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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역사 간단정리

열려라 에바다 2025. 2. 3. 10:13

로마역사 간단정리            

로마 : 2200년을 존속한 최강국가, 보통 국가는 1000년도 넘기기 어렵다.

고대 로마 : BC753 – AD476
로마 왕국~서로마 멸망까지 포함하는 시대의 로마 문명을 말한다.
로마왕국-로마공화정-로마제국

서로마 제국 : AD395 – 476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두 아들이 일으킨 이른 바, 동서분할로 인해 세운 고대 서로마제국이다.
395-476년까지 80년 존속했다.

동로마 제국 : AD330 – 1453(동로마 제국 = 비잔티움 제국 = 중세로마제국)
서유럽 역사가는 동로마를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며, 고대 로마랑 구별 지으려 한다.
그러나 동로마는 로마제국 자체였고, 국가 공식 명칭도 로마제국이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중심으로 발달했다.
로마를 제외한 나머지 4곳이 모두 제국의 동부에 몰려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비잔티움으로 천도한 것도 이미 로마를 비롯한 서유럽이 쇠퇴함에 따라 번성한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긴 것으로 본다.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연장선이다.

신성로마제국 : AD800 – 1806
로마 교황청 정치적 필요에 따라, 게르만 왕국에게 대관식을 통해 서로마 제국 황위를 부여하는 일이 있었다.
이런 관습으로 중세 서유럽 제국인 신성로마제국 탄생했다.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명이 정해지게 된다. 베스트팔렌 체제 이후 사실상 오스트리아의 전신이
되는 독일 민족국가화 되며, 나폴레옹에 의해 실질적인 해체 수순을 밟는다.



BC753 고대 로마건립 추정

BC6세기 귀족이 왕을 몰아내고 원로원 결성하여 공화정 실시

BC264 포에니 전쟁(로마 공화정 VS 카르타고 지중해 쟁탈전)

BC218-201 한니발(BC 247 - 181)은 카르타고라는 나라의 장군이다.
한니발은 코끼리 끌고 알프스 등반했다. 당시 로마가 강국이었는데, 로마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우는 아이를 나무랄 때 하는 말이, 자꾸 울면 한니발 아저씨가 잡아간다 였다.


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주인공으로, 로마를 멸망 시키려 했다. 카르타고의 전략적 열세를 극복하려고
알프스 산맥을 넘는 과감한 전략으로 이탈리아 본토로 쳐들어가 전설적인 활약으로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 넣었다. 끝내 실패하고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명장으로 칭송 받는다.


BC100 공화정→황제 넘어가는 시기, 카이사르 율리우스(100-44)=반대파에게 암살당함.
로마공화정→로마제국 변화의 결정적 역할 : 안토니우스(83~30)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불륜, 안토니우스 아내였던 옥타비아와 오빠였던 옥타비아누스와 사이 나빠졌다.


BC31 악티움 해전, 안토니우스+이집트 클레오파트라 VS 옥타비아누스(승)


AD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황제 1대(눅2:1)
디베료 가이사(티베리우스) 황제 2대(눅3:1), 본디오 빌라도 유대총독(눅3:1)
복음서 대부분 디베료 가이사 = 가이사 가이사에게, 예수님 처형 당시도 디베료 가이사가 황제


AD44 야고보 순교 – 헤롯 아그립바의 칼날


AD64 로마 대화재 발생, 원인 몰라, 범인 네로 추측. 네로는 그리스도인에게 뒤집어 씌움.
AD66-73 1차 유대로마전쟁
유대인은 예루살렘 주둔한 로마 요새를 공격 한다.
네로황제(54-68)에게 보고,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는 6만명 끌고 진압 간다.
당시 유대인 지도자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과 그의 아들 티투스를 만나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당신가 당신의 아들은 로마의 황제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네로는 68년 6월 9일 31세에 자살했다. 그리고 로마 원로원은 베스파시아누스를 선택한다.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 즉위를 위해 돌아 가야했다. 임무는 티투스가 맡았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완전히 포위하고 식량과 물자 공급 없이 5달 흐른다. 생지옥이었다. 요세푸스는 기록을 남겼다.
“굶주린 사람들은 손닿는대로 뭐든지 씹어 먹으려 들었다. 짐승들도 쳐다보지 않을 쓰레기를 주워 음식으로 삼았다. 마지막엔 허리띠와 신발, 방패에서 벗겨낸 가죽까지 씹어 삼키고 있었다.”(요세푸스, 유대전쟁사)
성전은 한쪽 벽만 남겨둔 채 처참히 불탄다.
예루살렘을 둘러싸던 그 성벽의 남은 것을 제외하고는, 로마군은 심지어 기초까지 파내 철저히 무너뜨려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거의 지워버렸다. 그들의 혁신적인 광기로 인해 대단히 장엄하며 모든 인류에게 위대함을 선사했던 도시, 예루살렘은 그렇게 종말을 맞았다.(유대푸스, 유대전쟁사)


마사다=(히, 요새),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된 장엄한 요새는 비극적 역사가 있다.
이스라엘 남쪽 유대 광야 동편, 사해를 바라보며 해발 434M 솟은 마사다는 가파른 절벽, 난공불락 지형이며,
75만리터 물이 저장된 12개 저수지를 갖춘 요새다. 로마가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유대인 반란군이 저항을
계속하려고 선택했다. 사람은 적었으나 지형적인 문제, 거센 저항 때문에 쉽지 않았다. 2년 지속되었다.
마침내 로마 군단은 높은 요새를 공격하도록, 마사다와 같은 높이의 성채를 쌓기 시작했다.
유대인 6천명을 노예로 동원, 동족을 공격할 수 없어 지켜보았다. 결국 완성 되어 73년 마사다는 무너진다.
요새의 유대인들은 합의하에 서로를 죽이고, 마지막 남은 사람은 자살한다.
마사다 정복을 지휘한 사령관 플라비우스 실바는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마사다를 정복했지만, 유대인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마사다를 기억하라!” 마사다는 지금도 이스라엘 군사학교 훈련코스다. 유대-로마 전쟁은 막이 내린다.
수 만명 유대인 죽고, 노예 팔리고 희생되었다.


AD70 유대 반란군 전쟁으로, 로마는 유대인 학살 추방 했다.
거의 유대교가 사라질 뻔 했으나, 바리새인 지도자 “요하난 벤 자카이”가 유대교 재건
유대 전통을 바리새인들이 세웠다.(정경채택, 탈무드, 미쉬나 등) 에세네파 소멸했다. 사두개인 도피했다.


AD79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이어, 10대 황제로 티투스 황제(79-81)가 된다.
티투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로마노 광장에 거대한 개선문을 새운다.(티투스 개선문)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 인구 3명만 죽음, 화산재에 덮혀 폼페이는 1500년 지나서 발굴


AD85 말시온 이단 출현 – 예수는 사람이다, 영지주의


5현제, 로마의 최전성기를 이끈 현명한 황제
12대 네르바(96-98) / 13대 트라야누스(98-117) / 14대 하드리아누스(117-138)
15대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 / 16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16대 마르쿠스는 국경 침범 야만족 때문에 전쟁터에서 인생을 보냈다.
17대 아들 코모두스 때는 국방력 세퇴, 제국은 혼란이었다.

AD235-284 약 50년 동안 26명 황제가 추대, 폐위 반복했다. 이 시기도 로마제국은 동서 구분 있었다.
서쪽 = 이탈리아 반도, 로마의 법, 언어, 문화 계승하며, 라틴어 쓰는 로마인
동쪽 = 그리스 문화 계승하며, 그리스어도 사용, 헬라 제국 정벌하여 확장된 영토

 

 

국경 방어 부담 느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는 2지역으로 나눴다.
정하제 : 디오클레티아누스=동방, 막시미아누스=서방 / 부황제 :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305년 두 정황제가 은퇴하고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정황제에 오른다.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로마장교시절 만난 헬레나(하녀) 낳은 아들이 콘스탄티누스1세(306-337)이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가 되지만 과정 험했다.
하녀 아들 출신임을 못마땅히 여긴 막시미아누스가 자기 아들 막센티우스를 황제로 추대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VS 막센티우스 / 312년 마지막 전투가 밀비아누스 다리였다.
결국 콘스탄티누스가 승리했다. 그런데 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신전에서 제사 안했다.
전쟁 전날 콘스탄은 기도했다. 하늘에서 십자가를 보고 신비한 음성을 듣는다. “이 표적으로 승리를 얻으리라”
다음날 콘스탄은 명령했고 병사들은 방패에 표적을 그려 넣는다. 그리스도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 첫 두 글자인 X와 P였다. 그리고 승리를 준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기로 결심한다.
문명 세계의 군주가 면류관을 벗어서 십자가에 달렸던 나사렛 예수의 발 앞에 놓았다(필립샤프)
당시 로마는 제우스를 포함해 여러 신을 섬겼다. 방탕한 축제와 잔인한 검투사 경기가 로마에서 벌어졌다.
근데 기독교인 황제의 탄생은 로마에 남은 이교도 풍습의 마침표를 찍었다.


콘스탄 황제와 리키니우스 황제는 밀라노에서 만난다. 리키니우스와 콘스탄의 누이 결혼을 위해서다.
그리고 동시에 밀라노 칙령 공포한다. 기독교인도 로마 고위직에 등용되고, 박해법령도 사라지고,
노예 해방 되고 일요일은 국정 공휴일이 되고, 동전에 새긴 로마신도 사라지고 십자가가 각인 된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수도로 옮겼다. 도시 이름은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정했다.(330)
이는 동로마 수도가 되었고, 동방교회 중심도시 역할을 감당한다.

AD325 니케아 공의회 개최(아리우스주의 정죄, 아타나시우스파 정통인정, 삼위일체 교리)


AD313 콘스탄티누스 황제(306-337),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칙령 발표
= 원하는 종교 인정, 기독교 박해 끝나고 장려 되었음. 사실상 기독교 공인. *콘스탄 엄마 헬레나 독실한 기독교
313년 전에는 기독교 박해 때문에, 신앙 순도 유지. “나 예수 믿고 죽겠다.”
313년 후에는 기독교 박해 끝나니, 타락하고 수도원 생김.
수도원도 혼자 있으면 기독교가 아니다. 공동체 수도원이 생김.(금식, 노동, 잠) 근데 수도원도 타락함.



AD347-395 테오도시우스 1세 : 강력 기독교 정책으로 기독교 역사가들로부터 ‘대제’ 칭호 받음.
테살로니가 칙령(380) : 로마국교 기독교 / 392년 모든 이교적 행위 금지.
문제는 권력의 달콤함에 빠졌다. 귀족 출신 교회 주교, 낮은 자를 섬기고 죄인과 함께하는 교회가 아니다.


AD375 훈족 공격으로 게르만족이 민족 대이동 했다. 게르만족은 로마를 만났다. 황금기 지나 약해진 로마였다.
게르만 족속은 반달족, 부르군트족, 알레만족, 서고트족 등등.


AD395 테오도시우스 사망 후, 로마 제국 동서 분열
서로마(로마교회) 동로마(콘스탄티노플 교회) 분열 / 이유 : 지역적, 종교적 = 누가 머리냐?
서로마 카톨릭교회 : 베드로가 로마 교회의 머리다. 우리는 보편 교회다. (보편=카톨릭) 로마 교회가 더 높다.
동로마 정교회 : 우리가 정통이니 정교회다.(정통교회) 베드로는 교회 머리가 아니다. 모든 교회 동등하다.
가톨릭 : 예수가 성육신 물질이니 성화, 성상 허용
정교회 : 성화는 이미지라 거룩함 드러내는 수단, 성상은 우상숭배 될 수 있어서 거부


AD410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가 서로마 포위하고 약탈했다. 서로마는 수치 경험했다.
최강로마가 북방 야만족 침략에 유린 당했고 세계적 충격이었다.
로마가 고트족에 약탈시 배경으로 “하나님의 도성”이 있다. 로마 함락된 책임은 기독교인 아니다.


AD447 훈족의 아틸라왕은 동로마 침공했고, 452년 서로마 본토에도 왔으나 교회 주교 레오1세가 설득해서 막았다.


AD476 게르만족 “오도아케르”는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폐위 시켰다. 이것이 서로마 종말이다.
동로마는 건재했다. 이때부터 ‘중세’라고 한다.(476-1453) 1000년 중세는 교회가 역사의 중심이었다.
르네상스 주도한 인문주의자들은 서로마 멸망 후, 고대 그리스와 로마 유산 단절되니 중세를 암흑시대로 보았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다. 다만 중세 교회는 지나치게 제도화, 권력화 되며 신앙 변질의 비난을 피할 순 없었다.


AD486 프랑크 왕국 건국


AD480-547 베네딕토 수도사 – <베네딕토 규칙서> = 수도원 교과서 / 똑바로 하자.


AD527 유스티니아누스 동로마 황제(527~565), 법전 편찬(528)=로마법
유스티 황제는 533년 명장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앞세워, 서로마 영토 차지한 이민족과 전쟁 선포한다.
북아프리카 반달왕국, 이탈리아 본토 동고트족, 히스파니아 서고트족 등 정복하고 서로마제국 영토 회복한다.


AD537 하기아소피아성당완공,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명으로 완공했다.
콘스탄티노플은 문명의 중심지였다. 교회 건축에서 외형은 서로마 양식 특징인 아치와 돔이 주를 이루고
내부 장식은 동방 건축의 특징인 화려한 색감과 모자이크로 채워진다.
14-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의 기초를 이룬다.
처음엔 황제 대관식으로 사용, 1453년 오스만에게 뺏기고 1931년까지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
최근까진 튀르키예 정부에 의해 박물관으로 운영 되다가(1935-2020) 다시 모스크로 전환됐다.


AD541 흑사병이 지중해와 유럽, 근동 전체 발병, 동로마에 결정적 타격


AD962 오토대제 신성로마제국 황제 즉위
AD1054 동서교회 완전히 분열된다. 교회의 수위를 빼고 교리는 비슷해서 통합 노력은 있었다.
서로마는 라틴 문화 기원, 라틴어 사용 / 동로마는 그리스 문화 기원, 그리스어 사용했다.
종교적 : 성찬식 어떤 빵 사용? 성직자 결혼허용? 성상 허용? 교리차이 있었는데 정점은 필리오케 논쟁이다.
(필리오케=그리고 아들), 서방교회가 니케아 신경에 이 단어를 넣으려고 하자, 동방교회는
중요한 삼위일체의 교리를 수정할 권한이 서로마와 동로마 중 누구에게 있는지 하는 종교적 권위 문제였다.
그런데 1054년 로마 교황 레오 9세가 특사 자격으로 콘스탄티노플 방문한다. 소피아 성당에 들어가 동방교회
파문한다는 내용의 교황 칙서를 올려놓고 로마로 돌아가버린다. 격분한 동방교회도 서방교회를 파문한다.
개신교 입장에선 모두 카톨릭이라고 보지만, 내부적으로는 오랜 갈등으로 대립하는 관계다.


AD1066 기욤2세 잉글랜드 정복


AD1073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 즉위(1073-1085),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하인리히 4세 황제였다.
당시 영주들은 마음대로 성직자 임명, 교회의 보호자로 행세했다. 이는 교회 지도자들 심기 불편하게 했다.
교회지도자인 주교를 임명하는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서임권 갈등’
교회대표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 VS 국가대표 황제 하인리히4세 붙었다.
황제는 “당장 교황 자리에서 내려올지어다!” 편지를 보냈다.(76년 보름스 공의회)
그레고리우스는 모든 교회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인리히를 왕으로 섬기는 것을 금한다!” 금령을 보냈다.
유럽사회와 교회는 교황을 지지했다. 몇몇 귀족들도 황제를 돌아섰다. 교황이 대세였다.


AD1077 카노사의 굴욕
성탄절을 앞둔 겨울, 교황을 만나러 황제 하인리히4세는 2살짜리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알프스를 넘었다.
당시 교황은 토스카나 백작가문의 영지에 있는 ‘카노사’라는 마을에 있었다.
카노사 성에 도착한 황제는 성의 주인 마틸다와 클루니 수도원 원장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교황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교황의 반응은 싸늘했다.
1월 25일-28일까지 사흘 동안 관을 쓰지 않고 신발도 없이 눈을 맞으며 성문을 두드렸다.
제국의 젊은 황제는 백발의 교황의 발 앞에 엎드렸다. 교황은 황제의 속죄를 받아들이고 파문을 철회했다.
독일 제국의 수장이 로마 주교의 발 앞에 머리를 숙였다.
더 치욕적인 것은 자신의 신하였던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다가 교황과 함께 앉아 자신의 굴욕적 모습을 지켜보았다.
57세 교황, 27세 황제의 이 사건은 카노사의 굴욕이라 불린다. 교황이 유럽의 1인자로 확실히 등극하는 순간이다.


AD1080 하인리히 4세는 7년간 복수를 준비한다.
그리고 훗날 클레멘스 3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추대한다.(1080-1100)


AD1095 투르크족과 이슬람 침략으로,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1세는 로마 교황에게 SOS 쳤다.
11월 클레르몽 마을 수백명 교회지도자가 모였다. 우르바노2세는 당시 대립교황인 클레멘스 3세와 대립했다.
*대립교황 : 교회법에 따라 선출된 교황에 대립하여, 부당하게 교황위를 주장한 성직자. 역사상 37명이나 됨.


교황 우르바노2세는 연설했다.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동방 형제교회를 구해야 합니다. 야만족을 물리치고
예루살렘 성지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교황의 호소에 청중은 감동했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함성이 터졌다. 크게보면 십자군은 유럽과 아시아의 대결이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이다.


AD1095 1차십자군, 1097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멀고 험해 1099년 도착했다.
결국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 함락시키고 승리했다. 성안에 이슬람 사원 초승달은 제거되고 십자가 세워졌다.
이어 이슬람 교도를 3만을 학살했다. 이는 이슬람 세계를 크게 자극했다.


AD1099 2차십자군(1147-1148), 이슬람의 반격
1144년 기독교 영토 에데사가 이슬람에 넘어간다. 에데사 대주교는 처형되었고 2만명 넘게 노예로 팔린다.
기독교인은 충격과 분노를 참지 못했다. 2번째 십자군으로 프랑스왕 루이7세와 3만명 참가한다.
그러나 이슬람의 거센 반발에 예루살렘에는 가지도 못하고 철수한다. 이 시기 이슬람 영웅이 있다.
아랍세계 통일한 술탄 살라딘(1174-1193)이다. 수니파-시아파 분열된 이슬람을 하나로 통일했다.
1187년 10월 살라딘은 예루살렘 입성하고, 88년만에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 도시가 된다.


AD1189 3차십자군, 사자왕리처드(1189-1199) VS 술탄 살라딘
교황 우르바노 3세는 이슬람에게 패배하여 충격 받아 사망한다. 이어
교황 클레멘스 3세는 예루살렘 재탈환을 위해 다시 십자군 일으킨다.
신성로마제국황제 프리드리히바르바로사, 프랑스왕 필리프2세, 리처드1세가 3차 십자군 선봉이다.
리처드 VS 살라딘 1년간 싸웠으나 리처드는 예루살렘 탈환 못하고, 평화조약 맺고 돌아간다.


AD1202 4차십자군, 카톨릭 교도가 콘스탄티노플 약탈(1204) 동서 영원히 통합 불가.
교황 이노센트 3세의 십자군은 예루살렘이 아닌 이슬람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런데 중간에 베네치아에 머물던 십자군은 체류비, 뱃삯이 없었다.
베네치아는 헝가리에게 빼앗긴 ‘차라’ 도시를 공격해서 돌려달라고 십자군에 제안했다.
차라는 원래 베네치아 권에 있었으나, 베네치아 통치를 거부하고 헝가리 왕의 통제에 들어간 도시였다.
제안하고 십자군은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를 공격한다. 교황의 명령을 무시하고 십자군 대표 ‘엔리코 단돌로’는
공격했다. 십자군이 제멋대로 하자 서방의 교황은 십자군을 파문해버린다.
이때 비잔틴에서 추방되어 앙심 품은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4세가 십자군을 찾아와 자기 왕좌를 찾아주는
조건으로 막대한 사례를 약속하며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것을 제안한다.
내부 간첩도 있었고 4차 십자군은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소피아 성당 제단파괴, 성상 훼손, 두 교회의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서 출발했으나 결국 돌아보니 상처뿐인 전쟁이 되었다.


AD1270 8차십자군 전쟁, 루이9세(1126-1270)
십자군은 신앙의 이름으로 헛된 욕망을 부추기고, 전쟁을 위해 구원을 파는 오명을 남겼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속죄를 남발했던 중세교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적나라게 보여주었다.
“전쟁은 인간이 여러 난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할 때 떠올리는 아이디어다.”


AD1321 단테(1265-1321) 신곡


AD1337-1453 백년전쟁


AD1378 교회 대분열(~1417)


AD1440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8-1468) 금속활자


AD1453 오스만 투르크가 동로마 멸망시킴, 러시아가 따로 떨어지고 러시아 정교회로 독립했다.
동방학자는 서유럽 피신, 로마 망해도 이탈리아엔 유적이 많았고 고대 로마 문명은 유럽인에게 여전한 로망이다.
이것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게 자극제였다.
은행가 ‘메디치’는 피렌체에 살았다. 메디치 가문은 4명의 교황과 통치자를 배출했는데 도시의 예술과 학문,
건축 관련하여 전폭적인 후원을 했고, 르네상스가 화려하게 꽃 피운다.
이탈리아 지성인들은 인간 학문과 예술을 통해, 교회 중심인 세상을 벗어나고 싶었다.
르네상스는 14-15세기 이탈리아 배경으로 서유럽에서 일어난 문학과 예술 부흥이다.
‘인간중심’ 돌아가자. re(다시) naissance(탄생) 다시 돌아가자.


또한 이탈리아에서 단테, 다빈치, 미켈란젤로가 태어났다. 천재 미술가들이 등장한다.
1494년 프랑스가 피렌체를 침공하며 피렌체 예술가는 로마로 이동한다.
이후 르네상스 상징적 인물인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는 로마 중심 활동한다.


1.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미술가, 과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도시 건축가이기도 했다.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미술작품 외에도 인간 신체구조 세밀히 연구했다. 위대한 예술가 1명으로 손꼽힌다.


2. 미켈란젤로(1475-1564)도 르네상스 미술의 전설이다.
바티칸 성당의 벽과 천장이 그의 종이였다. 천지창조, 다비드상 등이 있다.
성경을 주제로 하지만, 그 속에서 인간의 육체를 섬세하게 표현함으로 인문주의 정신을 담았다.


AD1492 이탈리아 모험가 콜럼버스 아메리카발견


AD1511 에라스무스(1466-1536)


AD1517 루터(1483-1546, 62세),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반박문, 종교개혁기점 ‘근대’가 열린다.
루터는 도보여행 중 친구가 갑자기 벼락을 맞아 죽는 것을 옆에서 목격했다. 수도원도 갔다.
<수도사의 일과>
새벽2시기상(성서와 수도원 규칙읽기) → 아침6시 기도회 → 아침9시 미사 → 정오12시 미사와 첫식사 →
오후3시 미사 →오후5시 기도모임 → 저녁6시 저녁식사 → 저녁7시 마지막 기도회 → 저녁8시 취침


루터가 자학행위도 했다. 스승인 요하네스 스타우비츠가 자학행위를 삼갈 필요가 있음을 지도 하였다.
1507년 신부로 안수 받고,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 근본 진리를 발견했다.
구원의 진리를 설명할 때, 믿음을 빈손에 비교하곤 했다.(움켜쥐는 것, 믿음은 손을 펴서, 하나님의 은혜 받는 것)
1517년 95개 조항 격문을 붙이기 1달전 테첼이 면죄부를 파는 것을 보게 되었다.


교황 레오10세는 면죄부 판매권을 독일 마인쯔 주교 알브레히트에게 위임했고 그는 테첼에게 팔게 했다.
독일의 최고 연설가, 면죄부 판매 위원장 요한 테첼이 교황의 휘장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면죄부는 하나님의 고귀하고 소중한 선물입니다. 여러분의 부모 형제가 연옥의 고통 중에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찰랑’하고 동전이 돈궤에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서 고생하던 영혼은 천국으로 뛰어오릅니다.”
테첼의 연설에 감동받은 사람들은 면죄부를 사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교황 율리우스2세와 레오10세는 성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해 많은 면죄부를 발행했다.
면죄부는 교회 사업과 건축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루터에겐 노점상이 길거리에서 물건 파는 것처럼 비춰졌다.


AD1521 루터 보름스 의회 출두
당시 지식인과 성직자는 라틴어 사용했다. 민중은 독일어 사용했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어로 쓰인 루터의 글을 읽고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그의 생각에 동조하기 시작한다.
교황은 심기 불편, 루터에게 경고장 보내지만 듣지 않아, 교황은 루터 파문하고 보름스 의회 출두 명령한다.
당시 이미 체코의 얀후스 같은 개혁자들이 고문 화형 당한 전례가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지붕 위에 기왓장들만큼 많은 악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나는 보름스에 가고야 말겠다.”
거기엔 황제 카틀 5세, 교황의 특사들, 권력자들 2만명의 대중들도 있었다.
교황의 일꾼은 물었다. 루터가 쓴 책을 가리키며 책 내용을 취소할 것이냐?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AD1525 츠빙글리(1484-1531) 취리히 의회 미사 폐지
독일 루터 개혁 시작 무렵, 스위스에서 츠빙글리가 등장한다. 1506년 츠빙글리는 사제가 되었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을 읽고, 초기 기독교 문서 연구하며 교회 개혁 필요성 느낀다.
1519년 취리히 대성당 사제로 부임하고 성인숭배, 금식관습, 마리아 숭배를 포함한 가톨릭 전통을 반박한다.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이런 설교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감탄한다.
1523년 가톨릭 지도자는 츠빙글리를 시의회로 소환하여 논쟁한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츠빙글리는 성경을 근거로 모든 논쟁에서 승리한다.
취리히 시의회와 협조하여 교회 성화, 제단의 초, 장식물, 성상과 유물이 제거된다.
그리고 1525년 미사 폐지가 결정된다. 스위스 취리히에는 재세례파를 수장시켰던 곳이 남아 있다.
*재세례파 :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서방교회 전통 허물고 복음위에 급진적으로 재건해야한다는 기독교파.
실제적 농민 고통 부조리 개선하려 했다. 유아세례 반대, 루터 말에 따라 애기는 믿음 없다.
AD1529 오스만 군대가 오스트리아 빈을 포위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에 슈파이어 의회 소집된다.
의회는 외부적으론 이슬람 위협, 내부적으론 종교개혁의 도전 앞에서 교회와 국가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루터 주장을 받지 않기로 결의한다. 그러나 6명의 제후와 도시 대표자 14인은 이런 강압적인 조치를 거부한다.
종교 자유를 제약하는 조치에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세상은 이런 루터파를 “프로테스탄트=항의하는 자들”로 불렀다.
그로부터 개혁자들에게 이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다.


칼빈(1509-1564) / 스위스 제네바 개혁 시작(1541)
프랑스에서 태어난다. 루터와 츠빙글리가 종교개혁 1세대면, 칼빈은 2세대다.
칼빈은 어거스틴 전통을 따르는 동시에 예정 교리로 발전 시키고 기독교 교리토대를 구축한다.


AD1533 헨리8세와 앤불린 결혼
독일과 스위스에서 종교개혁 바람이 불던 때, 영국에선? 왕실 스캔들 있다.
헨리8세(1509-1547)은 권력과 야망으로 6명의 아내와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1번 아내는 스페인 공주 캐서린(카톨릭)이다. 아들 낳아 달라했는데 딸을 낳았는데, 딸이 메리여왕이다.
2번 아내는 궁녀출신 앤불린(개신교)이다. 잉글랜드 새왕비로 맞이했다.


헨리8세는 합법적 이혼을 위해 교황 클레멘스7세에게 결혼 서약 무효화를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헨리8세는 1534년 수장령 발표 : 영국교회 관리권한이 국왕에게 있음을 선포한 법령
교황이 머리 아니고, 국왕이 머리다. 선언하는 “수장령” 선포하고 영국국교회를 만든다.
카톨릭교회의 지도에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격분한 교황은 헨리를 파문한다. 헨리도 수도원 해산과 교회 재산 몰수로 응수한다.
영국 최고 성직인 켄터베리 대주교의 자리에 개신교 지도자인 토머스 크랜머를 임명한다.(결혼지지 때문에)
1534년 헨리 8세가 카톨릭으로부터 분열되는 개혁이다.(성공회 시초)


그러나 안타깝게도 앤불린은 아들 못 낳고 딸을 낳는다. “엘리자베스 튜더” 훗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된다.
이후로도 아들을 못 낳고 버림받아 런던탑에서 참수형 당한다.
평민에서 잉글랜드 왕비로, 다시 왕의 미움을 받아 참수형을 당하기까지 1085일간의 파란만장한 왕비의
인생은 훗날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진다. 그런데 헨리가 마지막으로 호의를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무슨 호의냐?
참수형을 할 때에 “가장 유능한 참수형 집행자” 칼 제일 잘 쓰는 사람에게 맡긴 것이 호의라고 했다.


AD1547 헨리8세 사망, 앤불린의 시녀출신 헨리3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가 낳은 에드워드 6세가 왕이 됐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일찍 죽었고, 첫째부인 캐서린이 낳은 메리 튜더, 최초의 영국 여왕 메리1세다.(1553-1558)
메리 여왕은 아버지 헨리에게 버림받은 어머니 캐서린의 불행을 보며 자랐다.
메리는 열정적 카톨릭 신자였다. 둘째부인 앤불린에 대한 적개심도 가득했다.
메리는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 펠리페 왕과 결혼한다. 이는 카톨릭에겐 기쁨이나, 개신교에겐 재앙의 시작이다.


AD1556 메리는 개혁의 선두주자 토머스 크랜머 화형 시킨다.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에 카톨릭 지도자 레지널드 폴을 임명한다. 당시 메리는 휴라티머, 니콜라스리들리 등 개신교 지도자들과 수백명의 개신교도를 말뚝에 묶어
화형한다. 피의 여왕 메리로 불린다. 개신교도는 생명 지키려고 영국 떴다. 여왕되고 6년 만에 메리는 죽었다.


AD1558 다음은 헨리의 둘째부인 앤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튜더였다. 엘리자베스 1세다.(1558-1603)
이복언니 메리의 무시와 아버지 헨리의 홀대를 견디고 1558년 잉글랜드 국왕 자리에 오른다.
독신으로 말하기를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당시, 영국 셰익스피어(1564-1616)
최고의 극작가 등장했다. 햄릿으로 인간의 감정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묘사했다.


AD1588 영국함대 VS 스페인함대 격돌한다. “칼레 해전”에서 영국함대가 이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카톨릭 VS 개신교 대립으로 혼란함을 알았다.
엘리자베스는 카톨릭 예식과 개신교 신앙이 합쳐진 교회인 본격적 성공회를 공고히 했다.(국가공식종교 선언.)
예배와 성찬에 사용되는 예식은 카톨릭교회이며, 신앙고백과 교리는 개신교를 따랐다.


메리 박해시절 피했다가, 영국 돌아온 개혁자들은 엘리자베스의 성공회에 반대했다.
타협조치를 비판하며 칼빈의 제네바 같은 순수한 개혁교회를 만들 것을 원했다.
그 때, 성공회로부터 까탈스러운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깨끗한 척 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청교도 명칭 생겼다.
그들은 스스로를 청교도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청교도에서 기독교 고전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존번연의 천로역정이 대표적이다.
영국 청교도 무리, 존 녹스가 칼빈의 영향을 받고, 스코틀랜드 돌아와 칼뱅주의적 개혁이 영국에 시작되었다.
영국 캠브릿지 대학생 중심으로 루터 생각을 나눴던 “리틀 저머니 모임”(틴데일도 있다.)


엘리자베스에 이어 잉글랜드 왕이 된 제임스1세(1603-1625)는 가톨릭 옹호자였다. 청교도에게 영국국교회(성공회)를 강요했다. 청교도들은 이주했다. 그리고 믿음의 내용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1643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157명의 개신교 지도자가 모였다. 5년 6개월 동안 성경 8시간 연구하고
토론하며 개신교 신앙 핵심을 문서로 작성했는데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다.(1648)
영국 청교도는 미국 청교도에게 영향을 미쳤다.


AD1560 칼빈의 제자 / 존낙스(1513-1572) VS 메리 여왕
칼빈과 낙스의 영향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탄생한다.


그러나 국왕 찰스1세는 왕권신수설을 내세워 교회 지배권 주장하며 개신교 탄압한다.
1638년 2월 1200명 장로교 성도가 에든버러에 있는 그레이 프라이어스 교회에 모였다.
찰스1세의 폭정에 대항하여 개혁신앙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담아 ‘국가 언약’을 체결한다.
이 문서에 서명한 스코틀랜드 개신교도를 ‘언약도’라고 부른다. 이는 왕권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언약도에 대한 박해가 50년간 이어졌고 18000여명의 언약도가 순교한다.


AD1572 카톨릭교도들이 수천명의 위그노를 학살했다. 프랑스 개신교 신자를 ‘위그노’라 불렀다.


AD1598 개신교 차별 금지하는 ‘낭트 칙령’ 발표하고 위그노는 자유 얻는다.
그러나 루이14세가 낭트 치력 폐기하자, 위그노는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떠났다.
상업과 공업을 주도했던 위그노가 떠나자 프랑스 경제가 악화되고, 이것이 훗날 프랑스혁명의 원인 중 하나다.
위그노에게 종교자유가 인정된 것은 1802년이다.
종교개혁정신은 영국 청교도, 스코틀랜드 언약도, 프랑스 위그노에게 계승 발전되었다.
유럽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는데 이를 근대라고 부른다.




AD1600 동인도 회사 설립
이탈리아 모험가 콜럼버스 아메리카발견, 포르투갈 모험가 바스쿠 다가마(1469-1524) 인도 도착
15세기-18세기 대항해시대라고 부른다. 후추, 커피, 사탕 등 동양 특산품에 유럽인들이 매료 되었다.
인도는 유럽과 동방을 연결하는 중요 거점이었다. 유럽은 효과적 무역을 위해 인도에 ‘동인도회사’ 설립했다.
인도 뿐 아니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세계 모든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 별명을 얻는다. 17세기 끝나갈 무렵 신대륙 아메리카 역시 대영제국 지배아래 있었다.


17세기로 접어 들며 가톨릭과 개신교 갈등은 국가 간 갈등으로 확산 되었다.
종교적 = 구교 VS 신교 / 정치적 = 군주정 VS 봉건
유럽 남부 = 신성로마제국 중심 가톨릭 연합
유럽 중북부 =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등 개신교 연합
결국 30년전쟁 벌어진다.(AD1618-1648) 가톨릭VS개신교 빅매치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1648)으로 종결된다.
베스트팔렌 조약 = 개인종교 자유 보장이다. 교황 군림하던 중세 질서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카톨릭도, 개신교도, 영국국교회 성공회도 통일된 체계를 구축할 수 없었다. 다양성의 시대가 되었다.
종교 영향력이 약해진 자리에 과학이 들었고 사람은 철학에 매료되기 시작한다.


AD1611 제임스 1세(1604-1625) 킹 제임스 성경 출간
엘리자베스 유언에 따라 잉글랜드 왕위는 스코틀랜드 국왕 = 제임스 1세가 된다.
스코틀랜드는 종교개혁의 영웅이요 장로교 창시자인 존낙스의 나라였기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새 왕이, 영국의 개신교를 이끌 것이라 생각하여 청교도는 환영했다.
제임스왕은 킹제임스 성경을 표준으로 삼고 개신교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청교도 기대를 저버리고, 왕권을 강화하려고 성공회를 국교로 채택한다. 그리고 청교도를 탄압한다.
청교도는 가톨릭과 국교회(성공회) 두 고래 사이에 낀 새우와 같았다.
청교도들은 대서양 건너편,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로 간다.


AD1620 9월 16일, 잉글랜드 플리머스 항에 102명 모였다. 메이플라워호 타고 풍랑과 질병을 거쳐 66일 지났다.
11월 21일에 신대륙 아메리카 동북부 해안 케이프 코드에 도착한다. 출애굽과 같았다.
그들은 새로운 대륙을 뉴잉글랜드로 불렀다.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었다. 이들보다 먼저 신대륙에 도착한
정착민들이 버지니아에 건설한 이주민 타운이 있었으나, 그곳까지 갈 수 없었다.
12월이 되자 절반이상이 추위와 질병으로 사망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다가와서
옥수수 재배법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첫 수확을 얻고 인디언을 초청하여 옥수수와 칠면조를 나누며 예배한다.
1621년 가을, 새로운 대륙에서의 삶을 시작한 감격으로 올린 이 예배는 교회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추수감사절 예배가 되었다. 신대륙에선 가톨릭 흔적을 모두 지우고 개신교 신앙이 시작되었다.
청교도 지도자들은 신대륙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교회와 국가를 하나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한 사람도 있었는데, 청교도 지도자들은 그런 로저 윌리암스를 추방한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간 인디언 땅에서 새롭게 공동체를 이루고 프라비던스라는 이름을 붙인다.
교회와 정부는 분리되어야 하고, 모든 종교를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훗날 이 사상은 미국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도착한 후 1627-1640까지 약4천명이 대서양을 건넜고 1660년이 되자 매사추세츠에
5만명 청교도가 신대륙에 정착한다. 청교도에게 제임스1세와 찰스1세는 자유를 억압하는 이집트의 파라오였다.
신대륙에 도착한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영국에선 제임스1세 → 찰스1세(1625-1649)는 성공회 중심으로 국가와 종교 통일을 원했다.
그래서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부여 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을 내세웠다. / 영국내 의회파 VS 왕당파
청교도는 의회파와 연합했다. 1642-1651 청교도혁명이다.
1649년 찰스1세는 단두대 처형, 이후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이다. 그러나 오래 못가 찰스 2세가 왕 즉위한다.
영국은 대혼란 시기를 보낸다.


17세기 과학과 철학의 영향에서 교회가 약화 되는 유럽과 달린 신대륙 아메리카에선 순수한 신앙전통이
유지될 수 있었다. 청교도의 신앙적 열정이 교회를 지킨 것이다.
오직 성경을 신앙과 삶의 기준으로 삼고 국가와 정치의 표준으로 삼으려했던 사람들을 역사는 ‘청교도’라고 부른다.
AD1633 갈릴레오(1564-1642) 종교재판 회부
1633년 이탈리아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천동설 오류를 지적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폴란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토대로 자신이 개량한 망원경을 통해 관찰한 결과 태양계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인 것을 밝힌다. 이는 당시 세계관을 뒤집는 것으로 로마 교황청의 반발을 일으켰고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지동설을 철회할 것을 강요 받는다. 역사는 그에게 ‘근대과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갈릴레오가 촉발한 과학 혁명은 잉글랜드 수학자, 물리학자인 아이작 뉴턴(1643-1727)을 통해 이어진다.
뉴턴은 1687년 발간한 ‘프린키피아’를 통해 자연현상을 수학적 원리로 풀었고, 고전 역학과 만유인력의
기본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물리학 시대를 알린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로 계몽 사상의 기초를 놓고
영국 왕실 존로크(1632-1704)는 사회계약론으로 자유주의에 영향을 미친다.


1492년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
200년전 아시아를 탐험한 모험가 마르코 폴로 여행기를 읽고 감명 받아 콜롬버스는 서쪽바다로 항해하여
중국에 이르고 싶다는 꿈을 꾼다. 원거리 항해용 나침반이 발견되어서 하늘의 별을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먼 항해를 위해 든든한 후원자 ‘이사벨 여왕’이 필요했는데 여왕은 무적함대 스페인 지도자로서 세계 바다를 지배하려는 욕망이 있었다. 1492년 여왕의 지지를 약속받은 콜럼버스는 항해를 시작하고
33일간의 항해 끝에 도착한 땅이 인도인줄 알았지만, 실제론 아메리카 대륙의 섬이었다.
아무튼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가는 바닷길이 열렸다.


AD1675 독일 필립슈페너(1635-1705) 루터 후예인 독일 교회에서 엄격한 정통신학 고수
슈페너는 성도의 경건생활 강조하는 신앙운동했고, ‘경건주의’ 확산되었다.
1675년 슈페너는 [경건한 열망] 책 썼다. 권력에 취해 경건을 잃어버린 교회 목사에게 경종 울렸다.


AD1726 존 웨슬리(1703-1791) 경건주의 이어 받는다. 18세기초, 영국은 초기산업혁명 시대를 지나는
격변의 시기다. 가난, 질병, 술, 도박 넘쳤다. 성공회 목회자 아들로 태어난 웨슬리는 1736년 신대륙의 원주민
선교를 위해 조지아로 가는 배에 오른다. 항해중 폭풍 만나는데 대다수가 공포에 질렸지만, 평안한 표정으로
시편을 암송하는 사람을 목격한다. 모라비안 경건주의자였는데 도전 받았다.
동생 찰스웨슬리와 옥서퍼드 대학에서 홀리클럽 만들어 성경공부와 기도훈련 매진한다. 신앙규칙과 경건방법을
강조하는 이들은 ‘방법론자’(Methodists)라는 별명 얻는다. 감리교Methodist Church라는 새교단 시작이었다.
국교회(성공회) 입장에선 영국 교회 갱신을 외치며 개신교 운동하는 웨슬리 싫었다.
국교회가 웨슬리에게 강단을 안주니, 그는 온세계가 나의교구라고 선언하며 야외 설교한다.


AD1727 조나단 에드워즈 회심
18세기, 청교도 열심은 시들해졌다. 1734년 겨울, 매사추세츠 노샘프턴 교회에서 한 목회자가 설교 시작한다. 그저 조용히 원고 읽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는 영적인 잠에 빠진 성도를 깨우는 나팔소리였다.


AD1740 조지휫필드(1714-1770) 1740년 뉴잉글랜드에서 6주간 전도여행에 이전에 없던 대부흥이 일어난다.
그후 3년 동안 뉴잉글랜드를 넘어 150여교회가 대각성 운동 영향을 받는다.
휫필드는 웨슬리의 홀리클럽에서 신앙훈련 받았다. 성공회 목사가 된 휫필드는 뛰어난 설교가로 주목 받는다.
미국을 7번 방문하며 설교했다. 농부~하버드 학생까지 호소력 있고 불꽃 같은 설교에 청중 변화했다.


AD1775 미국 독립전쟁 발발, 보스턴 차사건(1773)
영국과 신대륙 목회자들이 부흥 시대를 이끌었지만 영국과 미국은 여전히 지배자와 식민지 관계였다.
신대륙 주민들은 영국 식민지 정책 불만이었다. 과중한 세금 부과하였고, 영국에서 홍차를 판매하기로 결정하자
수입이 줄어들게 된 식민지 상인들은 불만 폭발한다. 1773년 차를 실은 영국 화물선들이 보스턴 항구에 도착하자 식민지 주민들은 화물선의 차를 바다에 던졌다. 일명 보스턴 차사건이다.
분노한 영국 정부가 군대 파견했다.
조지워싱턴이 이끄는 식민지 연합 군대와 영국군대의 치열한 전투는 8년간 이어진다.
결국 영국이 요크타운 전투에서 패배하며 미국의 승리로 기운다.


1776년 7월 4일, 북아메리카 12개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독립선언문’ 발표한다.
벤저민 프랭클린과 토머스 재퍼슨을 비롯한 식민지 지식인들이 작성했고 56명의 지도자가 서명한 이 문서는
더 이상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다스릴 수 없음을 선포한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아메리카 합중국 역사가 시작된다.


AD1789 프랑스 혁명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한 소식은 유럽의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이제 프랑스였다.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왕족의 부유하고 사치스런 권력과 삶을 상징했다. 평민은 고통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미국독립전쟁에 참여한 후 빚더미 올라 파산 지경이며, 그래서 세금을 더 거두려 했던 것이
프랑스 민중은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시민들은 왕궁 무기고 바스티유 감옥 습격하고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왕정 몰락과 근대 사회 시작을 알리는 이 사건을 프랑스 혁명이라 부른다.
왕실과 귀족의 특권 폐지, 농노 해방되었다. 루이 16세는 혁명군 손에 사라졌다.


신대륙 교회가 주도한 대각성 운동은 독립과 혁명의 기초가 되었고,
성경 사상은 민주주의, 노예제도폐지, 남북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 기독교 대학 설립, 하버드(1636), 예일(1701), 프린스턴(1746)


AD1809 링컨
미국 켄터키주 농부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했으나 성경 읽어주던 엄마가 있었다.
1860년 공화당 후보 링컨은 미국 16대 대통령 된다. 링컨을 빌미로 남부의 11개 주가 남부 연합을 형성하며
미연방에서 탈퇴한다. 링컨이 노예제 폐지를 위해 본격적으로 권력을 사용할 것을 예상한 것이다.
당시 남부 주들은 면화, 담배 산업주축에 노예 노동력을 크게 의존했다.


1861년 남부 연합군이 찰스턴 만의 섬터 요새를 공격한다. 4년간 지속된 남북전쟁의 시작이었다.
100만명 넘는 사상자 발생한 이 전쟁은 1865년 북부연방군 승리로 끝난다.
남북전쟁 막바지 1863년 1월 1일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에 서명한다.


AD1929년 마틴루터킹은 미국 애틀랜타 목사아들로 태어났다. 목사로 1954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교회 부임한다.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 100년이 지났지만, 미국사회 흑인 인종차별은 여전했다.
버스에서 백인 곁에 앉지 못하고, 10개 자리는 백인을 위해 비워 두어야 했다.
1955년 12월 1일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는 버스의 흑인 전용 좌석에 앉아있었다.
만원이 되자 버스 기사는 로자에게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은 요청했는데 거부했고 경찰에 체포된다.
이를 시작으로 흑인들은 버스 거부 운동을 시작한다. 몽고메리의 버스회사는 적자에 시달린다.
이 운동을 승리로 이끈 킹목사는 인권운동 지도자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1963년 8월 28일, 미국 수도 워싱턴DC 링컨 기념관에는 흑인들 참정권을 요구하는 워싱턴 대행진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전역에서 모인 25만명의 흑인으로 가득찼다. 이 역사적 순간 루터킹 목사가 연설을 맡아 발언한다.


“100년전 오늘, 한 위대한 미국인 링컨이 노예해방선언에 서명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흑인은 차별정책에 매여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옛 노예의 후손들과 옛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 가득한 식탁에 함께 둘러 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루터킹 목사는 비폭력 저항으로 흑인 인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4년 노벨평화상 받는다.
4년 뒤 과격파 백인단체 소속 인종차별주의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 39세였다.


결론
: 교회사의 영웅들은 성경 원리로 돌아가기를 꿈꾸었다.
루터는 변질된 독일 교회가 성경원리로 돌아가기를, 청교도들에겐 자유로운 신앙의 땅에서 성경 가치를 둔
교회와 국가를 세우기를, 조나단 에드워즈는 잠든 시대가 깨어나고 뉴잉글랜드 교회의 부흥을
장대현 교회 길선주 목사에겐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이 말씀으로 세워지는 꿈을 꾸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수도가 된지는 150년 정도 됐다.
서로마제국 멸망 후 이탈리아는 외세지배를 받았다. 19세기 이탈리아 사람은 통일을 염원했다.
사르데냐 왕국의 왕 빗토리오 에마누엘레2세를 구심점으로 외교와 전쟁을 통해 1861년 이탈리아 북동부 지방과 교황령을 제외한 채 제1차 통일을 이룩했다. 빗토리오 에마누엘레2세를 초대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국 탄생했다.
이탈리아가 나라이름이 되었다. 3세기에 로마가 이탈리아를 흡수통일, 2200년 후에는 이탈리아가 로마를 흡수.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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