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⑫예루살렘의 흥망 1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3:00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⑫예루살렘의 흥망 1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⑫예루살렘의 흥망 1 기사의 사진헤롯 세 아들 역시 로마에 충성하며 예루살렘 성 확장

헤롯 이후의 예루살렘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헤롯은 한 명이 아니다. 예수께서 태어났을 당시 유대 지역을 통치한 헤롯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헤롯 대왕이라고 부른다. 헤롯 대왕은 주전 4년경 여리고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세 아들이 나누어 통치했다. 마태복음 2:22에 따르면 마리아와 요셉이 대학살을 피해 이집트에 있다가 헤롯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온다.

또 마태복음 14:1-14(막 6:14-29, 눅 9:7-9)는 세례 요한이 또 다른 헤롯을 향해 그의 형제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것을 비난했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라 불리는 인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재판을 했던 바로 그 헤롯이다.

헤롯의 세 아들은 헤롯 못지않게 로마에 충성 봉사하면서 헤롯의 유업이었던 예루살렘성을 완성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들은 헤롯이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피는 일 또한 잊지 않았다.

그중 유대인들에게 가장 호감을 샀던 인물은 주후 41∼44년 동안 로마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아그립바 1세였다. 헤롯 아그립바는 예루살렘성을 가장 크게 확장해 완공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 아그립바는 이전에 있던 제 1, 2성벽 외에 북쪽을 보호할 수 있는 제3성벽을 건설했다(유대전쟁사 2:11:6; 5:4:3). 현재 제3성벽의 흔적은 예루살렘 성 밖 북쪽 도로변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

현재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1537∼1541년 터키의 슐리만 대제가 세운 성벽이다. 헤롯 아그립바의 예루살렘 북쪽 경계에 미치지 못했다. 성벽의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슐리만 대제는 성벽 재건에 참여했던 건축가 두 명을 처형해 버렸다. 이들의 무덤이 예루살렘 욥바 문 바로 안쪽에 위치해 있다.

헤롯 아그립바는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마도 기독교인에 비판적인 모습이 다른 유대인들에게는 오히려 좋게 보였을 것이다. 헤롯 대왕에 비하면 헤롯 아그립바는 훨씬 더 자애롭고 덜 잔인했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다.

기독교의 시각에서는 다르게 평가된다. 사도행전 12장에 등장하는 헤롯이 바로 헤롯 아그립바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는데, 그는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1절)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 그의 조부 헤롯 대왕이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베드로도 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성서는 그러나 그의 삶이 얼마나 허망했는지 기록하고 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사도행전 12:20-23).

예루살렘을 온전히 완성한 것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 2세였다.

가야바 대제사장

헤롯 가문이 당시 유대 지역의 정치적 지도자였다면 종교적 지도자는 당연히 대제사장이었다. 요세푸스와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 우리는 주후 1세기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이름을 몇몇 알고 있다. 그 이름 중 우리의 시선을 끄는 인물은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다.

가야바는 유대 전통 자료인 탈무드와 미쉬나에도 등장한다. 신약성서에는 가야바가 장인 안나스와 함께 요한이 빈들에서 소리칠 때(눅 3:2)부터 대제사장이었으며, 사도들과 공회에서 토론을 벌였을 때까지도 대제사장이었다(행 4:6)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던 해에 대제사장이었다.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요 18:14)고 권고했다. 그의 관정에서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모여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였으며(마 26:3) 결국 예수를 체포해 가야바에게 데려왔다. 이때 가야바의 안뜰까지 따라온 베드로가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하고 통곡한 사건(눅 22장)은 사순절에 자주 등장하는 설교 주제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구시가지 밖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 시온산의 경사면에는 베드로의 통곡을 기념하는 교회가 있다. 주후 457년부터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었던 장소로 1931년 재건축됐는데, 교회의 돔 형태 지붕 중 하나에는 수탉 모형이 상징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교회가 세워져 있는 지하에 남아 있는 감옥 터인데, 주후 1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석회석 바위산을 뚫어 만들어진 감옥과 주변 가옥의 흔적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는 경사면에 놓인 오래된 돌계단이 주후 1세기경의 것으로 이곳이 바로 가야바 대제사장의 집이었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요셉, 가야바의 아들’의 유골함

주후 1세기 유대에는 장례를 치른 지 1년이 지나면 뼈을 다시 모아 유골함에 담아 두는 재매장 관습이 있었다. 그들의 부활신앙 때문이다. 그 근거는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환상을 보는 에스겔 37:1-14이다. 유대인들은 육체적 부활을 믿었다. 물론 몇몇 학자들은 이미 이 환상이 육체적 부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 의해 마른 뼈처럼 흩어졌던 이스라엘이 포로기 이후 다시 건설될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유골함은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들 안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석회석을 직사각형으로 깎아 만든 상자다. 상자에는 대체로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때론 여러 명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한다. 상자 안에는 뼈들이 담겨 있다. 1994년까지 895개의 유골함이 발견됐다. 유골함에 한 명의 이름이 씌어 있는 경우에도 여러 명의 시구가 확인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유골함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히브리어로 ‘요셉, 가야바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유골함이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가족 무덤으로 보이는 곳에서 발견됐다. 유골함이 상당히 아름답고 정교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최근 파인 같은 학자는 유골함의 사용을 부활신앙이 아닌 무덤 내 공간의 부족으로 보고 있다. ‘요셉, 가야바의 아들’의 유골함에는 분명 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내부에는 6명의 시구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부활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넘치는 가족 수에 비해 한정된 장묘 공간 때문에 조상의 뼈들을 치워야만 했다. 조상 매장의 중요성 때문에 오래된 뼈들을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고 유골함을 만들어 담아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대못이 박혀 있는 발뒤꿈치뼈도 유골함과 관련된 중요한 유골이다. 십자가 처형으로 죽은 이의 유골로 추정된다. 이 뼈는 예루살렘 북쪽에서 발견된 학콜의 아들 요하난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유골함 안에 들어 있었다. 요하난은 유대인으로서 20대에 십자가 처형으로 숨진 것으로 보인다. 대못의 한쪽이 구부러져 있어 이 못을 그의 몸에서 빼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예루살렘 도시 남서쪽의 작은 무덤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유골함이 발견되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와 같은 어원을 가진 이름으로, 1세기뿐만 아니라 현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흔한 이름이다. 이 유골함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 예수의 유골함일 확률은 없는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터치바이블 대표·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