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에돔 사람들 ③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1:20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에돔 사람들 ③

속보유저
입력 2013-02-14 17:13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에돔 사람들 ③ 기사의 사진
유대인들 에돔 사람이 새로 정착한 이두메아 경멸

이두메아 사람들

에돔은 주전 553년 바빌론의 나보니두스(주전 553∼543년)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주전 539년 바빌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한 후 에돔은 아라비아의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들을 피해 달아난 에돔 사람들은 오히려 네게브 북쪽 지역(진광야-현재 이스라엘 브엘세바 남쪽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곳은 한때 유다의 땅이었지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버려져 있던 곳이었다. 에돔 사람들은 헤브론을 수도로 삼았고 마레사와 벧술 같은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주전 332년경 알렉산더의 헬라 세력 이후 네게브 북쪽 지역에 정착한 에돔 사람들의 지역을 헬라어로 이두메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이두메아 사람들을 경멸했고 그들과 혼인도 하지 않았다.

마레사

마레사는 갈렙에게 주어진 성이었으며(수 15:44) 르호보암의 요새이기도 했다. 또한 히스기야 시대 이스라엘의 46개 도시를 파괴했다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목록에 등장하기도 한다. 바빌론이 유다를 정복하면서 도시는 산산이 부서졌고 오랫동안 버려진 도시였다. 그러나 에돔 사람들이 마레사에 정착하고 이두메아의 주요 도시가 되면서 도시는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마레사는 주전 332년 알렉산더가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은퇴한 그리스 군사들의 주요 거주지가 되면서 헬라문명과 이두메아, 시돈 그리고 나바테아 같은 가나안 문명이 뒤섞여 다양한 문화적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지이다.

마레사의 고고학적 흔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들은 이두메아 사람들이 살았던 동굴과 지하구조이다. 마레사의 많은 구조물들은 부드러운 바위를 깎아 만든 석회동굴들이다. 일반적인 가옥과 가축우리, 작업실(workplace) 그리고 비둘기 집(Columbarium Cave) 등 동굴을 뚫어 만든 이 구조물들은 때로는 지하에 길을 만들어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이 구조물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비둘기 집이다. 85개의 비둘기 집들이 발견된 바 있는데 지하 구조물 벽에 구멍을 뚫어 마련된 곳도 있으며 길이가 30m에 달하는 터널형 비둘기 집도 있다. 후자의 경우 벽에는 3000마리 이상의 비둘기들이 서식할 수 있는 1900개 벽감(niche)이 마련되어 있다. 이 비둘기 집에서 길러진 비둘기는 식용으로 주로 사용되었으며 비둘기의 변은 연료로 사용되었다.

마레사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지하 구조물 중에는 올리브 압축실이다.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큰 방의 한쪽 면을 깎아 만든 올리브 압축기가 보인다. 방 안에는 올리브가 담긴 주머니를 압축하기 위한 거대한 돌추들이 널려 있다. 돌추들은 벽면 반원형 아래 길게 깎여 있는 틈 사이에 걸려 있던 긴 통나무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방 한쪽에 마치 삼손의 연자 맷돌을 연상케 하는 맷돌들이 있다. 이 맷돌에서 먼저 올리브를 으깬 후 으깨진 올리브들을 바구니에 담아 벽면에 있는 올리브 압축기로 기름을 짜내었을 것이다.

마레사에서는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주전 3∼1세기 사이 이두메아 지역에 거주했던 시돈 사람들과 이두메아 사람들의 무덤이었다. 그중 무덤 내부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무덤이 가장 유명한데 이는 시돈의 아폴로파네스 가족 무덤이었다. 무덤의 양면에는 시체를 눕힐 수 있는 벽감이 마련되어 있고 가장 안에는 침대처럼 생긴 벤치가 깎여져 있어 아마도 이 무덤을 사용했던 가족들의 가장 우두머리 조상이 안치되었을 것이다. 무덤 내부는 거대한 항아리(그리스의 암포라형태)와 다양한 신화적 동물들의 벽화로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 까마귀들과 지하수의 입구를 지킨다는 세르베루스,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붉은 불새 등이 그려져 있다. 또 다른 무덤에는 플루트를 부는 남자와 하프를 켜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주전 63년 이스라엘을 정복한 로마의 폼페이는 마레사와 에돔 지역을 유대와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러나 마레사는 주전 40년 페르시아의 파르티아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마레사에는 더 이상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다. 주후 2세기경 로마 도시 에루테로포리스(Eleutheropolis)가 마레사 근처 언덕에 건설되었다.

이두메아인 헤롯이 유대인이 되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이두메아 지역은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러나 주전 202∼195년 사이 있었던 시리아 전쟁에서 셀루시드 왕조에게 통치권이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셀루시드 왕조의 이두메아 통치 역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셀루시드의 통치를 저지한 사람은 마카베오서에 의하면 존 히르카누스와 유대인들이었다(마카베오 1서 5:3). 마카베오서는 외경의 하나로 구약과 신약의 유대 중간사 중 망치라는 뜻을 유대 독립군 마카비가 어떻게 셀루시드 왕조에게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유대 왕조인 하스모니아 왕조를 세웠는가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주전 167∼164, 마카베오 1서 4:36∼61).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은 약 백년간(주전 164∼63년) 과거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영토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고 유대교를 팽창시킬 수 있었다. 결국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있었던 이들은 유대 국가에 종속되었고 모두 유대교로 개종해야만 했다. 이두메아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두메아 사람들이 유대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유대인으로서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이두메아 사람들 중 누구보다 유명한 사람은 헤롯이다. 헤롯은 이두메아 아버지인 안티파테르와 나바테아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의 지원을 받아 왕이 되었지만 사실 유대인들은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헤롯의 형제들과 그의 아들들 또한 이스라엘을 통치했지만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대 땅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로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는 이두메아를 유대 통치지역으로 함께 보았고 이두메아 사람들은 서서히 유대화되어갔다.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스라엘을 정복할 때 2만명의 이두메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싸웠다. 그들의 전쟁은 참혹한 파괴의 현장만을 남겼고 이 전쟁과 함께 이두메아 사람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다만 그들이 거주했던 장소를 이두메아라 부를 뿐이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