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고라신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1:39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고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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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3-04-25 17:53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고라신 기사의 사진사자상·메두사… ‘우상숭배’ 넘쳐 저주받은 도시

예수께서 권능을 행하신 도시


지난 호에 소개된 벳새다와 함께 고라신은 갈릴리 주변의 유대인 도시로서 예수께서 활동했던 무대이기도 하다. 고라신은 마태복음(11:20∼24)과 누가복음(10:13∼15)에 각각 한 번씩 언급되고 있는데 두 구절은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애석하게도 고라신은 예수께서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과 함께 회개하지 않은 도시로 책망을 받았다. 고라신에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 같은 이방인의 도시에서 행했다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며 심판 날에 오히려 이 이방인의 도시들이 고라신과 벳새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말했을 정도로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약성서는 벳새다가 제자들의 고향이라고 말하면서 예수의 사역을 다루고 있지만 고라신에서 어떤 사역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안타깝게도 고고학자들마저 고라신에 주후 1세기쯤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는 흔적만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주후 3∼4세기 유대인의 거주지역이 발견되면서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유대인이었을 확률이 높아졌다.

유대인의 흔적이 발견되다

고라신은 갈릴리 호수 북쪽 해변가에 있는 도시로 가버나움에서 동쪽으로 2.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1962∼64년 처음 유적지에 대한 조사와 발굴이 시작되었고 1980∼87년 보다 광범위한 발굴이 실행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적+지에는 주후 1세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주요 건물들은 주후 3∼4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건물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산석인 현무암으로 지어졌다.

도시의 전체 면적은 10만㎡에 달하는데 회당을 중심으로 5구역으로 나눈 모습과 유대인들이 안식일 전이나 회당에 가기 전 몸을 씻는 정결례를 행했던 미크베가 발견된 것은 이 도시가 유대인의 거주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적지 내에서 많이 발견되는 올리브기름을 짤 때 사용한 압축 돌들은 올리브기름 생산을 통해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고라신이 발굴되었을 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곳에서 발견된 회당에 관심을 가졌다. 우선 회당의 연대가 예수의 공생애 시기인 주후 1세기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무암으로 지어진 회당은 전형적인 갈릴리 양식으로 지어졌다. 갈릴리 양식의 회당 건물들은 두 줄의 기둥들이 세워져 전체 건물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고 세 개의 입구가 있으나 가운데가 가장 크게 만들어졌으며 실내의 벽을 따라 벤치 형태의 돌 의자가 마련돼 있었다. 회당은 주후 2세기부터의 흔적이 발견되며 주후 4세기 파괴되었다가 주후 6세기 다시 세워졌다.

회당, 유대인들의 신앙적·민족적·정치적 중심

회당은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발견되는 건물의 이름이며 동시에 유대인들의 모임을 칭하는 말로 오직 예루살렘에만 있을 수 있었던 성전과는 달리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모든 곳에 존재했다. 그렇다 보니 이방 도시들 가운데서 회당은 유대인의 상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무너지고 희생제사가 더 이상 드려지지 않으면서 제사장의 역할은 사라졌다. 유대인들은 제사 대신 함께 모여 기도와 토라를 연구하며 토론하였다. 회당은 헬라어로 시나고그로, 히브리어 카할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모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회당은 이스라엘의 바빌론 포로기(주전 586∼537년)에 혹은 페르시아에서 돌아와 제2성전을 짓던 시기에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성전이 없어진 포로기에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를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들(슥 7:5)과 말씀을 자손들에게 항상 읽어주는 관습을 행하던 특별한 장소가 필요했을 것이며 이 장소는 세대를 거쳐 건물의 형태로 발전해 기원전 1세기 전후 유대인 삶의 구심점이 되었으리라고 본다.

가장 오래된 회당은 그리스 델로스 섬에서 발견된 회당(주전 150∼128년)이며 팔레스타인 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회당은 하스모니아 왕조가 지은 여리고에 위치한 겨울궁전 안의 것(주전 75∼50년)이다. 로마의 점령 이후 유대인들은 그들이 가서 사는 곳마다 회당을 지었다. 고라신을 비롯해 가버나움 그리고 쯔팟 같은 유대인의 도시에서는 의례히 발견되는 것이 회당이다. 회당은 큰 방을 중심으로 작은 방 몇 개가 붙어 있는 형태로 지어졌는데 전체 구조는 시대와 장소에 유행하는 스타일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동일한 특징은 중앙을 중심으로 두 줄의 기둥이 세워져 있고 건물의 벽면을 따라 계단이 벤치 형태로 깎여 있거나 돌을 쌓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벤치는 회당에서 모이는 회중이 벽면을 따라 둘러앉아 있을 수 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신약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회당에는 회당장이 있어(막 5:22, 35∼36, 눅 8:49; 13:14; 행 13:15; 18:8, 17) 집안 대대로 회당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식과 공동체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던 사람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1세기쯤 기록된 테오도투스(Theodotus) 석비의 경우 이 석비를 만든 테오도투스는 본인을 회당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회당장의 지휘 아래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기도를 했고(마 6:5), 안식일과 절기에 성찬 예식을 행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관습이 있었다. 때로 마을에서 벌어지는 재판이 회당에서 행해지기도 하였는데 예수께서도 회당에서 채찍질이 있으리라 말씀하셨다(마 10:17; 23:24; 막 13:9). 회당은 각 마을에 가장 큰 건물로 사람들이 회합할 수 있는 장소였다. 덕분에 회당에서는 종교적 모임 외에도 정치적 모임을 갖기도 했다.

모세의 자리

그러나 무엇보다 회당에서 이루어진 가장 큰 활동은 토라 즉 구약의 5경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다. 예수 역시 회당에서 토라를 읽고 토론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이셨으며(마 4:23; 9:35; 13:54; 막 1:21∼39; 6:2; 눅 4:15, 16; 6:6; 13:10; 요 6:59; 18:20) 사도행전에서도 스데반과 다른 제자들 또한 성경을 읽고 토론하며 예수의 복음을 전파했다. 성서는 토라를 읽을 때 “회당의 높은 자리”(마 23:6; 막 12:39; 눅 11:43; 20:46)에 서서(눅 4:16)에서 읽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토라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토라를 읽는 자는 높게 만들어진 단상으로 올라갔다. 토라를 읽고 나면 강론과 토론이 잇따랐고 선생들 즉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 혹은 회당장은 “모세의 자리”(마 23:2)에 앉아 토론을 이끌었다. 특별히 고라신의 회당에서는 “모세의 자리”라고 새겨진 현무암으로 만든 의자가 발견돼 성서 속의 회당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일반인은 회당 벽을 따라 깎아져 있었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고라신의 회당 건물에서 또 다른 우리의 이목을 끄는 것은 한 쌍의 돌로 만든 사자 조각상과 건물 곳곳을 장식한 동물 형상과 독수리, 무장한 군사,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메두사의 머리 등의 조각들이다. 형상을 조각하는 것은 금기시하던 유대인들의 건물이 대부분 꽃이나 식물 혹은 기하학적 무늬들로 장식되는데 반해 고라신의 회당은 율법을 어기고 있어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고라신을 향한 예수의 저주를 떠올리게 한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