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대 광야 3 (마사다 下)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2:29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대 광야 3 (마사다 下)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대 광야 3 (마사다 下) 기사의 사진“하나님 외 누구의 종도 될 수 없다” 목숨 끊은 열심당원들

정치적 종파-열심당

유대 광야 남쪽에 위치한 마사다가 유명해진 이유는 주후 70년 로마에 멸망당한 유대인의 마지막 역사가 벌어졌던 현장이기 때문이다.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에서 이 역사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마사다의 항쟁은 주후 70년 로마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자 열심당원들을 중심으로 바리새인들과 쿰란의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목숨이 다해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마사다 항쟁을 주도했던 열심당을 이해해야 한다. 신약성서는 로마 통치 아래 있었던 유대 사회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정치적 종교적 지도층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였다. 이들은 유대인 내의 종파로 그들의 종교성에 대한 예수의 공격은 너무나 유명하다.

하나님의 충성된 자들이라는 의미의 ‘하시딤’에서 유래한 바리새인은 회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정치와 경제활동에 적극적인 사람들이었다. 그에 반해 사두개인들은 오직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고 부활신앙이 없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유대 사회에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이외에도 두 종파가 더 있었던 것을 알려져 있다. 그 중 하나는 에세네파로 다른 어떤 종파보다 정결례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열심이었다. 이들은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재산을 공동체에 환원한 후 결혼도 하지 않고 자급자족하면서 성서를 손으로 옮겨 적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사해 북쪽에 위치한 쿰란 유적지를 에세네파가 살았던 공동체의 흔적이 남은 곳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쿰란은 다음 편에 다룰 예정이다).

또 다른 종파는 유대교에 극단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던 열심당이었다. 열심당의 영어 표기가 ‘zealot’인데 히브리어로는 ‘kanai’라 불렸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는 뜻이다.

열심당의 활동상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신앙보다는 로마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위해 더 열심을 다했다. 열심당의 당원들은 마치 일제시대 독립군이 그랬던 것처럼 주후 1세기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군사적 저항을 일으켰다.

주후 6년 로마의 통치 지역 중 시리아 일대는 로마 상원의원 퀴리니우스가 통치를 맡게 되었다. 그는 세금 개편을 위해 인구조사를 실행했다. 이때 유대인들 중 갈릴리 지역 특히 가믈라 출신의 유다와 바리새파의 사독은 과거 다윗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인구조사를 했다고 말하면서 같은 맥락에서 퀴리니우스의 인구조사도 성서적이지 못하다고 공격했다. 이들은 또 인구조사를 통해 유대인이 노예로 전락하고 세금이 더 늘어날 것임을 내다보고 군대를 결성해 로마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열심당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은 종교적인 부분에 있어 바리새인과 생각을 공유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비폭력적인 바리새인과는 달랐다. 열심당은 하나님만이 통치자라는 신념 아래 로마에 끊임없이 저항했다. 주후 66년 마침내 열심당은 예루살렘을 로마의 손에서 빼앗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로마에서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의 힘을 얻은 그의 아들 티투스의 반격에 열심당은 속수무책이었다. 로마에게 다시 예루살렘을 뺏기고 만 열심당은 피난길에 오르고 말았다.

유대인들의 마지막 항거 장소

주후 66년 유대인이 로마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는 이스라엘을 점령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70년에는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이 무너졌다. 제사장 출신의 엘리에젤 벤 야이르를 우두머리로 한 960명의 열심당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의 요새 마사다로 몸을 숨겼다.

지난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쪽의 뱀길(snake way)만이 오직 마사다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마사다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곡식 저장고와 물 저장고를 갖춘 마사다에서 열심당원들은 3년 동안 로마에 항거했다. 그들은 마사다를 마지막 주둔지로 삼고 헤롯(the Great Herod)이 지은 마사다의 가옥 중 하나를 회당으로 변형해 사용하였다.

유대인의 회당이 늘 그렇듯 예루살렘을 향하도록 구조를 짜고 벽면에는 벤치형의 의자들과 지붕을 받칠 수 있는 기둥들이 세워졌다. 지난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회당에서는 제사장을 위한 십일조라고 기록된 토기 조각과 신명기 일부분과 에스겔 37장 기록된 사본도 발견된 바 있어 피난길에서도 지켜진 그들의 종교성을 엿볼 수 있다.

로마는 열심당원 토벌을 포기하지 않았다. 로마의 장군 플라비우스 실바와 그의 군사들은 마사다 주변에 8개의 군 진영과 막사를 짓고 열심당원들과 대적했다. 결국 로마는 서쪽의 낮은 절벽을 이용하여 앗수르가 라기스와의 전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천 톤의 흙과 나무, 돌 등으로 인공 언덕을 쌓아 정상까지 이르는 길을 만들어냈다.

이 인공 언덕은 1932년 솔첸이 발견했다. 18m 두께에 70m 길이의 이 인공 언덕을 쌓는 데는 약 9000명 이상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결전의 날, 로마 군사들은 인공 언덕을 올라가 공성퇴를 사용해 마사다의 벽을 무너뜨리고 돌로 만든 공성추를 성벽 안으로 날려 보냈다. 정상에 도달해 성문에 불까지 붙였다. 로마군은 이제 성안으로 진격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이때 바람이 서쪽으로 불었다. 불꽃이 로마 군사들에게 날렸다. 로마군은 도저히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 다시 성을 공략하기로 기약하고 진영으로 일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마사다에서 엘리에젤 벤 야이르는 장엄한 연설을 했다.

“우리는 오직 진실하신 하나님 외에 로마나 그 누구의 종이 되지 않기를 결의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결정의 때가 왔다. 우리는 가장 처음으로 로마에게 저항했으며 가장 마지막으로 로마와 싸운 자들이다.”

그는 그들의 명예로운 죽음을 증명해 줄 2명의 여인과 5명의 아이들만을 남기고 다 죽기로 했다. 10명의 사람이 제비를 뽑아 나머지 900여명의 사람을 죽이도록 하였다. 다시 그 중에 1명만을 제비 뽑아 나머지를 죽이고 그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음 날 로마가 성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시체 더미였다. 헤롯이 지은 북쪽 궁전 앞에서 벤-야이와 다른 10명의 이름이 각각 기록되어 있는 작은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다. 죽음의 순서를 뽑았던 제비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960명의 시신이 모두 발견된 것은 아니다. 단지 28명의 시신만이 발견되었을 뿐인데, 그중 24명의 시신은 언덕 절벽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그 주변에 돼지뼈가 있어 로마가 마사다를 함락한 후 이곳에 거주했던 비유대인들로 추측하고 있다. 목욕탕에서 한 여인의 머리가 발견됐는데, 정돈한 모양이 기혼여성으로 살아 있을 때 머리가 잘린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마사다가 발굴된 모습에 비해 요세푸스의 설명이 단출하고 그 모습이 정확지 않아 아마도 그의 숫자와 설명에 실수가 많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요세푸스의 설명에 오류가 있든 없든 오늘의 유대인에게는 상관이 없다. 마사다는 유대인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중요한 삶의 교훈을 주고 있는 장소이다. 이 정신을 기념하여 마사다에서는 매년 군장교 임관식이 거행되고 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터치바이블 대표, 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