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⑪유대인의 무덤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2:58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⑪유대인의 무덤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⑪유대인의 무덤 기사의 사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일에 매장한 까닭은…

예루살렘의 크기를 그리다

오늘날까지 유대인에게 있어 정결은 가장 중요한 종교적 관습이다. 구약 성서에서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거나 무덤에 가까이 한 자는 그 자신을 정결하게 씻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반드시 정결하게 하는 물을 자신에게 뿌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정함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민수기 19: 13; 19). 이러한 정결 관습은 상당히 강력히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장례식 역시 시신과 가까이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죽은 그날에 이루어져야만 했다.

이와 같은 관습을 우리는 신약 성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날 매장되었다. 물론 이날이 유월절 첫날이기 때문에 매장을 서두르기도 했지만, 또한 시신을 멀리하기 위한 유대 장례 관습에 따라 당일에 매장을 한 것이다.

이렇듯 시체를 멀리하는 관습이 강하게 시행된 결과 결국 유대인들은 그들의 무덤을 도성 안에 둘 수 없도록 금지하는 법을 만들기까지 했다. 예루살렘의 경우에도 무덤은 모두 성 밖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성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학자들은 발견된 무덤들을 연결하여 지금은 사라진 당시의 성벽 위치를 지도 위에 그릴 수 있었다.

무덤들은 모두 주변 산지의 바위를 뚫어 만든 무덤이었다. 예루살렘은 주변으로 반경 7㎞ 지점에서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입구가 아름답게 장식된 무덤은 지위가 높은 이들이 묻힌 곳인데, 이런 무덤들은 대체로 예루살렘 성벽과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무덤은 주전 168년 죽은 것으로 알려진 대제사장 야손의 무덤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글자들이 새겨져 있어 무덤 주인의 자세한 내력을 파악할 수 있다. 야손의 무덤은 또한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며진 가족 무덤이었다. 유명한 무덤들이 몰려 있는 곳도 발견됐다. 예루살렘 동쪽 성벽을 따라 있는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무덤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른바 압살롬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장식의 건물 형태의 무덤을 비롯하여 수많은 무덤들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1세기 무덤 모습

구약과 신약 시대 무덤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가족 무덤이라는 점이다. 무덤 안에는 여러 시신들을 눕힐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 있어야 했다. 1세기 전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 일대에 거주한 유대인들에게는 고인의 시신을 적절한 곳에 매장하는 것이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구약 시대부터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시신이 제대로 매장되지 않는 것을 무척이나 치욕적인 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치욕적인 매장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가장 큰 벌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예루살렘 지역의 지형적인 특성상 신구약시대 모두 자연 동굴이나 바위를 뚫어 마치 방처럼 생긴 공간을 무덤으로 사용했다. 구약 시대처럼 신약 시대에도 이 일대의 무덤은 중앙의 큰 방을 중심으로 삼면에 시체를 눕히도록 되어 있었다. 대신 방 안에는 구약 시대의 벤치 형태와는 다르게 로큘리(loculi)라 불리는 사람의 키만큼 바위를 뚫은 구멍들이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태어났을 때처럼 벌거벗겨졌다(전도서 5:5). 시신은 깨끗이 씻겨졌는데, 초기에는 지난 회에 설명한 미크베에서 씻었지만 후대에 가서는 몸을 씻는 전통 의식이 별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시신은 세마포로 싼 뒤 각종 향 재료로 가득히 채운(대하 16:14) 로큘리 같은 평상에 눕혔다. 미쉬나에서는 머틀(Myrtle)이라 불리는 향을 사용했다고 말하고 있다. 무덤의 입구는 1m 높이 정도 되게 낮았는데, 시신의 매장이 끝나면 돌로 막았다.

이러한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 장사한 바위 속에 판 무덤을 연상케 한다(마태 27:57-61; 마가 15:42-47; 누가 23:50-56; 요한 19:38-42). 그는 예수를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 앞에 놓았다. 예수가 부활할 것이라는 소문이 이루어지도록 누군가 시신을 훔쳐갈까 두려워 유대인들은 로마 군사들로 무덤을 지키게 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돌이 둥근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세 여인이 어떻게 돌을 굴려 무덤을 열 것인가 고민을 했을 것이기에 옆으로 굴릴 수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 발견된 무덤들의 98%는 입구를 둥근 돌이 아닌 사각형의 돌로 막았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다. 특별히 예루살렘 주변에서 발견된 900개의 무덤들 중 단 4곳의 무덤만이 둥근 돌로 닫혀 있었다. 예수의 무덤은 어떤 형태의 돌로 막혀 있었는지 아직도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돌을 ‘굴리다’라는 단어에 ‘밀었다’는 표현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도 연구해 볼 만하다.

예수 무덤의 위치

현재 예루살렘 구시가지 내에 무덤교회가 있는 곳이 예수의 무덤이 있던 곳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유대인의 무덤들이 성 밖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성 안에 자리잡은 무덤교회는 전통적으로 알려져 온 얘기일 뿐 실제 예수의 무덤 자리는 아니라고 보는 학설이 지배적이었다.

덕분에 학자들은 예수의 무덤을 현재 예루살렘 성 밖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보고 찾아왔다. 가장 유명한 후보는 정원무덤(Garden Tomb)으로 지금까지도 상당히 많은 순례객들이 방문하고 있는 곳이다. 1882년 영국의 찰스 고든 대령은 예루살렘성 북쪽 다메섹 혹은 세겜 성문을 나와 도로 변에 있는 한 언덕을 골고다 언덕이라고 생각했다. 이 언덕에는 두 개의 커다란 웅덩이가 있어서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마치 해골의 두 눈처럼 보였다. 이 언덕 뒤에서 숲에 둘러싸인 오래된 무덤 하나가 발견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골고다가 해골이라는 뜻을 가졌고 성 밖에 위치했으며 무덤 입구 바닥에 홈이 파져 있어 입구를 막았던 돌을 굴리도록 하는 구조까지 있는 이곳을 예수의 무덤이라 여겼다. 지금까지도 이곳에는 영국 교회가 있다.

그러나 이 무덤을 발굴해 본 결과 주전 7세기경 구약 시대에 주로 사용되었던 무덤으로 정원 무덤의 뒤쪽에 위치한 에콜 비블리크(Ecole Biblique)라 불리는 프랑스 성서 연구원 및 교회의 지하에서 발견된 무덤군과 같은 시대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무덤은 신약시대에는 사용된 적이 없고 한참 뒤 비잔틴 시대에 가서야 다시 사용되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예루살렘 성 북쪽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성벽과 다메섹 혹은 세겜 성문은 예수 당시에는 없었던 장소라는 점이다. 이 성벽과 성문은 주후 44년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세운 제3성벽이다. 예수 당시에는 제2성벽만이 세워져 있었다. 제2성벽 서쪽으로 가는 문을 벗어나면 욥바로 향하는 도로가 있었다. 현재 무덤 교회는 이 도로 곁에 위치해 있다.

무엇보다 이 지역이 골고다 언덕일 확률이 높다. 더불어 현재 무덤 교회 뒤편에 위치해 있는 방들 중에는 주후 1세기 유대인들의 독특한 무덤 형태가 남아 있는 곳들이 있어, 연대기적으로도 이 위치가 예수의 무덤일 가능성에 더 힘을 실어주고 있다.

최근 무덤 교회의 지하를 발굴한 결과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교회는 물론 한때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주후 76-138년)가 기독교를 박해하기 위해 세운 비너스 신전의 흔적까지 발견되어 골고다 언덕과 무덤의 위치가 전통적으로 알려진 무덤 교회일 수 있다는 주장이 더 힘을 얻고 있다.

이러한 결과를 봤을 때 최근 찰스 고든이 발견한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의 핏자국과 언약궤가 발견되었다는 교회 내에 돌고 있는 영상은 신빙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영상은 이스라엘이나 학계에서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해프닝으로 보고 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국제성서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김진산 박사

<터치바이블 대표, 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