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이 예루살렘 파괴때 일조… “에돔에 저주 있으리라”
유다의 속국 (항구 에시온게벨)
에돔 땅은 나무가 없고 붉은 바위로 이뤄진 산악지역이며 농업과 목축업에 부적합한 광야 지역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성서시대 에돔 사람들의 경제는 사해에서 추출해내는 소금과 바위(incense stone)에서 얻어낸 향신료 수출에 의존했다. 이렇듯 열악한 경제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구약시대 유다가 에돔 땅에 욕심을 냈던 것은 지난 호에 언급했던 구리 광산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무역로(King’s way) 때문이었다. 더불어 지중해변에 적당한 항구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 유다가 ‘에돔 땅의 바닷가 에시온게벨과 엘롯’(대하 8:17, 참조-왕상 9:26 ‘엘롯 근처 에시온게벨’)을 항구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다윗이 차지했던 에돔 땅 덕분에 솔로몬은 에시온게벨을 통해 오빌의 금을 들여올 수 있었다. 솔로몬 시대 이후 부국강병의 시대를 누렸던 유다의 왕 여호사밧 역시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어 오빌로 보내고자 하였다(왕상 22:48∼50).
한때 학자들은 홍해 해안 가까이에서 발견된 텔 엘-켈레이페(Tell el-Kheleifeh) 유적지를 에시온게벨로 추측했으나 지금은 오히려 엘롯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에시온게벨은 오늘의 이스라엘보다는 동쪽의 요르단 해안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아직까지 발견된 바는 없다. 텔 엘-켈레이페 유적지에서는 이미 주전 10세기께 토기들이 발견돼 솔로몬시대에 요새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유다 왕 요담(왕하 15:32∼38)의 것으로 보이는 인장도 발견된 바 있다. 비록 이곳이 에시온게벨은 아니지만 엘롯 역시 에돔의 땅이었기 때문에 이 요새의 발견은 에돔이 유다의 속국이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유다의 대적자
유다의 속국이었던 에돔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모압과 전쟁을 치를 때 그들의 동맹이 될 수밖에 없었다(왕하 3장). 그러나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때에 에돔은 유다를 배반했고 섭정 왕이 아닌 자신들의 왕을 세웠다(왕하 8:20). 물론 여호람의 반격도 있었지만 에돔은 더 이상 유다의 속국이 아니었다(왕하 8:22). 후에 유다 왕 아마샤는 다시 한 번 에돔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에돔 사람 1만명을 죽이고 에돔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 14:7, 대하 25장).
에돔의 신 코스(Qos/Qaws)
그러나 이 전쟁 과정 속에서 유다 왕 아마샤는 큰 죄를 범하고 말았고 이 범죄는 그를 망하게 만들었다. 아마샤는 에돔에서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지고 돌아왔고 자신의 신으로 세우고 백성들에게 경배하며 분향하도록 하였다(대하 25:14). 성서는 이 에돔의 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 신의 이름을 코스(Qos/Qaws)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모압이나 암몬 사람들에 관한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에돔 역시 성서 외의 다른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 자료가 거의 없다. 덕분에 에돔의 신화나 종교적 자료 역시 밝히는 데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단지 앗수르의 왕들이 에돔을 파괴하고 조공을 받은 기록에 의하면 디글랏빌레셀(주전 745∼727년)과 산헤립(주전 705∼681년) 시대에 에돔 왕의 이름은 ‘코스신은 왕’이라는 뜻의 ‘코스말락’이었고 에살하돈(주전 680∼669년) 시대에는 ‘코스는 위대함’이라는 뜻의 ‘코스가바르’가 왕이었다. 또한 에돔의 요새가 있었던 호르밧 키트밋(Horvat Qitmit) 유적지에서 발견된 인장 주인의 이름은 ‘슈브나코스’로 역시 코스신의 이름이 등장한다.
가나안 지역에서는 사람의 이름에 자신들이 섬기는 주요 신의 이름을 넣어 짓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들에 들어가는 ‘코스’가 에돔의 주요 신의 이름일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코스가 어떤 신이었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가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에돔 땅에서 신약시대 전후에 거주했던 나바테안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섬겼던 두슈라(Dushura)라 불리는 신이 산악을 다스리는 신이었던 것으로 보아 코스도 유사한 역할의 신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유다의 위협적인 세력
비록 코스 신과 관련된 고고학적 자료는 없지만 에돔의 요새가 발견된 호르밧 키트밋(Horvat Qitmit) 유적지에서는 뿔 달린 진흙으로 만든 여인의 두상이 발견돼 여신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이 여신상의 모습은 가나안 땅에서 발견된 어떤 신상과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두상의 양쪽에 뿔이 달렸고 다시 이마 한가운데 뿔이 하나 더 달려 있다. 두상의 정수리에 돋아 있는 기둥은 마치 전쟁용 투구를 연상케 해 전쟁의 여신의 모습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유적지에서 보다 남쪽에 위치한 엔 하체바(En Hazteva) 유적지에서는 작은 성소구역이 발견되었는데 제단과 함께 모두 750여개의 점토형상들과 향을 피우는 제대 그리고 제사용 용기들이 발견되었다. 토기의 형태를 볼 때 에돔의 것들이었으며 특별히 제대 중 세 개는 받침대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유적지들에서는 종교적 관습이나 신화 등을 알려 줄 수 있는 문헌자료는 발견된 것이 없어 정확한 에돔의 종교를 재현하는 것은 어렵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유적지(호르밧 키트밋과 엔 하체바)의 위치는 사해 남쪽 현재 이스라엘의 영토 내에 있으며 모두 주전 7∼6세기께부터 사용된 곳이라는 것이다. 호르밧 키트밋의 북쪽에 위치한 호르밧 우자(Horvat Uza)에도 같은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다의 요새가 발견되었다. 유다의 속국에서 벗어난 에돔은 앗수르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오히려 영토는 확장되었고 유다를 위협할 만큼 강력해졌다.
이러한 사실은 호르밧 우자에서 발견된 오스트라콘(ostracon)에서도 알 수 있다. 오스트라콘은 토기 조각에 잉크로 문헌을 기록하는 것으로 양피지나 파피루스 같이 값비싼 재료를 구하기 어렵거나 급하게 문서를 작성할 때 주로 사용했던 문헌 수단이었다. 호르밧 우자에서는 주전 7∼6세기께 기록된 37개의 히브리어 오스트라콘들과 판독하기 힘든 에돔어로 기록된 오스트라콘 하나가 발견됐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 중 하나는 호르밧 우자보다 북쪽에 있는 아랏(Arad) 요새로 보내지는 문헌으로 에돔이 쳐들어오고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에돔의 위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에돔 사람들은 바빌론 느부갓네살이 주전 586년 예루살렘을 파괴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유다 사람들을 학살했다. 선지자들은 에돔이 이 전쟁에 가담하였기에 저주가 있으리라 예언했다(시 137:7, 사 34:9, 겔 25:12∼13). 저주는 실현되었다. 바빌론의 나보니두스는 주전 553년 에돔을 멸망시켰다. 그 이후 바빌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하자 에돔 땅은 아라비아의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에 의해 점령됐고 그들을 피해 달아난 에돔 사람들은 오히려 네게브 북쪽 유다의 영역 안으로 이동하였다.
<에돔 사람들 계속>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에돔 사람들 ②
송세영
입력 2013-02-0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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