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단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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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3-04-04 17:13
요단강 가장 큰 水源으로 강 이름의 어원이 된 도시
요단강의 수원
1830년대 미국에서 온 성서학자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은 이스라엘 전국을 직접 답사하면서 성서의 땅 위치를 비교했고 수많은 성서 속의 도시들을 밝혀낸 바 있다. 그중 헬몬산 언저리 폭포 옆에 있었던 아랍어로 텔 엘-카디(Tel el-Qadi)라 불리는 유적지를 조사하면서 이곳을 단 자손이 이동하여 살게 된 레셈(수 19:47) 혹은 라이스 땅(삿 18:1)이라고 주장했다. 텔 엘-카디란 ‘심판의 언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히브리어 ‘단’도 심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창 49:16) 유적지 이름의 어원이 유사하다는 데 기인했으며 더불어 유적지 옆의 폭포가 요단강의 수원 중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단강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헬몬산(2840m)에서 시작하여 세계에서 가장 낮은 사해까지 흘러내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 건넌 강으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현재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가 경계선이기도 하다. 한국어로 번역된 요단강은 히브리어로는 야르덴(yarden) 강이다. 이 이름은 ‘내려오다’라는 히브리어 ‘야라드’와 ‘단’이라는 이름의 합성어로 그 의미는 ‘단 샘에서부터 내려오다’라는 뜻이다. 요단강의 수원은 모두 3개의 샘들(단, 헐먼, 스닐)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단 유적지의 샘이 가장 큰 수원지이다. 학자들은 단 유적지 즉 텔 엘-카디가 성서의 단이라 불렸고 요단강 이름의 어원이 되었다는 데 이견이 없다.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땅 레셈/라이스
단 샘에서 나오는 물이 주변 지역을 비옥하게 했으리라는 것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집트에서 시작해 이스라엘과 시리아를 지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연결되는 무역로에 위치해 있었던 이곳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었음도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덕분에 이 지역 백성은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어 부를 누렸고(삿 18:7)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살고 있었다(삿 18:27). 이 땅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단 자손에 의해 점령되기 전에는 레셈 혹은 라이스라 불렸고 이 이름은 이미 주전 19세기 이집트의 문서에도 이름이 남겨져 있을 만큼 오래된 도시가 있었다. 아브라함(아브람)의 시대에도 등장하는 단이라 불렸던 도시가 바로 이곳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시날, 엘라, 엘람, 고임의 왕들이 조카 롯이 거주하고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을 공격하고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가자 아브라함(아브람)은 이들과 대항해 싸웠다. 그는 집에서 기르고 훈련시킨 318명의 용사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단까지 쫓아가 쳐부수고 다메섹가지 쫓아갔다(창 14:1∼14).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 단 자손은 소라와 에스다올 지역(수 19:40∼46) 즉 지중해변 블레셋 사람들과의 경계에 위치했다. 그러나 그들은 온전히 그들의 땅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들은 기업의 땅을 구하러 떠나야 했고(삿18:1) 북쪽으로 올라가 여호수아서에는 레셈으로, 사사기에서는 라이스라 불렸던 성의 사람들과 싸워 점령하고 거기 거주하여 그들의 이름을 따서 단이라 부르고 그들의 경계를 확장했다(수 19:47; 삿 18장).
사사기에서는 이 전쟁의 과정을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단 자손은 그들 가족 가운데 용맹스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게 했다. 북쪽으로 가던 정탐꾼들은 중간에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라 부르는 이의 집에 유숙하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미가가 은을 부어 만든 드라빔과 함께 레위인 출신의 어린 제사장을 눈여겨보았다. 정탐꾼들이 본 라셈/라이스는 샘이 있어 비옥하고 부유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시돈과도 거리가 멀었고 북쪽은 헬몬산으로 막혀 있어 고립되어 있기에 아람 같은 다른 나라들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삿 18:27∼28) 그들이 차지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단 자손은 칼날로 그들을 치고 그 성읍을 불살라 이 땅을 점령하고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불렀다(삿 18:29). 그런데 이 전쟁 과정에서 성서는 후대 이스라엘의 왕국시대와 관련이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정탐꾼들이 보았던 미가의 집에 세워진 드라빔과 제사장을 단 자손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 자손은 그들의 전쟁 여정에 이 드라빔과 제사장을 취하는 것도 포함하였다. 미가가 다시 빼앗으려고 했지만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그는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삿 18:25).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을 단 자손의 제사장으로 삼았다(삿 18:30∼31). 후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었을 때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은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신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이를 단과 벧엘에 두었다. 아마도 여로보암은 벧엘에는 야곱의 돌베개가 세워진 곳이라는 그리고 단은 한때 제사장과 신상이 있었다는 종교적 전통에 의해 이 두 장소를 선택했을 것이다.
아브라함 성문
단의 발굴은 히브루 유니언 대학교의 아브라함 비란 교수에 의해서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현재도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유적지에 처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주전 4500년께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한동안 버려졌던 흔적이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발견된 놀라운 발견은 주전 1800년게 세워진 레셈/라이스의 도시 성문이다. 성문은 같은 시대 므깃도, 세겜, 게셀 같은 곳에서 유사한 형태로 발견되는 전형적인 ‘시리아’ 형식의 성문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 가장 잘 보존된 형태이다. 건축 당시의 7m 높이가 거의 다 보존되었다. 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 도시 주민들은 도시 전체의 경계선 바닥에 받침돌을 깔고 그 위에 1.7㎞의 거대한 땅을 덮어 마치 언덕처럼 쌓아 올렸다.
이때 동원된 노동자들은 3년 동안 1000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은 이 언덕 위에 세워졌고 성문 전체는 각각 아취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 세 쌍의 기둥들과 4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언덕의 경사면에 놓여져 있는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 첫 번째 성문을 지나가야 한다. 두 번째 성문에는 방들이 있어 사각형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세 번째 성문을 통과하면 거리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아치 형태로 이루어진 성문은 햇빛에 말려 만든 진흙 벽돌을 쌓아 올려 세워졌으며 표면은 흰색으로 회칠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50년 정도 사용된 후 성문은 흙으로 다시 덮여 버려졌고 덕분에 잘 보존된 상태로 발견될 수 있었다. 특별히 이 성문이 사용된 연대가 아브라함의 시대와 유사해 성문은 ‘아브라함 성문’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텔 단의 고고학적 결과물을 통해 안타까운 것은 주전 12∼11세기께 단 자손의 흔적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전 10∼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과 관련된 흔적은 상당히 풍부하다.
<‘단’ 이야기 계속>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요단강의 수원
1830년대 미국에서 온 성서학자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은 이스라엘 전국을 직접 답사하면서 성서의 땅 위치를 비교했고 수많은 성서 속의 도시들을 밝혀낸 바 있다. 그중 헬몬산 언저리 폭포 옆에 있었던 아랍어로 텔 엘-카디(Tel el-Qadi)라 불리는 유적지를 조사하면서 이곳을 단 자손이 이동하여 살게 된 레셈(수 19:47) 혹은 라이스 땅(삿 18:1)이라고 주장했다. 텔 엘-카디란 ‘심판의 언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히브리어 ‘단’도 심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창 49:16) 유적지 이름의 어원이 유사하다는 데 기인했으며 더불어 유적지 옆의 폭포가 요단강의 수원 중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단강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헬몬산(2840m)에서 시작하여 세계에서 가장 낮은 사해까지 흘러내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 건넌 강으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현재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가 경계선이기도 하다. 한국어로 번역된 요단강은 히브리어로는 야르덴(yarden) 강이다. 이 이름은 ‘내려오다’라는 히브리어 ‘야라드’와 ‘단’이라는 이름의 합성어로 그 의미는 ‘단 샘에서부터 내려오다’라는 뜻이다. 요단강의 수원은 모두 3개의 샘들(단, 헐먼, 스닐)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단 유적지의 샘이 가장 큰 수원지이다. 학자들은 단 유적지 즉 텔 엘-카디가 성서의 단이라 불렸고 요단강 이름의 어원이 되었다는 데 이견이 없다.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땅 레셈/라이스
단 샘에서 나오는 물이 주변 지역을 비옥하게 했으리라는 것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집트에서 시작해 이스라엘과 시리아를 지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연결되는 무역로에 위치해 있었던 이곳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었음도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덕분에 이 지역 백성은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어 부를 누렸고(삿 18:7)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살고 있었다(삿 18:27). 이 땅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단 자손에 의해 점령되기 전에는 레셈 혹은 라이스라 불렸고 이 이름은 이미 주전 19세기 이집트의 문서에도 이름이 남겨져 있을 만큼 오래된 도시가 있었다. 아브라함(아브람)의 시대에도 등장하는 단이라 불렸던 도시가 바로 이곳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시날, 엘라, 엘람, 고임의 왕들이 조카 롯이 거주하고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을 공격하고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가자 아브라함(아브람)은 이들과 대항해 싸웠다. 그는 집에서 기르고 훈련시킨 318명의 용사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단까지 쫓아가 쳐부수고 다메섹가지 쫓아갔다(창 14:1∼14).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 단 자손은 소라와 에스다올 지역(수 19:40∼46) 즉 지중해변 블레셋 사람들과의 경계에 위치했다. 그러나 그들은 온전히 그들의 땅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들은 기업의 땅을 구하러 떠나야 했고(삿18:1) 북쪽으로 올라가 여호수아서에는 레셈으로, 사사기에서는 라이스라 불렸던 성의 사람들과 싸워 점령하고 거기 거주하여 그들의 이름을 따서 단이라 부르고 그들의 경계를 확장했다(수 19:47; 삿 18장).
사사기에서는 이 전쟁의 과정을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단 자손은 그들 가족 가운데 용맹스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게 했다. 북쪽으로 가던 정탐꾼들은 중간에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라 부르는 이의 집에 유숙하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미가가 은을 부어 만든 드라빔과 함께 레위인 출신의 어린 제사장을 눈여겨보았다. 정탐꾼들이 본 라셈/라이스는 샘이 있어 비옥하고 부유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시돈과도 거리가 멀었고 북쪽은 헬몬산으로 막혀 있어 고립되어 있기에 아람 같은 다른 나라들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삿 18:27∼28) 그들이 차지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단 자손은 칼날로 그들을 치고 그 성읍을 불살라 이 땅을 점령하고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불렀다(삿 18:29). 그런데 이 전쟁 과정에서 성서는 후대 이스라엘의 왕국시대와 관련이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정탐꾼들이 보았던 미가의 집에 세워진 드라빔과 제사장을 단 자손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 자손은 그들의 전쟁 여정에 이 드라빔과 제사장을 취하는 것도 포함하였다. 미가가 다시 빼앗으려고 했지만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그는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삿 18:25).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을 단 자손의 제사장으로 삼았다(삿 18:30∼31). 후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었을 때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은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신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이를 단과 벧엘에 두었다. 아마도 여로보암은 벧엘에는 야곱의 돌베개가 세워진 곳이라는 그리고 단은 한때 제사장과 신상이 있었다는 종교적 전통에 의해 이 두 장소를 선택했을 것이다.
아브라함 성문
단의 발굴은 히브루 유니언 대학교의 아브라함 비란 교수에 의해서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현재도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유적지에 처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주전 4500년께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한동안 버려졌던 흔적이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발견된 놀라운 발견은 주전 1800년게 세워진 레셈/라이스의 도시 성문이다. 성문은 같은 시대 므깃도, 세겜, 게셀 같은 곳에서 유사한 형태로 발견되는 전형적인 ‘시리아’ 형식의 성문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 가장 잘 보존된 형태이다. 건축 당시의 7m 높이가 거의 다 보존되었다. 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 도시 주민들은 도시 전체의 경계선 바닥에 받침돌을 깔고 그 위에 1.7㎞의 거대한 땅을 덮어 마치 언덕처럼 쌓아 올렸다.
이때 동원된 노동자들은 3년 동안 1000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은 이 언덕 위에 세워졌고 성문 전체는 각각 아취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 세 쌍의 기둥들과 4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언덕의 경사면에 놓여져 있는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 첫 번째 성문을 지나가야 한다. 두 번째 성문에는 방들이 있어 사각형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세 번째 성문을 통과하면 거리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아치 형태로 이루어진 성문은 햇빛에 말려 만든 진흙 벽돌을 쌓아 올려 세워졌으며 표면은 흰색으로 회칠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50년 정도 사용된 후 성문은 흙으로 다시 덮여 버려졌고 덕분에 잘 보존된 상태로 발견될 수 있었다. 특별히 이 성문이 사용된 연대가 아브라함의 시대와 유사해 성문은 ‘아브라함 성문’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텔 단의 고고학적 결과물을 통해 안타까운 것은 주전 12∼11세기께 단 자손의 흔적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전 10∼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과 관련된 흔적은 상당히 풍부하다.
<‘단’ 이야기 계속>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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