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리고 ②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1:27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리고 ②

속보유저
입력 2013-03-07 17:33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리고 ② 기사의 사진
여호수아의 여리고城 정복사건 풀 해답은 아직 땅속에…

성서의 수많은 사건들 중 어릴 적부터 배우고 기억하는 사건은 아마 여리고 정복사건일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와 가나안 정복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정복한 지역이 바로 여리고이다. 여호수아 6장은 여리고 정복에 관한 보고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정복한 땅이기도 하지만 염탐군과 기생 라합의 만남 그리고 특이한 전술로 함락한 여리고 성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놀라움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절감하게 한다.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6일 동안 하루에 한 번씩 도시를 돌았고 마지막 칠 일째 도시를 7번 돌면서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백성들이 소리를 지르자 성벽이 무너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전술은 가능했을까? 어떤 이들은 이 전쟁이 지진의 효과라고 보기도 하고 그들이 성을 돈 것은 취약한 성벽을 확인하여 공격하기 위한 준비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호수아서 6장

지난 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리고는 사해주변 광야 가운데 있는 가장 살기 좋은 장소이다. 신석기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 오랜 기간 도시가 번영했었다. 심지어 현재도 상당히 발전한 도시가 형성되어 있으며 도시의 고대 이름인 여리고로 불리고 있다. 덕분에 고대 도시가 형성되었던 언덕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언덕은 24m 높이에 4만㎡의 면적으로 텔 에스 술탄이라 불리며 지난 세기 고고학자들의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장소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곳에서 찾고자 하는 흔적은 여호수아서 6장의 정복사건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사건의 흔적은 고고학자들과 성서학자들 사이에 가장 풀리지 않는 문제로 거론되고 있을 정도로 만족할 만한 답을 주고 있지 못하다. 고고학적인 흔적(remains)으로 연대기를 결정하는 고고학자들은 여리고 정복에 관한 충분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불충분한 고고학적 증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위험스런 주장이다.

여리고 탐사 및 발굴

처음 여리고 탐사를 시작한 사람은 영국의 워렌(C.Warren)으로 1868년 수십 명의 아랍 인부들과 함께 언덕을 파 들어갔다. 하지만 오직 돌로 만든 성벽을 기대했던 워렌에게 흙벽돌만이 발견되자 그는 발굴을 멈추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여리고에서 첫 번째 시행된 전문적인 발굴은 1907∼190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미 이스라엘 다른 유적지에서 발굴한 경험이 있었던 전문 고고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워렌에 비해서는 체계적인 발굴이 진행되었다. 특별히 그들은 도시의 기초 암벽에 무너져 있는 상당한 양의 흙벽돌 더미를 발견했고 여호수아가 파괴한 성벽이라는 결론을 내림으로 전 세계 기독교 사회는 흥분했었다. 그러나 발굴이 진행되면서 여러 시대에 걸쳐 사용된 다양한 성벽들이 발견되었고 어느 것이 여호수아 시대의 것인가 선택을 해야만 했다. 결국 주전 1500년경 파괴된 성벽이 이스라엘의 파괴로 인한 것이라고 보면서 이스라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연대도 같은 시대로 보게 되었고 보수적인 학자들은 아직도 이 연대를 신봉하고 있다.

위의 연대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영국의 가르스탕(J. Garstang)은 주전 1930년부터 여리고의 성벽을 찾는 발굴을 시작했다. 가르스탕은 여리고에서 여러 시대에 걸친 무덤들을 발굴하게 되면서 토기라든가 가구, 도구 등 무덤의 부장품들을 통해 오히려 고대 생활사를 밝히는 데 보다 많은 공헌을 하였다. 여리고 성벽의 경우 그는 여호수아의 파괴가 1500년경이 아닌 1400년경이라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가르스탕은 외부 성벽과 내부 성벽 두 성벽이 나란히 있었으며 외부 성벽의 경우 심한 파괴와 화재의 흔적이 보인다고 말했다. 더불어 성벽 내에서 굽지 않은 빵 반죽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갑작스런 파괴의 현장을 말해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케년(K.M.Kenyon)은 여리고에 보다 발전된 기술과 토기 분석법을 적용하여 발굴을 지휘했다. 케년은 지난 호 언급했던 신석기 시대 세계 최초의 도시 여리고의 거대한 성벽과 탑을 발견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바 있다. 그러나 캐년은 오히려 후기 청동기 시대 즉 여호수아의 정복시대에 여리고에는 도시가 없었으며, 앞서 언급된 무너진 흙벽돌 더미를 동반한 심각한 화재 현장은 오히려 이집트가 주전 1550년경 여리고를 파괴한 흔적이라고 주장했다.

케년의 이러한 발표 때문에 구약학계는 상당히 혼란에 빠졌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이 정복한 여리고에 성벽이 없었다면 성문 위에 살았다는 라합의 집은 어떻게 된 것이며 그들이 돌았다는 성벽은 어디에 있었는가? 안타까운 것은 1993년 여리고가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이 되면서 고고학자들은 물론 성지순례객조차 한동안 이 고대 도시를 방문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아직도 성벽이 언덕 어딘가에 있다는 주장과 흙벽돌이다 보니 빗물에 씻겨 내려가 사라졌다는 의견도 있다.

최근 조사현장

1997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니그로(L. Nigro)와 마르체티(N. Marchetti)가 팔레스타인 자치구역 고고학 부서가 생긴 이래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텔 에스 술탄을 발굴할 기회를 가졌다. 이들은 케년이 발굴한 주변을 한 달 동안 재 발굴하였는데 케년의 의견에 동의하여 여호수아의 전쟁 흔적을 발견한 바 없다고 발표했다. 그들의 발표가 발굴을 시행한 지 얼마 안 되어 순식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팔레스타인 정부가 유대인들의 역사와 여리고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들의 발표에 대해 최근 여리고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 우드(B. Wood) 박사는 이미 지난 세기 여리고에서 독일 고고학자들과 가르스탕, 그리고 케년에 의해 발굴된 자료에서 여호수아 정복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 학자들의 의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의 발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화재에 의해 무너진 거대한 흙벽돌 더미가 바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의 여리고 정복의 흔적이며 이 흔적의 연대는 주전 1400년이라고 주장했다.

우드는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이 남겨놓은 발굴 현장을 방문하였는데 후대에 여리고의 성벽을 지탱하는 벽이 무너진 흙벽돌 더미 위에 세워진 것을 확인하였다. 그는 이러한 현상은 이미 다른 발굴들에서도 발견된 바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 발굴 현장이 훼손되었고 씻겨져 내려가 단지 사진과 그림으로만 남겨져 있을 뿐이기에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의 생생한 현장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논란은 멈추지 않고 있다. 최근 성서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이 람세스 2세 즉 주전 1250년경 출애굽했고 1200년경 가나안 정복전쟁을 했다고 연대를 추정하고 있어 여리고의 함락 흔적에 대한 발견은 다시 미궁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텔 에스 술탄 유적지를 하늘에서 찍은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여리고는 일부분만 발굴이 이루어졌고 해답은 아직도 땅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여리고 계속>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