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스크랩 (시69:24-27)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열려라 에바다 2025. 9. 24. 09:01
(시69:24-27)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궁극이추천 0조회 4825.09.21 08:38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69편 24절-27절: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24절: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주께서 왜 맹렬하신 분노를 하실까? 그것은 세상 속화된 교인이 하나님의 진리생명 이치, 신적인 도덕이치의 옳은 말씀은 안 듣고 선악과 따먹고 저주 받은 세상사람들의 말만 듣고 돌아다니면서 자타를 영적인 면을 성장을 못하도록 하고, 인생을 사망성공으로 낭비를 하며, 신앙을 불에 타지고 없어질 물질성에 목적을 두고 종교적 건설을 하고, 자기를 지으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성을 내팽개친 채 세상에 예수를 내어주고, 말씀도 내어주고, 구원도 내어주고, 천국도 내어주고 사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맹렬한 분노를 하시지 않겠느냐?


그러면 본 절이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냐, 계시적으로 영적 이스라엘에게 하는 말이냐?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자들에게 하는 말씀이다. 예수님 당시 때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육신 그리스도를 주시고, 진리생명의 말씀도 주시고, 깨달으라고 크고 작은 사건을 주시면서 깨닫기를 바랐는데 유대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항하여 하지 말라는 짓을 부득부득 하니 이것은 참 사람 되기를 포기한 것이요, ‘내가 온전한즉 너희들도 온전하라’ 라고 하신 말씀을 버리고 살았으니, 믿는 정신을 포기하고 살았으니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거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교회 안에서 거짓 종들이 성경을 들고 교인들에게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없는 돼지처럼 물질의 소원 목적을 이뤄서 잘 먹고 잘 살라고 가르치고, 성도들은 기도로 그것을 구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없을 수 없는 거다. 예를 들어서 학생이 다른 사람까지 공부를 못하게 방해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것이니 이것은 학생의 기본정신도 안 된 것으로 특별조치가 필요한 거다. 우리가 성경을 영적 계시적 생명적 이치적으로 보면 일반적인 사회의 교육도 훤히 볼 수 있는 거다.


인간이 사는 사회에서는 지극히 작은 병이라도 누가 이걸 허용하겠느냐? 자기 몸 속에 이질적인 균이 들어오는 것을 누가 허용하겠느냐? 이런 것을 그냥 놔두게 되면 점점 커져서 자기를 집어 삼키게 되기 때문에 미리 처리를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세상 속화된 인본주의 육본주의로 나가는 교회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대우가 필요하다. 특별조치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인간 타락적 세상화 된 하나의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거나 하나의 종교적인 개념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 주님께서 ‘하늘나라를 전하시더라. 천국복음을 전하시더라’ 라고 했으니 천국을 전하는 게 기독교다. 기독교는 천국복음, 영 운동, 진리로 생명화 되는 생명운동, 진리로 자체화 인격화 실상화 되는 운동을 하는 거다. 이게 기독교 본질의 복음이다. 이 기독교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본질과 같은 성격이요 성질이다. 이 신앙을 떠나서는 기독교 복음이 아니다. 비슷한 것은 진짜가 아니다. 오늘날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기존지식을 가지고 믿는 세상 속화된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특별조치가 필요하다. 무슨 특별조치냐?


25절: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이것은 한 마디로 저주다. 그러면 다윗이 무슨 이유로 이런 저주를 할까? 다윗의 기도를 들어보면 ‘악인은 망하라. 자자손손 대대로 망하라’ 이런 게 많은데, 이런 말은 일반적으로 들어도 좋게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다윗이 자기감정으로 이런 기도를 하는 거냐?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망하게 할 수밖에 없는 악인에 대해 다윗의 입을 통해 이 기도가 나오게 하신 거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망할 것이 예정이 되어있는데, 악인들은 예정되어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다윗의 입을 통해 표현을 하게 해서 가르쳐 주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이 다윗의 이런 기도를 듣는다면 얼마나 듣기가 싫겠으며, 잡아 죽이고 싶겠느냐? 또한 세속화 되고 물질성적인 구복주의, 신비주의, 구국주의, 사회주의, 극기 극복주의, 세대주의 등등의 기독교인들도 다윗의 이런 기도를 들을 때 듣기 싫어서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할 거다. 세상 속화된 자들이 기도하는 질과, 다윗이 기도하는 질을 비교해 봐라. 다윗은 정신 사상의 뿌리를 어디에 뿌리를 박아놓고 기도를 하는 거냐?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은 모든 생각이 이성적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거지 영이 아니다. 영이라면 하나님의 일을 놓고 기도하고, 성령이 좋아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들어서, 물질을 들어서, 존재를 들어서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 당신과 같은 본질의 사람으로, 영원히 실상적인 효력을 가질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신다. 구약시대 때나 신약시대 때에 하시하처를 막론하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이 뜻은 변치 않는다. 알파와 오메가라. 처음과 나중이라.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회를 보면 신앙의 질이 변질이 돼버렸다.


세상은 선악과 따먹은 그 때부터 계속 악하다.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그 때에 비해 죄가 많아진 것뿐이지 질은 똑같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찾아서 당신의 구속으로 죄를 사해서 천국백성으로 만들어 주셨으니, 이 교회는 평생을 하나님의 본질을 찾아 들어가더라도 하나님으로 자기 인격화 시키기에 모자라는 시간이고 일생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기독자들은 자기가 완전자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은 구할 줄 모르고 세상적인 자기의 소원대로 기도하고 구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 그룹운동을 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계:로 보면 귀신의 집들이 되어버렸다.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다윗이 이런 저주의 기도를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누군가에게 악감정이 있어서냐, 아니면 하나님 앞이나 하나님의 집에서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자꾸 활동을 하고 팽창을 해서 불어나기 때문이냐? 하나님의 집에서는 선과 의가 팽창해야 되겠느냐, 세상에 속한 사고방식과 이해타산 평가성이나 이성적인 철학 등이 팽창해야 되겠느냐? 다윗의 기도는 악령에 감동이 된 기도냐, 성령에 감동이 된 기도냐? 성령에 감동이 된 기도다. 그래서 다윗이 저주를 해도 성령에 감동이 된 기도가 되는 거다.


하나님 앞에 선악과를 따먹고 그 지식과 그 정신 사상으로 사는 세상 속화된 인본주의, 육본주의, 인간 조작배기 사랑으로 모이는 곳은 그 생각, 그 사고방식, 그 이해타산과 평가성은 하나님 앞에 더러운 거다. 질적으로 죽음 저 너머의 영원 궁극적인 세계에까지 해당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 기독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생명과를 따먹고 나온 지식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판단하는 효력이 죽음 저 너머 영원 궁극적인 세계에 가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는 일반적인 세상에서 아무리 학박사를 땄다고 해도,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무엇을 하던 중생되지 못하고 영이 죽어있는 상태에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신령천국에는 해당이 안 되는 세상에서 끝나는 거다. 성경은 이걸 밝히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이런 것을 구별 분별을 못하는 거냐? 영적 지식을 구별 분별하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영적 지식을 가지게 되면 육적 지식을 분별하고도 남는다. 육적인 사고방식 이해타산을 분별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육적인 이해타산 평가성을 가지고는 영적인 면을 분석할 수 없다. 영의 세계에 도달을 할 수 없다. 땅의 것을 가지고는 하늘의 것을 분석할 수 없다.


땅의 지식, 즉 땅의 사고방식과 땅의 이해타산 평가성, 땅의 사고방식의 도덕성으로 주님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줄 만큼 충성봉사를 할지라도 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왼 쪽에 속한 자가 된다. 이런 자는 ‘난 너를 모른다’ 라는 주님의 말을 듣게 된다. 일을 한 장소와 시간이 똑같다고 해도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게 된다. 심각하다.


예수를 믿는 것은 자기의 영원을 좌우하는 게 들어있는데 하나의 종교생활로 교회만 왔다 갔다 하게 되면 현실에서 깨닫는 게 없다. 그 증거가 뭐냐? 그렇게 오래 동안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여러 번 봤는데도 성경에서 변치 않는 이치를 발견했느냐? 하나의 종교생활로는 네 자체가 세상의 바람이 불면 변질된 사고방식, 이해타산, 평가성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깨달음이 없는 거다. 우리 주님은 세상바람을 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영원불변이다. 바람을 안 탄다. 하나님의 지식은 상황에 따라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을 성도들의 구원에 이용하는 실력이 들어있다.


세상으로 속화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이방 불신 세상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 목적을 가진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하다. 왜냐?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것을 주장하고 가르치는데 세상에 속한 기독교 종교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을 이루라고 하니 하나님 앞에 악한 거다. 우리는 지식의 개념을 바꾸고 구원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사성이 기록이 되어있지 타락된 이방인들의 의사성이 기록된 게 아니다. 그런데 세상 속회된 종들은 성경을 들고 세상 것을 가르치고 자랑을 한다. 세상 것은 언젠가는 불타고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참에 비하면 거짓이 된다. 그래서 성경을 들고 세상 것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 되는 거다. 교회 안에서 이런 세상 속화되고 거짓적인 종들은 이방 종교인들과 질이 같기 때문에 손을 잡고 악수를 하게 되어있다. 이건 이치적으로 말하면 부처와 하나님을 같이 앉혀놓고 악수를 하라고 하는 식이다. 왜 이런 이치를 따질 줄 모르느냐? 벼락 맞을 일이다.


뭐가 하나님을 믿는 거냐? 이해타산 가치 평가성을 우리 주님의 것을 가지는 게 믿는 건데, 교회가 이게 다 어디로 가버렸느냐?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을 용납을 하지 않았는데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이방종교의 사상을 받아들였느냐? 이건 하나님 앞에 악하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거룩한 생각들이 하나도 없다. 말세가 되어갈수록 더 그렇다. 악한 자들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참 교회는 생명권 라인 안에 들어있지만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이들과 함께 하는 자들의 마음이 머무는 거처지는 전부가 선악과 따먹은 자들이 거하는 에덴동산 밖이다. 거짓 교회는 생명권 밖이다. 생명과를 먹지 못하는 밖이요, 진리통치 신정통치가 없는 생명권 밖이다. 하나님의 애정권 치리 밖이요, 성전 밖이다. 밖은 하나님의 보호가 없다. 밖은 밟히게 되어있다. 거짓된 교회의 마음은 전부가 세상으로 들어가 있다. 딱딱하다. 그래서 옳은 진리이치의 말씀이 안 들어간다. 그러나 다윗은 신정통치를 했다.


거짓된 교회일수록 사람이 하나님의 온전한 인격과 성품의 사람으로 자라지 못하고 그 머릿속에는 늘 불타고 썩고 변질된 것만 잔뜩 들어있다. 거짓된 사람일수록 경건미를 나타내려고 이방종교인들처럼 외보를 꾸미는 것에 집중한다. 거짓된 교회일수록 사람을 만드는 교육에 돈이 들어가지 않고 건물 안팎으로 쳐 바른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하지만 실은 이성적 감정과 흥분으로 된 각종 더러운 귀신들의 활동으로 되어있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면 진리이치로써 자기 속이 분별이 되고 정화가 되어야 하는데, 사람이 예수님의 정신 사상으로 체계가 잡혀 들어가야 하는데 거짓된 교회일수록 이게 없다.


이 악한 자들은 그 속에 영웅성, 허풍성, 교만성, 교활성 등의 거짓된 것이 잔뜩 들어있다. 구별 분별이 없기 때문에 음란의 곳이요 광란의 곳이다. 사람이 영적 인격 면에서 황폐가 돼 버렸다. 믿는 사람은 늘 성령의 감화로 젖어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사람 속에 독사가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우가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구더기가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돼지가 살고 있는 것 같기고 하고, 사람이 귀신들린 것처럼 정신 사상에 정립이 없다. 사람이 진리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할 텐데 이게 없다. 그러니 흐물흐물 흔들흔들 한다. 황폐한 사람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어떻게 믿겠느냐? 사람도 이런 사람을 붙잡고 일을 하지 않는다.


일반사회에서는 사람의 가치를 계급적으로 따지는데 이 양심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속 중심을 보신다. 특히 성도들에게는 진리 따르는 양심을 보신다. 진리를 따르는 양심은 진리본질인 하나님의 의사성과 하나로 들어가기 때문에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잘 된다.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하나님의 의사성과 이질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통하지 않지만 인간들끼리는 잘 통한다. 이런 교회일수록 프로그램이 재미가 있다.


우리는 사람이 망한 것을 ‘사업이 맹했다’ 이런 것만 보지 말고 세상적으로 아무리 부요하고 명예 영광이 있을지라도 인격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되어있지 않다면 이 사람은 망했구나. 물질적으로 잘 먹고 잘 살지만 사람이 망했구나. 아무리 세상부자라고 해도 그 머릿속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것이 없다면 사람이 망했다. 마지막 때 왜 세상을 불태우는 거냐?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뭐냐? 뭐가 남는지 다 불에 태워보자’ 라고 해서 세상을 불에 태우는 거다. 이게 마지막 심판이다. 그런데 왜 성경을 보고 이런 걸 이치적으로 모를까?


시1:에서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느냐? 사람의 마음과 인격이 무엇으로 되어있기에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거냐? 사람은 어디를 가던 복이 있어야 한다. 어디를 가던 하나님의 애정권 사랑권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 복이 있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끄집어 당겨서 ‘이것도 써라. 저것도 써라’ 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세상의 것을 다 주고 싶어 하신다.


세상의 물질부자를 하늘나라에 데려다 놓으면 그 천국을 통치하고 다스릴 수 있느냐? 못 다스린다. 반대로 아무리 거지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성품의 온전자로 만들어져 있다면 이 사람은 그 나라를 마음 것 다스린다. 세상에서도 보면 아무리 학박사라고 해도 사람이 바로 되지 않으면 그 배운 학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피를 짠다.


정치인들이 함부로 백성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는데, 뭘 모르는 소리다.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는 그런 데 쓰라는 십자가가 아니다. 식당에 가 보면 한 쪽 벽에 ‘처음에는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케 되리라’ 라는 말씀을 붙여놓기도 하는데, 이 구절이 돈을 많이 버는 데 쓰라는 거냐? 화장터에서 돼지 대가리를 놓고 제사를 한다면 사람이 많이 죽게 해 달라는 거냐, 많이 죽지 않게 해 달라는 거냐? 세상은 우스꽝스럽다.


26절-27절: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이 말씀은 이방 불신자를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방 불신자를 놓고 해석을 하게 되면 예수를 믿는 자기 속에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아가는 면이 없어져 버린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느니라’ 라고 하는 것은 영이 중생된 기본구원을 말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이 기본구원을 얻은 것을 전제로 한다. 그 다음에는 기본구원을 얻은 자로서 ‘너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라고 하는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이뤄가야 한다. 이 이룰구원은 현재적으로 되어지는 구원이다. 예수학교에 들어왔으면 예수공부를 잘 해야 한다. 예수를 잘 알아야 한다. 예수를 잘 알면 하나님을 잘 아는 거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아버지를 본 자는 하나님의 은밀한 뜻, 중심사상을 잘 알게 되고,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는 사람을 바로 알게 된다.


성경을 안 보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면 인간을 어떻게 아느냐? 그럼에도 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인간 자기를 바로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지식적 차원, 지혜적 차원, 선 사랑 거룩 진실의 도덕성의 차원, 의와 주권의 능력성의 차원을 알기 때문에 먼저 자기부터 심사를 한다. 하나님의 의와 주권에 속하는 옳은 것을 가진 자는 신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죄를 이길 수 있고, 시험을 이길 수 있고, 유혹과 미혹을 이길 수 있다.


옳은 것을 가지고 이기는 자가 능력자다. 사단 마귀의 앞잡이들인 세상 속회된 거짓 종들이 사람을 앉혀놓고 신비한 것을 체험시킨다고 하면서 ‘굴러 굴러’ 하며 교인들을 마룻바닥에 굴러다니게 하는 것은 목사가 아니라 사기꾼이다. 세상 못된 것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이런 짓을 하는 거다. 공부(주- 김경형목사님이 신학생 및 교역자 대상으로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하러 오는 여자 목사님의 말을 들어보니 어느 교회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겠다고 하면서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다고 한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더럽고 추한 거다. 하나님의 집에 온갖 귀신들린 자들이 판을 치고 있다.


교인들은 살아생전에 말씀의 이치에서 바로 깨달아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아가고, 또 세상에 나가서 깨달은 말씀을 응용 활용 사용하면서 자타의 이룰구원을 잘 이뤄나가야 하는 건데 이 일은 안 하고 모두가 미쳐 돌아간다면 이건 기독교가 아니다. 교회간판이야 아무라도 붙일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간판을 붙였다고 해도 그 교회 안의 사람들의 중심과 사상 속에 진리사상의 본질이 없다면 이게 성도냐? 이는 이방 불신세계에서 보듯이 여러 종교 중에 기독교라고 하는 명칭을 가진 하나의 종교인일 뿐이다.


우리교인들은 절대로 하나의 종교인이 되면 안 되고 신앙인이라야 한다. 주님을 닮는 사람이라야 한다. 사람이 바꿔져야 한다. 그래야 구원의 일을 할 수 있는 거지 사람이 안 바뀐 채 자칭 예수 믿는 사람으로 되어있다면 이런 사람을 어디에 쓰겠느냐?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잡고 쓰시겠느냐? 오히려 마귀가 부려먹게 된다.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바로 세우기 위해 징계를 하시는데, 이 때 악한 자들이 징계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다가와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징계를 안 하시는데 너는 징계 받는 것을 보니 악한 자가 분명하다. 실컷 얻어맞아라. 두들겨 패라. 고소하다’ 라고 한다. 이러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징계하는 자를 비방하고 조롱하는 자들의 머리 위에 심판을 하신다.


한 가정에서 형이 동생을 늘 괴롭히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형이 잘못을 해서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을 때 동생이 이것을 보고 ‘아이고, 고소하다. 실컷 두들겨 패라’ 이럴 수 있다. 동생이 형으로부터 워낙 핍박을 받으면 이럴 수도 있겠는데, 우리가 신앙심으로 생각을 한다면 동생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려야 하겠느냐, 그대로 둬야 하겠느냐? 말려야 한다. 아버지를 감동 감화를 시켜서 형이 맞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삶이 바로 이런 거다.


늘 엄마 말을 안 듣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얻어맞으면 사랑이 많은 엄마는 그 자식을 얼른 가슴으로 앉고 아버지의 매를 막는다. 교육적으로만 본다면 자식이 잘못했으면 맞아야 하고, 맞지 않을 수 있는 교육이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사랑으로는 꼭 매를 드는 방법만 쓰는 게 아니라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정확한 교육이 들어가야 한다. 학교공부는 사회에서 뭘 개발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들어가는 교육이지 참 인격의 교육이 아니다. 참 인격의 교육은 성경밖에 없다. 진리이치의 말씀에서 나오는 교육밖에 없다.


신자와 불신자가 싸울 때 신자가 진리의 성도일 경우에는 옆에 있는 나는 진리의 성도를 도와야 한다. 그런데 신자가 육적이며 비진리일 경우에는, 즉 세상 속화된 교인이요 세상바람을 타는 교인일 경우에는 이 교인이 개떡같이 믿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니까 일단은 데리고 나와서 피하게 한 후에 옳은 것을 가르쳐야 하고, 같은 신자끼리 싸울 때는 그 중간에서 싸움을 말려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잘 아는 신자와 안 믿는 나의 육적인 형제가 싸울 때는 어느 편을 들어야 할까? 어느 편을 들어야 하나님 보시기에 옳겠느냐?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는 어느 편을 들어야 옳다고 하겠느냐? 혈육을 도와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판단은 어느 쪽이냐? 신자 쪽이다. 이걸 판단하기가 어려우냐? 그렇다면 예수님과 안 믿는 자기의 형제가 싸운다면 내가 어느 쪽 편을 들어야 옳겠느냐? 예수님 쪽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쪽에 붙어서 역사하시는지를 보면 쉽게 판단을 할 수 있는 거다.


교회가 싸우고서 갈라질 때도 하나님이 어느 쪽에 붙어있는지를 봐라. 이걸 보는 눈이 없으면 돈 많고 큰 쪽에, 힘 있는 자 쪽에 붙게 된다. 인간 자기의 이해타산이 걸린 쪽에 붙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판단이 나오지 않느냐? 자기가 판단 평가를 잘 못 내릴 때는 한 마디로 비슷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판단을 내렸나를 봐라. 그러면 신앙 면에 틀림이 없다. 이 판단이 정확한 거다.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할 때는 가서 도와줘야 한다. 그러나 얻어맞고도 옳은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안 보일 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하시나?’ 하고 두고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믿는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다고 해서 무조건 돕다가는 그 어려움을 통해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내가 들어서 막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매사에 지혜를 써야 한다. 반면에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환난을 만났을 경우에는 믿는 내가 다각적인 면으로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도가 세상 속화된 교인들로부터 고난과 조롱을 받는 것은 대부분 평소의 인간성의 문제, 즉 성격이나 성질이나 품행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믿는 사람이 이방인들 편에 서서 진리로 가고자 하는 성도에게 입을 삐쭉이고 헐뜯고 조롱하고 핍박을 한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진리성도를 핍박하는 자기에게 임한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에게 잡혔을 때의 장면을 생각해 봐라. 이 장면은 복합적인 교훈과 계시가 들어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천국복음을 전하는 분이다. 땅에서 천국의 일을 하는 분이다. 천국의 일이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거다. 병자를 낫게 하고 귀신을 쫓는 것에는 사람을 온전케 하는 교훈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을 하는 원 뜻은 영적인 면에 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뜻인 영인 성장을 위해 주시는 뜻이 없어진다. 이런 교훈을 하는 것이 거짓 종이요, 세상 속화된 교회가 되는 거다.


모세가 지팡이를 바로 왕 앞에 던져서 뱀이 되게 한 일이 있는데, 어느 분이 이것을 ‘네가 사랑하고 정들었던 지팡이를 던져라. 안 던지고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안 일어난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 말이 맞느냐? 어떻게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틀린 것 같기도 한데, 이건 아무런 하나님의 뜻이 없는, 계시의 뜻이 없는 해석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석을 하는 것이 바른 걸까? 지팡이가 뭐냐? 마른 막대기다. 그러니까 마른 막대기만도 못한 인간일지라도 하나님께 순종을 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붙들어 쓰신다는 계시가 그 안에 들어있는 거다.


계:에 양쪽에 날 선 검이 나오는데, 이것을 ‘이순신장군이 긴 칼을 휘둘렀듯이 우리들도 나라를 위해 양쪽에 날 선 검을 가지고 휘두르자’ 라고 한다면 맞는 말이냐? 어떻게 보면 맞는 말 같으나 해석상 문제가 있다. 우리는 이런 말에 속으면 안 된다. 우리는 양 날을 가진 칼인 복음을 가지고 안팎을 구별하고 분별해서 거짓되고 세상적인 정신과 사상을 찔러 쪼개야 한다. 사람의 정신 사상의 사고방식이 비스듬히 앉은 건지 바로 놓인 건지, 떨어지려고 하는 건지 전혀 아닌 건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쪼개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정화가 된다.


우리는 소위 말하는 ‘영해’는 안 된다. 진짜 영해는 그런 게 아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그 어떤 구절이던 현실에서 자타의 이룰구원에 쓸모가 있어야 한다. 믿는 사람이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산다’ 라고 하는 말은 맞는데, 신령한 천국에 가서 살 것이라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자기 신앙의 성격과 성질을 천국에 적응이 될 수 있는 영원의 성질로 만들어 가는 해석이 돼야 한다.


계:에 ‘새 노래’가 나오는데, 새 노래란 새로 나온 찬송가를 말하는 거냐? 새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새 노래다. 속이 바꿔진 사람이 부르는 것이 새 노래다. 감화 감동이 새롭고 새사람이 되면 보는 시야나 느낌의 감각성이나 이해타산 평가성이 전과는 전혀 다르게 나온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새 노래다.


이룰구원 차원에서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은 살만하다. 이룰구원거리가 많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겪는 모든 사건과 환경은 자기의 밥상 위에 놓여진 음식물과 같다. 세상 모든 사건 환경은 자기가 먹어야 할, 겪어야 할 밥상 위의 음식과 같다. 믿는 사람은 이걸 잘 먹을 줄 알아야 한다. 이걸 잘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앞에 놓여진 사건 환경을 보고 ‘내 마음에 안 맞는다. 저 사람은 나와 대화도 안 된다. 보기 싫다. 에이, 교회에 안 간다’ 이런 식이 된다. 이건 밥을 안 먹는 것과 같다. 그래서는 안 된다. (계속)
69편 24절-27절: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24절: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주께서 왜 맹렬하신 분노를 하실까? 그것은 세상 속화된 교인이 하나님의 진리생명 이치, 신적인 도덕이치의 옳은 말씀은 안 듣고 선악과 따먹고 저주 받은 세상사람들의 말만 듣고 돌아다니면서 자타를 영적인 면을 성장을 못하도록 하고, 인생을 사망성공으로 낭비를 하며, 신앙을 불에 타지고 없어질 물질성에 목적을 두고 종교적 건설을 하고, 자기를 지으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성을 내팽개친 채 세상에 예수를 내어주고, 말씀도 내어주고, 구원도 내어주고, 천국도 내어주고 사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맹렬한 분노를 하시지 않겠느냐?


그러면 본 절이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냐, 계시적으로 영적 이스라엘에게 하는 말이냐?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자들에게 하는 말씀이다. 예수님 당시 때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육신 그리스도를 주시고, 진리생명의 말씀도 주시고, 깨달으라고 크고 작은 사건을 주시면서 깨닫기를 바랐는데 유대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항하여 하지 말라는 짓을 부득부득 하니 이것은 참 사람 되기를 포기한 것이요, ‘내가 온전한즉 너희들도 온전하라’ 라고 하신 말씀을 버리고 살았으니, 믿는 정신을 포기하고 살았으니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거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교회 안에서 거짓 종들이 성경을 들고 교인들에게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없는 돼지처럼 물질의 소원 목적을 이뤄서 잘 먹고 잘 살라고 가르치고, 성도들은 기도로 그것을 구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없을 수 없는 거다. 예를 들어서 학생이 다른 사람까지 공부를 못하게 방해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것이니 이것은 학생의 기본정신도 안 된 것으로 특별조치가 필요한 거다. 우리가 성경을 영적 계시적 생명적 이치적으로 보면 일반적인 사회의 교육도 훤히 볼 수 있는 거다.


인간이 사는 사회에서는 지극히 작은 병이라도 누가 이걸 허용하겠느냐? 자기 몸 속에 이질적인 균이 들어오는 것을 누가 허용하겠느냐? 이런 것을 그냥 놔두게 되면 점점 커져서 자기를 집어 삼키게 되기 때문에 미리 처리를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세상 속화된 인본주의 육본주의로 나가는 교회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대우가 필요하다. 특별조치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인간 타락적 세상화 된 하나의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거나 하나의 종교적인 개념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 주님께서 ‘하늘나라를 전하시더라. 천국복음을 전하시더라’ 라고 했으니 천국을 전하는 게 기독교다. 기독교는 천국복음, 영 운동, 진리로 생명화 되는 생명운동, 진리로 자체화 인격화 실상화 되는 운동을 하는 거다. 이게 기독교 본질의 복음이다. 이 기독교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본질과 같은 성격이요 성질이다. 이 신앙을 떠나서는 기독교 복음이 아니다. 비슷한 것은 진짜가 아니다. 오늘날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기존지식을 가지고 믿는 세상 속화된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특별조치가 필요하다. 무슨 특별조치냐?


25절: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이것은 한 마디로 저주다. 그러면 다윗이 무슨 이유로 이런 저주를 할까? 다윗의 기도를 들어보면 ‘악인은 망하라. 자자손손 대대로 망하라’ 이런 게 많은데, 이런 말은 일반적으로 들어도 좋게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다윗이 자기감정으로 이런 기도를 하는 거냐?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망하게 할 수밖에 없는 악인에 대해 다윗의 입을 통해 이 기도가 나오게 하신 거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망할 것이 예정이 되어있는데, 악인들은 예정되어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다윗의 입을 통해 표현을 하게 해서 가르쳐 주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이 다윗의 이런 기도를 듣는다면 얼마나 듣기가 싫겠으며, 잡아 죽이고 싶겠느냐? 또한 세속화 되고 물질성적인 구복주의, 신비주의, 구국주의, 사회주의, 극기 극복주의, 세대주의 등등의 기독교인들도 다윗의 이런 기도를 들을 때 듣기 싫어서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할 거다. 세상 속화된 자들이 기도하는 질과, 다윗이 기도하는 질을 비교해 봐라. 다윗은 정신 사상의 뿌리를 어디에 뿌리를 박아놓고 기도를 하는 거냐?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은 모든 생각이 이성적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거지 영이 아니다. 영이라면 하나님의 일을 놓고 기도하고, 성령이 좋아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들어서, 물질을 들어서, 존재를 들어서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 당신과 같은 본질의 사람으로, 영원히 실상적인 효력을 가질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신다. 구약시대 때나 신약시대 때에 하시하처를 막론하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이 뜻은 변치 않는다. 알파와 오메가라. 처음과 나중이라.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회를 보면 신앙의 질이 변질이 돼버렸다.


세상은 선악과 따먹은 그 때부터 계속 악하다.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그 때에 비해 죄가 많아진 것뿐이지 질은 똑같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찾아서 당신의 구속으로 죄를 사해서 천국백성으로 만들어 주셨으니, 이 교회는 평생을 하나님의 본질을 찾아 들어가더라도 하나님으로 자기 인격화 시키기에 모자라는 시간이고 일생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기독자들은 자기가 완전자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은 구할 줄 모르고 세상적인 자기의 소원대로 기도하고 구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 그룹운동을 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계:로 보면 귀신의 집들이 되어버렸다.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다윗이 이런 저주의 기도를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누군가에게 악감정이 있어서냐, 아니면 하나님 앞이나 하나님의 집에서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자꾸 활동을 하고 팽창을 해서 불어나기 때문이냐? 하나님의 집에서는 선과 의가 팽창해야 되겠느냐, 세상에 속한 사고방식과 이해타산 평가성이나 이성적인 철학 등이 팽창해야 되겠느냐? 다윗의 기도는 악령에 감동이 된 기도냐, 성령에 감동이 된 기도냐? 성령에 감동이 된 기도다. 그래서 다윗이 저주를 해도 성령에 감동이 된 기도가 되는 거다.


하나님 앞에 선악과를 따먹고 그 지식과 그 정신 사상으로 사는 세상 속화된 인본주의, 육본주의, 인간 조작배기 사랑으로 모이는 곳은 그 생각, 그 사고방식, 그 이해타산과 평가성은 하나님 앞에 더러운 거다. 질적으로 죽음 저 너머의 영원 궁극적인 세계에까지 해당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 기독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생명과를 따먹고 나온 지식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판단하는 효력이 죽음 저 너머 영원 궁극적인 세계에 가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는 일반적인 세상에서 아무리 학박사를 땄다고 해도,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무엇을 하던 중생되지 못하고 영이 죽어있는 상태에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신령천국에는 해당이 안 되는 세상에서 끝나는 거다. 성경은 이걸 밝히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이런 것을 구별 분별을 못하는 거냐? 영적 지식을 구별 분별하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영적 지식을 가지게 되면 육적 지식을 분별하고도 남는다. 육적인 사고방식 이해타산을 분별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육적인 이해타산 평가성을 가지고는 영적인 면을 분석할 수 없다. 영의 세계에 도달을 할 수 없다. 땅의 것을 가지고는 하늘의 것을 분석할 수 없다.


땅의 지식, 즉 땅의 사고방식과 땅의 이해타산 평가성, 땅의 사고방식의 도덕성으로 주님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줄 만큼 충성봉사를 할지라도 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왼 쪽에 속한 자가 된다. 이런 자는 ‘난 너를 모른다’ 라는 주님의 말을 듣게 된다. 일을 한 장소와 시간이 똑같다고 해도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게 된다. 심각하다.


예수를 믿는 것은 자기의 영원을 좌우하는 게 들어있는데 하나의 종교생활로 교회만 왔다 갔다 하게 되면 현실에서 깨닫는 게 없다. 그 증거가 뭐냐? 그렇게 오래 동안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여러 번 봤는데도 성경에서 변치 않는 이치를 발견했느냐? 하나의 종교생활로는 네 자체가 세상의 바람이 불면 변질된 사고방식, 이해타산, 평가성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깨달음이 없는 거다. 우리 주님은 세상바람을 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영원불변이다. 바람을 안 탄다. 하나님의 지식은 상황에 따라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을 성도들의 구원에 이용하는 실력이 들어있다.


세상으로 속화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이방 불신 세상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 목적을 가진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하다. 왜냐?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것을 주장하고 가르치는데 세상에 속한 기독교 종교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을 이루라고 하니 하나님 앞에 악한 거다. 우리는 지식의 개념을 바꾸고 구원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사성이 기록이 되어있지 타락된 이방인들의 의사성이 기록된 게 아니다. 그런데 세상 속회된 종들은 성경을 들고 세상 것을 가르치고 자랑을 한다. 세상 것은 언젠가는 불타고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참에 비하면 거짓이 된다. 그래서 성경을 들고 세상 것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 되는 거다. 교회 안에서 이런 세상 속화되고 거짓적인 종들은 이방 종교인들과 질이 같기 때문에 손을 잡고 악수를 하게 되어있다. 이건 이치적으로 말하면 부처와 하나님을 같이 앉혀놓고 악수를 하라고 하는 식이다. 왜 이런 이치를 따질 줄 모르느냐? 벼락 맞을 일이다.


뭐가 하나님을 믿는 거냐? 이해타산 가치 평가성을 우리 주님의 것을 가지는 게 믿는 건데, 교회가 이게 다 어디로 가버렸느냐?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을 용납을 하지 않았는데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이방종교의 사상을 받아들였느냐? 이건 하나님 앞에 악하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거룩한 생각들이 하나도 없다. 말세가 되어갈수록 더 그렇다. 악한 자들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참 교회는 생명권 라인 안에 들어있지만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이들과 함께 하는 자들의 마음이 머무는 거처지는 전부가 선악과 따먹은 자들이 거하는 에덴동산 밖이다. 거짓 교회는 생명권 밖이다. 생명과를 먹지 못하는 밖이요, 진리통치 신정통치가 없는 생명권 밖이다. 하나님의 애정권 치리 밖이요, 성전 밖이다. 밖은 하나님의 보호가 없다. 밖은 밟히게 되어있다. 거짓된 교회의 마음은 전부가 세상으로 들어가 있다. 딱딱하다. 그래서 옳은 진리이치의 말씀이 안 들어간다. 그러나 다윗은 신정통치를 했다.


거짓된 교회일수록 사람이 하나님의 온전한 인격과 성품의 사람으로 자라지 못하고 그 머릿속에는 늘 불타고 썩고 변질된 것만 잔뜩 들어있다. 거짓된 사람일수록 경건미를 나타내려고 이방종교인들처럼 외보를 꾸미는 것에 집중한다. 거짓된 교회일수록 사람을 만드는 교육에 돈이 들어가지 않고 건물 안팎으로 쳐 바른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하지만 실은 이성적 감정과 흥분으로 된 각종 더러운 귀신들의 활동으로 되어있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면 진리이치로써 자기 속이 분별이 되고 정화가 되어야 하는데, 사람이 예수님의 정신 사상으로 체계가 잡혀 들어가야 하는데 거짓된 교회일수록 이게 없다.


이 악한 자들은 그 속에 영웅성, 허풍성, 교만성, 교활성 등의 거짓된 것이 잔뜩 들어있다. 구별 분별이 없기 때문에 음란의 곳이요 광란의 곳이다. 사람이 영적 인격 면에서 황폐가 돼 버렸다. 믿는 사람은 늘 성령의 감화로 젖어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사람 속에 독사가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우가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구더기가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돼지가 살고 있는 것 같기고 하고, 사람이 귀신들린 것처럼 정신 사상에 정립이 없다. 사람이 진리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할 텐데 이게 없다. 그러니 흐물흐물 흔들흔들 한다. 황폐한 사람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어떻게 믿겠느냐? 사람도 이런 사람을 붙잡고 일을 하지 않는다.


일반사회에서는 사람의 가치를 계급적으로 따지는데 이 양심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속 중심을 보신다. 특히 성도들에게는 진리 따르는 양심을 보신다. 진리를 따르는 양심은 진리본질인 하나님의 의사성과 하나로 들어가기 때문에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잘 된다.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하나님의 의사성과 이질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통하지 않지만 인간들끼리는 잘 통한다. 이런 교회일수록 프로그램이 재미가 있다.


우리는 사람이 망한 것을 ‘사업이 맹했다’ 이런 것만 보지 말고 세상적으로 아무리 부요하고 명예 영광이 있을지라도 인격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되어있지 않다면 이 사람은 망했구나. 물질적으로 잘 먹고 잘 살지만 사람이 망했구나. 아무리 세상부자라고 해도 그 머릿속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것이 없다면 사람이 망했다. 마지막 때 왜 세상을 불태우는 거냐?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뭐냐? 뭐가 남는지 다 불에 태워보자’ 라고 해서 세상을 불에 태우는 거다. 이게 마지막 심판이다. 그런데 왜 성경을 보고 이런 걸 이치적으로 모를까?


시1:에서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느냐? 사람의 마음과 인격이 무엇으로 되어있기에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거냐? 사람은 어디를 가던 복이 있어야 한다. 어디를 가던 하나님의 애정권 사랑권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 복이 있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끄집어 당겨서 ‘이것도 써라. 저것도 써라’ 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세상의 것을 다 주고 싶어 하신다.


세상의 물질부자를 하늘나라에 데려다 놓으면 그 천국을 통치하고 다스릴 수 있느냐? 못 다스린다. 반대로 아무리 거지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성품의 온전자로 만들어져 있다면 이 사람은 그 나라를 마음 것 다스린다. 세상에서도 보면 아무리 학박사라고 해도 사람이 바로 되지 않으면 그 배운 학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피를 짠다.


정치인들이 함부로 백성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는데, 뭘 모르는 소리다.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는 그런 데 쓰라는 십자가가 아니다. 식당에 가 보면 한 쪽 벽에 ‘처음에는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케 되리라’ 라는 말씀을 붙여놓기도 하는데, 이 구절이 돈을 많이 버는 데 쓰라는 거냐? 화장터에서 돼지 대가리를 놓고 제사를 한다면 사람이 많이 죽게 해 달라는 거냐, 많이 죽지 않게 해 달라는 거냐? 세상은 우스꽝스럽다.


26절-27절: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이 말씀은 이방 불신자를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방 불신자를 놓고 해석을 하게 되면 예수를 믿는 자기 속에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아가는 면이 없어져 버린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느니라’ 라고 하는 것은 영이 중생된 기본구원을 말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이 기본구원을 얻은 것을 전제로 한다. 그 다음에는 기본구원을 얻은 자로서 ‘너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라고 하는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이뤄가야 한다. 이 이룰구원은 현재적으로 되어지는 구원이다. 예수학교에 들어왔으면 예수공부를 잘 해야 한다. 예수를 잘 알아야 한다. 예수를 잘 알면 하나님을 잘 아는 거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아버지를 본 자는 하나님의 은밀한 뜻, 중심사상을 잘 알게 되고,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는 사람을 바로 알게 된다.


성경을 안 보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면 인간을 어떻게 아느냐? 그럼에도 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인간 자기를 바로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지식적 차원, 지혜적 차원, 선 사랑 거룩 진실의 도덕성의 차원, 의와 주권의 능력성의 차원을 알기 때문에 먼저 자기부터 심사를 한다. 하나님의 의와 주권에 속하는 옳은 것을 가진 자는 신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죄를 이길 수 있고, 시험을 이길 수 있고, 유혹과 미혹을 이길 수 있다.


옳은 것을 가지고 이기는 자가 능력자다. 사단 마귀의 앞잡이들인 세상 속회된 거짓 종들이 사람을 앉혀놓고 신비한 것을 체험시킨다고 하면서 ‘굴러 굴러’ 하며 교인들을 마룻바닥에 굴러다니게 하는 것은 목사가 아니라 사기꾼이다. 세상 못된 것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이런 짓을 하는 거다. 공부(주- 김경형목사님이 신학생 및 교역자 대상으로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하러 오는 여자 목사님의 말을 들어보니 어느 교회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겠다고 하면서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다고 한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더럽고 추한 거다. 하나님의 집에 온갖 귀신들린 자들이 판을 치고 있다.


교인들은 살아생전에 말씀의 이치에서 바로 깨달아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아가고, 또 세상에 나가서 깨달은 말씀을 응용 활용 사용하면서 자타의 이룰구원을 잘 이뤄나가야 하는 건데 이 일은 안 하고 모두가 미쳐 돌아간다면 이건 기독교가 아니다. 교회간판이야 아무라도 붙일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간판을 붙였다고 해도 그 교회 안의 사람들의 중심과 사상 속에 진리사상의 본질이 없다면 이게 성도냐? 이는 이방 불신세계에서 보듯이 여러 종교 중에 기독교라고 하는 명칭을 가진 하나의 종교인일 뿐이다.


우리교인들은 절대로 하나의 종교인이 되면 안 되고 신앙인이라야 한다. 주님을 닮는 사람이라야 한다. 사람이 바꿔져야 한다. 그래야 구원의 일을 할 수 있는 거지 사람이 안 바뀐 채 자칭 예수 믿는 사람으로 되어있다면 이런 사람을 어디에 쓰겠느냐?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잡고 쓰시겠느냐? 오히려 마귀가 부려먹게 된다.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바로 세우기 위해 징계를 하시는데, 이 때 악한 자들이 징계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다가와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징계를 안 하시는데 너는 징계 받는 것을 보니 악한 자가 분명하다. 실컷 얻어맞아라. 두들겨 패라. 고소하다’ 라고 한다. 이러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징계하는 자를 비방하고 조롱하는 자들의 머리 위에 심판을 하신다.


한 가정에서 형이 동생을 늘 괴롭히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형이 잘못을 해서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을 때 동생이 이것을 보고 ‘아이고, 고소하다. 실컷 두들겨 패라’ 이럴 수 있다. 동생이 형으로부터 워낙 핍박을 받으면 이럴 수도 있겠는데, 우리가 신앙심으로 생각을 한다면 동생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려야 하겠느냐, 그대로 둬야 하겠느냐? 말려야 한다. 아버지를 감동 감화를 시켜서 형이 맞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삶이 바로 이런 거다.


늘 엄마 말을 안 듣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얻어맞으면 사랑이 많은 엄마는 그 자식을 얼른 가슴으로 앉고 아버지의 매를 막는다. 교육적으로만 본다면 자식이 잘못했으면 맞아야 하고, 맞지 않을 수 있는 교육이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사랑으로는 꼭 매를 드는 방법만 쓰는 게 아니라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정확한 교육이 들어가야 한다. 학교공부는 사회에서 뭘 개발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들어가는 교육이지 참 인격의 교육이 아니다. 참 인격의 교육은 성경밖에 없다. 진리이치의 말씀에서 나오는 교육밖에 없다.


신자와 불신자가 싸울 때 신자가 진리의 성도일 경우에는 옆에 있는 나는 진리의 성도를 도와야 한다. 그런데 신자가 육적이며 비진리일 경우에는, 즉 세상 속화된 교인이요 세상바람을 타는 교인일 경우에는 이 교인이 개떡같이 믿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니까 일단은 데리고 나와서 피하게 한 후에 옳은 것을 가르쳐야 하고, 같은 신자끼리 싸울 때는 그 중간에서 싸움을 말려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잘 아는 신자와 안 믿는 나의 육적인 형제가 싸울 때는 어느 편을 들어야 할까? 어느 편을 들어야 하나님 보시기에 옳겠느냐?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는 어느 편을 들어야 옳다고 하겠느냐? 혈육을 도와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판단은 어느 쪽이냐? 신자 쪽이다. 이걸 판단하기가 어려우냐? 그렇다면 예수님과 안 믿는 자기의 형제가 싸운다면 내가 어느 쪽 편을 들어야 옳겠느냐? 예수님 쪽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쪽에 붙어서 역사하시는지를 보면 쉽게 판단을 할 수 있는 거다.


교회가 싸우고서 갈라질 때도 하나님이 어느 쪽에 붙어있는지를 봐라. 이걸 보는 눈이 없으면 돈 많고 큰 쪽에, 힘 있는 자 쪽에 붙게 된다. 인간 자기의 이해타산이 걸린 쪽에 붙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판단이 나오지 않느냐? 자기가 판단 평가를 잘 못 내릴 때는 한 마디로 비슷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판단을 내렸나를 봐라. 그러면 신앙 면에 틀림이 없다. 이 판단이 정확한 거다.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할 때는 가서 도와줘야 한다. 그러나 얻어맞고도 옳은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안 보일 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하시나?’ 하고 두고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믿는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다고 해서 무조건 돕다가는 그 어려움을 통해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내가 들어서 막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매사에 지혜를 써야 한다. 반면에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환난을 만났을 경우에는 믿는 내가 다각적인 면으로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도가 세상 속화된 교인들로부터 고난과 조롱을 받는 것은 대부분 평소의 인간성의 문제, 즉 성격이나 성질이나 품행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믿는 사람이 이방인들 편에 서서 진리로 가고자 하는 성도에게 입을 삐쭉이고 헐뜯고 조롱하고 핍박을 한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진리성도를 핍박하는 자기에게 임한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에게 잡혔을 때의 장면을 생각해 봐라. 이 장면은 복합적인 교훈과 계시가 들어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천국복음을 전하는 분이다. 땅에서 천국의 일을 하는 분이다. 천국의 일이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거다. 병자를 낫게 하고 귀신을 쫓는 것에는 사람을 온전케 하는 교훈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을 하는 원 뜻은 영적인 면에 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뜻인 영인 성장을 위해 주시는 뜻이 없어진다. 이런 교훈을 하는 것이 거짓 종이요, 세상 속화된 교회가 되는 거다.


모세가 지팡이를 바로 왕 앞에 던져서 뱀이 되게 한 일이 있는데, 어느 분이 이것을 ‘네가 사랑하고 정들었던 지팡이를 던져라. 안 던지고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안 일어난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 말이 맞느냐? 어떻게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틀린 것 같기도 한데, 이건 아무런 하나님의 뜻이 없는, 계시의 뜻이 없는 해석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석을 하는 것이 바른 걸까? 지팡이가 뭐냐? 마른 막대기다. 그러니까 마른 막대기만도 못한 인간일지라도 하나님께 순종을 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붙들어 쓰신다는 계시가 그 안에 들어있는 거다.


계:에 양쪽에 날 선 검이 나오는데, 이것을 ‘이순신장군이 긴 칼을 휘둘렀듯이 우리들도 나라를 위해 양쪽에 날 선 검을 가지고 휘두르자’ 라고 한다면 맞는 말이냐? 어떻게 보면 맞는 말 같으나 해석상 문제가 있다. 우리는 이런 말에 속으면 안 된다. 우리는 양 날을 가진 칼인 복음을 가지고 안팎을 구별하고 분별해서 거짓되고 세상적인 정신과 사상을 찔러 쪼개야 한다. 사람의 정신 사상의 사고방식이 비스듬히 앉은 건지 바로 놓인 건지, 떨어지려고 하는 건지 전혀 아닌 건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쪼개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정화가 된다.


우리는 소위 말하는 ‘영해’는 안 된다. 진짜 영해는 그런 게 아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그 어떤 구절이던 현실에서 자타의 이룰구원에 쓸모가 있어야 한다. 믿는 사람이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산다’ 라고 하는 말은 맞는데, 신령한 천국에 가서 살 것이라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자기 신앙의 성격과 성질을 천국에 적응이 될 수 있는 영원의 성질로 만들어 가는 해석이 돼야 한다.


계:에 ‘새 노래’가 나오는데, 새 노래란 새로 나온 찬송가를 말하는 거냐? 새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새 노래다. 속이 바꿔진 사람이 부르는 것이 새 노래다. 감화 감동이 새롭고 새사람이 되면 보는 시야나 느낌의 감각성이나 이해타산 평가성이 전과는 전혀 다르게 나온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새 노래다.


이룰구원 차원에서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은 살만하다. 이룰구원거리가 많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겪는 모든 사건과 환경은 자기의 밥상 위에 놓여진 음식물과 같다. 세상 모든 사건 환경은 자기가 먹어야 할, 겪어야 할 밥상 위의 음식과 같다. 믿는 사람은 이걸 잘 먹을 줄 알아야 한다. 이걸 잘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앞에 놓여진 사건 환경을 보고 ‘내 마음에 안 맞는다. 저 사람은 나와 대화도 안 된다. 보기 싫다. 에이, 교회에 안 간다’ 이런 식이 된다. 이건 밥을 안 먹는 것과 같다. 그래서는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