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북방 요충… 여로보암이 성지로 선택 우상 세워
이스라엘의 최북단 도시
사사시대 이후 이스라엘의 경계는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고 말한다(삿 20:1). 다윗은 자신의 나라를 통치하는 데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인구조사를 실시했고(삼하 24:2) 솔로몬의 통치는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평안히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왕상 4:25).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였을 때도 브엘세바에서 단까지 온 이스라엘에 공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대하 30:5). 브엘세바가 사람이 살 수 있는 최남단의 땅이라면 단은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로 중요한 정치적 입지를 가진 도시였다. 구약성서시대에 단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아람을 경계하는 요새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단은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경계지역으로 1967년 6일 전쟁의 접전지역이었다.
이러한 단의 정치적 성격은 고고학 유적지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지난 호에서 언급되었던 아브라함 성문 외에도 단에는 주전 9∼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이 도시를 요새화하기 위해 세운 성문이 발견되었다. 이 성문은 진흙벽돌을 쌓아 세운 아브라함의 성문과는 달리 돌로 건축되었다. 단의 성문은 이스라엘 왕 아합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도시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성문 입구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졌고 바닥은 돌로 포장된 도로였다. 거대한 성문은 뜰 하나를 사이에 둔 두 개의 다른 사각형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경사진 길을 올라가면 7개의 탑과 여러 개의 방들로 이루어진 첫 번째 구조물에 도착하게 된다. 이 구조물을 통과하면 앞서 언급한 뜰이 나오고 4개의 방으로 구성된 직사각형의 본 성문을 만날 수 있다. 성문을 지나면 넓은 도로를 지나 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단의 성문 구조에서 발견된 흥미로운 구조물은 두 성문 사이 뜰에 놓여 있는 단상이었다. 뜰의 북서쪽에서 발견된 단상은 돌을 직각으로 잘 다듬어 쌓았던 것으로 학자들은 성서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 성문에 올라가 회합을 주도한 이들이 서 있거나 앉아 있었던 자리라고 주장했다. 이 단상을 둘러싸고 각 코너에는 시리아에서 당시 유행하던 꽃잎 모양으로 조각된 둥근 기둥 받침이 발견되었고 이는 앞서 주장한 의견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아마도 단상의 네 귀퉁이의 받침 위에는 각각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단상 위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자의 위에 그늘을 드리우는 지붕을 받치는 구조였을 것이다.
성서에서 우리는 성문에 앉아 있었던 여러 사람들을 발견하는데 이는 성문 위가 아닌 성문과 접해 있는 이러한 구조물에 앉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룻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보아스도 성문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룻 4:1). 또 이스라엘의 왕들은 성문에 있는 이러한 구조물에 앉아 백성을 만났다. 다윗은 성문에 앉아 있었고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해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함으로 모든 백성이 왕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모인다(삼하 19:8). 때로 이곳에서는 재판이 이루어졌다. 아모스서 5장 12절에서는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스가랴 8장 16절에서는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라고 말하고 있다.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에는 때로 산당들도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유다 각 성읍의 성문에 산당들이 있어 헐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단의 성문에서는 5개의 평평한 돌들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마치 제물을 바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긴 탁자 형태의 돌이 있어 이 돌들이 우상을 상징하는 주상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
다윗 왕가의 정통성이 없었던 여로보암은 세겜을 수도로 삼았다가 부느엘로 수도를 이전했다. 아마도 왕국 초기 그는 정치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입지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드리기 위해 자신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올라가 마음이 바뀌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 자신을 죽이고 나라를 돌려줄까 걱정이 되었다. 결국 예루살렘이 아닌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두고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낸 그들의 신이라고 말했다.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을 성지로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 두 도시가 국가 경계선이기 때문이다. 단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이며 벧엘은 남쪽 경계로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지난 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종교적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은 미가 집에 있던 레위지파 출신의 제사장과 드라빔이 있던 장소이며 벧엘은 야곱이 하늘로 오르내리는 천사들을 보았던 장소로 베고 잤던 돌을 세워 하나님의 집 즉 벧엘이라 명명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놓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가나안 땅에서 신상들은 대부분 각각 상징하는 동물상 위에 올려졌고 여로보암은 금송아지가 가나안 최고의 신의 상징이었기에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만들지 않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일은 우상을 섬기지도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이스라엘의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며 이 일이 죄가 되어 단은 저주받은 장소 일 수밖에 없었다(암 8:14). 심지어 단의 성소 구역은 주전 2세기에도 여전히 주변지역을 위한 신전들로 사용되었던 흔적이 있다.
실제로 텔 단에서는 주전 10세기 후반 여로보암 시대에 세워졌다가 주전 9세기 아합의 시대에 증축되어 제사가 행해진 성소구역이 발견되었다. 도시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성소구역은 여러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신전 자체는 이미 사라졌지만 신전이 서 있었던 19×19m의 단상과 높이 3m에 크기는 5×6m로 추정되는 거대한 돌제단이 있었던 제사구역 그리고 제사용 도구를 두거나 정결례를 행하거나 신전의 행정을 담당했던 사무실 격의 여러 방들이 함께 발견되었다. 건물 전체는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행정건물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베니게 즉 두로와 시돈의 건축양식이 두드러졌다. 정교하게 모나게 다듬은 돌로 지어진 건물은 지진에도 버틸 수 있는 벽돌쌓기 방식으로 쌓아졌다. 비록 제단 전체가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50㎝ 높이의 돌을 깎아 만든 뿔은 이스라엘의 흔한 뿔 달린 제단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 제단은 잘 다듬은 돌을 사용했고 높이도 3m나 되어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출 20:25)는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고 있어 단의 종교적 부패 역시 엿볼 수 있게 한다.
단은 주전 732년 앗수르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단의 비옥한 땅은 주전 4세기까지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변 지역의 종교적 장소로 사용된 흔적은 있지만 주전 4세기까지 그다지 역사에 언급된 적이 없는 장소로 꽤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단 ②
이지현
입력 2013-04-1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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