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편 18절-67편 2절.
66편 18절-20절: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소리에 주의하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67편. 시, 곧 노래.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것.
1절-2절: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66편.
18절: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죄악을 품고 하는 기도를 누가 들어주겠느냐? 인간도 그 속셈을 안다면 들어줄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도를 들어주시겠느냐?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한 이룰구원의 이치와 도리, 즉 구원에 관한 기도를 들어주신다. 이런 기도는 들어주기로 계약이 되어있고, 언약이 되어있고, 약속이 되어있다.
그렇다면 안 들어주시는 기도는, 즉 죄악을 품은 기도는 어떤 기도냐?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기도는 안 들어주신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뭐냐? 어느 장소, 어느 환경,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어느 사람 누구에게든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그 뜻은 인간 자기에게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히는 거다. 이것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방편을 쓰신다. 그런데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하기를 예배당을 크게 짓는 거나, 전도를 하는 것 등의 활동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은 사람이 말씀에 순종을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실 때 은혜로 받는 거다. 우리에게는 이런 건 이차적인 문제이고, 우리에게 향하신 뜻을 잊으면 안 된다.
진리이치에서 비진리로 나간 것, 즉 세상 육적 소원 목적으로 나간 것, 불에 타지고 변질되고 변동될 것, 썩어질 것. 요동될 것, 바람 불면 날아갈 것 등은 전부가 세상과 세상에 속한 거다. 믿는 사람이 사람이던, 물질이던, 사건이던 세상과 세상 것에 소원 목적을 두고 기도를 하는 것은 전부가 죄악성이다. 하나님 앞에 죄로 나타난다.
어떤 사건 환경 속에서도 주님과의 인격적 애정적 결합적 관계성이 되어야 하는데, 이 관계성은 없이 자기 마음에 맞게 자기의 몸 밖의 것이 잘 되게 해 달라는 것은 사건 환경을 주시는 주님의 뜻과는 완전히 빗나간 생각이요 정신이니 이것은 죄악이다. 즉 주님의 의사성과 자기의 의사성이 맞지 않는 게 죄다. 서로 의사성이 맞지 않으면 큰 소리가 나오고, 고통이 나오고, 원망소리가 나오게 된다. 이건 죄다. 우리는 죄악을 품은 기도를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해코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으면 안 된다.
믿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건너가야 하겠는데 하나님의 사랑, 진리사랑, 깨닫게 하는 사랑은 들어가지 않고 육적인 사랑, 세상사랑, 물질로만 들어가면 상대방은 자꾸 이용을 해 먹는다. 이런 사람은 자기에게 그 동안 주던 물질사랑이 안 들어오면 믿는 사람이 변질이 됐다고 하며 원망 불평을 한다. 한 번 이렇게 되면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신과 마음을 똑바로 기준을 잡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간 자기의 사고방식은 죄가 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자기 똑똑으로 자기가 시험에 들고 하나님과 멀어진다.
19절: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소리에 주의하셨도다.’ 다윗은 죄악을 품고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고, 열매 있는 기도를 했다는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했다는 거다. 무조건 오래 기도를 했다는 말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열매가 맺힐 기도, 자타의 구원에 영원히 효력이 있는 합당한 기도를 했다는 거다. 자타의 이룰구원에 합당한 기도는 열매가 있는 기도요,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신다.
우리의 언행심사 전부는 선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활동의 열매, 노력의 열매, 말의 열매가 선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열매가 없으면 안 된다. 우리가 그냥 무관심하게 언행심사를 할지라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한 언행심사는 선이든 악이든 열매가 맺혀 들어간다. 목사님들의 세계에서 교회에서 하는 설교도 교인들에게 은연중에 열매가 맺혀 들어간다. 큰 책임이 있다. 사람에게는 그 어떤 열매보다 정신적인 면에 열매가 맺히는 게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목사는 자칫 잘못하면 한 사람의 일생을 완전히 헛 살게 하는 인도자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소리에 주의하셨도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관심 있게 들으셨다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주님께서 들으시지 않는 세상 속화된 기도들이 너무나도 많다. 헛된 소리가 많다. 이런 기도는 아무리 금식기도를 하고 밤을 새워서 기도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종교인으로서 그냥 하는 기도, 의식순서에 따라 그냥 하는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다.
금식기도를 하면 자기의 비뚤어진 것이 바로 잡아지느냐? 아니다. 우리는 금식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본질을 붙잡아야 한다. ‘금식을 해서 무슨 응답을 받았다느니, 무슨 음성을 들었다느니’ 하는 것은 괜히 정서적인 흥분이 일어나서 야단법석을 떠는 거다. 이성적으로 오는 흥분을 성령의 감화라고 하는 거다. 성령의 감화는 그런 게 아니라 말씀이치의 깨달음에서 오는 거다. 성령에 감화가 되면 몸을 벌벌 떠는 게 아니라 진리이치의 말씀이 깨달아지면서 진리이치가 샘솟듯 솟아난다. 이런 깨달음이 없이 어떤 흥분을 가지고 성령의 감화 감동이라고 하는 건 안 된다.
20절: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이 말씀은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물리치는 기도가 있고, 들으시는 기도가 있다는 거다. 기도를 하면 무조건 다 들어주시는 게 아니다.
성경에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했는데, 중언부언 기도가 어떤 기도냐? 첫째는 아무 목적이 없이 기도하는 게 중언부언이다? 일꾼은 일을 더 많이 하려는 목적으로 기도를 해야 하고, 학생은 공부를 더 잘 하려는 목적에 두고 기도를 해야 하고, 선생은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치는 목적에 두고 기도를 해야 하는데, 이를테면 채소장사가 고기장사를 위해 기도를 하는 게 중언부언이냐?
두 번째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방향 없이 하는 기도가 중언부언 기도다? 세 번째는 어린아이가 말을 하듯이 옹알옹알 하면서 하는 잠꼬대 같은 소리로 기도를 하는 게 중언부언 기도다? 네 번째는 얼음바닥에 박 밀듯이 숨도 쉬지 않고 유창하게 하는 기도가 중언부언 기도다? 다섯 번째는 삼천리 방방곡곡을 누비는 기도가 중언부언 기도다? 여섯 번째는 자타의 이룰구원에 관계가 없는 기도, 주님과 인격적 관계성이 없는 기도가 중언부언 기도다? 어느 게 중언부언 기도냐? 이룰구원과 관계가 없는 기도는 주님과 관계가 없는 기도이니, 여섯 번째의 기도 속에는 앞에서 말한 다른 기도가 다 포함이 될 수 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기도는 옛사람이 주격이 된 기도다. 옛사람이 주격이 된 사람은 반드시 육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되어있다. 반대로 새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기도를 할 때는 자타의 이룰구원에 관한 기도를 하게 된다. 금식기도, 새벽기도, 백 일, 천 일, 만일기도를 해도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기도다. 세상을 위한 기도를 하면 세상사람들이 ‘아멘’을 하는 거지 진리의 사람은 ‘아멘’을 할 수 없다. 왜냐? 이룰구원의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기도는 이룰구원이 망한다. 사람이 깨달을 게 없다.
부자 되기를 바랄진대 영원한 부요를 위해 기도를 해야지 임시적인 부요는 마치 아침에 먹은 밥 배가 시간이 지나면 꺼지는 것과 같다. 우리 기독자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의 영인성장을 위한 기도, 자타의 영원 궁극적 구원에 관한 기도, 진리 자체화, 인격화, 사상화, 실상화 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기도가 된다.
세상 것이 없어서 죽을 판인데 세상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죽을 지경이냐? 이럴 때는 더 이상 패역을 부리지 말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지혜를 주옵소서’ 라고 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해야 한다. 자기 상황은 자기가 개척을 해야지 누가 개척을 해 주느냐? 자기 일생을 누가 대신 살아주느냐? 다 각자 자기 일생을 사는 거다.
67편. 시, 곧 노래.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것.
다윗의 시는 어떤 사물을 보고 쓰는 시가 아니고, 부르고 싶어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성령에 감화 감동이 되어서 쓰는 시요 노래다. 성령에 감동이 되어서 나오는 것에는 성도의 이룰구원의 이치가 들어있다. 사람은 진리이치가 자기 인격화 되면 이룰구원이 이뤄진다. 성령의 감화 감동은 평소에 진리 인격화 된 신앙사상에서 되어지는 거지 자기 속에 세상성적인 소원 목적이 들어있으면 성령의 감화 감동이 있을 수 없다.
1절-7절: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찌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셀라).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1절에서 7절을 보면 개인적이던 단체적이던 민족적이던 하나님의 은총이 온 땅에 확대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세상에 속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원이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다. 우리도 세상을 향한, 즉 인류를 위한 사심이 없는 기도를 할 줄 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무슨 말이냐? 사람이 진리이치로 바로 섬으로써 되어지는 확장성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구국기도를 잘 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해 달라고 하고, 그러면서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게 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진리이치의 사람과는 관계가 없는 육에 관한 기도일 뿐이다. 하나님은 이런 걸 원하시지 않는다.
1절: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셀라).’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거다. 그러면 기도를 하면서 왜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거냐? 가난하고 못 배워서인가? 인간들이 모두 육신적으로 병이 들어서 앓고 있기 때문인가?
세상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돈이 없고, 가난하고, 집도 없고, 자식도 없고, 몸도 아프고, 혼자 살고, 아무 데서나 자고, 떠돌아다니면서 얻어먹는 사람을 불쌍하다고 본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의 그런 면을 보고 불쌍하다고 하시느냐? 예를 들면 예수 믿는 거지가 있고, 예수를 안 믿고 부자가 된 사람이 있다면 일반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불쌍하다고 보느냐? 예수 믿는 거지를 불쌍하다고 본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불쌍하다고 보시느냐? 예수를 안 믿는 부자를 불쌍하다고 보신다. 그러면 우리교인들은 어느 사람이 불쌍하게 보이느냐? 불쌍하다고 보는 기준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육적인 면에서 불쌍하게 될 것을 몰라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하신 거냐?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지으심에 분명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있는데 이것을 모른 채 살고 있고, 궁극적으로 신령천국에서 존귀와 영광과 쾌락으로 누림이 있는 존재인데 이것을 모른 채 살고 있고, 현실에서 진리로 영인의 기능과 지능 면을 성장시키고 영능의 실력을 닦아가야 할 존재인데 이것을 모른 채 살고 있고, 짧디 짧은 나그네 인생으로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죄와 사망 아래서 사단 마귀의 종노릇이나 하고 짐승처럼 미래도 없이 살고 있고, 인간은 죽음의 선에서 금수로 변한다거나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요 인간 자기의 출생목적과 세상에 사는 목적이 분명히 있는데도 이것을 모른 채 살다가 필연적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인데 이것을 모른 채 현세가 다인 줄 알고 살고 있으니 얼마나 불쌍한 거냐? 하나님은 이걸 불쌍하게 보신다.
돼지에게는 궁극적인 미래가 있느냐? 없다. 돼지는 잘 먹다가 죽던, 굶어서 죽던, 길거리에서 죽던 불쌍하게 보지를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환경에 처해서 죽으면 불쌍하게 보고 혀를 찬다. 믿는 우리도 그런 사람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데, 왜 불쌍히 보는 거냐? 인간에게는 궁극적인 미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도 모른 채 살다가 그렇게 죽는다면 얼마나 처절하고 불쌍한 거냐?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믿는 우리가 인간의 불쌍함을 주님의 눈으로 볼 줄을 모른 채 타락된 인간의 눈으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일반사람들과는 보는 각도가 다른 거다. 예수 믿는 자가 타락된 인간들이 불쌍히 보는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면 이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얻는 기도가 되겠느냐, 긍휼을 얻지 못하는 기도가 되겠느냐? 후자다. 예수 믿는 사람이 불쌍하고 처절한 사람을 보고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를 한다면 이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을 수 있는 기도겠느냐, 받지 못하는 기도겠느냐? 긍휼을 받지 못하는 기도다.
자식이 아버지를 모르면 아버지로부터 받을 것도 못 받듯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면 받을 참 복을 받기는커녕 저주를 받고 죽는다. 영적 이스라엘인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말씀, 진리이치의 깨달음을 받지 못하면 영의 눈은 어두워지고, 자기가 안다고 하는 앎은 없고, 죄의 노예가 되어 끌려 다니게 되는 것이니 자기의 삶은 고통스러워지고, 불쌍하고, 처절하고, 추한 사람이 돼버린다. 우리는 ‘불쌍하다. 불쌍하지 않다’ 하는 것을 보는 척도를 바로 가져라.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선악과 따먹은 상태의 일반 세상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것과 세상의 명예 영광을 가지고 세상에서 누리는 것을 복이라고 한다. 영적 이스라엘인 진리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잘 아는 것, 인간을 잘 아는 것, 세상을 잘 아는 것, 천국을 잘 아는 것, 말씀의 뜻을 잘 깨달아서 이 세상에서 영능의 실력으로 자기의 천국을 점령하고 가는 것,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는 것이 참 큰 복이다. 천국을 소유하는 게 큰 복이다.
마5:에 ‘돈이 없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했느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했다. 믿는 사람이 영적인 참 복을 모른 채 물질에 대한 복만 알고 ‘복, 복’ 하게 되면 사람이 저질이 돼버린다.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말세 된 오늘날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운 이때에 세속화된 거짓 종들이 무슨 복을 달라고 악을 쓰고 있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 ‘주의 얼굴’이란 주님의 인격을 말하는 것이요, 주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특수한 은혜를 말한다.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는 하나님의 창조의 제 일 목적물이요, 사랑의 대상자요, 신령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히 인격적 애정적 결합적 수수관계로 살 자들이다. 따라서 주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춰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에게 방금 말한 주님의 특수한 은혜를 달라고 하는 것이니, 이 기도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대로 된 기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의사에 적중이 된 기도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것이 자기에게 복이 되는 것임을 알고 이것을 지극히 가치 있게 여기며 구해서 받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사에 적중한 이 기도를 누가 하겠느냐? 이방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적중한 기도를 할까, 영적인 이스라엘인 자기가 이런 기도를 해야 옳은가?
2절: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정통치가 이뤄지는 것을 소원하는 자다. 신정통치의 세계는 진리의 세계, 공의의 세계, 아가페의 세계, 거룩의 세계, 공평의 세계, 의사단일의 세계, 기쁨과 쾌락과 행복을 극치로 누림의 세계다. 이 세계를 아는 자는 이 땅에서 하루 속히 신정통치가 이뤄지기를 원한다.
주님의 도는 사람을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만들어 준다. 이것을 주의 구원이라고 한다. 사람이 바로 만들어지는 게 주님의 구원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주의 도를 깨닫고 아는 자를 들어서 주의 구원역사를 이뤄나가신다. 이런 사람을 당신의 오른 손을 붙잡고 종으로 쓰신다. 이런 사람을 주의 도로 무장을 시켜서 신의 감화 감동으로 주의 구원을 전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이걸 알 수 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이 이런 말을 많이 했다. 이것을 인간 편에서 보면 주의 도로 특수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 은혜를 알지 못하고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의 도를 전해서 주의 구원을 받도록 하는 마음이 불 같이 일어난다는 거다. 신학교를 가고 안 가고 이게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서 인간구원을 위한 불이 당겨진다는 거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도는 오직 주님의 도밖에 없다. 다른 도는 없다. 그렇다면 주님의 도가 어떤 것이냐? 주님의 도는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게 해 주신다. 하나님의 속성대로 만들어진 만큼 영능의 실력대로 천국을 누리게 해 주신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으로 성육신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흠과 티가 없는 기본구원을 이루어 놓으셨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 주셨고, 영능의 기능과 지능과 영능의 자체적 실력을 위해 존재도, 물질도, 말씀도, 신실한 종들과 거짓 종들까지, 심지어 마귀의 유혹과 미혹까지, 그리고 성령의 감화 감동을 입히고, 또한 신령계의 영물들과 물질계의 크고 작은 모든 사건 환경들을 총 동원하고 계신다.
우리 인간에게는 전체적인 심판과 개체적인 심판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는 옛사람의 성질과 새사람의 성질이, 즉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이 자기 속에서 늘 싸우고 있는데, 이 싸움에서 새사람이 이기는 것은 주님의 도가 아니면 세상의 그 어떤 도라도 불가능이다. 주님의 도가 아니면 이 싸움에서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인간의 구원은 말씀밖에 없다. 성도가 옛사람과 새사람의 싸움에서 새사람이 옛사람에게 지면 개체적인 심판에 회부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명과와 일반과는 먹고 선악과는 절대로 먹지 말고 세상을 지키고 통치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생명과를 먹었느냐? 그렇다면 일반과를 먹어라. 일반과란 일반적인 선행, 의행을 말한다. 그래서 믿는 우리가 선행과 의행을 할 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안 믿는 사람들이 선행과 의행을 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게 보일지라도 사실은 근원적으로 다른 거다.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에 목적을 두고 방편적으로 일반적인 선행, 즉 일반과를 따먹는 거지만 세상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 선행과 의행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룰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다.
그런데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하나님의 온전성이 없이 일반적인 선행을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이걸 잘 분별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진리의 사람들은 의행과 선행만 아니라 물질을 쓸 때도 바로 쓸 줄 알아야 한다. 믿는 사람이 일반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물질을 쓴다면 이는 일반과를 못 따먹는 거다. 이러면 자기 정복이 없다. 믿는 우리는 일반적인 선행을 할지라도 진리가 그 안에 들어있는 상태에서 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을 진리로 연관시키려는 하나의 매개물로써 선행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한 활동인 고로 일반과를 따먹는 거다.
마지막 시대인 오늘날 세상 속화된 인본주의 비진리적 교회의 운동들이 교회 안에 확산이 되어있기 때문에 기독교 안에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함정들이 많이 있다. 구복주의의 가르침, 신비주주의 가르침, 사회주의의 가르침, 구국주의의 가르침, 극기 극복주의의 가르침, 은둔주의의 가르침 등등은 기독교의 본질이 뭔지, 복음이 뭔지, 인간의 구원이 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가르침들이다. 그래서 그런 위주로 행동을 하고 그런 위주로만 치닫는 거다. 이건 모두가 선악과 따먹고 나온 사상들이다.
주님의 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은 한 분이다. 진리는 하나밖에 없다. 우리교회만 진리가 있다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도 진리가 있다면 다 통하는 거다. 앞에서 말한 비진리로 나가는 ‘무슨 무슨 주의’들은 기독교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신앙인이라고 보지 않는다. 다 심판의 대상자들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성경을 바로 깨닫게 해서 진리본질로 구원이 되게 해야 한다.
땅에 속한 것, 땅에서 생산이 된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주의 도라고 할 것이 없다. 주의 도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다. 주님은 하늘로부터 오셨고, 하늘로부터 오신 그 분의 말씀은 하늘의 말씀이요, 하늘을 자랑하는 거다. 주의 도가 가는 곳에는 인간구원의 역사가 있다. 인간구원은 오직 진리밖에 없다. 땅에서 솟아났다면 땅의 것을 자랑하게 된다. 땅의 것을 자랑하는 것은 기독교 본질이 아니다. 마귀가 거짓된 종들을 붙잡고 이런 짓을 한다.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주의 도로 주의 구원을 만방에 알리는 것은 인간의 주도적인 역사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주도적인 역사로 되는 거다. 하나님의 주도권, 즉 성령으로 되는 거다. 성령에 붙잡힌 자들로 인해서 구원이 만방에 퍼지는 거다.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서 정치색을 띠다가 쫓겨나고 하는 건 주의 도가 아니라, 주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구원이다. 주의 도로 인간이 구원이 되는 것은, 다시 말하면 천국복음은 민족초월이요 혈통초월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을 어느 나라에 맞추게 되면 복음이 아니다.
주의 도로 인간이 구원이 되는 것인데, 즉 사람에게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입혀지는 것은 주의 도라야 만이 되는 것인데 이게 아닌 인간 속에서 나온 어떤 종교적 사심으로 예수이름을 이용해서 세상의 것을 취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주님에게 이용을 당하다가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른 면으로 말을 하면 사단 마귀에게 이용물이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이건 헛 고생을 하는 거고, 헛 죽음을 당하는 거고, 헛 사는 거고, 헛 예수를 믿는 거다. 그래서는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66편 18절-20절: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소리에 주의하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67편. 시, 곧 노래.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것.
1절-2절: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66편.
18절: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죄악을 품고 하는 기도를 누가 들어주겠느냐? 인간도 그 속셈을 안다면 들어줄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도를 들어주시겠느냐?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한 이룰구원의 이치와 도리, 즉 구원에 관한 기도를 들어주신다. 이런 기도는 들어주기로 계약이 되어있고, 언약이 되어있고, 약속이 되어있다.
그렇다면 안 들어주시는 기도는, 즉 죄악을 품은 기도는 어떤 기도냐?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기도는 안 들어주신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뭐냐? 어느 장소, 어느 환경,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어느 사람 누구에게든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그 뜻은 인간 자기에게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히는 거다. 이것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방편을 쓰신다. 그런데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하기를 예배당을 크게 짓는 거나, 전도를 하는 것 등의 활동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은 사람이 말씀에 순종을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실 때 은혜로 받는 거다. 우리에게는 이런 건 이차적인 문제이고, 우리에게 향하신 뜻을 잊으면 안 된다.
진리이치에서 비진리로 나간 것, 즉 세상 육적 소원 목적으로 나간 것, 불에 타지고 변질되고 변동될 것, 썩어질 것. 요동될 것, 바람 불면 날아갈 것 등은 전부가 세상과 세상에 속한 거다. 믿는 사람이 사람이던, 물질이던, 사건이던 세상과 세상 것에 소원 목적을 두고 기도를 하는 것은 전부가 죄악성이다. 하나님 앞에 죄로 나타난다.
어떤 사건 환경 속에서도 주님과의 인격적 애정적 결합적 관계성이 되어야 하는데, 이 관계성은 없이 자기 마음에 맞게 자기의 몸 밖의 것이 잘 되게 해 달라는 것은 사건 환경을 주시는 주님의 뜻과는 완전히 빗나간 생각이요 정신이니 이것은 죄악이다. 즉 주님의 의사성과 자기의 의사성이 맞지 않는 게 죄다. 서로 의사성이 맞지 않으면 큰 소리가 나오고, 고통이 나오고, 원망소리가 나오게 된다. 이건 죄다. 우리는 죄악을 품은 기도를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해코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으면 안 된다.
믿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건너가야 하겠는데 하나님의 사랑, 진리사랑, 깨닫게 하는 사랑은 들어가지 않고 육적인 사랑, 세상사랑, 물질로만 들어가면 상대방은 자꾸 이용을 해 먹는다. 이런 사람은 자기에게 그 동안 주던 물질사랑이 안 들어오면 믿는 사람이 변질이 됐다고 하며 원망 불평을 한다. 한 번 이렇게 되면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신과 마음을 똑바로 기준을 잡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간 자기의 사고방식은 죄가 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자기 똑똑으로 자기가 시험에 들고 하나님과 멀어진다.
19절: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소리에 주의하셨도다.’ 다윗은 죄악을 품고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고, 열매 있는 기도를 했다는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했다는 거다. 무조건 오래 기도를 했다는 말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열매가 맺힐 기도, 자타의 구원에 영원히 효력이 있는 합당한 기도를 했다는 거다. 자타의 이룰구원에 합당한 기도는 열매가 있는 기도요,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신다.
우리의 언행심사 전부는 선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활동의 열매, 노력의 열매, 말의 열매가 선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열매가 없으면 안 된다. 우리가 그냥 무관심하게 언행심사를 할지라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한 언행심사는 선이든 악이든 열매가 맺혀 들어간다. 목사님들의 세계에서 교회에서 하는 설교도 교인들에게 은연중에 열매가 맺혀 들어간다. 큰 책임이 있다. 사람에게는 그 어떤 열매보다 정신적인 면에 열매가 맺히는 게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목사는 자칫 잘못하면 한 사람의 일생을 완전히 헛 살게 하는 인도자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소리에 주의하셨도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관심 있게 들으셨다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주님께서 들으시지 않는 세상 속화된 기도들이 너무나도 많다. 헛된 소리가 많다. 이런 기도는 아무리 금식기도를 하고 밤을 새워서 기도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종교인으로서 그냥 하는 기도, 의식순서에 따라 그냥 하는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다.
금식기도를 하면 자기의 비뚤어진 것이 바로 잡아지느냐? 아니다. 우리는 금식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본질을 붙잡아야 한다. ‘금식을 해서 무슨 응답을 받았다느니, 무슨 음성을 들었다느니’ 하는 것은 괜히 정서적인 흥분이 일어나서 야단법석을 떠는 거다. 이성적으로 오는 흥분을 성령의 감화라고 하는 거다. 성령의 감화는 그런 게 아니라 말씀이치의 깨달음에서 오는 거다. 성령에 감화가 되면 몸을 벌벌 떠는 게 아니라 진리이치의 말씀이 깨달아지면서 진리이치가 샘솟듯 솟아난다. 이런 깨달음이 없이 어떤 흥분을 가지고 성령의 감화 감동이라고 하는 건 안 된다.
20절: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이 말씀은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물리치는 기도가 있고, 들으시는 기도가 있다는 거다. 기도를 하면 무조건 다 들어주시는 게 아니다.
성경에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했는데, 중언부언 기도가 어떤 기도냐? 첫째는 아무 목적이 없이 기도하는 게 중언부언이다? 일꾼은 일을 더 많이 하려는 목적으로 기도를 해야 하고, 학생은 공부를 더 잘 하려는 목적에 두고 기도를 해야 하고, 선생은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치는 목적에 두고 기도를 해야 하는데, 이를테면 채소장사가 고기장사를 위해 기도를 하는 게 중언부언이냐?
두 번째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방향 없이 하는 기도가 중언부언 기도다? 세 번째는 어린아이가 말을 하듯이 옹알옹알 하면서 하는 잠꼬대 같은 소리로 기도를 하는 게 중언부언 기도다? 네 번째는 얼음바닥에 박 밀듯이 숨도 쉬지 않고 유창하게 하는 기도가 중언부언 기도다? 다섯 번째는 삼천리 방방곡곡을 누비는 기도가 중언부언 기도다? 여섯 번째는 자타의 이룰구원에 관계가 없는 기도, 주님과 인격적 관계성이 없는 기도가 중언부언 기도다? 어느 게 중언부언 기도냐? 이룰구원과 관계가 없는 기도는 주님과 관계가 없는 기도이니, 여섯 번째의 기도 속에는 앞에서 말한 다른 기도가 다 포함이 될 수 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기도는 옛사람이 주격이 된 기도다. 옛사람이 주격이 된 사람은 반드시 육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되어있다. 반대로 새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기도를 할 때는 자타의 이룰구원에 관한 기도를 하게 된다. 금식기도, 새벽기도, 백 일, 천 일, 만일기도를 해도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기도다. 세상을 위한 기도를 하면 세상사람들이 ‘아멘’을 하는 거지 진리의 사람은 ‘아멘’을 할 수 없다. 왜냐? 이룰구원의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기도는 이룰구원이 망한다. 사람이 깨달을 게 없다.
부자 되기를 바랄진대 영원한 부요를 위해 기도를 해야지 임시적인 부요는 마치 아침에 먹은 밥 배가 시간이 지나면 꺼지는 것과 같다. 우리 기독자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의 영인성장을 위한 기도, 자타의 영원 궁극적 구원에 관한 기도, 진리 자체화, 인격화, 사상화, 실상화 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기도가 된다.
세상 것이 없어서 죽을 판인데 세상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죽을 지경이냐? 이럴 때는 더 이상 패역을 부리지 말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지혜를 주옵소서’ 라고 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해야 한다. 자기 상황은 자기가 개척을 해야지 누가 개척을 해 주느냐? 자기 일생을 누가 대신 살아주느냐? 다 각자 자기 일생을 사는 거다.
67편. 시, 곧 노래.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것.
다윗의 시는 어떤 사물을 보고 쓰는 시가 아니고, 부르고 싶어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성령에 감화 감동이 되어서 쓰는 시요 노래다. 성령에 감동이 되어서 나오는 것에는 성도의 이룰구원의 이치가 들어있다. 사람은 진리이치가 자기 인격화 되면 이룰구원이 이뤄진다. 성령의 감화 감동은 평소에 진리 인격화 된 신앙사상에서 되어지는 거지 자기 속에 세상성적인 소원 목적이 들어있으면 성령의 감화 감동이 있을 수 없다.
1절-7절: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찌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셀라).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1절에서 7절을 보면 개인적이던 단체적이던 민족적이던 하나님의 은총이 온 땅에 확대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세상에 속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원이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다. 우리도 세상을 향한, 즉 인류를 위한 사심이 없는 기도를 할 줄 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무슨 말이냐? 사람이 진리이치로 바로 섬으로써 되어지는 확장성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구국기도를 잘 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해 달라고 하고, 그러면서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게 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진리이치의 사람과는 관계가 없는 육에 관한 기도일 뿐이다. 하나님은 이런 걸 원하시지 않는다.
1절: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셀라).’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거다. 그러면 기도를 하면서 왜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거냐? 가난하고 못 배워서인가? 인간들이 모두 육신적으로 병이 들어서 앓고 있기 때문인가?
세상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돈이 없고, 가난하고, 집도 없고, 자식도 없고, 몸도 아프고, 혼자 살고, 아무 데서나 자고, 떠돌아다니면서 얻어먹는 사람을 불쌍하다고 본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의 그런 면을 보고 불쌍하다고 하시느냐? 예를 들면 예수 믿는 거지가 있고, 예수를 안 믿고 부자가 된 사람이 있다면 일반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불쌍하다고 보느냐? 예수 믿는 거지를 불쌍하다고 본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불쌍하다고 보시느냐? 예수를 안 믿는 부자를 불쌍하다고 보신다. 그러면 우리교인들은 어느 사람이 불쌍하게 보이느냐? 불쌍하다고 보는 기준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육적인 면에서 불쌍하게 될 것을 몰라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하신 거냐?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지으심에 분명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있는데 이것을 모른 채 살고 있고, 궁극적으로 신령천국에서 존귀와 영광과 쾌락으로 누림이 있는 존재인데 이것을 모른 채 살고 있고, 현실에서 진리로 영인의 기능과 지능 면을 성장시키고 영능의 실력을 닦아가야 할 존재인데 이것을 모른 채 살고 있고, 짧디 짧은 나그네 인생으로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죄와 사망 아래서 사단 마귀의 종노릇이나 하고 짐승처럼 미래도 없이 살고 있고, 인간은 죽음의 선에서 금수로 변한다거나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요 인간 자기의 출생목적과 세상에 사는 목적이 분명히 있는데도 이것을 모른 채 살다가 필연적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인데 이것을 모른 채 현세가 다인 줄 알고 살고 있으니 얼마나 불쌍한 거냐? 하나님은 이걸 불쌍하게 보신다.
돼지에게는 궁극적인 미래가 있느냐? 없다. 돼지는 잘 먹다가 죽던, 굶어서 죽던, 길거리에서 죽던 불쌍하게 보지를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환경에 처해서 죽으면 불쌍하게 보고 혀를 찬다. 믿는 우리도 그런 사람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데, 왜 불쌍히 보는 거냐? 인간에게는 궁극적인 미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도 모른 채 살다가 그렇게 죽는다면 얼마나 처절하고 불쌍한 거냐?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믿는 우리가 인간의 불쌍함을 주님의 눈으로 볼 줄을 모른 채 타락된 인간의 눈으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일반사람들과는 보는 각도가 다른 거다. 예수 믿는 자가 타락된 인간들이 불쌍히 보는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면 이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얻는 기도가 되겠느냐, 긍휼을 얻지 못하는 기도가 되겠느냐? 후자다. 예수 믿는 사람이 불쌍하고 처절한 사람을 보고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를 한다면 이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을 수 있는 기도겠느냐, 받지 못하는 기도겠느냐? 긍휼을 받지 못하는 기도다.
자식이 아버지를 모르면 아버지로부터 받을 것도 못 받듯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면 받을 참 복을 받기는커녕 저주를 받고 죽는다. 영적 이스라엘인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말씀, 진리이치의 깨달음을 받지 못하면 영의 눈은 어두워지고, 자기가 안다고 하는 앎은 없고, 죄의 노예가 되어 끌려 다니게 되는 것이니 자기의 삶은 고통스러워지고, 불쌍하고, 처절하고, 추한 사람이 돼버린다. 우리는 ‘불쌍하다. 불쌍하지 않다’ 하는 것을 보는 척도를 바로 가져라.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선악과 따먹은 상태의 일반 세상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것과 세상의 명예 영광을 가지고 세상에서 누리는 것을 복이라고 한다. 영적 이스라엘인 진리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잘 아는 것, 인간을 잘 아는 것, 세상을 잘 아는 것, 천국을 잘 아는 것, 말씀의 뜻을 잘 깨달아서 이 세상에서 영능의 실력으로 자기의 천국을 점령하고 가는 것,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는 것이 참 큰 복이다. 천국을 소유하는 게 큰 복이다.
마5:에 ‘돈이 없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했느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했다. 믿는 사람이 영적인 참 복을 모른 채 물질에 대한 복만 알고 ‘복, 복’ 하게 되면 사람이 저질이 돼버린다.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말세 된 오늘날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운 이때에 세속화된 거짓 종들이 무슨 복을 달라고 악을 쓰고 있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 ‘주의 얼굴’이란 주님의 인격을 말하는 것이요, 주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특수한 은혜를 말한다.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는 하나님의 창조의 제 일 목적물이요, 사랑의 대상자요, 신령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히 인격적 애정적 결합적 수수관계로 살 자들이다. 따라서 주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춰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에게 방금 말한 주님의 특수한 은혜를 달라고 하는 것이니, 이 기도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대로 된 기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의사에 적중이 된 기도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것이 자기에게 복이 되는 것임을 알고 이것을 지극히 가치 있게 여기며 구해서 받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사에 적중한 이 기도를 누가 하겠느냐? 이방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적중한 기도를 할까, 영적인 이스라엘인 자기가 이런 기도를 해야 옳은가?
2절: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정통치가 이뤄지는 것을 소원하는 자다. 신정통치의 세계는 진리의 세계, 공의의 세계, 아가페의 세계, 거룩의 세계, 공평의 세계, 의사단일의 세계, 기쁨과 쾌락과 행복을 극치로 누림의 세계다. 이 세계를 아는 자는 이 땅에서 하루 속히 신정통치가 이뤄지기를 원한다.
주님의 도는 사람을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만들어 준다. 이것을 주의 구원이라고 한다. 사람이 바로 만들어지는 게 주님의 구원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주의 도를 깨닫고 아는 자를 들어서 주의 구원역사를 이뤄나가신다. 이런 사람을 당신의 오른 손을 붙잡고 종으로 쓰신다. 이런 사람을 주의 도로 무장을 시켜서 신의 감화 감동으로 주의 구원을 전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이걸 알 수 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이 이런 말을 많이 했다. 이것을 인간 편에서 보면 주의 도로 특수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 은혜를 알지 못하고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의 도를 전해서 주의 구원을 받도록 하는 마음이 불 같이 일어난다는 거다. 신학교를 가고 안 가고 이게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서 인간구원을 위한 불이 당겨진다는 거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도는 오직 주님의 도밖에 없다. 다른 도는 없다. 그렇다면 주님의 도가 어떤 것이냐? 주님의 도는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게 해 주신다. 하나님의 속성대로 만들어진 만큼 영능의 실력대로 천국을 누리게 해 주신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으로 성육신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흠과 티가 없는 기본구원을 이루어 놓으셨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 주셨고, 영능의 기능과 지능과 영능의 자체적 실력을 위해 존재도, 물질도, 말씀도, 신실한 종들과 거짓 종들까지, 심지어 마귀의 유혹과 미혹까지, 그리고 성령의 감화 감동을 입히고, 또한 신령계의 영물들과 물질계의 크고 작은 모든 사건 환경들을 총 동원하고 계신다.
우리 인간에게는 전체적인 심판과 개체적인 심판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는 옛사람의 성질과 새사람의 성질이, 즉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이 자기 속에서 늘 싸우고 있는데, 이 싸움에서 새사람이 이기는 것은 주님의 도가 아니면 세상의 그 어떤 도라도 불가능이다. 주님의 도가 아니면 이 싸움에서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인간의 구원은 말씀밖에 없다. 성도가 옛사람과 새사람의 싸움에서 새사람이 옛사람에게 지면 개체적인 심판에 회부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명과와 일반과는 먹고 선악과는 절대로 먹지 말고 세상을 지키고 통치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생명과를 먹었느냐? 그렇다면 일반과를 먹어라. 일반과란 일반적인 선행, 의행을 말한다. 그래서 믿는 우리가 선행과 의행을 할 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안 믿는 사람들이 선행과 의행을 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게 보일지라도 사실은 근원적으로 다른 거다.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에 목적을 두고 방편적으로 일반적인 선행, 즉 일반과를 따먹는 거지만 세상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 선행과 의행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룰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다.
그런데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하나님의 온전성이 없이 일반적인 선행을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이걸 잘 분별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진리의 사람들은 의행과 선행만 아니라 물질을 쓸 때도 바로 쓸 줄 알아야 한다. 믿는 사람이 일반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물질을 쓴다면 이는 일반과를 못 따먹는 거다. 이러면 자기 정복이 없다. 믿는 우리는 일반적인 선행을 할지라도 진리가 그 안에 들어있는 상태에서 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을 진리로 연관시키려는 하나의 매개물로써 선행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한 활동인 고로 일반과를 따먹는 거다.
마지막 시대인 오늘날 세상 속화된 인본주의 비진리적 교회의 운동들이 교회 안에 확산이 되어있기 때문에 기독교 안에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함정들이 많이 있다. 구복주의의 가르침, 신비주주의 가르침, 사회주의의 가르침, 구국주의의 가르침, 극기 극복주의의 가르침, 은둔주의의 가르침 등등은 기독교의 본질이 뭔지, 복음이 뭔지, 인간의 구원이 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가르침들이다. 그래서 그런 위주로 행동을 하고 그런 위주로만 치닫는 거다. 이건 모두가 선악과 따먹고 나온 사상들이다.
주님의 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은 한 분이다. 진리는 하나밖에 없다. 우리교회만 진리가 있다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도 진리가 있다면 다 통하는 거다. 앞에서 말한 비진리로 나가는 ‘무슨 무슨 주의’들은 기독교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신앙인이라고 보지 않는다. 다 심판의 대상자들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성경을 바로 깨닫게 해서 진리본질로 구원이 되게 해야 한다.
땅에 속한 것, 땅에서 생산이 된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주의 도라고 할 것이 없다. 주의 도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다. 주님은 하늘로부터 오셨고, 하늘로부터 오신 그 분의 말씀은 하늘의 말씀이요, 하늘을 자랑하는 거다. 주의 도가 가는 곳에는 인간구원의 역사가 있다. 인간구원은 오직 진리밖에 없다. 땅에서 솟아났다면 땅의 것을 자랑하게 된다. 땅의 것을 자랑하는 것은 기독교 본질이 아니다. 마귀가 거짓된 종들을 붙잡고 이런 짓을 한다.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주의 도로 주의 구원을 만방에 알리는 것은 인간의 주도적인 역사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주도적인 역사로 되는 거다. 하나님의 주도권, 즉 성령으로 되는 거다. 성령에 붙잡힌 자들로 인해서 구원이 만방에 퍼지는 거다.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서 정치색을 띠다가 쫓겨나고 하는 건 주의 도가 아니라, 주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구원이다. 주의 도로 인간이 구원이 되는 것은, 다시 말하면 천국복음은 민족초월이요 혈통초월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을 어느 나라에 맞추게 되면 복음이 아니다.
주의 도로 인간이 구원이 되는 것인데, 즉 사람에게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입혀지는 것은 주의 도라야 만이 되는 것인데 이게 아닌 인간 속에서 나온 어떤 종교적 사심으로 예수이름을 이용해서 세상의 것을 취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주님에게 이용을 당하다가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른 면으로 말을 하면 사단 마귀에게 이용물이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이건 헛 고생을 하는 거고, 헛 죽음을 당하는 거고, 헛 사는 거고, 헛 예수를 믿는 거다. 그래서는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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