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리고 ③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1:29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리고 ③

이지현
입력 2013-03-14 17:23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리고 ③ 기사의 사진
엘리사의 샘·헤롯의 궁전… 예루살렘 길목 핵심도시였다

왕국시대의 여리고

왕국시대의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오고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 지리적 중심지역으로 경제, 사회, 정치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윗은 요단 동편에 있던 암몬 땅에서 하눈이 왕이 되었을 때 인사차 신하들을 보냈다. 하지만 하눈은 암몬 관리들의 이간질로 다윗이 보낸 신하들의 수염을 절반이나 잘라버렸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더불어 가나안 지역에서도 수염은 성인의 상징으로 생각됐기 때문에 이것은 상당히 모욕적인 행위였다. 결국 다윗은 수염이 자라기까지 이들을 예루살렘과 하룻길 정도 떨어져 있는 여리고에서 머물도록 했다(삼하 10:1∼5).

여리고는 주전 9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보이며 꽤 번성한 도시로 북왕국 이스라엘에 속한 성이었다. 처음 여리고에 성을 쌓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상 16장 34절에 의하면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 성을 건축할 때 쌓을 때는 맏아들을 잃었고 성문을 세울 때는 막내아들을 잃는 고통이 따랐다. 이는 여호수아를 통해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수 6:26)고 말씀하신 예언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히엘이 건축한 여리고 성에는 특별히 선지자의 제자들이 살고 있었다(왕하 2:4∼18). 학자들은 여리고에 마치 오늘날 목회자를 위한 신학교처럼 선지자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간 이후 엘리야의 성령이 엘리사에게 임하는 것을 보고 엘리야의 제자들은 엘리사를 따르게 됐다(왕하 2:15). 특별히 엘리사가 여리고에 있는 좋지 않은 물의 근원에 소금을 뿌리고 물을 고치는 장면이 있다(왕하 2:19∼22). 여리고의 물의 근원은 에인 에스 술탄(Ein es-Sultan)이라고 불리는 오아시스로 현재 이곳은 엘리사의 샘이라 불린다. 샘은 1분에 1000갤론 이상의 물을 제공하고 있으며 여리고 도시에 물을 대고 있다.

여리고의 흥망성쇠

여리고 성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파괴된 뒤에도 작은 도시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갈대아 군대 즉 바빌론이 주전 586년에 유다를 점령했을 때 바빌론 군대는 여리고 평지에서 시드기야를 내쫓았고 결국 유다의 군대는 패배하고 말았다(왕하 25:5). 유다 멸망 이후 여리고는 한동안 버려진 폐허도시로 변해버렸다. 주전 539년 고레스는 고대 도시가 위치했던 텔 에스 술탄에서 남동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 새로이 도시를 건축했다.

여리고의 풍부한 경제적 자원은 페르시아 통치 시대뿐만 아니라 헬라문명시대에도 유대인 지역의 중심도시가 되게 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가나안 지역을 점령했을 때 여리고는 그의 개인 소유가 될 만큼 가치있는 도시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그의 장군들이 점령지역을 나눠가질 때 여리고는 셀루시드 왕조의 땅이 되었다. 유대인들의 반란을 두려워했던 셀루시드 왕조 중 바키데스 장군은 여리고 주변에 방어벽들을 쌓고 이 성을 요새화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전 167년 여리고는 마카비를 선두로 한 유대인들에게 빼앗겼으며 한때 예루살렘을 차지했던 유대인 제사장 왕조인 하스모니아의 통치를 받았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고도에 위치한 (해저 400m) 사해에 접해 있는 여리고는 겨울 우기 내내 싸늘한 예루살렘에 비해 훨씬 따뜻하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겨울에 사해와 여리고 지역으로 휴가를 보내러 가는 것처럼 하스모니아 왕조도 여리고에서 겨울을 보내기 위해 헬라문명의 영향을 받은 궁전을 건축했다. 겨울 궁전은 텔 에스 술탄에서 남쪽으로 약 3㎞ 떨어진 와디 켈트 계곡에 위치해 있다. 와디는 가나안 지역의 독특한 지형이다. 일반적으로 겨울 우기에 석회석 암반의 지반이 약한 곳으로 물이 흘러 형성되는 계곡인데 여름에는 물이 전혀 없지만 겨울에는 강처럼 흐른다. 특별히 유다광야의 와디 켈트는 여름에도 부분적으로 물이 남아 있는 웅덩이들이 있으며 자연이 만들어낸 장관이 펼쳐지는 계곡으로 유명하다. 이 계곡의 겨울에 흐르는 물을 끌어들여 궁전 안에는 수영장이 만들어졌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헤롯은 어느 날 여리고 궁전에서 연회를 열고 하스모니아 왕조의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그의 처남 아리스토불루스 3세를 수영장에서 익사시켜버렸다. 그리고 헤롯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 선포했다.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그의 부인 클레오파트라의 도움으로 유대인의 왕이 된 헤롯은 감사의 선물로 여리고를 바쳤다. 하지만 주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했고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여리고를 다시 헤롯에게 주었다. 헤롯은 여리고에 로마식 도시를 건설했다. 하스모니아 왕조의 겨울 궁전을 확장하고 현재 와디 켈트의 계곡 양쪽 툴루 알 알라크(Tulu al-Alaq)라 불리는 유적지에 세 개의 궁전을 새롭게 건축했다. 계곡의 양쪽은 다리를 만들어 서로 왕래할 수 있게 했다. 가장 큰 궁전은 첫 번째 건축한 궁전으로 그 크기만 87×46m에 달한다. 로마식 아쿠아덕트(수로 다리)를 만들어 궁전의 수영장과 목욕탕에 물을 채웠다. 145×40m 규모의 정원을 만들었고 로마식 기둥이 세워진 방들이 있었다. 주변에는 병거 경기가 열렸던 극장도 있었으며 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따 ‘시프로스(Cypros)’라 불렀던 요새를 세워 방어벽을 구축했다. 훗날 이 요새는 수도사들의 광야 은둔장소로 이용되다 수도원이 됐다.

헤롯의 궁전을 중심으로 여리고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큰 도시로 발전했다. 신약시대 여리고를 방문했던 예수님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만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행했으며(막 10:46; 눅 18:35), 키 작은 세리 삭개오를 만났다(눅 19장). 예수님의 유명한 예화 중 선한 사마리아인의 경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는 이야기다(눅 10:30). 최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목 언덕에 예수시대 여관이 있었을 법한 유적지가 발견돼 기독교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주후 70년 로마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이후 여리고는 더 이상 중요한 도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주후 324년 이후 비잔틴 교회의 순례객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수도원과 교회들이 세워졌고 여리고는 다시 한 번 번성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여리고 시험산(Mt. of Temptation)에는 주후 5세기 이후 세워진 그리스정교회의 수도원이 존재하고 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