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버나움 ①
속보유저
입력 2013-05-02 17:59
귀신 쫓고 병자 고치고… 예수님 공생애 주요 무대
예수 공생애의 주요 무대
지난 호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3년 공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갈릴리 지역에서 보내셨다. 특히 갈릴리호수 지역에서도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활동하셨다. 유년시절부터 청년에 이르기까지 살았던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살면서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고 복음을 전하셨다(마 4:13; 8:5,14,15; 9:2∼6,10∼17; 막 1:32∼34). 공관복음의 처음 책인 마가복음은 예수의 공생애 시작을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출발하고 있다.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곧이어 베드로의 집에 머물고 있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다(막 1:21∼29). 이러한 예수의 권능의 사건들을 직접 목격하고도 가버나움 사람들은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처럼 회개하지 않았다. 결국 가버나움은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는 책망을 듣고 말았다(눅 10:15).
가버나움에서의 발굴
현재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 해변에 위치한 ‘크파르 나훔(Kfar Nahum)’이라는 유적지다. 크파르 나훔이란 히브리어로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다. 가버나움은 주전 2세기부터 정착이 시작된 유대인의 마을이기 때문에 이 이름은 구약성서의 나훔과는 관련이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이 이름이 후대에까지 이어져 유적지의 이름이 아랍어로 ‘탈훔(Talhum)’ 즉 훔의 폐허 언덕이라 불려왔기 때문에 1830년대 성서의 땅을 답사했던 에드워드 로빈슨에 의해 쉽게 가버나움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1800년대 후반 프랑스 수도사들은 가버나움 지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발굴을 통해 신약시대와 비잔틴시대에 사용된 유적들을발견했다. 더불어 유적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도사들은 주변에 울타리를 두르고 야자수 등을 심어 순례객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00년대 초반 본격적인 발굴이 이뤄지면서 회당이라든가 집터 그리고 베드로의 집이라 불리는 교회터 등이 발견돼 신약시대 가버나움에 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게 됐다.
어업 도시
가버나움은 갈릴리 주변 도시 중에서 어업이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다. 주전 2세기쯤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부터 도시가 세워졌다. 도시 자체를 둘러싸고 있는 방어벽은 없었지만 해안가까지 도시가 확장돼 있어 신약시대에는 1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도시는 다메섹에서 가이사랴 그리고 이집트까지 이어지는 해변무역도로(Via Maris)가 지나가는 무역이 발전한 도시 중 하나였다. 유적지에서는 이 해변무역도로가 지나가는 표시가 새겨진 마일스톤(Milestone)이 발견된 바 있다. 마일스톤은 로마가 정복한 도시들을 잇는 도로에 1마일마다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로 가버나움에서는 바닥을 돌로 포장한 로마식 도로가 함께 발견됐다. 이곳에서는 여행자들과 순례객들에게서 세금을 거둬들였는데 아마도 예수의 제자 중 마태 역시 이 세금을 받는 사람이었을 것이다(마 9:9∼13). 무역상들은 가버나움에 들러 긴 여정에 필요한 말린 물고기라든가 곡식가루 등 음식을 구입했다.
최근 가버나움에서 새롭게 조사된 바에 의하면 해안가에는 2×5m 크기의 반원형 돌을 쌓아 잘 지은 움푹한 두 개의 건축물이 있는데 건물 벽은 모두 하얗게 회칠을 해 방수 처리했다.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탁자처럼 쌓인 돌이 있어 학자들은 이곳이 물고기를 사고팔았던 장소라고 보고 있다. 가버나움 조사에 의하면 곡식을 갈아 가루를 만드는 수많은 맷돌과 올리브기름을 짜는 틀들이 많아 어업뿐 아니라 농업 쪽에서도 상당한 이윤을 창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견된 가옥들은 현무암으로 만든 벽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그다지 잘 다듬은 것은 아니다. 가옥의 중앙은 안뜰로 이뤄져 있고 안뜰을 둘러싸고 방들이 있었다. 문이 없는 입구들이 안뜰을 향해 있어 안뜰은 마치 공동 소유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여러 가족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방에는 낮은 창문이 만들어져 빛이 들어올 수 있는 구조였다. 안뜰의 바닥은 돌로 포장돼 있었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 역시 발견됐다. 가옥들은 단층으로 이 계단을 통해 지붕 위로 올라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붕 천장은 나무 들보를 깔고 진흙을 섞은 나뭇가지 등으로 덮었다.
마가복음 2장 4절에 등장하는 4명의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내리기 위해 천장을 뜯는 사건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뤄질 수 있었다. 주후 1세기 즉 신약시대 지어진 현무암 집들은 모두 두 개의 안뜰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뻗어 있었다. 방들은 대부분 작고 좁은 직사각형 모양이지만 두 개의 안뜰이 만나는 지점에 있던 동쪽의 방 하나는 길이가 7.5m에 이르는 꽤 큰 방이었다. 안뜰에는 돌로 만든 화로가 있었고 여러 가지 살림도구라든가 토기, 어업에 필요한 도구들이 함께 발견됐다. 이 가옥 구조 가운데 로마의 도시들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화장실이나 하수도 시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베드로의 집
이러한 가옥들 중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현재 8각형 모양의 현대 건물 아래 발굴된 흔적이다. 프랑스 수도사들은 이 집을 ‘거룩한 인슐라’라 불렀다. 인슐라란 로마식 건물의 형태로 안뜰 하나를 둘러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지금의 아파트처럼 집이 위로 지어져 모여 있는 모습을 말한다. 이 집은 총 3개의 층이 쌓여져 있는 것으로 발견됐는데 주전 1세기 처음 지어진 집과 4세기와 5세기에 걸쳐 교회가 세워진 층이 있다.
주전 1세기에 지어진 집의 경우 가버나움에서 발견된 다른 집들처럼 잘 다듬지 않은 현무암으로 지어진 집이었지만 1세기 후반 이 집은 조심스럽게 리모델링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벽들은 흰색의 회칠로 뒤덮였고 벽 위에는 글자들이 쓰여 있다. 총 131개의 비문이 발견됐는데 헬라어와 아람어, 고전 시리아어와 라틴어로 쓰였다. 예수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주님, 가장 높으신 하나님 등이 언급돼 있다. 기독교의 상징인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가 그려졌고 특별히 ‘로마의 도우미’ 베드로라고 쓰여 있었다. 글씨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색깔로 그린 꽃으로 장식된 십자가라든가 석류, 무화과 등의 그림들도 발견되었다.
이 집에서는 등잔만이 발견될 뿐 더 이상 살림도구용 그릇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집이 처음에는 일반적인 개인 집이었으나 점차 종교적 모임이 있었던 장소로 탈바꿈했다고 주장하면서 초대 가정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별히 학자들은 이 집을 가버나움에 있었던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준 집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머무는 동안 베드로의 집에 머물렀을 것이며 병 고치는 기적이 행해진 이 장소가 예수의 승천 이후 기념장소로 기도 모임이 이뤄지다가 교회가 됐다고 본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이 집의 벽에서 발견된 비문들은 훼손이 심해 베드로의 이름을 읽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학자들은 이 집의 바닥이 돌로 포장돼 있고 그 크기도 다른 방에 비해 클 뿐 아니라 지붕을 지탱할 수 있는 기둥도 없어 집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안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집이 베드로의 집이거나 혹은 초대 교회의 모습일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바이다. 주후 4∼5세기 이 건물 위에 지어진 교회의 전통은 분명 이곳이 기독교적 전설이 담겨진 곳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예수 공생애의 주요 무대
지난 호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3년 공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갈릴리 지역에서 보내셨다. 특히 갈릴리호수 지역에서도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활동하셨다. 유년시절부터 청년에 이르기까지 살았던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살면서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고 복음을 전하셨다(마 4:13; 8:5,14,15; 9:2∼6,10∼17; 막 1:32∼34). 공관복음의 처음 책인 마가복음은 예수의 공생애 시작을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출발하고 있다.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곧이어 베드로의 집에 머물고 있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다(막 1:21∼29). 이러한 예수의 권능의 사건들을 직접 목격하고도 가버나움 사람들은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처럼 회개하지 않았다. 결국 가버나움은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는 책망을 듣고 말았다(눅 10:15).
가버나움에서의 발굴
현재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 해변에 위치한 ‘크파르 나훔(Kfar Nahum)’이라는 유적지다. 크파르 나훔이란 히브리어로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다. 가버나움은 주전 2세기부터 정착이 시작된 유대인의 마을이기 때문에 이 이름은 구약성서의 나훔과는 관련이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이 이름이 후대에까지 이어져 유적지의 이름이 아랍어로 ‘탈훔(Talhum)’ 즉 훔의 폐허 언덕이라 불려왔기 때문에 1830년대 성서의 땅을 답사했던 에드워드 로빈슨에 의해 쉽게 가버나움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1800년대 후반 프랑스 수도사들은 가버나움 지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발굴을 통해 신약시대와 비잔틴시대에 사용된 유적들을발견했다. 더불어 유적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도사들은 주변에 울타리를 두르고 야자수 등을 심어 순례객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00년대 초반 본격적인 발굴이 이뤄지면서 회당이라든가 집터 그리고 베드로의 집이라 불리는 교회터 등이 발견돼 신약시대 가버나움에 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게 됐다.
어업 도시
가버나움은 갈릴리 주변 도시 중에서 어업이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다. 주전 2세기쯤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부터 도시가 세워졌다. 도시 자체를 둘러싸고 있는 방어벽은 없었지만 해안가까지 도시가 확장돼 있어 신약시대에는 1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도시는 다메섹에서 가이사랴 그리고 이집트까지 이어지는 해변무역도로(Via Maris)가 지나가는 무역이 발전한 도시 중 하나였다. 유적지에서는 이 해변무역도로가 지나가는 표시가 새겨진 마일스톤(Milestone)이 발견된 바 있다. 마일스톤은 로마가 정복한 도시들을 잇는 도로에 1마일마다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로 가버나움에서는 바닥을 돌로 포장한 로마식 도로가 함께 발견됐다. 이곳에서는 여행자들과 순례객들에게서 세금을 거둬들였는데 아마도 예수의 제자 중 마태 역시 이 세금을 받는 사람이었을 것이다(마 9:9∼13). 무역상들은 가버나움에 들러 긴 여정에 필요한 말린 물고기라든가 곡식가루 등 음식을 구입했다.
최근 가버나움에서 새롭게 조사된 바에 의하면 해안가에는 2×5m 크기의 반원형 돌을 쌓아 잘 지은 움푹한 두 개의 건축물이 있는데 건물 벽은 모두 하얗게 회칠을 해 방수 처리했다.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탁자처럼 쌓인 돌이 있어 학자들은 이곳이 물고기를 사고팔았던 장소라고 보고 있다. 가버나움 조사에 의하면 곡식을 갈아 가루를 만드는 수많은 맷돌과 올리브기름을 짜는 틀들이 많아 어업뿐 아니라 농업 쪽에서도 상당한 이윤을 창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견된 가옥들은 현무암으로 만든 벽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그다지 잘 다듬은 것은 아니다. 가옥의 중앙은 안뜰로 이뤄져 있고 안뜰을 둘러싸고 방들이 있었다. 문이 없는 입구들이 안뜰을 향해 있어 안뜰은 마치 공동 소유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여러 가족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방에는 낮은 창문이 만들어져 빛이 들어올 수 있는 구조였다. 안뜰의 바닥은 돌로 포장돼 있었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 역시 발견됐다. 가옥들은 단층으로 이 계단을 통해 지붕 위로 올라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붕 천장은 나무 들보를 깔고 진흙을 섞은 나뭇가지 등으로 덮었다.
마가복음 2장 4절에 등장하는 4명의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내리기 위해 천장을 뜯는 사건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뤄질 수 있었다. 주후 1세기 즉 신약시대 지어진 현무암 집들은 모두 두 개의 안뜰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뻗어 있었다. 방들은 대부분 작고 좁은 직사각형 모양이지만 두 개의 안뜰이 만나는 지점에 있던 동쪽의 방 하나는 길이가 7.5m에 이르는 꽤 큰 방이었다. 안뜰에는 돌로 만든 화로가 있었고 여러 가지 살림도구라든가 토기, 어업에 필요한 도구들이 함께 발견됐다. 이 가옥 구조 가운데 로마의 도시들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화장실이나 하수도 시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베드로의 집
이러한 가옥들 중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현재 8각형 모양의 현대 건물 아래 발굴된 흔적이다. 프랑스 수도사들은 이 집을 ‘거룩한 인슐라’라 불렀다. 인슐라란 로마식 건물의 형태로 안뜰 하나를 둘러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지금의 아파트처럼 집이 위로 지어져 모여 있는 모습을 말한다. 이 집은 총 3개의 층이 쌓여져 있는 것으로 발견됐는데 주전 1세기 처음 지어진 집과 4세기와 5세기에 걸쳐 교회가 세워진 층이 있다.
주전 1세기에 지어진 집의 경우 가버나움에서 발견된 다른 집들처럼 잘 다듬지 않은 현무암으로 지어진 집이었지만 1세기 후반 이 집은 조심스럽게 리모델링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벽들은 흰색의 회칠로 뒤덮였고 벽 위에는 글자들이 쓰여 있다. 총 131개의 비문이 발견됐는데 헬라어와 아람어, 고전 시리아어와 라틴어로 쓰였다. 예수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주님, 가장 높으신 하나님 등이 언급돼 있다. 기독교의 상징인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가 그려졌고 특별히 ‘로마의 도우미’ 베드로라고 쓰여 있었다. 글씨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색깔로 그린 꽃으로 장식된 십자가라든가 석류, 무화과 등의 그림들도 발견되었다.
이 집에서는 등잔만이 발견될 뿐 더 이상 살림도구용 그릇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집이 처음에는 일반적인 개인 집이었으나 점차 종교적 모임이 있었던 장소로 탈바꿈했다고 주장하면서 초대 가정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별히 학자들은 이 집을 가버나움에 있었던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준 집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머무는 동안 베드로의 집에 머물렀을 것이며 병 고치는 기적이 행해진 이 장소가 예수의 승천 이후 기념장소로 기도 모임이 이뤄지다가 교회가 됐다고 본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이 집의 벽에서 발견된 비문들은 훼손이 심해 베드로의 이름을 읽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학자들은 이 집의 바닥이 돌로 포장돼 있고 그 크기도 다른 방에 비해 클 뿐 아니라 지붕을 지탱할 수 있는 기둥도 없어 집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안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집이 베드로의 집이거나 혹은 초대 교회의 모습일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바이다. 주후 4∼5세기 이 건물 위에 지어진 교회의 전통은 분명 이곳이 기독교적 전설이 담겨진 곳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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