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③히스기야 시대
히스기야, 산헤립 공격대비 성벽 강화하며 “우리를 구원하소서”
앗수르의 침략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단일왕국으로 이끌어가지 못했다. 북쪽의 열 지파는 독립을 선언했다.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쪽 지역은 유다라 불리는 반쪽 국가가 되고 말았다.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가 여러 번 바뀐 데 반해 유다의 수도가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집이 있는 유다의 종교적 수도요 다윗의 정통성을 갖고 있는 정치적 수도가 되었다. 나라가 둘로 나뉜 뒤 북왕국 이스라엘은 세계 정세에 뛰어들어 아합 시대에 더욱 강력한 국가가 됐다. 반면 남왕국 유다는 이스라엘과의 잦은 국경 전쟁과 앗수르의 정치적 압력으로 정세가 불안해졌다. 덕분에 예루살렘은 히스기야 시대 전까지 고고학적으로 특별한 변화가 있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주전 8세기 고대 중동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는 앗수르였다. 유다의 아하스는 앗수르 왕에게 전적으로 복종했다. 이스라엘의 위협에 앗수르의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했다(왕하 16장).
그의 아들 히스기야는 재위 초기만 해도 앗수르에게 충성을 바쳤으나 주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변심했다. 주전 705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점령했던 앗수르의 왕 사르곤이 죽고 그의 아들 산헤립이 왕위를 계승했을 때, 속국들은 산헤립이 정세를 빠르게 장악할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했다. 앗수르의 정치적 불안을 노리고 히스기야는 소국가들과 반(反)앗수르 동맹을 결성했다. 그는 앗수르에게 더 이상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블레셋 도시 아스글론과 에글론의 동맹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사야는 반앗수르 동맹을 절대적으로 반대했다(사 30-31; 36:6-9). 이사야는 이집트가 곧 포로가 되어 앗수르 왕 앞에 서게 되는 비참한 날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였다(사 20;1-6). 결국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집트와 유다의 동맹국들은 앗수르에게 굴복당하고 말았다.
산헤립은 재빠르게 앗수르의 주권을 잡아 반앗수르 동맹국들을 포위하고 말았다. 성서는 산헤립과의 전쟁에 앞서 히스기야가 어떻게 예루살렘을 재정비하였는지 설명하고 있는데(왕하 18장, 사 22장, 대하 32장) 이는 고고학을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다.
물 근원을 막고자
이스라엘은 물이 항상 부족한 곳이어서, 도시가 발달한 곳에는 어김없이 샘이나 물 저장고 시설을 찾을 수 있다. 예루살렘에는 기혼샘이라 불리는 사철 물이 솟는 샘이 기드론 골짜기에 있어 이미 주전 2000년경 가나안 도시 때부터 샘을 지키는 탑이 있었을 정도였다. 역대하 32:3-4와 이사야 22:9, 11은 히스기야가 성 밖의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고, 아래 못의 물도 모으고,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히스기야는 전쟁 동안 샘의 물을 확보하고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두 가지 수리시설을 건설했다. 하나는 성벽을 이중으로 세우고 샘의 물을 모은 저수지요, 또 다른 하나는 다윗성 서쪽 끝에 저수지를 만들었지만(대하 32:30)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수도(터널)였다. 이 터널은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였다(왕하 20:20).
1838년 이스라엘을 탐사했던 미국 성서학자 에드워드 로빈슨(E. Robinson)은 예루살렘의 기혼샘에서 시작되는 긴 터널을 걸어 다윗 성 끝 실로암 연못이라 불리는 장소까지 나올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이 터널은 히스기야 터널이라 불리고 있으며 533m 길이에 S모양으로 굽었다. 석회석 산을 인공적으로 뚫어 완성된 것이다.
최근 터널과 기혼샘 주변을 재발굴한 하이파대학의 로니 라이히(R. Reich) 교수에 의하면 주전 9∼8세기경 기혼샘에서 시작해 다윗성의 경사면을 따라 설치되어 있던 수로가 있었는데 주전 8세기말 사용이 중단됐다. 밖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수로는 적들에게 도시의 물길을 훤히 보여준 셈이어서, 결국 지하에 새로운 터널을 뚫은 것으로 보인다.
이 터널이 건설된 시대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벽면에서 발견된 글귀 덕분이었다. 주전 8세기 히브리어 글자체로 새겨진 글은 수도를 완성하기 위해 양쪽 끝에서 장인들이 파 들어갔으며 1.5m 정도를 남겨두고 틈새에서 들리는 소리로 서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글귀는 양쪽의 터널이 만난 지점을 기념한 내용이다.
성벽을 견고하게 하며
주전 8세기 말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의 인구가 갑자기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연구를 통해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2만5000명 수준이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솔로몬 시대보다 5배나 많은 숫자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예루살렘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있었고,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다윗 성만으로는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다윗 성의 서쪽 언덕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이때 산헤립이 군대를 이끌고 반역 동맹의 중심인 히스기야를 치기 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히스기야는 예루살렘 성을 더 튼튼히 해야 했다. 이사야 22:9-10은 히스기야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을 보고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대하 32:5는 무너진 모든 성벽을 보수하되 망대까지 높이 쌓고 또 외성을 쌓고 다윗 성의 밀로를 견고하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루살렘의 기혼샘이 위치한 다윗 성의 동쪽 성벽은 이중 성벽으로 견고한 방어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외벽의 두께는 3m, 내벽은 6m였다. 서쪽 언덕에도 새 성벽이 세워졌다.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던 북쪽에도 거대한 성벽과 높은 망대가 올라갔다. 현재 비록 일부분이 무너졌지만 발견된 상태만으로도 8m의 높이를 자랑하는 예루살렘 북쪽의 망대는 히스기야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두께 7m의 거대한 성벽 흔적은 앗수르의 공성퇴 공격을 견디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성벽의 기초에서 가옥 일부분이 발견됐는데,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 했다는 이사야의 기록을 뒷받침한다. 아마도 전시의 조급함은 장인들로 하여금 성벽을 세워야 하는 자리에 있었던 가옥을 모두 헐 만한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한 채 그 위로 성벽을 세우게 했을 것이다.
전쟁의 승패
성서는 히스기야와 산헤립과의 전쟁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다(왕하 18-20장, 사 36-39장, 대하 29-32장). 당시 제2 행정도시였던 라기스를 점령하고 있던 산헤립과 그의 군대에게 히스기야는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쳤다.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도 주고 성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앗수르 왕에게 주어야만 했다(왕하 18:14-16). 니느웨에서 발견된 산헤립의 연대기에서도 이 조공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앗수르가 46개의 도시를 파괴했다고 전한다.
산헤립은 조공을 받고도 랍사게 장군을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보내 여호와와 히스기야를 섬기지 않도록 회유하려 했다. 히스기야는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왕하 19: 15).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앗수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향해 화살도 쏘지 못했고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했으며 토성을 쌓지도 못했다. 오히려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의 군사 18만5000명을 쳤다. 결국 산헤립은 앗수르로 돌아가 니느웨의 니스록 신전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왕하 19: 32-37).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터치바이블 대표, 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
앗수르의 침략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단일왕국으로 이끌어가지 못했다. 북쪽의 열 지파는 독립을 선언했다.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쪽 지역은 유다라 불리는 반쪽 국가가 되고 말았다.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가 여러 번 바뀐 데 반해 유다의 수도가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집이 있는 유다의 종교적 수도요 다윗의 정통성을 갖고 있는 정치적 수도가 되었다. 나라가 둘로 나뉜 뒤 북왕국 이스라엘은 세계 정세에 뛰어들어 아합 시대에 더욱 강력한 국가가 됐다. 반면 남왕국 유다는 이스라엘과의 잦은 국경 전쟁과 앗수르의 정치적 압력으로 정세가 불안해졌다. 덕분에 예루살렘은 히스기야 시대 전까지 고고학적으로 특별한 변화가 있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주전 8세기 고대 중동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는 앗수르였다. 유다의 아하스는 앗수르 왕에게 전적으로 복종했다. 이스라엘의 위협에 앗수르의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했다(왕하 16장).
그의 아들 히스기야는 재위 초기만 해도 앗수르에게 충성을 바쳤으나 주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변심했다. 주전 705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점령했던 앗수르의 왕 사르곤이 죽고 그의 아들 산헤립이 왕위를 계승했을 때, 속국들은 산헤립이 정세를 빠르게 장악할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했다. 앗수르의 정치적 불안을 노리고 히스기야는 소국가들과 반(反)앗수르 동맹을 결성했다. 그는 앗수르에게 더 이상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블레셋 도시 아스글론과 에글론의 동맹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사야는 반앗수르 동맹을 절대적으로 반대했다(사 30-31; 36:6-9). 이사야는 이집트가 곧 포로가 되어 앗수르 왕 앞에 서게 되는 비참한 날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였다(사 20;1-6). 결국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집트와 유다의 동맹국들은 앗수르에게 굴복당하고 말았다.
산헤립은 재빠르게 앗수르의 주권을 잡아 반앗수르 동맹국들을 포위하고 말았다. 성서는 산헤립과의 전쟁에 앞서 히스기야가 어떻게 예루살렘을 재정비하였는지 설명하고 있는데(왕하 18장, 사 22장, 대하 32장) 이는 고고학을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다.
물 근원을 막고자
이스라엘은 물이 항상 부족한 곳이어서, 도시가 발달한 곳에는 어김없이 샘이나 물 저장고 시설을 찾을 수 있다. 예루살렘에는 기혼샘이라 불리는 사철 물이 솟는 샘이 기드론 골짜기에 있어 이미 주전 2000년경 가나안 도시 때부터 샘을 지키는 탑이 있었을 정도였다. 역대하 32:3-4와 이사야 22:9, 11은 히스기야가 성 밖의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고, 아래 못의 물도 모으고,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히스기야는 전쟁 동안 샘의 물을 확보하고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두 가지 수리시설을 건설했다. 하나는 성벽을 이중으로 세우고 샘의 물을 모은 저수지요, 또 다른 하나는 다윗성 서쪽 끝에 저수지를 만들었지만(대하 32:30)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수도(터널)였다. 이 터널은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였다(왕하 20:20).
1838년 이스라엘을 탐사했던 미국 성서학자 에드워드 로빈슨(E. Robinson)은 예루살렘의 기혼샘에서 시작되는 긴 터널을 걸어 다윗 성 끝 실로암 연못이라 불리는 장소까지 나올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이 터널은 히스기야 터널이라 불리고 있으며 533m 길이에 S모양으로 굽었다. 석회석 산을 인공적으로 뚫어 완성된 것이다.
최근 터널과 기혼샘 주변을 재발굴한 하이파대학의 로니 라이히(R. Reich) 교수에 의하면 주전 9∼8세기경 기혼샘에서 시작해 다윗성의 경사면을 따라 설치되어 있던 수로가 있었는데 주전 8세기말 사용이 중단됐다. 밖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수로는 적들에게 도시의 물길을 훤히 보여준 셈이어서, 결국 지하에 새로운 터널을 뚫은 것으로 보인다.
이 터널이 건설된 시대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벽면에서 발견된 글귀 덕분이었다. 주전 8세기 히브리어 글자체로 새겨진 글은 수도를 완성하기 위해 양쪽 끝에서 장인들이 파 들어갔으며 1.5m 정도를 남겨두고 틈새에서 들리는 소리로 서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글귀는 양쪽의 터널이 만난 지점을 기념한 내용이다.
성벽을 견고하게 하며
주전 8세기 말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의 인구가 갑자기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연구를 통해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2만5000명 수준이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솔로몬 시대보다 5배나 많은 숫자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예루살렘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있었고,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다윗 성만으로는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다윗 성의 서쪽 언덕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이때 산헤립이 군대를 이끌고 반역 동맹의 중심인 히스기야를 치기 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히스기야는 예루살렘 성을 더 튼튼히 해야 했다. 이사야 22:9-10은 히스기야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을 보고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대하 32:5는 무너진 모든 성벽을 보수하되 망대까지 높이 쌓고 또 외성을 쌓고 다윗 성의 밀로를 견고하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루살렘의 기혼샘이 위치한 다윗 성의 동쪽 성벽은 이중 성벽으로 견고한 방어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외벽의 두께는 3m, 내벽은 6m였다. 서쪽 언덕에도 새 성벽이 세워졌다.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던 북쪽에도 거대한 성벽과 높은 망대가 올라갔다. 현재 비록 일부분이 무너졌지만 발견된 상태만으로도 8m의 높이를 자랑하는 예루살렘 북쪽의 망대는 히스기야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두께 7m의 거대한 성벽 흔적은 앗수르의 공성퇴 공격을 견디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성벽의 기초에서 가옥 일부분이 발견됐는데,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 했다는 이사야의 기록을 뒷받침한다. 아마도 전시의 조급함은 장인들로 하여금 성벽을 세워야 하는 자리에 있었던 가옥을 모두 헐 만한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한 채 그 위로 성벽을 세우게 했을 것이다.
전쟁의 승패
성서는 히스기야와 산헤립과의 전쟁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다(왕하 18-20장, 사 36-39장, 대하 29-32장). 당시 제2 행정도시였던 라기스를 점령하고 있던 산헤립과 그의 군대에게 히스기야는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쳤다.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도 주고 성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앗수르 왕에게 주어야만 했다(왕하 18:14-16). 니느웨에서 발견된 산헤립의 연대기에서도 이 조공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앗수르가 46개의 도시를 파괴했다고 전한다.
산헤립은 조공을 받고도 랍사게 장군을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보내 여호와와 히스기야를 섬기지 않도록 회유하려 했다. 히스기야는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왕하 19: 15).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앗수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향해 화살도 쏘지 못했고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했으며 토성을 쌓지도 못했다. 오히려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의 군사 18만5000명을 쳤다. 결국 산헤립은 앗수르로 돌아가 니느웨의 니스록 신전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왕하 19: 32-37).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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