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를 시작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지역 여행
지난 호까지 우리는 성서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면서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과 관련된 고고학적 흔적들과 성서적 표현을 살펴보았다. 가나안 땅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운 이스라엘 역사는 주변 국가들과 멀고도 가까운 이웃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 그들의 흔적들을 찾아가고자 한다. 현대 이스라엘로 지정된 경계선으로 볼 때 구약과 신약 시대의 이스라엘 땅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그 땅의 원주민이 아닌 이주민으로 들어와 정착했고 가나안 정복을 통해 원주민을 모두 몰아낸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았기 때문에 가나안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포로생활을 겪을 때 그 땅을 완전히 떠난 적도 있었다.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그들은 이미 잊혀져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고유문화와 종교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헬라와 로마에 의한 이스라엘 땅 점령은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혼란을 가져다준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스라엘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다양한 문화와 역사의 모습들을 찾아보는 흥미로운 일이 되리라 기대한다. 이 작업의 시작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첫 점령지인 여리고로 그 이후 가나안 정복의 여정을 따라 가고자 한다. 여정의 마지막 장소는 이스라엘의 신앙과 역사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물론 구약시대부터 시작되지만 신약시대 그리고 기독교 문명의 고고학적 흔적을 통하여 성서를 읽게 될 것이다.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여리고는 현재 요단 계곡의 강 서쪽, 사해 북쪽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 해수면 아래 258m에 위치해 있다. 여호수아서에 의하면 요셉의 자손에게 할당된 땅이었다(수 16:1). 여리고라는 이름은 레아흐에서 유래한다. 이 이름의 뜻에는 몇 가지 의견들이 있는데 아랍어로 여리고가 ‘향기로운’이라는 뜻의 ‘아리하’로 불리고 있고 레아흐가 히브리어로는 ‘냄새’라는 뜻이기에 아마도 이 곳에서 생산되는 향유 때문에 이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의견이 있다. 또 다른 의견은 달을 의미하는 ‘야레아흐’와 관련이 있고 고대 여리고가 달 신을 섬기는 중심지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
예루살렘에서 황량한 유대광야를 지나 사해가 멀리 보일 즈음 갑자기 푸른색으로 가득한 장소가 눈에 띄는데 그곳이 바로 여리고이다. 여리고는 유대 광야를 지나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사해 지역에 위치해 있고 강우량은 일 년에 160㎜밖에 안 된다. 연 평균 기온도 15∼31도에 이르는 더운 지역이다. 그러나 주변에 샘들이 있어 나무와 풀들이 무성하다. 도시 근처에 있는 엔 에스-술탄 샘에서는 1분에 3.8㎥의 샘물이 솟아 적어도 10㎢의 땅에 물을 댈 수 있다. 성서에서 여리고는 ‘종려나무의 성읍’(신 34:3; 대하 28:15)이라 묘사되고 있을 만큼 종려나무가 상당히 많이 자라고 있다. 비록 광야지역이지만 풍부한 물 자원 덕분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고 당연히 많은 거주지가 발견된 바 있다. 여리고에는 이미 주전 9000년경부터 인류가 살고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이후 20개 이상 거주지로 사용된 층들이 발견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기독교인에게 여리고는 여호수아 정복 전쟁의 첫 번째 목표였고 라합의 이야기라든가 어떻게 성벽이 무너졌는가 등 다양한 사건으로 기억되는 도시이다. 그러나 고고학에서 여리고는 인류가 건설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가 있었던 장소로 더 유명하다.
여리고에 처음 정착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우리는 나투피아(Natufia)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현대 여리고 도시에서 2㎞ 정도 떨어져 있는 엔 에스-술탄 샘 주변에 주전 10000∼9000년 사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문화는 아직까지는 토기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농사를 기초로 하고 있었다. 200∼300명의 사람들이 영구적으로 작지만 둥근 집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다. 이 집은 진흙과 짚을 섞어 태양에 말려 만든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보통 거주지의 지름은 5m 정도 됐고 집의 중앙에는 바닥을 움푹하게 파서 만든 화로가 있었다. 이 거주지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사항은 방바닥 아래에 시신이 묻혀 있는 것이다.
주전 9400년경 마을의 인구는 점차 늘어나 10배 이상의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70채 이상의 집이 지어졌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4만㎡의 세계 최초 도시가 건설되었다. 집들은 여전히 진흙 벽돌을 쌓아 둥글게 지었다. 도시 성벽 하나에는 거대한 돌탑이 있는데 여리고에서 가장 많은 관심과 시선을 받는 고고학적 발견물이다. 이 탑은 높이가 약 3.6m에 달하며 탑 아래 부분만 폭이 1.8m이다. 탑 내부에서 꼭대기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22개의 돌계단을 밟아야 한다. 이 탑에 대한 추측은 상당히 다양하다. 전망대라는 의견이 다수였지만 최근에는 홍수에 대비한 의례가 행해졌던 장소로 보고 있다. 이러한 탑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수백명의 사람이 꽤 오랜 기간 동안 노동에 참여해야만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당시 중앙 집권층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가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유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 여리고에서는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 주전 6800년경부터 도시는 다시 사람들로 북적댔다. 이전에 주로 농사에만 집중했던 것에 비해 이 시대부터는 양을 키우는 목축도 병행했다. 이 시대 무엇보다 유명한 고고학적 발견은 사람 해골의 발견이다. 현재 발견된 해골은 10구인데 몸은 아마도 어딘가 묻고 두상만을 집에 간직한 것으로 보인다. 턱을 제거한 해골은 전체에 회반죽을 입혔고 눈은 조개껍질을 박아 마치 눈을 뜨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몇몇 학자들은 이전시대에 사람을 방바닥에 묻는다든가 해골만을 특이하게 장식한 후 집에 간직한 것을 조상을 섬기는 신앙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해석이 알려진 바는 없다.
이 시대 층에서는 세석기와 방추, 화살촉과 돌칼 등 다양한 도구가 발견되는가 하면 동물이나 사람의 모습을 한 점토 인형이나 토기도 발견된 바 있다. 신을 형상화한 기형학적인 문양의 점토형상이나 돌 형상도 함께 발견되었다. 더불어 조개와 돌을 깎아 만든 장신구들도 발견되어 당시 예술의 발달도 엿 볼 수 있다.
<여리고 계속>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리고 ①
속보유저
입력 2013-02-28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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