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다 산지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2:35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다 산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다 산지 기사의 사진유다 산지 헤브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정착 시작한 곳

다윗의 활동무대

유다 산지는 해발 1000m 높이와 연평균 강우량이 최대 900㎜나 되는 숲이 우거진 푸른 산지다. 이 지역이 유다 산지로 불리게 된 것은 구약성경 여호수아 20∼21장에 유다 지파에게 배정된 지역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유다 지파는 남방 혹은 네게브 지역과 더불어 가나안 남쪽 산지로 내려가 가나안 족속과 싸워 그들을 내쫓고 이곳에 터전을 삼았다(삿 1:9). 그러나 유다 지파는 철 병거를 갖고 있던 골짜기의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했다. 유다 산지에는 예루살렘을 비롯한 베들레헴과 헤브론 등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들이 있으며 유다 지파의 후손 다윗의 동네이기도 하다. 이번 연재에서 우리는 먼저 헤브론을 살펴보려고 한다.

헤브론

헤브론은 유다 산지의 가장 중심지라 부를 수 있는 지역으로,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30㎞ 떨어져 있다. 해발 930m 높이의 언덕에 형성된 이 도시는 팔레스타인 자치구역 도시들 중 가자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히브리어로 헤브론의 어원은 ‘동료’ 혹은 ‘친구’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데, 아랍어 이름인 엘-칼릴(el-Khalil) 역시 ‘신의 친구’라는 뜻을 보여준다. 헤브론은 고대부터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해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지역이고, 무엇보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막벨라굴과 관련해 오늘날의 유대인에게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가장 큰 성지다. 안타까운 것은 헤브론이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이기 때문에 발굴을 할 수 없어 자료들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예루살렘의 유물 암시장에는 헤브론에서 왔다는 많은 유물을 발견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출처를 정확히 밝힐 수가 없다.

민수기 13장 22절에 의하면 헤브론은 이집트의 소안보다 7년 앞서 즉 주전 1720년경 도시가 건설되었다. 헤브론의 텔 에르-레우메이다(Tell er-Reumeidah)에서는 주전 3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한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주전 18세기 번성한 도시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헤브론의 가나안 이름은 기럇아르바로 이스라엘의 땅 분배 당시 유다 지파의 갈렙에게 배분 되었다(수 14:13∼14). 이 도시는 이스라엘 민족과 싸우기 위해 연합한 가나안의 다섯 왕들 중 하나인 아낙이 통치하던 도시였는데 가나안 땅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수 10장).

족장들의 무덤

무엇보다도 헤브론이 우리에게 익숙한 이유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정착을 시작한 곳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창세기 23장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가 127세에 죽자 헤브론에 살고 있던 헷족속 에브론에게 은 400세겔을 치루고 막벨라 밭과 동굴을 사들인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후 아브라함을 비롯한 그의 아들 이삭과 리브가, 손자 야곱과 아내 레아도 묻히는 가족 매장지가 되었다. 유대인 전통에 의하면 막벨라 동굴에는 아담과 하와도 매장되었다. 이러한 유대적 전통은 헤브론을 중요한 종교적 장소로 만들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보수하고 화려하게 장식한 헤롯은 또 다른 유대인들의 성지였던 헤브론에 거대한 건물을 지었다. 전통적으로 알려졌던 막벨라 동굴 위에는 예루살렘 성전과 유사한 건축물이 들어섰다. 돌을 반듯하게 깎아 만든 벽돌을 쌓아 건물을 세웠는데 가장 긴 벽돌의 경우 길이는 7m가 넘었으며 두께도 2m나 되었다. 헤롯은 천장을 덮지는 않은 채 건물을 지었는데 벽 높이만 12m에 달했다. 벽면 전체는 오목한 면과 볼록한 면을 번갈아 있게 하여 멀리서 보면 마치 기둥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로마시대 유대인들은 이곳에 회당을 지었다. 그러나 비잔틴시대 들어와 족장들의 무덤 위에는 교회가 지어졌다. 유대인들은 더 이상 이곳을 방문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638년 무슬림인들이 헤브론을 정복하면서 교회는 허물어졌다. 그 자리에 모스크사원이 들어섰다.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을 성인으로 생각하는 무슬림에게 막벨라 동굴은 여전히 성지였다. 십자군 시대 막벨라는 다시 교회로 사용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지붕은 십자군들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무슬림의 손에 헤브론이 넘어가면서 모스크로 탈바꿈했으며 내부의 모습은 주로 8∼15세기 여러 시대에 걸쳐 갖추어진 것이다.

종교적, 정치적 중요성

사울이 죽자 여호와는 다윗에게 유다 산지의 헤브론으로 올라가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삼하 2:1∼4).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린 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삼하 5:1∼3)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면서 종교적, 정치적 정당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헤브론에서 왕위에 올랐으나(삼하 145:10) 성공하지는 못했다. 헤브론은 이후 남왕국 유다의 경제적 주요 도시가 되었으며 유다 지파의 여섯 도피성 중 하나로(대상 6: 57) 중심지 역할을 했다.

주전 8∼7세기 남왕국 유다의 발견물 중에는 히스기야 전후 시대에 사용한 ‘라멜렉(lmlk·왕에게 속함)’이라 불리는 항아리들이 있다. 이 항아리들은 기름이나 포도주 등을 저장했던 것들로 4개의 손잡이가 있는데 손잡이에는 인장이 찍혀 있다.

인장의 가운데는 고대 중동지역 왕을 상징하는 두 날개를 펴고 있는 원반이나 4개의 날개를 펴고 있는 풍뎅이가 있고 위에는 라멜렉이라고 새겨져 있다. 인장의 아래에는 4개의 다른 장소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중에는 헤브론이 있다. 항아리는 왕을 위하여 포도주나 올리브기름 같은 조공품이나 세금을 담았던 것으로 헤브론을 비롯한 네 도시로 보내져 예루살렘으로 전송되었을 확률이 높다. 결국 헤브론이 유다 산지에 있어 행정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헤브론은 주전 586년 바빌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무너지고 말았다. 비록 적은 숫자이기는 하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지를 버리지 않았다. 느헤미야 11장 25절에 의하면 기럇 아르바 즉 헤브론에는 일부 유다의 자손들이 살고 있었다. 헤브론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종교적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신약시대에도 헤브론은 항상 유대인들의 거주지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헤롯의 막벨라 동굴을 다시 건설하기도 하였다. 헤브론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로마와 타협하지 않았다. 도시는 주후 68∼70년, 그리고 주후 132∼135년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인 반란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비잔틴시대를 지나 중세시대에도 이곳은 유대인의 성지로 지켜졌다. 비잔틴 시대에는 유대 회당이 지어지기도 했다.

1929년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의 싸움에서 67명의 유대인이 살해되는 사건으로 유대인들은 잠시 동안 헤브론을 떠났었다. 그러나 1967년 6일 전쟁 이후 아랍인으로 가득찬 헤브론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거주지를 확보했다. 현재 헤브론에는 약 16만명의 무슬림인들이 살고 있으며 유대인 특별 거주지역에 900명이 안되는 유대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까지도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 장소이기도 하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터치바이블 대표, 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