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이름으로 승리하리라
사도행전16:16-34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원래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였지만 성령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유럽으로 인도하십니다.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역사하신 성령께서는 밤에 마게도냐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게 하심으로 아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마게도냐의 첫 성 즉 제일 큰 성인 빌립보입니다.
이 성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곳이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빌립보에 왔는데 막상 전도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회당이 없었기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곳이 강가입니다.
회당이 없을 경우 강가와 같이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을 했던 것인데 바울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몇 명의 여인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때 루디아라는 여인이 받아들여 빌립보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루디아의 집을 거처로 삼아 계속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고 있을 때 바울의 눈에 띄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귀신들린 여종이었습니다.
이 여종은 귀신들려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었는데 귀신을 쫓아내자 점을 치지 않았고
이익이 끊어진 주인들이 바울 일행을 고발해 심한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고통과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감옥에서 찬송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바울과 실라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간수와 그의 가정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렇게 자주 장사 루디아와 귀신에 매여 있던 여종과 간수장의 가족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후에 바울 선교에 가장 협조적인 교회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빌립보전도는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전도에 대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통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복음전도자의 고통을 보여줍니다.
고통과 함께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것까지 참아야 하는 전도자의 슬픔을 보여줍니다.
전도자가 얼마나 인내해야 하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언제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전도에 있어서 예수님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시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지 사흘 만에 주님은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주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하셨습니다.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은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의 빌립보 전도에 함께 하셨고 지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이 교회력으로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절은 한 주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강림절까지 7주 동안 지키게 됩니다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지금도 그 예수님이 살아 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일 뿐 아니라 살아나신 분이 영원히 죽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가 몇 명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했다고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은 또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지금까지 살아 역사하시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천지만물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인간의 생사화복과 역사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런 큰 부분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에서도 역사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빌립보전도는 사도 바울 일행이 전도할 때 살아계신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부활하신 주님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으로 역사하십니다.
바울일행이 안식일에 강가에 가서 기도할 곳이 있을까? 생각하고 나가봅니다.
회당이 없는 지역에서는 강가와 같이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나가보니 한 무리의 여자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고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자 그 중에 한 사람인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장사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 루디아의 마음을 열게 하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였습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주께서는 복음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어주시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믿고 싶어서 믿었다고 하지만 실상 우리가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주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시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주님을 믿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복음을 전하며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문을 여시어서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2. 둘째로, 부활하신 주님은 능력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으로 역사하십니다.
빌립보 전도의 두 번째 열매는 귀신들려서 점을 치고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었던 여종이었습니다.
이 여종은 바울 일행을 따라 오면서 소리 질러 하는 말이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러 날 반복해서 합니다.
역시 귀신은 귀신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바울 일행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합니다. 구원의 길을 전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정확하게 알고는 있지만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였어요.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동방박사들이 헤롯 궁에 들어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냐고 묻잖아요?
헤롯이 잘 알지 못하니까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고 자문을 구하자 서기관들은 즉시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답변합니다.
그 근거로 구약 미가서 5장 2절에 예언된 말씀을 제시합니다.
서기관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가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태어나실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탄생장소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메시아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알고 있었으면 뭣합니까? 만나러 가지 않았는데요.
귀신이 아무리 정확하게 바울 일행을 알고 있고 그들이 하는 일을 알고 있었어도 귀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런 귀신들린 자를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귀신에게 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귀신이 즉시 나갑니다.
이 여자는 귀신이 떠나간 이후에 점을 치지 않았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았고 빌립보 교회의 두 번째 교인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귀신을 쫓아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 귀신을 즉시로 떠나갑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사도 바울에게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은 능력 있는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온 만물을 다스리시는 능력을 그 이름에 주셨습니다.
그 이름으로 명할 때 귀신이 쫓겨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능력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마음껏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능력임을 믿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귀신을 물리치고 병을 고치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3. 셋째로, 부활하신 주님은 기도와 찬송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으로 역사하십니다.
바울과 실라가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자 여종은 점을 치지 않았고 주인들은 여종으로 인하여 얻었던 이익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화가 난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잡아다가 관리들에게 넘기면서 거짓말로 그들을 고발합니다.
그러자 관리들은 바울과 실라의 죄를 정확하게 살피지도 않고 매를 가합니다.
이때 맞은 매가 채찍에 맞은 매였습니다. 이러한 매를 40에 하나 감한 매 즉 39대를 맞게 됩니다.
40대를 맞으면 죽을 수 있으니까 39대를 때린 것인데 죽지 않을 만큼 맞았지만 실상은 죽을 지경까지 맞은 것입니다.
그리고 깊은 옥에 가둡니다. 이 때 바울과 실라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관리들에 대한 치솟는 분노가 있었을 것입니다. 억울한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주님께서 인도하셔서 유럽으로 와서 복음을 전했는데 결과가 이런 것이냐? 짜증을 내고 항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픈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을 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될 수 있지만 찬송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뭐가 좋다고 찬송을 하고 매를 실컷 맞게 하신 주님께 무슨 찬송으로 영광을 돌린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들은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찬송합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신앙인의 능력이요 믿음의 기적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주님의 은혜요 주님의 역사요 주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고통 받는 이들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엄청난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당한 것을 생각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생각할 때 오히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분노하지만 마시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시고 참으시고 이기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의 십자가만큼 힘들겠습니까? 아무리 아파도 주님의 십자가만큼 아프겠습니까?
주님은 어떤 환경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보고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 감옥에 있던 ‘죄수들이 듣더라.’ 죄수들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 누군가는 우리의 모습을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 부르는 찬송을 듣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듣던 죄수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겠습니까?
‘미친놈들’ 했을 수도 있었지만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 죄수들은 감동을 받고 뭔가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존경하고 순종을 합니다.
그러기에 감옥 문이 열렸어도 도망하지 않고 바울의 눈치를 보고 그 자리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생각하며 참고 인내하고 기도하고 찬송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사랑의 기적을 이루어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넷째로 부활하신 주님은 구원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으로 역사하십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했을 때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갑자가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감옥 문이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바울과 실라가 도망할 생각을 안 합니다.
얼마든지 이런 기적을 베푸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감옥을 나설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바울과 실라 뿐 아니라 다른 죄수들도 도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눈치를 보지 않았겠습니까? 이들이 누구인데 이런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가? 두려움 속에서 관망하지 않았겠습니까?
바울과 실라는 이런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은 단순히 우리를 옥에서 끄집어내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검을 꺼내 자결하려고 합니다.
죄수들이 도망갔으면 그 책임을 지고 자기가 죽을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이때 바울이 소리를 지릅니다.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여기 있다.’
이 말에 간수가 다시 한 번 놀랍니다. 이들이 누구이기에 감옥 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다 풀어졌음에도 도망가지 않았을까?
여러분 문이 열렸다고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원수였던 사울 왕을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고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내 돈 내고 내 마음대로 사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이냐? 그게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고 없는 자를 생각하고 거룩한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문이 열렸다고 도망했으면 간수는 죽었을 것이고 간수의 가정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문이 열렸어도 도망하지 않았을 때 간수도 살고 그 가정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바울일행과 함께 하셨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시고 역사하여 주십니다.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믿고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2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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