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대 광야 5 (쿰란)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2:34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대 광야 5 (쿰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대 광야 5 (쿰란) 기사의 사진쿰란 사람들 광야 공동체에서 성경 필사하며 금욕생활

쿰란 공동체

사해 북서쪽 해변 동굴에서 성서 사본이 발견되자 누가 이 사본들을 동굴에 안치했는지가 학자들의 최대 관심사가 됐다. 대부분 학자들은 발견된 사본들 중 ‘공동체 규율집’이 신약시대 에세네라 불리던 사람들의 생활상과 너무나 유사해 그들이 사본의 주인이 아닐까 추측했다.

더욱이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와 로마인 플리니우스에 의하면 에세네는 자신들을 “진실한 이스라엘 (True Israel)”이라 부르면서 부패한 예루살렘을 떠나 사해 주변 광야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금욕적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1949∼1956년 드보(R deVaux) 신부는 사해사본이 발견된 동굴 4번과 마주보이는 ‘쿰란’이라 불리는 언덕에서 유적을 발견했다.

드보에 의하면 쿰란 유적지에서는 주전 8∼7세기 남왕국 유다의 흔적들도 발견됐고 이곳이 여호수아(15:61∼62)에 등장하는 스가가이거나 소금성읍이었으며 사해 경계를 지키는 요새 역할을 했으리라고 보고 있다.

그 이후 쿰란은 주전 130년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하다 주전 31년 지진에 의해 무너졌고 잠시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이 됐다. 이어 주전 4년 다시 사람들이 살다가 주후 68년 로마의 침략 이후 버려진 장소가 됐다. 드보 신부는 쿰란 유적지가 에세네의 거주지였다고 확신했다. 사해사본이 발견된 1번 동굴에서는 10개의 접시 모양을 지닌, 뚜껑 달린 긴 몸체의 항아리가 사본과 함께 발견됐다. 이러한 항아리는 아직까지 쿰란 유적지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학자들은 대부분 쿰란에 거주하면서 성서 사본을 필사했던 에세네 구성원들이 주후 68∼70년 로마를 피해 주변 동굴에 필사본들을 숨겨두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수로와 미크베

쿰란 유적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돌로 쌓아 만든 수로다. 유적지 뒤편 서쪽의 절벽에서 시작된다. 사해 지역은 연평균 강수량이 100㎜도 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는 물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쿰란 거주자들은 겨울 우기에 잠깐 흐르는 강줄기였던 와디 쿰란에 댐을 만들어 물을 끌어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로를 통과한 물은 유적지 내에 있는 물 저장고와 미크베(복수 미크바옷)로 흘러들어왔다. 미크베는 주전 1세기∼주후 1세기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을 행하던 탕(bath)을 말한다. 이 의식은 물에 사람이 침수함으로 정결케 되는 것으로 당시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인 거주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정결 장소다. 미크베는 그 내부를 여러 번 두껍게 회칠하여 방수가 되도록 했다. 위에서 내려오는 계단과 올라가는 계단은 줄로 나뉘어 있어 부정한 사람과 정결해진 사람이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미크베에 사용되는 물은 자연적인 물이어야 했으며 최소 500ℓ가 필요했다. 쿰란 유적지에서도 여러 개의 미크베가 발견됐다. 만약 유적지 거주자들이 에세네였다면 유대인으로서 정결 의식을 강조했던 그들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정결을 강조했던 공동체의 성격이 드러나는 증거는 돌로 만든 용기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정한 것을 담은 그릇은 깨뜨려야 했다. 그러나 돌은 예외적인 재료로서 부정을 타지 않는 것으로 간주됐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유대인의 결혼식에 사용된 항아리 역시 돌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요2:6).

필사방과 식당

쿰란에 남아 있는 가장 높은 건물은 유적지 동쪽의 망대다. 유목민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망대 남쪽에는 2층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는데 위층이 무너지면서 길이 5m, 높이 50㎝의 석고를 입힌 탁자와 잉크병들의 파편이 발견됐다. 2층은 사본을 베껴 쓰던 필사방으로 보인다.

이 방의 서쪽에 벽을 따라 벤치가 마련돼 있는 방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선반이 놓인 장들이 있었는데 드보는 이 방을 도서관으로 해석했다. 건물의 남쪽 한 방에서는 똑같이 생긴 컵 708개, 접시 210개, 사발 108개 등 개인용 그릇과 음식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 등 1000여개의 용기가 함께 겹겹이 쌓여 있는 채 발견됐다.

개인 접시를 사용한 모습은 공동 접시를 사용하던 고대 중동지역 식사 풍습과는 달랐다. 식당의 크기와 그릇의 개수로 보아 공동체 인원은 150∼200명 사이로 추측된다. 학자들은 에세네의 일부만이 이곳에서 거주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유적지의 남동쪽 코너에서 그릇들을 굽는 데 사용된 가마가 발견됐다. 최근 가마와 물 저장고 아래 깔려 있는 진흙 등을 통해 쿰란이 토기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는 가설이 주장되기도 했으나 공장으로 보기에는 가마의 규모가 상당히 작다.

특이한 것은 쿰란 유적지 내에서는 개인이 거주했던 방으로 보이는 장소는 발견된 바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쿰란이 에세네라 불리는 공동체 생활이 이뤄졌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개인 생활은 텐트에서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임미영 박사가 참여한 바 있는 1995∼96년 쿰란에서의 발굴 중 브로시(M Broshi)와 에셸(H Eshel) 교수는 유적지 주변의 동굴에서 개인 생활을 했던 흔적을 발견한 바 있다.

기도시간

요세푸스는 에세네 사람들이 아침마다 동쪽을 향해 기도했다고 말했다.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에세네 사람들이 기도 시간과 안식일 절기 등을 거룩히 지켰다는 흔적을 쿰란의 유물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쿰란에서는 돌로 만든 원형의 독특한 시계를 사용했는데 354일로 이뤄진 유대인 월력과는 달리 364일의 태양력을 이용했다.

1년은 천지창조 중 빛을 창조한 넷째 날부터 시작되는데 52주로 구성됐으며 13주씩 4계로 이루어졌다. 기도 시간은 유적지 남쪽 광장에 모여 정확한 시간에 동쪽을 향해 이뤄졌다. 기도 중에는 신명기(6:4∼9)에서 강조한 것처럼 경문의 띠를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았다. 쿰란에서 발견된 길이 3.5㎝의 검정 가죽주머니, 즉 경문의 띠에는 양피지에 기록된 성경말씀(출 13:1∼10,11∼16, 신 6:4∼9, 11:13∼21)이 들어 있다. 신약시대 예루살렘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기도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 경문의 띠를 보다 넓게 제작했고(마23:5), 이는 에세네와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에세네와 쿰란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건물의 형태나 유물을 통해 쿰란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낮에는 건물의 한 곳에 모여 식사를 함께 하고 사본을 쓰는 일을 했고 밤에는 주변 동굴이나 텐트에서 잠을 잤다는 의견에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군사 요새, 로마의 겨울 별장,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이 사용한 서재, 심지어 기독교인들의 흔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는 가장 큰 이유는 유적지 동쪽의 50m 지점에서 발견된 공동묘지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돌무더기로 쌓아 표시된 1000여개 무덤이 발견되었다. 조상의 무덤을 발굴하는 것을 꺼리는 유대법 때문에 비록 모두 발굴되지는 못했지만 남성의 무덤 사이에 소수의 여성과 4명의 아이들이 발견되었다.

이는 에세네의 구성원들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기록과는 배치된다. 보석이나 빗 등 여성 장신구와 561개의 동전이 가득 든 항아리 3개가 발견되기도 해 금욕적이었던 공동체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는 의견들도 있었다. 하지만 동전의 경우 공동체에 들어올 때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았던 관습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며 자급자족했던 공동체의 수입으로 보기도 한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터치바이블 대표, 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