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염소 찾다 2000년 은둔 最古의 성서 사본 발견
최고의 발견
유대 광야와 사해에 관련된 이야기에서 단연코 빼놓을 수 없는 유물은 사해 사본이다. 사해 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 사본은 10세기에 기록된 알레포 사본과 1008년에 기록된 레닌그라드 사본이었다.
알레포 사본은 알레포 코덱스라고도 부르는데 코덱스란 두루마리의 형태가 아닌 현대의 책처럼 한 명씩 편철한 것을 말한다. 알레포 사본은 925년 갈릴리 호수 곁의 디베랴에서 기록된 필사본으로 예루살렘에 보관되어 있었다. 십자군 시대에 사라졌다가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가 다시 구입하여 시리아 알레포의 회당에 보관하였다. 알레포 사본은 이동 중 여러 장이 떨어져 나가 완전한 성서라고는 할 수 없었다.
레닌그라드 사본은 현재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사본으로 성서 전체가 보존되어 있다. 성서의 사본이 너무나 후대의 것들이고 원본이 없는 관계로 구약 기록의 진위 여부까지 거론된 적도 있었다.
1947년 봄 사해 주변의 한 동굴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본들보다 1000년 이전에 기록된 사본이 발견됐다. 유대 광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 중에 이른바 베두인이라고 불리는 유목민이 있다. 베두인 목동 무하마드 엣 디브는 다른 2명의 동료와 잃어버린 염소를 찾아 사해의 북서쪽 해안, 쿰란이라 불리는 지역의 절벽을 헤매고 있었다. 사해 지역은 워낙 덥기 때문에 목동들과 가축 떼는 동굴에서 더위를 피하기도 하고 기온차가 심한 밤에는 동굴에서 추위를 피하기도 했다. 한 동굴 입구에 이들은 염소가 있는지 확인하고자 돌을 던졌다.
염소 울음소리가 아니라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 놀란 목동들은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돌들을 치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에는 10개 항아리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중 8개는 비어 있었으며 하나는 흙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마지막 하나의 항아리에 세 개의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동굴에서 그들은 이사야서 전권, 공동체 규율서, 하박국 주석, 이사야서의 두 번째 사본, 감사 찬송집, 전쟁 문서, 그리고 창세기 외경 두루마리 등 총 7개의 사본을 발견했다.
목동들은 두루마리의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칸도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베들레헴의 골동품 상인 칼릴 에스칸더 샤힌이 단돈 7요르단파운드(현 시가 3만원 남짓)를 주고 두루마리를 샀다.
칸도는 사본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 사본 4개를 24요르단파운드에 시리아 정교회 대주교 아타나시우스 사무엘에게 팔았다. 나머지 3개는 히브리 대학교의 수케닉 교수가 샀는데 이 거래는 이스라엘의 독립전쟁 하루 전인 1947년 11월 29일 토요일, 유엔이 이스라엘 정부를 승인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이루어졌다. 수케닉 교수는 훗날 1962년 마사다를 발굴한 야딘 교수의 아버지로 사해에서 발견된 이 두루마리들이 구약 성경임을 밝혀낸 인물이다.
사무엘 대주교는 그가 가지고 있던 사본을 미국에 가져갔다. 1954년 월스트리트저널에 ‘사해 사본(Dead Sea Scroll) 판매’란 광고가 실렸다. 광고에 이 사용된 문구가 사본의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다. 사해 사본이 이스라엘로 돌아오기를 염원했던 아버지의 바람을 이어받아 야딘 교수가 2만5000달러를 주고 되사왔다.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 사본
학자들은 사본이 발견된 첫 번째 동굴과 주변의 25개가 넘는 동굴들을 탐사했다. 1947∼56년에 사해 주변의 11개 동굴들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현재까지 모두 972개로 알려져 있다. 1967년 6일 전쟁이 있기까지 사해와 예루살렘은 아직 요르단이 통치하는 지역이었기에 처음 8년간의 발굴은 요르단이 집행했다. 요르단의 박물관으로 옮겨진 사본들은 현재까지 요르단이 소장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에는 이스라엘 박물관 내 ‘사본의 전당’에 소장되어 있다.
사본은 대부분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으며 아람어와 헬라어 기록도 있다. 파피루스에 쓰여진 문서도 있었으나 많은 양의 사본이 양피지에 쓰여 있었다. 세 번째 동굴에서 발견된 3개의 사본은 구리에 기록되어 있었다.
사본의 기록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 측정법과 글씨체의 변화 등을 통해 주전 408년∼주후 318년 사이로 추정됐다. 주변에서 발견되는 동전들로 보아 주전 135년∼주후 68년 사이에 가장 왕성하게 기록된 문서들로 보인다.
사본의 40%는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성서를 포함하고 있다. 나머지 60%의 반은 가톨릭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토빗서와 에녹서 등의 위경들이 있고, 나머지 반은 성서주석이라든가 유대인들의 종교적 규율, 기도문 같은 문헌들이었다. 특별히 후자의 문서들은 신약과 동시대 유대인들의 관습, 종교, 사상, 생활 방식에 관한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사해 사본의 기록자
사해 사본의 해독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기록자를 밝혀내는 일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학자들은 사해 사본이 발견된 동굴 앞 쿰란 유적지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에세네 학파이고 이들이 사본을 필사해 숨겨놓았다는 주장을 한 치의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주후 1세기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에세네 학파는 종교적 정결을 중요시 여겼으며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규율을 엄격히 지켰다. 이러한 그들의 생활은 첫 번째 동굴에서 발견된 ‘공동체 규율집(Community Rule)’에서 묘사하고 있는 모습과 비슷했다.
그러나 최근 몇몇 학자들이 주후 70년쯤 로마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면서 일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에 있던 사본들을 옮겨와 동굴에 숨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사본이 쿰란 유적지 한 곳에서 기록된 것도 아니고, 에세네 학파 한 종파의 기록이 아니며, 다양한 예루살렘의 서고에서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사해 사본의 일부가 신약성서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사본의 기록인들이 초기 기독교인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그다지 지지는 받지 못했다. 최근에는 에세네 학파 기록설보다 사두개인 기록설이 더 지지를 받고 있다. 네 번째 동굴에서 발견된 4QMMT 문서에 기록된 정결례의 율법과 축제 달력이 사두개 종파의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보존과 연구
발견 초기 사해 사본의 보존 상태는 상당히 좋았다. 쉽게 부식될 수 있는 양피지와 파피루스지만 건조하고 습기가 적은 쿰란 지역의 기후와, 동굴 속에 2000년 가까이 숨겨져 있어 빛과 사람의 손이 전혀 닿지 않았다는 조건 덕분이었다.
처음 사해 사본을 연구한 학자들은 보존 방법을 몰랐다. 밝은 빛을 쬐거나 방온과 방습이 안 되는 곳에 보관했다. 고대 문서들은 금이 갔고 글씨는 사라졌으며 찢겨나갔다. 심지어 사본을 연구하고 있는 초기 학자들의 사진 중에는 사본을 연구하면서 다른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모습도 있다. 투명테이프를 붙인 자국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후 사본을 보존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들이 동원되었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현재까지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고문서 보존과학이 사해 사본을 보호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과거에 붙인 투명 테이프도 하나씩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있다.
문자의 해독과 연구 역시 세계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더불어 지금도 사해 사본을 찾기 위해 쿰란 지역의 동굴들을 뒤지거나 구리사본에 기록된 보물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도 있다. 사해 지역에서 간혹 이런 사람을 볼 수 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터치바이블 대표, 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대 광야 (사해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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