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아합王이 요새화… 6방 성문·대규모 물 저장고 갖춰
솔로몬의 철병거성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전만 해도 맹주였던 하솔 왕 야빈과 그의 백성은 여호수아서 11:1∼15에 기록된 것처럼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죽음을 면치 못했고 도시는 불로 진멸됐다. 주전 1200년경 파괴된 후 하솔의 하부 도시에는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았다. 고고학 보고에 의하면 여호수아 정복 이후 하솔의 하부 도시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된 바 없다. 다만 상부 도시만이 이스라엘 시대에 재건축되었을 뿐이다.
구약성서는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과 자기 왕궁과 밀로를 지으면서 하솔과 므깃도 그리고 게셀에 철병거성을 건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9:15). 그가 성전을 어떻게 건축했는가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다른 세 도시의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성들을 건축하는데 얼마나 많은 건축자재와 노역이 필요했을지도 역시 가늠할 수 있다. 특별히 이 세 도시의 지리적 입지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지난 호에서도 밝힌 것처럼 하솔의 경우 가나안 정복 이전부터 북부 갈릴리 지역의 중심도시였다. 그 이유는 하솔이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가나안과 시리아를 통과하여 바빌론으로 연결되는 도로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솔로몬 역시 이 도시의 중요성을 간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솔을 철병거성의 하나로 건축하였다. 이를 증명하듯 하솔과 므깃도 그리고 게셀에는 같은 형태의 성문이 발견되었다. 이 성문은 보통 ‘솔로몬의 성문’이라고 불리는데 양쪽에 세 개의 방이 나란히 있는 즉 6개의 방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6방 성문(six chambered gate)’이라고도 불린다. 양쪽의 입구에는 각각 탑 하나씩이 더해져 앞으로 튀어나와 있고 오른쪽으로 도로가 놓여 있다.
하솔을 발굴한 야딘에 의하면 하솔의 ‘6방 성문’은 벽을 이중으로 쌓고 벽과 벽 사이를 칸으로 막아 위에서 보면 방들을 연결해 성벽을 쌓은 것 같은 ‘포곽벽(casemate wall)’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야딘은 이 성벽을 주전 10세기 솔로몬 시대의 독특한 성벽이라고 발표했으며 또한 성 안쪽에서 발견된 행정 건물 역시 솔로몬의 것으로 해석했다. 성문의 건축 연대에 대해서는 사실 아직도 학자들 간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성문의 형태가 동일하여 같은 시대 같은 인물 같은 건축 평면도에 의해 도시를 요새화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아합의 요새
솔로몬이 죽고 난 후 르호보암이 왕권을 이어받으려 하자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찾아와 중앙집권적 통치에 반발하며 고역과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는 요청을 르호보암에게 쏟아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르호보암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협박한다(왕상 12:3-4). 결국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요구를 르호보암이 거절하자 그들은 독립 왕국인 ‘북이스라엘’을 세웠다. 솔로몬의 철병거성들 가운데 하솔과 므깃도는 북이스라엘의 땅이 되었다. 하솔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고고학적 흔적에 의하면 도시는 아합의 시기에 보다 확장되었고 견고한 성으로 사용되었다.
아합의 하솔에서 발견된 건축물들은 어떤 전쟁에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도성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하솔의 서쪽에 세워진 요새로서 그 크기는 25×21m이며 벽의 두께가 2m에 달했다. 전쟁에 대비한 요새의 모습은 물 저장고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가나안 땅은 여름에 비가 전혀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자원도 상당히 부족한 지역이다. 덕분에 수자원이 있는 곳에 주로 사람들이 거주했고 더불어 수자원을 확보하는 것은 각 성을 다스리는 왕의 임무이기도 했다.
하솔의 남서쪽 지역에서 발견된 물 저장고는 주전 9세기 아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그 크기와 규모 때문에 방문객들을 놀라게 한다. 저장고는 유적지를 46m 깊이로 암반에 닿을 때까지 파고 들어가 있다. 한 변이 15m나 되는 사각형의 입구를 파고 지하로 내려가는 갱을 팠다. 갱의 주변을 따라 계단이 만들어져 있는데 계단을 따라 19m 깊이의 갱을 내려가면 비스듬한 경사를 만난다. 다시 경사면에 있는 계단을 따라 25m를 내려가면 지하수와 빗물을 모아놓은 저장고를 만날 수 있다. 계단의 숫자는 총 123개로 석회 반죽이 입혀져 있다. 고대 하솔에 살았던 여인들은 물을 길어 항아리를 이고 매일 이 저장고를 오르내렸을 것이다. 이러한 저장고는 성 밖에 진을 치고 있는 적들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았고 보이지도 않는 수자원으로 전쟁에서 하솔의 주민들이 오랫동안 지탱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하솔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건축물은 양쪽에 기둥을 줄 지어 세워 방을 세 면으로 나눈 건물(tripartite pillared building)이다. 유사한 건물이 므깃도와 브엘세바에도 발견된 바 있는데 양 쪽의 두 방의 넓이는 거의 비슷하여 1.5∼2m에 이르며 자갈돌로 바닥을 포장하였고 가운데 공간은 2.5∼3.5m 넓이로 바닥은 땅을 발로 밟아 만든 우리의 마당과 비슷하다. 일반적인 가옥이 진흙벽돌로 짓는 데 반해 이 건물은 반듯하게 다듬은 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이 건물이 행정에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데 모든 학자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건물의 역할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다르다. 어떤 학자들은 건물 안에서 곡식의 일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곡식 저장고라고 생각한 이들이 있다. 일부에서는 건물이 마치 현대 군인들의 막사와 비슷한 것을 보아 구약시대 군사들의 거처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둥들 사이에 놓여있는 구유라든가 기둥들에 뚫려 있는 구멍들이 동물을 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더불어 현대 마구간과 비교했을 때 이 건물은 왕의 혹은 도시 영주의 말들을 두었던 마구간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별히 하솔의 정치적 성격상 요새가 있었고 전쟁에 대비한 왕의 마구와 마병들이 있었을 것을 추측해 볼 때 이 건물은 솔로몬 시대를 시작으로 아합 시대에도 마구간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하솔은 영원히 황폐하리니
하솔의 정치적 중요성은 이스라엘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했다. 주전 885년경 아람 왕 벤 하닷이 북왕국 이스라엘과 전쟁을 했을 때(왕상 15:20) 하솔은 타격을 받았다. 또한 주전 841년 앗수르의 살만에셀 III세가 시리아로 원정을 나왔을 때도 파괴되었다. 주전 815∼810년경 아람 왕 하사엘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괴롭혔을 때 역시 하솔은 주요 목표물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왕하 8:21; 10;32-33; 12:18-19). 결국 하솔은 주전 734∼732년 베가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었을 때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III세에 의해 점령당했다. 하솔은 완전히 멸망했으며 백성은 사로잡혀 앗수르로 옮겨졌다(왕하 15:29). 유다가 바빌론에 의해 멸하고 페르시아에 의해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 왔을 때 하솔에도 유다인들이 거주했다(느 11:33). 그러나 하솔은 작은 마을이었을 뿐 솔로몬이나 아합 시절에 건축되었던 요새화된 성의 모습을 다시는 갖출 수 없었다. 예레미야가 “하솔은 큰 뱀의 거처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거기 사는 사람이나 그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그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리라 (렘 39:33)”고 예언했던 것처럼 하솔의 고대 도시는 버려졌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솔 ②
속보유저
입력 2013-03-28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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