은 그렇다 하고, 우리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다른 깊은 이유가 있다. 우리는 남을 비판하면 안 될 뿐만 아니라 절대로 정당하게 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하였다. 또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5-18) 하였다. 이와 같이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것이 악인지 선인지 분별이 되지 않는다.

하늘로부터 거듭나지 못한 인간은 자신의 마음조차도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더욱이 남의 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을 알 수 있는 건 우주의 비밀을 알기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어려운 일을 우리는 하려 든다. 이것이 바로 월권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에는 남을 비판하는 것은 남의 종을 심판하는 것이라고 한다. 남이란, 즉 하나님을 말하는 것으로, 그 대상이 불신자일지라도 하나님의 종인 것이다. 우리가 남을 이것저것 비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종을 비판하는 것이다. 종을 심판하는 이는 그의 주인이다.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그의 조물주이시다. 우리는 남을 심판할 권리도 능력도 없다. 다만 하나님의 법을 준행해야 할 존재들이다.

특히 사람에게는 각자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의 결점은 그만의 결점이 아니다. 그는 그 몸에 그의 부모의 죄악, 그의 조상 대대의 죄악, 그의 사회의 죄악을 모두 짊어지고 산다. 사람 하나를 다 알려면 인류 전체의 역사를 죄다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전능한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하며 함부로 남의 행위에 심판을 내린다. 우리는 얼마나 교만한가? 조선의 역사도 온전히 모르는데 인류의 역사를 모두 알고 있는 듯한 얼굴로 우리의 이웃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숨기고 싶지 않은가?

이렇게 남을 비판하는 행위는 큰 죄악이다. 이것은 도둑질이나 살인, 간음하는 것과 같은 죄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죄를 범하고는 사실은 사람 앞에도, 하나님 앞에도 설 수 없는 존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르는 교회라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성직자부터 추방해야 한다. 그러면 교회는 좀 정화될 것이다. 살인죄를 범한 자를 절대로 성직자로 받들지 않듯이, 즐겨 남의 나쁜 점을 성토하는 성직자는 교회에서 내쫓아야 한다. 남을 비판하는 죄,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죄라는 것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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