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에게문명 유지하다 이스라엘 왕조 등장 후 쇠락
블레셋 문화의 흥망성쇠
성서에서도 잘 드러나 있는 것처럼 블레셋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문명의 사람들이었다. 에게문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갑돌(크레타 섬)을 떠나 가나안 남부 지중해변에 정착한 블레셋 사람들은 가나안 땅의 새로운 기후와 지형 그리고 가나안 문화에 적응해야만 했다.
그들은 정착 초창기에 여전히 에게문명에서 사용했던 그릇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기원전 13세기 말 새와 물고기 장식, 그리고 흑색과 적색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사용했던 에게문명의 미케네 IIIC 토기는 그 무늬와 기본적인 형태는 비슷하지만 가나안 남부 지중해변 토양으로 만든 조금은 변형된 토기(미케네 IIIC1b 토기)로 만들어졌다.
특별히 디오니소스라는 포도주의 신이 유명했던 에게문명의 생활은 이 지역에서도 여전히 포도주용 토기를 만들어 음주문화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음주용 토기들 중에는 포도주뿐만 아니라 맥주용 주전자들도 발견된다. 이러한 주전자는 이스라엘 유적지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서에서는 맥주를 호칭하는 히브리어가 없어 이스라엘 민족과는 다른 음주문화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토기들은 블레셋 사람들의 잔치에 흔하게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예를 들어 일주일이나 되는 긴 기간 동안 거행된 삼손의 결혼 잔치(사사기 14장)에는 분명 이 토기들이 상 위에 올라있었을 것이다. 한글 성서에서 ‘잔치’(14:17)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미쉬테 mishte’로 ‘음료를 동반한 잔치’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정착 이후 블레셋 사람들의 고유한 문화적 유산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변 강대국의 팽창과 이스라엘의 왕조가 등장하면서 블레셋의 세력은 극도로 위축되었고 더 이상 이스라엘에서 블레셋의 고유한 문화적 특색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최근 고고학은 상당히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분야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유적지에서 발견된 다양한 동물의 뼈를 연구하는 고동물고고학 연구는 고대의 식습관과 유목문화를 밝혀내고 있다. 특별히 가나안 땅에 정착한 블레셋의 유적지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금기시 된 돼지 뼈가 상당수 발견되어 이목이 집중된 바 있다.
돼지는 다른 동물보다는 습한 환경을 필요로 하며 양이나 염소처럼 유목이 아닌 정착생활을 하는 이들이 키우는 동물이다. 돼지는 소나 양 같은 가축들보다 손이 덜 가고 상당한 단백질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음식물 쓰레기들을 먹어치우는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돼지 사육은 쉽게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기에 한 지역에 이주해 온 새로운 민족이 빠른 정착을 위한 수단으로 선택했던 인기 업종이었다. 블레셋 사람들 역시 그들이 가나안 정착 초기에 이 업종을 선호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지중해변에 위치한 블레셋의 유입과 동시에 아스글론과 에그론 (텔 미크네), 딤나(텔 바타쉬)에서는 돼지 뼈의 비율이 높아졌다. 아스글론에서는 기원전 13세기 4%의 돼지 뼈가 발견되었지만 기원전 12세기 돼지 뼈의 비율은 19%로 증가했다. 에그론에서도 역시 이전 시대 8%의 비율에 비해 기원전 12세기에 18%로 증가했고 딤나에서도 5%에서 8% 비율로 증가했다. 이후에도 위의 유적지들에서는 숫자는 적으나 여전히 돼지 뼈가 발견되었지만 블레셋의 쇠퇴와 함께 점차 돼지 뼈는 사라졌다.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이주한 장소에 적응하기 위해 그곳의 언어와 문화를 습득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자녀의 이름은 고향의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블레셋 사람들에게도 같은 현상이 있었을 것이다.
가드에서 최근 발견된 한 토기 조각에는 가나안어 알파벳으로 써 있는 두 사람의 이름이 씌어있었는데 “alwt”와 “wlt”로 읽히는 이스라엘의 셈어에서는 생소한 이름이다. 다윗과 싸웠던 가드 출신의 장군 골리앗의 이름 역시 셈어가 아니고 오히려 리디아의 ‘Alyattes’라는 왕의 이름과 어원이 같은 것으로 보아 블레셋 사람들은 셈어 이름보다는 그들이 떠나온 땅에서 사용했던 이름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많은 양은 아니지만 블레셋 지역에서 발견되는 문헌들이 가나안어 특히 히브리어인 것으로 보아 블레셋 사람들은 고향의 언어를 점차 잃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가나안 땅에서 사라진 사람들
주전 732년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의 이집트까지 정복하고자 했던 야망은 해안 도로상에 위치해 있던 블레셋의 다섯 도시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의 궁정 벽 부조에는 아스돗과 아스글론의 포위된 블레셋 사람들이 남겨져 있다. 10년 후 북왕국 이스라엘이 사르곤에 의해 멸망할 때 블레셋은 소규모의 도시국가로 겨우 살아남았다. 그러나 주전 586년 남왕국 유다와 함께 바빌론의 손에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바빌론의 잔혹함은 블레셋의 도시를 불태워 버렸고 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갔다. 하지만 유다와는 달리 그들은 다시는 그들의 도시로 돌아오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세계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들이 살았던 지역은 신약시대 전후에도 헬라어로 ‘필리스티아 혹은 팔레스티아’ 즉 블레셋 사람의 땅이라는 의미로 불렸다.
주후 135년,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들의 제2차 반란을 주도했던 바르 코크바와 그의 군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정복한 지역을 행정구역으로 나누면서 하드리아누스는 이스라엘을 유다로 부르기를 거절했다.
당시 유대인들의 하나님에게 약속 받은 땅이라는 선민의식은 로마인들의 미움을 샀고 하드리아누스는 이 땅과 유대인들의 관계를 끊어버리기 원했다. 결국 하드리아누스의 로마는 ‘이스라엘’ 혹은 ‘유다’를 로마의 지도에서 지워버렸고 ‘필리스티아/팔레스티아’라고 바꾸어 버렸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까지 ‘이스라엘’이 아닌 ‘필리스티아/팔레스티아’에서 유래한 ‘팔레스티나’로 불렸다. 이와 같은 역사를 제대로 인식을 하지 못한 일부 사람들은 성서의 ‘블레셋 사람들’과 오늘의 ‘팔레스타인들’을 혼동하고 있고 오늘의 팔레스타인을 마치 다윗의 적이었던 ‘블레셋 사람들’로 여기고 심지어 미워하기까지 한다. 분명한 사실은 성서의 블레셋 사람들은 오늘의 팔레스타인과 무관한 사람들이고 그들은 사라진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임미영 박사·김진산 박사 공동집필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블레셋 사람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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