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다 산지 ②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2:36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다 산지 ②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유다 산지 ② 기사의 사진
예수님 탄생지 베들레헴, 다윗이 목동으로 성장한 풍요로운 땅

풍요로운 유다 산지 도시 - 베들레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성탄절이 다가오면 베들레헴과 밤하늘에 떠 있는 별 하나를 떠올린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다(눅 2:11).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 정도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었던 베들레헴은 ‘빵집’이란 히브리어 의미를 갖고 있다. 아랍인들에게 베들레헴은 베틀라헴 즉 ‘고깃집’으로 불리고 있어, 성서 시대의 베들레헴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베들레헴은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도시로 무슬림인과 아랍 기독교인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라는 유명세는 도시를 먹여 살리는 원천이 되고 있을 정도로 ‘예수탄생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가 발달해 있다. 덕분에 성탄절은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큰 축제가 되고 있고 또한 한몫을 챙기려는 장사꾼들로 시끌벅적하다.

베들레헴은 주전 14세기에 기록된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에서 처음으로 역사적인 기록에 등장한다. 당시 예루살렘의 왕은 이집트 왕에게 아피루에게 빼앗긴 ‘비트-라흐미(라흐미의 집)’를 되찾고자 도움을 청했다. 학자들은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도시로 음가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 도시가 베들레헴이라고 보고 있다.

라흐미는 가나안의 풍요를 상징하는 신인 라하마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고대 이 도시의 언덕에는 이 신을 위한 신전이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신전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신의 이름은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따라 부르기 편한 유사한 이름으로 바뀌어 히브리어로는 베트-레헴이라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직 고대 신전의 흔적이 발견된 바는 없다.

헤브론처럼 베들레헴도 팔레스타인의 자치도시라는 이유로 발굴에 어려움이 있다. 또 고대 도시가 있었을 법한 장소에 오랜 기간 사람들이 계속 살고 있어 유적은 이미 훼손되어 찾아보기가 어렵다.

야곱의 아내 라헬은 베들레헴 길 곧 에브랏이라 불리는 장소에 장사되었다(창 35:19). 현재도 베들레헴 입구에 전통적으로 라헬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장소가 있다. 여호와가 라헬의 불임을 해결해 주신 사실을 기억하는 유대 여인들이 그들의 생산을 위한 기도를 이곳에서 드리곤 한다. 에브랏이라는 이름 역시 ‘풍요’를 상징하고 있는데 도시의 이름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베들레헴은 부유한 유다 산지의 혜택을 누렸었다.

사사기 19장에 등장하는 레위사람은 베들레헴의 장인에게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물론 자신의 딸이 불의를 행한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도 있었겠지만 풍요로운 장소의 사람들이 베풀 수 있는 호의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들레헴에도 흉년이 찾아왔다. 고향을 버리고 모압 땅에 갔던 나오미라는 여인은 남편도 아들들도 모두 잃은 채 며느리 룻과 다시 베들레헴에 돌아왔다. 이곳에서 룻은 보아스를 만났고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었다. 성서는 룻이 다윗의 조상을 낳았다고 말하고 있다.

다윗의 동네

유다 자손인 다윗의 집안은 베들레헴에서 살았다. 다윗은 풍요로운 베들레헴에서 목동으로 성장하였으며 사무엘에게서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다(삼상 17장). 다윗의 통치시기에 베들레헴을 잠깐이나마 블레셋이 점령한 적이 있었다(삼하 23:14).

그때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분명 자신의 고향에 있던 맑은 물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를 위해 세 용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에서 물을 가져오자 그는 도저히 그 물을 먹을 수 없어 여호와께 부어 드리고 말았다.

베들레헴 출신 사람들은 다윗과 그 집안에 지속적인 충성을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 다윗의 신하들 중에는 베들레헴 출신 엘하난이 있었으며(삼하 23:24), 다윗의 손자 르호보암 왕 시절에는 이곳에 요새를 건설했다(대하 11:6).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들레헴에서 유다 왕국 시대의 요새를 발견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최근 예루살렘 다윗성 발굴에서 ‘왕에게 베들레헴으로부터’라는 구절이 새겨진 인장을 찍은 점토 덩어리 하나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점토 덩어리는 고고학적 용어로는 불라(bulla)라 불리는데 편지를 봉인하는 데 주로 사용된 것으로 유다 왕국 시대 베들레헴이 예루살렘의 왕에게 행정적 문서를 보내는 도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탄생교회(the Church of the Nativity)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주전27∼주후14년)가 통치하는 지역에서 세금을 좀 더 쉽게 거둬들이기 위해 인구조사를 시행했을 때, 유다 지파요 다윗의 후손인 요셉도 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만 했다(눅 1:1-4). 이는 미가 5:2의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이루었다.

학자들은 눅 1:2에 시리아의 총독 구레뇨(퀴리니우스)가 통치하였을 때(주후 6∼7년) 인구조사가 시행되었다고 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어 예수 탄생 연도에 대한 논란을 낳고 있다. 예수께서 헤롯대왕(주전 37∼4년)이 살아 있을 때 태어났다면 이는 주전 4년 이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인구조사 덕에 예수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현재 베들레헴에는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교회가 있다. 주후 4세기에 건축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다. 주후 132∼135년 바르 코크바를 중심으로 일어난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제2차 항쟁 이후 로마군인들은 베들레헴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내쫓았다. 로마는 예수 탄생의 자리로 기념되어 초대교회 교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장소에 아도니스의 신전을 세웠다.

그러나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아도니스 신전의 자리에 예수탄생교회를 세웠다(326년). 현재 예수탄생교회의 내부에는 이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교회의 모습이 남아있다. 헬레나는 당시 비잔틴시대 유행했던 팔각형 모양의 교회를 건설했으며 바닥은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했다. 비잔틴시대 건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홀을 가로지르는 두 줄의 기둥들을 세우고 화려하게 조각한 기둥머리들이 얹혀졌다. 지금도 이 기둥들은 교회의 천장을 지탱하고 있으며 교회 바닥 일부분의 뚜껑을 열면 이 시대 만들어진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교회는 베들레헴이 누구의 손에 넘어갔는가에 따라 파괴되기도 하고 재건축되기도 하였다. 529년 사마리아의 베들레헴 점령으로 교회는 무너졌지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다시 세웠다(531년).

614년 아랍 무슬림이 베들레헴에 들어왔을 때 교회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베들레헴을 점령한 아랍 무슬림들은 대부분 페르시아 출신들이었다. 그들이 탄생기념교회를 파괴하려고 했을 때, 교회의 내부 벽화에서 동방박사(페르시아 출신)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탄생기념교회를 파괴하면 그 불행이 자신들에게 닥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고 결국 두려움 때문에 교회를 파괴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교회 입구 위에는 아기 예수를 만나러 오는 세 명의 동방박사가 페르시아 의복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터치바이블 대표, 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