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블레셋 도시 ② 아스돗·아스글론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0:46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블레셋 도시 ② 아스돗·아스글론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블레셋 도시 ② 아스돗·아스글론 기사의 사진
아스돗 : 언약궤 빼앗아 처음 뒀던 곳

아스글론 : 삼손이 삼십명 죽인 장소


블레셋 도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곳이 아스돗과 아스글론일 것이다. 특히 아스돗은 에벤에셀 전투(사무엘상 4:1; 5:1)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아 간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처음 두었던 도시이다. 아스글론은 성경에서 자주 접하는 장소는 아니지만 삼손이 아스글론으로 내려가 ‘그곳 사람 삼십 명’(사사기 14:19)을 죽인 사건 때문에 알려진 곳이다. 블레셋 도시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그들의 신앙과 문화가 이스라엘 민족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드에서 발견된 제단과 에그론의 신전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번 호에서 찾아가 볼 아스돗과 아스글론은 어떠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스돗

아스돗은 지중해변가에 위치한 도시로 현재 이스라엘의 수도인 텔아비브에서 남쪽으로 35㎞ 정도 떨어진 도시이다. 아스돗은 1962년부터 72년까지 미국의 프리드만 교수와 히브리대 도단 교수 부부에 의해 발굴되었다.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에서 아스돗의 오래된 역사를 알 수 있었다. 특히 도단 부부는 아스돗의 발굴을 통해 블레셋의 독특한 토기의 발달을 목격할 수 있었고(지난 1회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이미 살펴보았다), 블레셋 사람들이 주전 13세기 말부터 12세기 초 지중해변가에 정착했음을 밝혀낸 바 있다.

아스돗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성서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성서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아스돗과 하나님의 궤(혹은 언약궤) 그리고 다곤신 등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5장은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빼앗아 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 하나님의 궤를 아스돗에 있던 다곤 신전에 두었고 다음날 아침 다곤 신상은 엎드려져 있었다. 다음날도 같은 사건이 반복되었다. 이후 도시에 찾아온 재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궤는 가드와 에그론으로 옮겨졌고 이 도시들 역시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성서 이야기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바로 아스돗의 다곤 신상과 신전이다. 다곤 신은 일찍이 앗수르와 바빌론 지역에서 주로 섬겨졌던 신으로 가나안 지역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다곤은 주전 2300년쯤 기록된 에블라 문서에도 등장하고 있는데 200명이 넘는 신들의 신이요 땅의 주인, 가나안의 주인, 수많은 도시의 주인으로 묘사되었다.

에블라의 도시 성문들은 다곤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주전 1300년경의 우가릿 문서는 바알 이후 세 번째 신으로 다곤의 거대한 신전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자들은 다곤을 바알과 동일한 신으로 보거나 바알과 비슷한 위치의 신으로 이해하고 있다. 바빌론 신화에서 다곤은 비록 그 신화가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상류층의 신들 중에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가릿어의 경우 다곤(dagon)의 어근으로 보이는 dgn은 곡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히브리어의 다간(dagan)도 같은 의미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곤(dagon)의 앞부분 다그(dag)는 히브리어의 물고기라는 뜻이기 때문에 물고기 모양의 신으로 추측하는 경우가 많다. 다곤의 의미가 곡식이든 물고기이든 다곤은 분명 풍요와 관련이 있는 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과 고대 근동 지역의 건조한 여름과 부족한 물이라는 자연환경을 볼 때 풍요로움을 염원하는 이들의 종교적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블레셋 사람들은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면서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기대로 가나안의 신 다곤을 숭배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아스돗에서는 아직까지 신전이나 다곤 신상의 흔적이 발견된 게 없다. 다만 학자들 가운데 앗수르의 니므롯에서 발견된 사르곤의 궁전 벽부조에서 보이는 물고기 모양의 의복을 쓰고 성배하고 있는 사람과 다곤을 연관시키곤 한다.

아스글론

아스글론은 아스돗에서 남서쪽으로 53㎞ 떨어진 장소로 유적지의 경우 공원화되어 현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휴양지로 유명하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중심지인 가자(가사) 지역과 가까워 분쟁이 끊이지 않는 도시이다. 성서시대의 가사와 아스글론은 서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던 블레셋 사람들의 중심 도시들이었지만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의 가자,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스글론으로 가깝고도 먼 이웃이 돼버렸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없다. 하버드대 발굴팀은 현재도 활발하게 아스글론을 발굴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블레셋 사람들의 독특한 토기가 발견되었고 후에는 가나안의 문화와 융화된 토기를 제작한 것이 목격되었다. 특별히 아스글론에서는 포도주 생산을 위한 틀이라든가 수많은 포도주 항아리들 그리고 ‘yn ‘dm 붉은 포도주’라고 기록된 항아리 조각들을 통하여 포도주 생산이 상당히 활발했던 장소였음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생산품들의 거래를 위한 저울과 저울추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방을 회계용 사무실이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아스글론의 부유함은 삼손이 30벌의 의복이 필요했을 때 왜 아스글론에 가서 구할 수 있었는지를 추측하게 한다(사사기 14장). 아스글론의 부유함은 블레셋 시대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스글론의 이름은 주전 1350년 전후 이집트가 가나안 땅을 장악했던 세력이었음을 보여주는 텔 엘아마르나 문서에도 성벽을 쌓은 도시로 묘사되어 있다. 실제로 아치 형태로 진흙벽돌을 쌓아 만든 거대한 성문으로 요새화된 도시가 주전 1850년경부터 이곳에 있었음이 밝혀졌다. 1992년 발견된 이 성문은 길이 15m, 높이 4m, 두께 2m에 달해 마차가 충분히 출입할 수 있는 크기이다. 아스글론의 성문은 천장을 아치 형태로 건축하는 방법 중 가장 최초의 예로서 그 솜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성문 밖은 40도의 경사면으로 이루어져 있어 도시를 침략하려는 적군은 성문까지 힘겹게 올라와야만 했다. 성문은 이후 계속해서 도시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재건축되면서 탑이 더해져 보안이 더욱 강화되었다. 아마 삼손도 이 성문을 통과하여 아스글론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요새화된 성문을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이 왜 아스글론을 정복하지 못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스글론의 성문에서 시작된 도로는 항구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 도로를 따라가다가 발견된 것이 바로 유명한 청동 송아지상이다. 10㎝x10㎝ 크기의 작은 청동상은 상당 부분 벗겨지기는 했지만 은으로 도금되어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특별히 이 청동상은 함께 발견된 점토로 만든 신전 모형 안에 들어 있어 가나안의 신전에는 신상들이 서 있었음을 상상하게 해준다. 아스글론의 송아지상과 신전모델이 도로에서 발견된 것은 도시를 출입하면서 출입의 목적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드려졌던 제사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송아지는 잘 알려진 것처럼 가나안의 신 ‘엘’과 ‘바알’의 상징이다. 바알은 번개를 들고 있는 비를 불러오는 신으로 역시 가나안 땅의 기후와 풍요와 관련이 있는 신이다. 이러한 신상은 이스라엘 민족이 호렙산 아래서 만든 금송아지상(출애굽기 32장),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에 세워 둔 금송아지상(왕상 12장), 그리고 은을 부어 만든 것에 제사 드리는 자는 송아지와 입을 맞춘 것과 같다(호세아 13:2)는 송아지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 역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청동으로 만든 뒤 금을 부어 입힌 조각상을 만들어 숭배했던 적이 있었다. 하나님의 집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든 어떠한 신상도 세울 수 없었고 존재할 수 없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