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⑧ 농촌운동 이끈 한국교회
일제강점기 농촌으로 달려간 기독교, 개혁과 희망 일궜다
“전도자들아. 부귀한 자의 문으로 가지 말고, 빈민에게로 가라. 헐벗고 배 주리는 그네들에게 영의 위안이라도 주라. 목사들은 프록코트를 벗고, 노동자의 옷을 입고 노동자 속에 들어가라.” 지금으로부터 꼭 90년 전인 1923년 10월 26일 동아일보에 실린 사설은 교회 지도자들의 손과 발이 교회 밖 세상으로 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국민의 80%가 농업에 종사했던 당시 ‘빈민’과 ‘노동자’는 다름 아닌 농민들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중심으로 확산된 농촌운동은 ‘농촌경제 살리기’와 ‘영적 각성’ 운동이 접목되면서 이른바 ‘농촌 혁명’을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교회, 농촌운동에 왜 뛰어들었나=1919년 3·1 만세운동이 끝난 뒤 사회적 분위기는 패배감과 상실감에 휩싸였다. 빚을 갚지 못해 일본과 만주로 야반도주하는 이들, 고향을 등지고 떠도는 농민들이 많아지면서 농촌 경제는 피폐해져갔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발간한 ‘조선사정요람’(1916, 1922∼1932)에 따르면 1917년 19.6%였던 자작농가는 1930년에 17%로 줄었다. 같은 기간 ‘자작 겸 소작농가’도 40.2%에서 30%로 줄었다. 반면 소작농은 37.4%에서 45%로 크게 증가했다.
1920∼1930년대 당시 교회의 73%가 농촌교회였기 때문에 농촌의 위기는 곧 교회의 위기였다. 주 성도인 농민이 줄고, 헌금도 부족해지면서 교회의 존립도 위태로워졌다. 임희국 장신대 교수는 “당시 농가의 위기는 곧 그 지역교회의 심각한 피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농촌문제를 남의 문제로 방관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농촌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 ‘농민들이 실력을 키워야 한다.’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 간에 공감대가 차츰 형성되면서 한국교회의 관심은 농촌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장로교 총회는 1928년 9월 7일 제17회 총회에서 ‘농촌부’를 두기로 결정했다. 또 농사학교 설치, 신용조합 설치·보급, ‘농민생활지(誌)’ 발행도 가결했다. 농민생활은 1928년부터 1933년까지 22만6000부를 발행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YMCA(기독교청년회)가 실시한 농촌사업 간이교육 이수자는 1927년 9월 기준 2579명에 달했다.
이밖에도 미션스쿨인 숭실전문학교는 1931년 농과를 신설, 전문적인 농촌지도자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앞서 감리교도 1928년 연희전문학교 내에 농촌문제 심사위원회를 설치하는가 하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전신인 한국기독교연합회도 산하 농촌위원회를 통해 농촌문제 해결에 적극 나섰다. 당시 농촌운동에 뛰어든 기독교 단체로는 YMCA와 YWCA의 농촌부 및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농촌부, 기독교조선감리회 농촌부, 연합기관인 농촌협동사업위원회 등이 꼽힌다.
◇‘농촌 실태조사’에서 ‘협동조합 설립’까지=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활발했던 농촌운동에는 농촌 실태조사가 큰 도움이 됐다.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 등 교단뿐만 아니라 YMCA도 농촌문제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특히 신흥우 YMCA 총무는 1924년 도미, 국제YMCA 위원회 총무인 모트와 한국농촌 지원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주요 합의 내용은 국제YMCA가 농촌 분야 전문가인 미국 간사를 1925년부터 1년에 2명씩 5년간 10명을 파송한다는 내용 등이다. 이 협정에 따라 파송된 국제 YMCA 간사들은 농촌교육(에비슨)과 쌀 문제(프레데릭십), 축산(번스), 농촌경제(클라크), 농촌사업(반하트) 등을 각각 전담하면서 국내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926년 농촌경제학자인 브루너(컬럼비아대) 교수는 1년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 농촌에 대한 실태보고서를 작성, 전 세계에 한국 농촌의 현실을 알렸다.
농촌문제 전문 선교사의 활약도 컸다. 농촌문제 전문가인 루츠 선교사는 1920년부터 평양에 거점을 두고 농작물 및 토양개량과 농촌지도자 육성훈련을 추진했다. 그는 사과나무의 마름병, 감염방지방법, 윤작제, 농민학교 개설 등 농촌 개혁작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협동조합 창설도 붐을 이뤘다. 서울에만 협동조합 11곳, 소비조합 5곳, 판매조합 11곳이 조직됐다. 전국적으로는 65개의 협동조합이 설립됐다. 박용규 총신대 교수는 “범교단적이고 지속적인 농촌운동을 전개한 결과 1929년에 이르러서는 농촌문제에 대한 관심이 사회 전반적으로 높아졌다”면서 “한국 농촌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시기였다”고 평가했다.
◇농촌운동에 헌신한 크리스천들=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던 일제강점기, 농촌에 희망의 싹이 틀 수 있었던 건 농촌으로 달려간 크리스천들의 헌신 덕분이었다.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1909∼1935·여)이 대표적이다. 서울에서 협성신학교를 다니다 스물두 살 때 농촌운동에 투신한 그는 YMCA 농촌사업부 파송으로 경기도 수원군 샘골(현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로 향했다. 오전·오후·야간 3개 반으로 나눠 농민들에게 한글, 역사, 재봉을 가르치는가 하면 종자개량과 금주·금연, 미신타파 등 계몽 활동에도 앞장섰다. 처음엔 거부감을 보였던 마을 주민들도 몸을 사리지 않는 20대 처녀의 열정과 헌신에 마음의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일본 유학파 출신의 조민형(1896∼1950) 장로는 “대대로 농사를 짓는 일이 한국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며 농촌운동에 투신했다. 특히 농촌운동의 지침서로 통하는 ‘조선농촌구제책’을 저술해 농촌운동의 선구자로 불린다. 스승인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간디의 무저항주의를 접한 배민수(1886∼1968) 목사는 농민운동을 독립운동의 청사진으로 삼았다. 장로교총회 농촌부 신설을 비롯해 농촌계몽 순회강연을 활발하게 펼쳤다.
최용신과 함께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던 류달영(1911∼2004) 선생은 서울대 농대(원예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85년 ‘한국무궁화연구회’를 창립해 전국에 무궁화 붐을 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임희국 교수는 “한국교회의 농촌운동은 교회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영적, 경제적, 정신적 발전을 도모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한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다”면서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요구되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자문해주신 분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 △박용규 총신대 신대원 교수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 △이상규 고신대 부총장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
“전도자들아. 부귀한 자의 문으로 가지 말고, 빈민에게로 가라. 헐벗고 배 주리는 그네들에게 영의 위안이라도 주라. 목사들은 프록코트를 벗고, 노동자의 옷을 입고 노동자 속에 들어가라.” 지금으로부터 꼭 90년 전인 1923년 10월 26일 동아일보에 실린 사설은 교회 지도자들의 손과 발이 교회 밖 세상으로 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국민의 80%가 농업에 종사했던 당시 ‘빈민’과 ‘노동자’는 다름 아닌 농민들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중심으로 확산된 농촌운동은 ‘농촌경제 살리기’와 ‘영적 각성’ 운동이 접목되면서 이른바 ‘농촌 혁명’을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교회, 농촌운동에 왜 뛰어들었나=1919년 3·1 만세운동이 끝난 뒤 사회적 분위기는 패배감과 상실감에 휩싸였다. 빚을 갚지 못해 일본과 만주로 야반도주하는 이들, 고향을 등지고 떠도는 농민들이 많아지면서 농촌 경제는 피폐해져갔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발간한 ‘조선사정요람’(1916, 1922∼1932)에 따르면 1917년 19.6%였던 자작농가는 1930년에 17%로 줄었다. 같은 기간 ‘자작 겸 소작농가’도 40.2%에서 30%로 줄었다. 반면 소작농은 37.4%에서 45%로 크게 증가했다.
1920∼1930년대 당시 교회의 73%가 농촌교회였기 때문에 농촌의 위기는 곧 교회의 위기였다. 주 성도인 농민이 줄고, 헌금도 부족해지면서 교회의 존립도 위태로워졌다. 임희국 장신대 교수는 “당시 농가의 위기는 곧 그 지역교회의 심각한 피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농촌문제를 남의 문제로 방관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농촌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 ‘농민들이 실력을 키워야 한다.’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 간에 공감대가 차츰 형성되면서 한국교회의 관심은 농촌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장로교 총회는 1928년 9월 7일 제17회 총회에서 ‘농촌부’를 두기로 결정했다. 또 농사학교 설치, 신용조합 설치·보급, ‘농민생활지(誌)’ 발행도 가결했다. 농민생활은 1928년부터 1933년까지 22만6000부를 발행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YMCA(기독교청년회)가 실시한 농촌사업 간이교육 이수자는 1927년 9월 기준 2579명에 달했다.
이밖에도 미션스쿨인 숭실전문학교는 1931년 농과를 신설, 전문적인 농촌지도자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앞서 감리교도 1928년 연희전문학교 내에 농촌문제 심사위원회를 설치하는가 하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전신인 한국기독교연합회도 산하 농촌위원회를 통해 농촌문제 해결에 적극 나섰다. 당시 농촌운동에 뛰어든 기독교 단체로는 YMCA와 YWCA의 농촌부 및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농촌부, 기독교조선감리회 농촌부, 연합기관인 농촌협동사업위원회 등이 꼽힌다.
◇‘농촌 실태조사’에서 ‘협동조합 설립’까지=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활발했던 농촌운동에는 농촌 실태조사가 큰 도움이 됐다.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 등 교단뿐만 아니라 YMCA도 농촌문제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특히 신흥우 YMCA 총무는 1924년 도미, 국제YMCA 위원회 총무인 모트와 한국농촌 지원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주요 합의 내용은 국제YMCA가 농촌 분야 전문가인 미국 간사를 1925년부터 1년에 2명씩 5년간 10명을 파송한다는 내용 등이다. 이 협정에 따라 파송된 국제 YMCA 간사들은 농촌교육(에비슨)과 쌀 문제(프레데릭십), 축산(번스), 농촌경제(클라크), 농촌사업(반하트) 등을 각각 전담하면서 국내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926년 농촌경제학자인 브루너(컬럼비아대) 교수는 1년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 농촌에 대한 실태보고서를 작성, 전 세계에 한국 농촌의 현실을 알렸다.
농촌문제 전문 선교사의 활약도 컸다. 농촌문제 전문가인 루츠 선교사는 1920년부터 평양에 거점을 두고 농작물 및 토양개량과 농촌지도자 육성훈련을 추진했다. 그는 사과나무의 마름병, 감염방지방법, 윤작제, 농민학교 개설 등 농촌 개혁작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협동조합 창설도 붐을 이뤘다. 서울에만 협동조합 11곳, 소비조합 5곳, 판매조합 11곳이 조직됐다. 전국적으로는 65개의 협동조합이 설립됐다. 박용규 총신대 교수는 “범교단적이고 지속적인 농촌운동을 전개한 결과 1929년에 이르러서는 농촌문제에 대한 관심이 사회 전반적으로 높아졌다”면서 “한국 농촌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시기였다”고 평가했다.
◇농촌운동에 헌신한 크리스천들=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던 일제강점기, 농촌에 희망의 싹이 틀 수 있었던 건 농촌으로 달려간 크리스천들의 헌신 덕분이었다.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1909∼1935·여)이 대표적이다. 서울에서 협성신학교를 다니다 스물두 살 때 농촌운동에 투신한 그는 YMCA 농촌사업부 파송으로 경기도 수원군 샘골(현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로 향했다. 오전·오후·야간 3개 반으로 나눠 농민들에게 한글, 역사, 재봉을 가르치는가 하면 종자개량과 금주·금연, 미신타파 등 계몽 활동에도 앞장섰다. 처음엔 거부감을 보였던 마을 주민들도 몸을 사리지 않는 20대 처녀의 열정과 헌신에 마음의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일본 유학파 출신의 조민형(1896∼1950) 장로는 “대대로 농사를 짓는 일이 한국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며 농촌운동에 투신했다. 특히 농촌운동의 지침서로 통하는 ‘조선농촌구제책’을 저술해 농촌운동의 선구자로 불린다. 스승인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간디의 무저항주의를 접한 배민수(1886∼1968) 목사는 농민운동을 독립운동의 청사진으로 삼았다. 장로교총회 농촌부 신설을 비롯해 농촌계몽 순회강연을 활발하게 펼쳤다.
최용신과 함께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던 류달영(1911∼2004) 선생은 서울대 농대(원예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85년 ‘한국무궁화연구회’를 창립해 전국에 무궁화 붐을 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임희국 교수는 “한국교회의 농촌운동은 교회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영적, 경제적, 정신적 발전을 도모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한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다”면서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요구되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자문해주신 분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 △박용규 총신대 신대원 교수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 △이상규 고신대 부총장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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