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④유다의 멸망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2:45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④유다의 멸망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④유다의 멸망 기사의 사진
요시야 死後 신흥세력 바벨론에 의해 다윗성 불타 사라져

종교적 타락

히스기야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실수는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파견한 사신에게 왕국의 국고를 보여준 것이다. 그가 병들고 죽어간다는 소식에 예물과 편지를 들고 위문차 파견된 사신이 찾아오자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의 국고와 금은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군기고와 창고를 보여주었다(왕하 20:12-15). 그때 이사야는 히스기야가 모든 국가적 비밀을 적국에게 보여준 것을 나무라면서 결국 유다가 바벨론의 손에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왕하 20:17-18).

그 후 히스기야가 죽고 유다 왕국에는 정치적 혼란의 상태는 물론 종교적 위기까지 왔다.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그는 아버지와 달리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아합을 쫓아 우상숭배자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웠다.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여 섬겼다.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고 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악을 행하였다(왕하 21장).

당시 유다 왕국에서는 종교적 불안이 급증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백성들은 어쩌면 당장에 볼 수 없는 여호와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정확히 아세라나 혹은 어떤 여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가정이나 무덤에서 발견되는 ‘유다 기둥 몸통 여인상(Judean Pillared Figurne)’들은 신앙적 대상이었음에는 의심이 없다. 높이가 25㎝를 넘지 않는 점토 여인상들이 처음 발견됐을 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인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가슴을 강조하여 양쪽 손을 바치고 있는 모습이라든가 오직 얼굴만이 중요할 뿐 뒤통수에는 전혀 장식하지 않은 모습, 그리고 어딘가 세울 수 있도록 아래를 받침 형태로 만든 것 등을 보았을 때 인형보다는 불안한 시대에 풍요를 염원하는 유다인들의 민간신앙 대상으로 재평가됐다. 그 외에도 아랏과 브엘세바 등에서 다루었던 내용들처럼 당시 유다에는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다른 신앙들이 있었다. 결국 유다 사람들은 여호와를 향한 신앙 외에도 여러 다른 신에 의존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정치적 위기

이러한 종교적 타락을 멈춘 것은 요시야였다. 왕하 22-23장은 요시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종교개혁을 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그의 종교적 업적을 기록하느라 사실 그의 정치적 업적에는 적은 분량을 할애했다.

요시야의 재위기간을 살펴봤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유다 왕국을 확장한 왕이었다. 주전 640년경 중동 지역에는 정치적으로 큰 바람이 불었다. 한때 최고의 강국이었던 이집트는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해 피폐해진 상태였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강한 제국 앗수르 역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과거 바벨론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는 이들이 서서히 힘을 모으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유다에 관여하는 강국의 세력이 없자 요시야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권을 회복하였다.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바에 의하면 그는 지중해변까지 유다의 영토를 넓혔다. 또한 국고를 채우고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히스기야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왕의 인장이 찍힌 항아리를 사용하여 세금을 걷둬들였다. 이때 사용된 인장은 꽃잎모양의 인장으로 당시 중동에서는 왕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위기는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바벨론의 공격에 고통당하고 있는 앗수르를 돕고자 이집트의 바로 느고는 주전 609년 유다의 지중해변을 지나 북으로 올라갔다. 이는 유다의 영토를 밟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앗수르가 다시 세력을 장악했을 경우 유다에는 정치적 압박이 닥칠 것이 분명했다. 이를 막기 위해 요시야는 군대를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시야는 안타깝게도 므깃도에서 느고에 의해 죽고말았다(왕하 23:29). 요시야의 죽음 이후 국제적 정세의 바람은 유다를 더욱 세게 강타했다. 이집트의 느고는 요시야 대신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를 폐위하고 여호야김을 왕좌에 앉혔다.

고대근동 지역은 이제 이집트도 앗수르도 아닌 신흥 바벨론이 그 세력을 얻었다. 요시야 이후 유다의 왕들은 길게는 3년, 짧게는 3개월을 재위하면서 바벨론에 동조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했다. 결국 주전 586년 유다 왕 시드기야 제 9년 10번째 달 10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다.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다”(왕하 25:8-10, 렘 39:8, 대하 36:18-19).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막기 위해 세운 망대는 무너졌고 다윗 성은 불타 사라졌다. 성전 역시 무너졌으며 성전 안 기물들은 약탈당했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갔다.

파괴의 흔적

예루살렘을 파괴한 바벨론의 잔혹한 전쟁의 흔적 속에서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것은 ‘아히엘의 집’이라 불리는 가옥이다. 다윗성에서 발견된 이 집은 고대 이스라엘의 가장 전형적인 가옥 구조라 생각되고 있는 4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옥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에 ‘아히엘’이라는 이름이 씌어 있어 ‘아히엘의 집’이라고 불린다. 주로 주전 8∼6세기 유다 멸망 전까지 사용된 집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이스라엘의 집은 기초만 돌로 쌓고 진흙 벽돌을 쌓아 지었는데, 이 집은 값비싼 재료로 통했던 돌만을 사용해 지었다. 다윗 성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상류층이 거주했을 확률이 높다고 보고 있다. 1층은 가운데 공간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기둥을 세워 집 입구에서 보면 세로로 공간이 나뉘어 있다. 이 세로로 나뉜 공간 뒤쪽에는 가로로 방 하나가 더 있어 1층이 4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형태다. 이를 4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집(Four-room house)이라 부른다.

1층의 가운데 공간은 화로를 두어 부엌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양쪽 공간은 가축을 두는 우리로 썼다. 뒤쪽의 가로 공간은 항아리들을 두어 저장 공간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히엘의 집은 바깥벽에 돌을 쌓아 계단을 만든 2층집이었다. 2층은 사람이 거주했던 공간으로 우리말 성경에 ‘다락’이라고 번역했다. 여기서는 또 현대의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거의 유사한 돌로 만든 변기가 발견된 바 있어 세상을 놀라게 한 바 있다.

아히엘의 집 맞은편에서는 ‘불 탄 방(burnt room)’이라 불리는 방이 발견되었다. 바벨론의 파괴로 완전히 불타버린 방은 한때 서기관이 사용하던 방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방에서는 51개의 ‘불라(bulla·복수형은 bullae)’가 발견되었다. 불라는 인장이 찍힌 상태로 굳은 원형의 점토덩어리로 크기는 손가락 마디 정도다. 고대중동 지역에서는 파피루스나 양피지 같은 부드러운 재질을 이용해 문서를 만들었는데, 문서를 돌돌 말아 끈을 묶은 후 문서를 보낸 이가 누군인가를 알리기 위해 동그란 점토를 매듭 위에 올리고 문서 주인의 인장을 찍었다.

대부분의 불라는 점토를 자연 상태에서 말린 것이기 때문에 이미 고대에 문서를 풀면서 쉽게 부서져버렸다. 그러나 이 방은 주전 586년 바벨론의 화재를 동반한 파괴로 불이 지펴졌고 덕분에 불라들이 마치 토기처럼 구워져 오늘날까지 보존됐다. 발견된 숫자만으로도 이 방이 불라를 모아놓은 방이었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 발견된 불라 중 예레미야 36장 10절에 등장하는 서기관 사반의 아들 그마랴의 인장이 있어 서기관의 방으로 추측하는 이들이 많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터치바이블 대표·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