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대 광야 4 (엔게디)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2:31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대 광야 4 (엔게디)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대 광야 4 (엔게디) 기사의 사진
광야의 오아시스… 다윗이 추적해온 사울을 살려준 곳

엔게디 - 새끼 염소의 샘

유대 광야는 황량한 석회석 산지이다. 광야의 덥고 건조한 기후 속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은 기쁨이다. 유대 광야의 동쪽, 사해 서쪽 해변가에 엔게디라 불리는 오아시스가 있다. 나할 다비드와 아루속, 슐라밋과 엔게디 등 4개의 샘이 모여 이룬 오아시스다. 사해 주변에 있는 몇몇 샘이나 온천은 소금 성분을 가지고 있지만 엔게디의 물은 담수다. 덕분에 이곳에는 광야에서는 볼 수 없는 온갖 꽃과 나무로 덮여 있다. 1년에 300만ℓ의 물을 쏟아내는 샘 주변에 900여종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200여종의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 아이벡스(야생염소)가 뛰어다니는 모습은 누구나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싶게 할 만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준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다른 도시들과는 멀리 떨어진 광야의 오아시스이지만 풍요로운 수자원 덕분에 주전 4000∼3150년쯤부터 사람들의 발걸음과 거주가 끊이지 않았다.

엔게디는 예루살렘에서 동남쪽으로 50㎞ 떨어져 있으며 지난 호에서 찾아갔던 마사다에서는 북쪽으로 16㎞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4개의 샘이 모여 만들어진 오아시스와 주변에 모여든 야생염소들 덕분에 이 지역의 이름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어로 ‘엔’은 샘이며 ‘게디’는 새끼염소를 말한다.

성서는 엔게디를 하사손다말이라고도 부르는데(대하 20:2), 하사손다말은 대추야자의 하사손(아마도 사람 이름)이라는 뜻이다. 엔게디 주변에서 대추야쟈나무를 키우는 과수원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지역의 풍요로움은 성서에도 기록돼 있다. 아가서 1장 14절은 자신의 사랑하는 자가 마치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사해 서편 요새

하사손다말 즉 엔게디는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다(창 14:7). 후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 엔게디는 광야의 다른 다섯 성읍(벧 아라바·밋딘·스가가·닙산·소금 성읍)과 함께 유다 지파에 분배되었다(수 15:62).

사해 서편 광야에 풍부한 수자원을 가지고 있는 엔게디는 적에게서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장소였다. 다윗 시대에 이곳에는 이미 요새가 있었다(삼상 23:29). 엔게디를 유명하게 한 성서 사건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사울의 시기와 분노를 피해 다윗은 엔게디의 요새로 도망가 거기서 머물렀다. 사무엘상 24장은 사울과 다윗의 추적 과정을 상세히 이야기해주고 있다.

엔게디로 도망갔다는 사실을 안 사울은 다윗을 쫓아왔다. 사울의 추적으로 요새에 머물 수 없었던 다윗은 주변에 있는 굴로 숨어 들어갔다. 이 굴은 험난한 바위 절벽에 있는 것으로 오직 야생 염소들만이 접근이 가능한 곳이었다. 이 동굴들은 지금도 엔게디 절벽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 동굴까지 샅샅이 뒤지던 사울은 뒤를 보기 위해 굴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이곳에 다윗이 숨어 있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이 절호의 기회에 단지 그의 옷자락 끝만을 잘라내며 화해를 시도했다. 사울은 그를 해치지 않으리라 약속한 후 돌아갔고 다윗은 다시 엔게디 요새로 가서 머물렀다.

200년 후 여호사밧 시대에 이 요새는 사해 동쪽 아람에서 유다를 치기 위해 온 무리들에게 점령당하고 말았지만(대하 20:2), 전쟁을 통해 다시 유다의 땅이 되었다. 엔게디를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신약시대 이후이다. 신약 성서에서는 등장하고 있지 않지만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엔게디는 로마 왕실 소유의 주요 도시였다. 오직 이 지역에서만 자라는 나무의 송진에서 생산할 수 있었던 값비싼 발삼 덕택에 경제적 부유를 누리고 있었다.

주후 70년 이스라엘은 멸망했지만 일부 유대인들은 이후 엔게디에 다시 발삼을 생산하는 풍요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주후 4세기 가이사랴의 주교 유세비우스는 엔게디에 상당히 큰 유대인 마을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후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유대인 박해 당시 이 마을은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고고학적 흔적

이렇듯 풍부한 엔게디의 역사와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받아왔다. 이미 1848년 미국의 발굴조사팀이 엔게디의 위치를 밝혀냈다. 발굴은 1960년대 히브리대학교 마잘 교수(B Mazar)가 시작해 지금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처음 엔게디가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오아시스 위쪽 바위 절벽 위에서 발견된 주전 4000∼3150년쯤 즉 동석병용기 시대의 신전 때문이다. 20×2.5m의 긴 직사각형 건물과 안뜰로 이루어진 신전이 발견되었는데, 제단과 더불어 동물 뼈와 재의 흔적도 있어 희생 제사가 드려졌음이 분명하다.

특이한 것은 신전 주변에는 어떤 마을도 발견되지 않았고, 신전 내부에서는 제사용 도구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이 신전이 광야를 지나는 유목민들을 위한 제의 장소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내부에 있었을 제의 용기들은 전쟁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이 신전에서 남쪽으로 9㎞ 정도 떨어져 있는 나할 미쉬마르의 한 동굴에서 구리와 금 등으로 만들어진 432개의 제의용 용기들이 발견됐다 학자들은 엔게디의 신전에서 사용된 것이었다고 보고 있다.

성서시대의 마을이 발견된 곳은 텔 고렌이라 불리는 오아시스 앞의 낮은 언덕이다. 주전 7세기쯤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마을에서는 이스라엘 왕실 인장이 찍혀 있는 항아리들과 함께 여러 가정용 용기들이 발견되었다. 이 시대에 화폐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은 조각을 가득 담은 항아리는 마을이 경제적인 거래가 이루어진 부유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마을은 남왕국 유다가 멸망한 후 주전 5∼4세기 페르시아 시대에 큰 마을로 성장했다. 이때부터 마을은 발삼의 생산지로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주전 1세기부터 주후 1세기 사이 엔게디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흔적은 로마 왕실 소유의 중요한 도시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광야에 흩어져 있다가 식량이 필요할 때 급습할지도 모르는 유목민들에게서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성벽과 탑들이 세워졌다. 이 도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로마와 열심당의 싸움 속에 사라져 버렸다.

엔게디가 가장 번영한 시기는 주후 2∼6세기다. 도시는 로마 황실의 소유였지만 거주민은 유대인이 다수였다. 이곳에서 생산된 발삼은 값비싼 향수와 의료를 위한 연고로 사용이 되었다. 대추야자나무와 다양한 열대나무에서 생산되는 과일은 도시를 부유하게 했다. 산지를 이용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계단식 농경과 관개시설도 발전했으며 넘쳐나는 농산품들을 관리하기 위한 행정체제도 발전했다.

도시의 부유함은 유대인들의 회당에서도 발견된다. 사다리꼴 모양의 회당은 예루살렘을 향해 건축되었다. 회당이 가장 컸을 때는 서쪽 길이만 16m나 되는 상당히 큰 2층 건물이었다. 모자이크로 꾸며진 바닥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인물과 히브리어, 아람어로 가득했다. 바닥을 장식한 기록 중 도시의 비밀을 발설하는 자에 대한 경고가 있다. 비밀이란 아마도 이 도시를 살찌우게 했던 발삼 향수와 연고를 만들어내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회당과 도시는 주후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화재로 파괴되었다.

1996년에 이루어진 발굴로 텔 고렌 북서쪽 작은 샘 주변에서 돌로 지은 30개의 방들이 발견되었는데, 일부 학자들이 이곳이 주전 2세기∼주후 1세기 사이 이스라엘의 종파들 중 공동체를 이루고 광야에서 고립된 생활을 했다는 에세네파의 거주지라는 새로운 주장을 하고 있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터치바이블 대표, 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