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나바테아 사람들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1:21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나바테아 사람들

속보유저
입력 2013-02-21 17:23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나바테아 사람들 기사의 사진
에돔사람을 서쪽 유다로 몰아내고 그 땅 차지했던 아랍계

아람문화를 계승한 나바테아

나바테아 사람들은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돔 사람들의 땅을 차지했던 이들로 신약시대 유대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나바테아의 수도인 페트라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어 이 칼럼에서 다루고자 한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아랍계통 사람들로 아라비아와 시리아 사이 즉 유프라테스 강부터 홍해까지 지역에 거주했다. 주전 586년 바빌론이 유다를 파괴하자 황폐한 유다 땅에 에돔 사람들이 목초를 찾아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에 남쪽 아라비아 사막에서 올라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히려 에돔 사람들을 서쪽 유다 땅으로 몰아내고 자신들이 에돔 땅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주전 312년께 셀루시드 장군 히에로니무스의 나바테아와의 전쟁 기록 이후 헬라 문헌들에 종종 나타났다.

그러나 나바테아 사람들이 남긴 그들만의 문헌은 아직까지 발견된 바 없다. 단지 사해 주변을 비롯한 요르단 남쪽의 주요 거주지 내에 남겨져 있는 벽화들과 비문들이 있을 뿐이다. 비문에 따르면 나바테아 사람들은 아람어에서 발전된 언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전 12세기부터 오랫동안 근동의 언어로 사용되었던 아람어는 주전 330년께 헬라 문명의 세력이 커지면서 점차 사용되지 않았고 오히려 헬라어가 발전했었다. 그러나 나바테아 알파벳은 아람어에서 발전한 것이었고 주후 4세기께 이 지역에서 사용된 아랍어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들의 동전과 비문은 주로 아람어로 기록되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에 있어서도 아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후대에 아랍 사람들은 아람 사람을 나바테아 사람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사막의 오아시스

나바테아의 언어와 문화가 아람에 기초하고 있지만 에돔이 차지하고 있었던 항구 엘롯과 아카바만을 지나는 무역상들 때문에 이 지역은 보다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이집트에는 사해에서 나오는 역청을 판매했고 항구를 통해 들여오는 향료들을 동쪽 지역과 거래했다. 또한 사막의 기후이기는 하지만 관개시설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고 이를 통한 수입이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나바테아 사람들의 관개시설은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하다. 현재 나바테아 사람들의 거주지는 매우 건조하여 거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으로 이 조건은 과거에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이 지역에 비는 우기에 겨우 1∼2번 크게 내릴 뿐 자주 내리지도 않고 물이 고이지도 않는 지역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물을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 독특한 기술을 개발해냈다. 우선 땅을 깔때기 모양으로 파 들어간 후 가운데에 과일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우기가 시작되기 전 나무 주변 지역의 흙을 무너뜨려 부드럽게 만들어 물이 잘 스며들게 했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 빗물은 깔때기의 경사면을 따라 흘러들어가 나무 아래 고이게 되고 이 물을 덮어 물이 고여 있도록 하였다. 고대부터 역사학자들은 이 시설을 사막의 오아시스라 불렀다. 이러한 발전된 기술을 가진 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바테아 사람들은 바다에서는 악명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한때 해적으로 불린 적도 있다.

유대인과 싸우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던 유대 하스모니아 왕조가 셀루시드 왕조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바테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동맹 관계였다. 그러나 하스모니아 왕조의 알렉산더 야네우스는 이두메아인들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나바테아 사람들 역시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 하스모니아 왕조와 나바테아 사이는 나빠졌고 주전 90년 나바테아 왕 오보다스I세는 알렉산더 야네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주전 62년 로마의 침략에 버티기는 했지만 결국 당시 무적이었던 로마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와의 전쟁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버텼던 장소가 페트라이다.

주전 32년 유다 왕 헤롯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손을 잡고 나바테아 왕 말리쿠스Ⅱ세를 공격했다. 헤롯의 군사와 병거는 몇 번의 접전 끝에 나바테아를 함락할 수 있었다. 주후 1세기 로마시대에 아라비아와 홍해를 잇는 무역으로 인해 나바테아는 국제 무역시장으로 호황을 누리기도 했으며 주후 4세기에는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나바테아의 수도 페트라

페트라는 주전 312년께부터 나바테아의 수도로 대상무역의 중심지였다. 도시는 사해에서부터 시작돼 아카바만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계곡인 와디 아라바의 동쪽 호르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계곡 덕분에 주변이 온통 높게 탑처럼 솟은 바위산들로 둘려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는 자연적 요새를 갖춘 곳이다. 로마가 왜 이곳을 함락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는지 이해할 수 있다.

페트라 유적지에서는 이미 주전 16∼13세기께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학자들 중에는 페트라가 에돔 땅 중 셀라(왕하 14:7)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셀라의 뜻은 단순히 ‘바위’일 뿐 같은 장소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페트라는 바위 계곡 틈새를 지나 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바위로 둘러싸인 분지에 있었던 도시다. 이 계곡의 이름은 와디 무사 즉, 와디 모세라 불리는데 아랍 전통에 의하면 모세가 바위에 지팡이를 꽂아 물이 나오게 한 장소가 페트라이다. 또한 이곳은 모세의 형 아론의 무덤이 있는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페트라에서 발견되는 로마 극장 등 도시의 모습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장관을 이룬 것은 무덤 군이다. 페트라의 무덤은 바위산의 절벽을 깎아 만든 것으로 무덤 입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주전 6세기께 사용된 초기 무덤은 단순한 기둥들이 있는 형태로 아취 형태의 입구가 연결되어 집의 모습을 상상케 한다. 이 무덤의 형태는 점차 화려한 양식을 더하게 되는데 이집트의 장식들과 그리스의 기둥들이 혼합되어 웅장한 입구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 무덤은 주전 2세기께 주로 사용되었다. 마지막에는 로마 신전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건축물로 발전했다.

현재 페트라의 무덤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Ⅲ편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던 성배를 찾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