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재 박사의 성서 건강학] 성경 속 수명 이야기
수명을 결정하는 데는 정말로 많은 인자들이 관여한다. 장수학을 연구하시는 분들의 지적처럼 궁극적으로 인간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데는 삶의 현장 주변에서 나타나는 각종의 조건이나 환경이 고려되어야 한다.
실제 우리가 흔히 쓰는 평균수명은 그러한 조건들이 모두 고려된 실질적인 삶의 길이를 수치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금 언급되고 있는 수명이야기는 인간의 삶의 조건을 완벽하게 해 주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기전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수명변화에 흥미로운 단서들이 나온다. 5장에 아담의 족보가 나오는데 평균 900세가 넘는 수명이라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또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 대한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셈의 후손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시 수명이 900세 근처가 아니고 600세 근처에서 시작한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에 이르면 205세로 줄어들고 있다. 창세기의 주인공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아브라함은 175세, 그의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은 180세, 이삭의 아들 야곱은 147세를 살고 있다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요셉 때문에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에서의 삶을 출애굽을 통해 청산하는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도 들어 가보지 못하고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가나안 땅을 내려다보며 120세에 소천한다고 신명기 34장은 적고 있다. 그러나 모세의 노래인 시편 90편 10절을 보면,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일지라도”라고 노래하고 있으니 이미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오늘날 우리처럼 70∼80세의 수명을 누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명에 대해서 조금의 공부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한 종(種)의 수명은 그렇게 쉽사리 10배 가까이 줄어들 수 없음을 안다. 과연 수천 년의 역사를 거듭하며 인간의 수명이 정녕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일까.
성경학자들의 창조시대에는 100진법을 썼다는 주장이나 달의 주기에 맞추어 1살씩 나이를 더했을 거라는 추정은 노아의 홍수 사건의 문자적 해석에서 여지없이 산산조각이 난다. 즉, 창조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노아가 600세에서 601세로 1살을 더하는데 결코 1개월이 아닌 1년 12달, 360여 일이 지나야 가능함을 홍수사건은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기록만으로 볼 때 분명 인간의 수명은 당초의 10분의 1 이상으로 줄었다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이 기독교적 관점이라고 볼 때 분명 인간의 수명에 손질을 가하신 것이 틀림없다 할 것이다. 창세기 6장3절에는 이를 암시할 수도 있는 인간 수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더욱 그 추정에 설득력이 더해진다. 즉, 하나님의 아들과 인간의 딸들이 결혼해서 자식이 나오지만 육체를 띤 인간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영원히 그들과 함께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영원히 함께하지 못하지만 ‘인간의 육체의 날수를 120년으로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점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흙으로 육체를 지으셨고 필경 흙으로 돌아간다(죽는다)고 설파했기 때문에 육체는 곧 살아있는 사람(생명)을 의미하며 육체의 날 수는 곧 수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물론 성경학자들은 그 120년이 노아의 홍수사건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성경학자가 아닌 평신도 과학자에게는 앞뒤가 틀림없는 인간의 수명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음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키셨을까. 대단히 흥미로운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서울대 의대 교수>
실제 우리가 흔히 쓰는 평균수명은 그러한 조건들이 모두 고려된 실질적인 삶의 길이를 수치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금 언급되고 있는 수명이야기는 인간의 삶의 조건을 완벽하게 해 주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기전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수명변화에 흥미로운 단서들이 나온다. 5장에 아담의 족보가 나오는데 평균 900세가 넘는 수명이라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또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 대한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셈의 후손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시 수명이 900세 근처가 아니고 600세 근처에서 시작한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에 이르면 205세로 줄어들고 있다. 창세기의 주인공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아브라함은 175세, 그의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은 180세, 이삭의 아들 야곱은 147세를 살고 있다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요셉 때문에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에서의 삶을 출애굽을 통해 청산하는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도 들어 가보지 못하고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가나안 땅을 내려다보며 120세에 소천한다고 신명기 34장은 적고 있다. 그러나 모세의 노래인 시편 90편 10절을 보면,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일지라도”라고 노래하고 있으니 이미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오늘날 우리처럼 70∼80세의 수명을 누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명에 대해서 조금의 공부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한 종(種)의 수명은 그렇게 쉽사리 10배 가까이 줄어들 수 없음을 안다. 과연 수천 년의 역사를 거듭하며 인간의 수명이 정녕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일까.
성경학자들의 창조시대에는 100진법을 썼다는 주장이나 달의 주기에 맞추어 1살씩 나이를 더했을 거라는 추정은 노아의 홍수 사건의 문자적 해석에서 여지없이 산산조각이 난다. 즉, 창조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노아가 600세에서 601세로 1살을 더하는데 결코 1개월이 아닌 1년 12달, 360여 일이 지나야 가능함을 홍수사건은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기록만으로 볼 때 분명 인간의 수명은 당초의 10분의 1 이상으로 줄었다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이 기독교적 관점이라고 볼 때 분명 인간의 수명에 손질을 가하신 것이 틀림없다 할 것이다. 창세기 6장3절에는 이를 암시할 수도 있는 인간 수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더욱 그 추정에 설득력이 더해진다. 즉, 하나님의 아들과 인간의 딸들이 결혼해서 자식이 나오지만 육체를 띤 인간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영원히 그들과 함께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영원히 함께하지 못하지만 ‘인간의 육체의 날수를 120년으로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점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흙으로 육체를 지으셨고 필경 흙으로 돌아간다(죽는다)고 설파했기 때문에 육체는 곧 살아있는 사람(생명)을 의미하며 육체의 날 수는 곧 수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물론 성경학자들은 그 120년이 노아의 홍수사건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성경학자가 아닌 평신도 과학자에게는 앞뒤가 틀림없는 인간의 수명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음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키셨을까. 대단히 흥미로운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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