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W : 믿음 BIW : 행복을 회복하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행복과 기쁨과 소망을 회복하는 것이다.
엄마, 뭘 그렇게 찾아요?
어느 청년의 고백입니다.
며칠 주방에만 들어가면 엄마는 뭔가를 찾아 헤매느라 분주해지십니다.
“분명 여기에 뒀는데 이상하네.”
엄마가 물건이 없어지기 시작한다고 말씀한 지 꽤 되었지만, 가족들은 엄마의 건망증으로 치부해 버리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없어졌다고 말씀하신 물건도 쌀, 라면, 조미료 종류이고, 그 양도 적어서 사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주방에서 엄마의 한숨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오늘은 좀 자세히 살펴봐야겠다 싶어 주방으로 들어갔더니 엄마가 빈 찬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순간, 자신이 어제 사다 놓은 통조림 캔 몇 개를 찾아봤더니 역시나 없습니다.
생각해 보니 엄마가 집을 비우는 매주 수요일에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누군가가 아무도 없는 우리 집에 들어와 물건을 가져간다는 것은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사소한 부재료만 가져가지만, 앞으로 더 큰 걸 훔쳐갈 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열쇠를 바꾸고 경찰서에 신고하자고 흥분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거지 도둑이야? 왜 맨날 남의 집에 들어와서 이런 거나 훔쳐 가냐고, 그게 더 기분이 나빠!”
엄마는 좀도둑이 들어오는 날에 기름진 음식에 잘 보이는 곳에 돈까지 놓아두고 나가셨습니다.
그런 엄마의 선행이 못마땅한 저는 도둑을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엄마가 문화센터에 가시는 수요일에 도서관에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어머니가 나가신 걸 확인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몇 분 후, ‘달그닥’ 열쇠를 따는 소리가 났습니다.
‘삐그덕’ 현관문이 열립니다.
저는 숨죽인 채 야구 방망이 하나를 들고 주방 입구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만 비명을 지를 뻔했습니다.
도둑의 모습을 본 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름 아닌 시집간 누나였기 때문입니다.
“누...나!”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힘들게 결혼하며 부모님의 가슴에 큰 대못 박고 떠났던 누나가, 만삭의 몸으로 얼굴은 반쪽이 되어 친정을 몰래 찾아왔던 것입니다.
돌아누울 곳도 없는 작은 방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행색이며 그 곱던 얼굴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거지 도둑이냐?’ 며 경찰에 신고해서 당장 붙잡자는 말에 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엄마의 행동이 그제서야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칠순이 된 자식을 아흔이 넘은 노모는 외출할 때마다 차 조심하라고 몇 번을 당부합니다.
언제나 부모는 자식을 보호해 주어야 하고, 아껴줘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그런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기 일쑤입니다.
관심이 부담스럽고, 더 해주지 못하는 부모가 야속하기만 합니다.
부모의 마음 전부를 헤아려주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밥 먹었냐?’는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하지 말고, ‘응, 엄마도 아빠도 식사하셨어요?’라고 다정하게 한마디 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 무엇보다 기쁜 한마디가 될 것입니다.
자녀가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행복을 느끼게 합니다.
자기 자식이 좋아하는 모습은 엄마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느끼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서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오늘도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는 베풀어주시는 행복으로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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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3:29에 보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야.”라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 백성,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의무, 권리,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신앙인들의 삶이 행복한 삶이기를 소망한다.
언제나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요 고통이요 역경의 환경으로 돌변하고 만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만들어주신 에덴은 행복 그 자체이다.
온갖 종류의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널려 있고, 생명나무가 있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지내는 곳이 에덴이다.
그런데 그 행복한 에덴에 마귀, 사탄, 악령들이 찾아와서 에덴을 파괴하여 고통, 질고, 슬픔, 고난의 환경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온갖 고난과 역경과 질고와 아픔과 전쟁과 다툼과 싸움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에덴을 다시 회복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만들어가시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여 지구촌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사탄, 마귀로 인해서 슬픔과 고통과 불행으로 변해버린 세상을 다시 행복과 기쁨과 생명의 세상으로 바꾸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지구촌, 세상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주님으로, 메시야로 영접하여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 신앙인들은 마땅히 행복한 삶을 살아갈 의무, 권리, 특권을 가진 사람이다.
세상에 행복을 다시 찾아주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오늘은 어떤 사역을 감당하고 계실까?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어떤 일을 성취해 나가고 계시는 것일까?
그 마을로 찾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어디로 찾아가실까?
우리들이 거주하는 자유대한민국과 우리 동네로, 우리 교회로 찾아오시지는 않으실까?
D4.
① 나인성으로 찾아가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인(Nain)이란 성은 가버나움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직선거리로 34km, 나사렛에서는 남동쪽 방향으로 9km 지점에 있는 아주 작은 성이다.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하인, 종을 살려주시는 역사를 이루어주신 예수님은 직선거리로 34km나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더 먼 거리이다.
아마도 실제로는 구불구불한 거리를 걸어서 가야 하기 때문에 60에서 70km는 떨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먼 나인성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유와 목적이 없는 발걸음은 없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시는 발걸음에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나인성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나인성으로 찾아가시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인성으로 찾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무리들도 동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앙인들께서 어딘가를 찾아가고 있다면 어떤 목적과 이유로 그곳으로 찾아가고 있는가?
사업을 위해서, 누군가를 은밀하게 만나기 위해서 찾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주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찾아가고 있을까?
어떤 목적과 이유로 찾아가시든 언제 어디서나 삼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사명자답게, 신앙인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괜히 남몰래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죄악의 구렁텅이로 빨려 들어가려고 찾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하고 의미와 이유와 목적이 있었던 것처럼 신앙인의 발걸음도 의미있는 발걸음, 주님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이 되기를 소망한다.
② 장례식 장면을 목격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인성으로 들어가셨는데, 12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예수님께서 나인성으로 들어가려고 하시는데, 성에서는 장례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우리들처럼 3일장, 5일장, 7일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1일장으로 장례를 치른다.
그러기 때문에 나인성에서는 오늘 어느 여인의 독자가 세상을 떠났고 곧이어 장례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인성에 장례가 발생할 것을 알고 계시고, 그래서 나인성으로 찾아가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땅에 장례가 발생하는 것은 다반사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나인성 여인의 아들만 장례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나인성에도 다른 사람의 장례가 발생할 수도 있고, 다른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장례가 발생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셨던 가버나움에서도 얼마든지 장례는 발생할 수 있다.
우리가 잘 모르기도 하고, 우리들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장례가 발생해서 그렇지 우리가 살고 있는 대전에만 해도 하루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다.
대전에만 해도 장례식장이 얼마나 많은가.
그 장례식장마다 여러 건의 장례가 진행되지 않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는 필연적으로 생사의 문제, 태어나고 죽는 문제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루에 여러 건의 장례식이 발생하는 것은 이스라엘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34km나 떨어진 나인성에 장례가 발생할 것을 미리 아시고 나인성으로 찾아가고 계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장례식에는 장례가 발생하면 곧바로 양각 나팔을 불면서 장례가 발생했음을 알린다.
그러면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협력하여 장례를 진행한다.
맨 앞에 화환을 들고 장례를 알리는 사람들, 관을 맨 사람들, 울어주는 사람들, 가족과 유족들, 그리고 온 동네 사람들이 뒤를 따라간다.
죽은 시신은 올리브기름으로 염을 한 이후에 긴 널빤지에 올려놓고 시신이 떨어지지 않도록 끈으로 묶는다.
우리나라에서처럼 관을 뚜껑으로 닫고 못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지 않도록 끈으로 묶으면 되는 것이다.
이 관을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조상들의 묘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온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 참여하기 때문에 적으면 200명에서 많으면 500명도 넘는 사람들이 장례에 참여하게 된다.
보통 남성들 중심으로 장례가 진행되고, 보편적으로 여성들은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고 집에서 애도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처럼 진행되는 장례 행렬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이다.
장례식 현장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으로 찾아오신다.
신앙인들이 어떤 처지가 되었든, 어떤 모습으로 있던지, 좋은 일이 있든지, 좋지 않은 일이 있든지,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가리지 않고 사랑과 은혜와 축복의 마음을 가지고 찾아오신다.
③ 여인을 불쌍하게 여겨주시는 예수님.
13절에서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편적으로 장례식에는 여성들은 참여하지 않고 집에서 애도의 시간을 가진다.
그런데 엄마는 아들의 장례식 행렬에 참여하고 있다.
이 여인은 과부라고 소개하고 있다.
죽은 아들은 여인의 독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독자를 잃은 과부인 엄마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여인들이 남편을 일찍 여의어서 사별하더라도 강력한 모성애를 발휘하면서 자녀들을 양육해 나갈 수 있지만, 고고고고고고대사회에서는 여인이란 존재는 반드시 남자의 그늘아래서만 살아갈 수 있었던 시절이다.
이 여인은 비록 남편을 일찍 여의었지만, 그래도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아들마저 잃게 된 것이다.
아들이라도 살아 있을 때는 그 아들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지만, 이제 아들마저 세상을 등지고 떠나보낸 이후에는 이 여인이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아들에게 얼마만큼의 재산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만큼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아들은 독자였기 때문에 그 재산은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상속되어 이 여인에게는 그야말로 땡전 한 푼 없이 내쫓겨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애미, 이제 살아갈 길이 전혀 없이 막막한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울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누가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온 동네 사람들이 외아들의 장례에 동참하면서 과부와 함께 슬픔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여인을 불쌍한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것이다.
극심한 슬픔을 당하여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큰 위로가 된다.
영국에서 너무나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여인에게 한 번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찾아오셨다고 한다.
사람들은 여왕이 찾아오셨기 때문에 대단한 무언가를 주시고 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여왕이 돌아가신 다음에 여인에게 여왕이 무엇을 주시고 가셨느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면서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여인은 사람들에게 여왕님은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고, 아무 것도 주시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저 여왕님께서 내 곁에서 내 슬픔에 함께 울어주셨다고 하면서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다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잃은 여인을 불쌍한 마음으로 바라보시면서 “울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위로해 주신다.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위로해 주신다고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목 놓아 통곡해도 시원치 않다.
독자를 잃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당한 나인성 과부에게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신앙인들에게도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신다.
우리 신앙인들이 어떤 슬픔, 고난, 불행, 역경, 시련을 겪고 있더라도 신앙인들의 마음과 영혼과 정서에 찾아오셔서 깊이깊이깊이깊이깊이 위로해 주시고 감싸안아 주신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께서 심어주시는 깊은 위로를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위로하심으로 꼭 안아주고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의 마음이 머물기만 하면, 성령님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들 영혼에 촉촉하게 내려서 머물기만 하면 신앙인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④ 다시 행복과 기쁨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죽은 아들이 누워 있는 관으로 가신다.
예수님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랬더니 15절에서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죽은 아들의 생명을 되돌려주신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생명을 거두어갈 수도 있지만, 이미 간 영혼을 되돌려주시기도 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난 아들을 어머니에게 돌려준다.
조금 전에만 해도 분명히 죽은 아들이었는데,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서 엄마 품에 안겼을 때, 엄마는 얼마나 놀라고 감동스러웠을까.
이제 엄마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감동을 받는다.
나인이라는 단어는 “행복, 기쁨”이라는 뜻이다.
행복과 기쁨이 넘쳐야 할 나인성인데, 과부의 독자 아들이 죽음으로 인하여 슬픔과 고통과 불행이 찾아온 것이다.
기쁨과 행복과 소망 대신에 슬픔과 고통과 불행으로 변해버린 나인성에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슬픔과 고통과 불행이 사라지고 다시 행복과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나인성으로 회복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라파의 하나님(JEHOVAH-RAPHA)이라고 하신다.
라파의 하나님은 치유와 회복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이다.
치유와 회복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나인성으로 찾아오심으로 본래의 기쁨과 행복과 소망이 넘치는 나인성으로 회복하고 치유해 주시는 것이다.
어디든지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면 치유와 회복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죄가 있는 곳에는 은혜와 용서함의 변화가 일어난다.
심판이 있는 곳에는 구원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부활의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
불행이 있는 곳에는 행복이 찾아온다.
슬픔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넘치게 하신다.
고난과 역경이 있는 곳에는 인내와 승리가 찾아온다.
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더 넓게 퍼져나가도록 역사하시는 성령님,
16-17절에서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라고 기록한다.
분명히 죽어서 장례식을 거행하던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났다는 소식은 굉장하게 쇼킹하는 사건이다.
병을 고치거나 이적을 행한다 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죽은 사람까지 다시 살려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필시 예수님이란 분은 어떤 특별한 권능과 권세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야. 라고 반응하는 것이다.
예수님이란 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구세주가 맞나 봐. 하는 반응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모습을 직접 목격한 이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보면서 두렵기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기도 하고, 대단히 크고 위대한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하는 이들도 있고, 하나님께서 이제야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돌보셨다고 반응하는 이들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널리 퍼져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멀리까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급속하게 퍼져나가게 된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사건이다.
간혹 있더라도 흔하지 않은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더더더더더 퍼져나가면서 복음이 증거되고 확장되어진다.
예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구원의 놀라운 이적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이 전해지고 확장시켜 나가는 계기가 된다.
좋은 소문, 치유와 회복의 소문은 널리널리 퍼져나갈 때 복음의 역사,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
신앙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좋은 소식들, 교회에서 찾을 수 있는 좋은 소식들은 주변을 비롯하여 널리널리 퍼져 나갈수록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의 증거는 확장되는 것이다.
신앙인들의 삶, 교회의 사명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이 주변으로 널리 널리 널리 더 널리 퍼져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소문이 되었든, 모임이 되었든, 집회가 되었든, 어떤 모습으로라도 주님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은 증거되고 확장되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죽음과 죄와 율법의 권세에서 다시 날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도행전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4;2에서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쉬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L4 & B4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유일한 희망, 기대, 꿈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다면 어떤 기분일까?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지 않을까?
해마다 종종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뿌리뽑혔다면 어떨까?
태풍, 폭우, 폭설, 지진, 쓰나미, 산사태와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주택이 무너지고 공장이 무너지고 논밭이 쑥대밭으로 변해버렸다면 어떨까?
종종 들려오는 전쟁의 소식, 바다 한가운데서 선박이 침몰당하여 그 선박에 타고 모든 선원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내 가족들도 함께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어떨까?
종종 항공기가 추락하여 발생하는 인재 사건에 우리 가족들이 포함되어 있다면 어떨까?
정말로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이다.
그 사건에 우리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 지인들이 포함되어 있다면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하고 있을까?
22년10월29일에 발생한 서울 이태원에 일어난 사건, 24년12월29일에 제주항공기가 전남 무안공항에서 추락하여 승무원 두 명만 겨우 살아남고 모든 탑승객들이 세상을 떠난 사건과 같은 사건들이 얼마든지 우리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한창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야 할 순간인데 이런 사건으로 인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 슬픔, 고통, 고난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유일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아들, 한참 행복하게 살아야 할 젊은 아들을 잃어버린 애미, 엄마는 얼마나 낙심이 되고 불행하고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까?
그곳에 생명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본래의 행복과 기쁨과 꿈과 희망과 기대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도 정말로 우리들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어려운 처지가 되었을 때, 유일하게 우리들에게 희망이 되고, 꿈이 되고, 기쁨과 행복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 되어주시는 예수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들을 꼭 안아주시면서 위로해 주시는 그 은혜와 사랑과 축복만이 우리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원동력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행복하고 기뻐하고 새로운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 가운데 살아가려는 믿음의 사람, 신앙인들은 행복하게 살아갈 의무와 권리와 특권을 가지고 있다.
행복과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살아야 할 나인 성에 죽음이 찾아와서 행복과 기쁨과 소망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만다.
그런 나인성에 행복과 기쁨과 소망의 주인되시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다시 행복과 기쁨과 소망이 회복된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심으로 잃어버리고 빼앗겨버린 행복과 기쁨과 소망을 다시 회복하여 이제는 행복과 기쁨과 소망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행복과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살아가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①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
임마누엘이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의 품 안에서, 예수님의 그늘 안에서, 예수님의 날개 아래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행복과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만에 하나라도 예수님을 벗어나는 순간에는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모든 행복과 기쁨과 소망은 공중에 날아다니는 물풍선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만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은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지!.”하면서 의지적으로 붙들고 살아야 한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란 시시각각으로 바뀔 수 있고, 변할 수 있고, 후회할 수 있고, 갈등할 수 있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고 견인하시는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② 행복한 삶을 노래하며 살아야 한다.
난 행복한 사람이야. 난 행복질거야, 난 행복해,...
라고 늘 노래를 부르면서 다녀야 한다.
노래는 신기하게도 중독성이 강하고 반복함으로 뇌리와 가슴 깊이 파고 들어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노래는 심금을 울리고 행복한 삶을 더 높여준다.
모세도, 다윗도, 여호수아도, 미리암도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인다.
신앙인들이 행복한 삶을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삶이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기 때문에 노래하면서 다니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행복하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에 결단하게 된다.
결단하고 결단하다 보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음을 실망하게 된다.
③ 조그마한 일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더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생겨나게 된다.
민수기14:28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소리라면 그 소리를 하나님께서 귀로 들으시고 그 들으신대로 행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앙인의 입에서 나오는 감사하고 감격하고 행복하다라는 소리를 하나님의 귀에 들리면 하나님께서 감사하는 만큼, 행복해 하는 만큼 역사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입에서는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짜증내거나 불신하는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고, 언제나 감사하고 행복하고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축복하는 말을 해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넘치게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나인성으로 찾아오셔서 본래 행복과 기쁨과 소망을 회복시켜 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신앙인들의 가정과 교회와 생업 터전과 자유대한민국이라는 우리나라에 행복과 기쁨과 소망을 회복시켜 주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복과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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