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①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2:40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①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① 기사의 사진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모두의 성지… 종교적으로 세계의 중심

세계 최고의 성지

현재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수도는 텔아비브다. 그러나 세계의 어느 곳에서 길을 가는 아무나 붙잡고 이스라엘의 수도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예루살렘이라고 답할 것이다. 예루살렘은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거룩한 도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가장 꼭대기 언덕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왔던 모리아 산이다. 솔로몬이 이곳에 세운 여호와의 성전은 유대교의 전통이 되었다. 포로 시기를 거쳐 돌아와서도 제일 처음 한 일이 성전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주후 70년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졌지만 예루살렘은 언젠가 돌아가야만 하는 고향이 되었고, 현재 유대교의 중심 성지 역할을 하고 있다. 유대교와 구약을 함께 나누고 있는 기독교로서도 예루살렘은 여전히 성지이다. 유대인이었던 예수님 역시 절기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또한 예루살렘은 십자가 처형과 부활의 사건이 있었기에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이슬람교의 무슬림에게도 이곳은 중요하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아들이 이삭이 아닌 그들의 조상 이스마엘이라고 믿는 무슬림에게 예루살렘은 당연히 성지이다. 더불어 이슬람교의 성인인 모하메드는 이곳에서 하늘로 올라가 천국의 알라신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코란에 기록돼 있다.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와 더불어 이슬람교의 3대 성지가 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당시 예루살렘의 동쪽은 요르단이 차지했었고 서쪽은 이스라엘에 속해 있었다. 1967년 6일전쟁을 통해 요르단을 몰아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도시가 되었지만, 지금도 동쪽은 팔레스타인이 차지하고 있다. 팔레스타인도 예루살렘을 미래의 수도로 꿈꾸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민감성 때문에 예루살렘이 아닌 지중해 연안의 텔아비브를 신생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고 모든 외교관저들도 이곳에 있다. 하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정신적·사회적 수도로서 기능을 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세 종교의 순례객들도 예루살렘을 죽기 전에 꼭 방문해야 하는 도시 1순위로 꼽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세계의 중심이며 마음의 수도인 것이다.

4000년 도읍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은 유다 산지의 북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해발 720m의 석회석 산지이다. 기혼이라 불리는 사철 물이 솟아나는 샘을 가지고 있어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는 이스라엘의 기후적 악조건 속에서도 도시가 발전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 도시가 자리 잡은 언덕은 서쪽의 힌놈 골짜기와 동쪽의 기드론 골짜기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 상당히 용이한 지형이다. 두 골짜기는 남쪽 끝에서 만나 위에서 보면 도시는 깔때기 모양을 이루고 있다. 삼면은 자연적인 방어시설이 갖추어진 데 반해 북쪽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성서도 이러한 예루살렘의 모습을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내가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을 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14)”라고 묘사하고 있다.

위의 두 골짜기에 비해 지금은 건물로 가득차 현대 지형에서는 볼 수 없는 고대의 골짜기가 있다. 옛 예루살렘 언덕의 북에서 남쪽 가운데를 지나는 튜로페온 골짜기다. 튜로페온 골짜기는 요세푸스가 유대 전쟁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곳으로, 성전이 있던 위쪽 거리와 일반인들이 주로 살았던 아래쪽 거리의 경계가 되었다.

고대 예루살렘은 아몬드와 올리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아름다운 언덕이었다. 수많은 전쟁을 겪고 쉼 없이 건물이 지어지면서 숲은 훼손되었다. 언덕의 동쪽 맞은편 올리브산(성경의 감람산)이라 불리는 곳에서는 여전히 올리브나무 과수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당연히 고고학자들도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로마는 이 도시를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제우스신의 이름을 혼합해 앨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고 부르고, 무슬림은 ‘거룩’이라는 뜻의 알-쿠즈(Al-Quds)라고 불렀지만 이곳이 예루살렘인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전 세계의 고고학자들이 20세기 초부터 예루살렘을 발굴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집을 짓고 또 그 위에 다시 짓는 일이 거듭되면서 고대 유적들이 훼손되기도 했고, 현재 사람이 살고 있는 장소를 발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아직도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많은 비밀을 안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난제 속에서도 고고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예루살렘에는 이미 주전 3000년경 도시가 세워져 있었다. 주전 19∼18세기의 이집트 기록에는 루샬림뭄(Rusalimum) 혹은 우루샬리뭄(Urusalimum)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아카드어에서 기원한 이름으로 해석된다.

비슷한 시기에 성경에서도 그 이름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롯을 엘람의 그돌라오매와와 다른 왕들과의 전쟁에서 구해냈을 때 멜기세덱이라는 살렘의 왕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살렘이라는 도시를 학자들은 예루살렘이라고 보고 있다.

주전 14세기에 기록된 이집트의 텔-엘 아마르나 토판 중에는 예루살렘의 왕 압디헤바가 쓴 다섯 편의 서신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최근 발견된 바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기혼샘을 지키는 거대한 탑 구조가 세워져 있었던 흔적 역시 발견되었다. 가나안인들은 성벽을 세웠지만 언덕 아래에 있는 기혼샘을 포함하지는 못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성 안에서부터 대각선으로 수갱을 뚫어 언덕 아래 있는 기혼샘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물을 지키기 위해서 탑이 세워졌고 성의 주민들은 여기서 물을 길었다. 이곳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에서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는 말씀에 언급된 장소이다.

고고학적으로나 문서적으로나 예루살렘에는 이미 상당한 규모의 도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으로 예루살렘은 벤냐민 지파가 할당 받았지만(수 18:28), 여부스 사람들을 물리치지는 못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그에게는 유다 지파의 중심지인 헤브론보다는 12지파를 고르게 다스릴 수 있는 단일왕국의 수도가 필요했다.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이스라엘의 중앙부에 위치했다. 또한 기혼샘에서 솟는 풍부한 물과 기드론 골짜기를 낀 지형도 방어에 유리했다. 그는 여부스 사람들을 물리치고 이곳을 왕국의 수도로 삼아 다윗 성을 세웠다(삼상 5:6-7).

최근 히브리대학교의 에일랏 마잘과 발굴팀이 예루살렘에서 다윗 성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있어 많은 고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이 흥분하고 있다. 다윗의 선택은 솔로몬에게로 이어졌다. 다윗 성 북쪽 언덕 위에 세운 하나님의 성전은 예루살렘을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원한 성지이자 수도로 기억하도록 하였다. 예루살렘은 적어도 4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가진 중요한 도시다. 예루살렘은 수많은 전쟁 속에서 그 모습과 이름이 수 없이 많이 바뀐 도시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성경을 떠올리게 하는 변함없는 수도이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터치바이블 대표, 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