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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방우체국-조성수 남아共 선교사] 엄마·아빠의 심장을 가졌던 바울 선생님

열려라 에바다 2013. 8. 12. 08:07

 

[열방우체국-조성수 남아共 선교사] 엄마·아빠의 심장을 가졌던 바울 선생님

 

 

자식같은 사람들 하나하나 하늘나라에 들이는데 생애 보낸 그 분 흉내라도…

1987년 3월 케냐를 잠깐 거쳐 보츠와나에 살면서 아프리카 구석에서의 삶이 시작됐습니다. 선교사라 불리니 영광스러웠지만 그만큼 부담도 컸습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 되는 줄 알고 세월을 보냈습니다.

사람들이 고생한다고 격려하며 등을 두드려주니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사역이려니 믿었습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면 상처 난 마음과 피곤한 몸 말고는 무엇 하나 제대로 남은 게 없어 보였습니다. 제 자신을 ‘오래된 선교사’라며 소개라도 할라치면 민망해서 어디 숨을 곳을 찾곤 했습니다. 물론 어제까지만 그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 땅에 살아온 시간만큼 여러 사역을 했습니다. 보츠와나에서 기술학교를 열었습니다. 기술을 가진 한국인 선교사들을 도와 젊은 흑인들의 필요를 채워보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동네에서 유치원을 시작하는데도 힘썼습니다. 신학 교육을 돕기도 했습니다. 신학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흑인 교회의 목회자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몇몇 마을에 예배당을 세우고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단기선교팀을 통해 찬양으로 도전하거나 성경학교를 열어 동네 어린 친구들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때 태권도 사역으로 마을에서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교 전략이 전혀 없어 보였던 바울 선생님

그분, 바울 선생님이 기억납니다. 이분의 사역은 제게 큰 가르침이 됐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술학교를 열려고 하신 것도 아닌 것 같고 교회당을 건축하는 데 열정을 보이신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찬양 팀을 구성해 온갖 연습을 다하신 모습도 없어 보였습니다. 태권도 축구 등을 통해 젊은 친구들을 모을 수 있지만 그런 전략에 대해서도 크게 강조하지 않으신 것 같았습니다.

바울 선생님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느껴지는 엄마와 아빠의 심장을 가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행여 그분이 학교를 열었다면 학생 하나하나 모두 그분의 자녀였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희생이나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겠다 싶었습니다. 그분이 신학교를 열었다면 그곳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탈 정도로 신학을 잘 가르치셨겠지만 어디 보여주기 좋은 학위를 주는 것에 관심을 두시기보다 신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엄마 아빠가 되려는 것이 먼저였겠다 싶었습니다.

찬양 팀의 리더로 사역을 하셨다면 모든 악기들과 노래하는 사람들의 조화를 위해 부지런히 많은 시간을 들여 연습을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 찬양 팀원 하나하나뿐 아니라 찬양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부모의 절절한 사랑을 먼저 보이시는 것을 목표로 하셨을 겁니다. 태권도와 축구를 도구로 삼아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더라도 많은 어린이들을 모으는 데 힘을 쏟기보다 그들의 엄마와 아빠가 되시는 기쁨이 먼저였겠다 싶었습니다.

바울 선생님은 어느 곳에도 예배당을 건축하신 흔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로 불림을 받는 디모데와 디도를 참아들, 사랑하는 아들이라 부르시는 것에는 정성을 다해 그 표시를 편지에다 열심히 하셨던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렇게나 성도들의 엄마 아빠가 되기를 좋아하셨던 그분이 바로 선교사였습니다. 화려한 선교 전략은 없어 보였지만 그분의 심장은 예수님을 닮아 어디를 가셔서 누구를 만나시든 한 사람 한 사람의 부모가 됐습니다. 자식 같은 그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에 하나하나 들이시는데 온 생애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선교사라는 이름을 붙이고 살다가 어려움에 빠지거나 절망했던 제 가슴이 다시 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선교사가 엄마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쉬웠습니다. 엄마는 이 땅을 떠나시기 전까지 무엇이든 하셨으니까요. 엄마가 돌아가신 지 40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아직 제 옆에 계신 것 같고 손을 뻗으면 잡아 주실 것 같습니다. 실패감에 젖어 털썩 주저앉아 깊은 한숨과 눈물을 짓고 있을 때 따뜻하게 안아주고 그 슬픔과 당혹함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있어 주실 것 같은 그 엄마 말입니다. 바울 선생님이 선교사로서 하신 사역이 바로 엄마의 일이었습니다.

바울 선생님께서 “복음으로만 아니라 목숨까지” 주기를 기뻐하신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밤낮으로 일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음에도 피곤치 않으셨던 그 육신의 강건함을 알겠습니다. 사도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지만 도리어 만물의 때와 찌꺼기처럼 대접받으셨다 해도 전혀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으셨던 그 삶의 의미와 생각을 조금이나마 알겠습니다.

바울 선생님을 흉내 내 자식을 돌보는 마음으로

부모의 마음으로 사역하는 것이 선교사라는 생각이 들자 지금까지 선교 현장에서 만난 친구들의 얼굴이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특히 4세 때부터 알고 지낸 칼빈. 그의 어머니는 14세 때 칼빈을 낳았습니다. 칼빈은 내년부터 상급학교로 진학해야 하는데 등록금이 없어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존슨은 고아가 됐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존슨을 처음 봤을 때 그의 긴 콧물이 기차가 터널로 빨려 들어가듯 코로 들어갔다 나오는 모습이 또렷이 기억납니다. 그때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엄마와 중장비를 운전하는 새 아빠 사이에서 나름 힘 있게 성장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엄마와 아빠가 한 달 간격으로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건강해 보이던 젊은 부모가 그렇게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에이즈 때문 아니냐는 말이 돌았습니다.

존슨은 온몸에 진물이 나곤 했지만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건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얼마 전 태권도 검정 띠를 땄고 다른 어린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주며 씩씩하게 생활합니다. 간혹 그 큰 눈에서 눈물을 보일 때를 빼고 말입니다.

4년간 한솥밥을 먹으며 주의 사랑을 나누었던 제인은 말 한마디 없이 저희 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제인은 “아직 고등학생이니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는 남자 친구가 없어야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겠다”고 했는데 이번 학기에 낙제점을 받았다고 합니다.

로라는 영리하고 계산이 빠릅니다. 부아튀멜로는 공부에 소질이 없어 수년째 고등학교 졸업을 못했습니다. 동급생 틈에 끼여 왕따를 당하는 그를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됐다고 고백한 러시아. 이 어린이는 이따금 이 동네 저 동네를 기웃거리며 거지 행세를 하고 다녀 여러 번 제가 혼쭐을 낸 적이 있습니다.

선교사로서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과 자랑해야 할 것이 있다고 느낍니다. 교회당 지은 것, 학교를 만들어 등록하고 운영하는 것, 태권도와 축구를 통해 어린이들을 불러 모은 것…. 이벤트 사역으로 은혜를 나눴다고 하는 얘기는 자랑거리처럼 보고를 하면 안 된다고 다짐합니다. 십자가만 자랑 삼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살전 2:7∼11)

조성수 남아共 선교사

● 조성수 선교사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 소속 선교사, GP선교회 협력선교사

△1956년생. 84년 성결대 신학과 졸업

△87년부터 5년간 보츠와나에서 사역

△95년부터 ‘월간 한국인 선교사’ 편집인

△99년부터 남아공 루스텐버그에서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