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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1. 입문:신학과 신앙] ③ 신학의 역할 : 평신도가 신학을?

열려라 에바다 2014. 9. 6. 19:53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1. 입문:신학과 신앙] ③ 신학의 역할 : 평신도가 신학을?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1. 입문:신학과 신앙] ③ 신학의 역할 : 평신도가 신학을? 기사의 사진신학적 토대 없으면 신앙과 삶이 분리돼

평신도가 왜 신학공부를 해야 하는가. 성경대로 살면 되고, 신앙대로 살면 되지, 웬 신학 타령인가. 요즘은 신학을 전문하는 목회자도 신학공부를 멀리하는 시대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학은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평신도라면 다시 반문할 것이다. 정말 일반 신자도 신학적 소양을 갖추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신학의 역할’에 따라 달라진다. 신학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답변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오늘은 신학의 역할을 세 가지로 말해보려 한다. 독자들은 이 글을 읽고 나서 신학이 필요한지에 대해 스스로 답변해 보시라.

성경을 통일성 있게

신학은 성경의 내용을 ‘통일성’ 있게 보는 토대를 제공한다. 성경의 내용과 표현 방법은 다양하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 하지만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서로 충돌되거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성경을 읽다가 이런 부분을 만나면 누구나 당황한다. 또 성경의 표현에는 역사적 문헌의 성격, 문학적 성격, 종교적 성격, 수사학적 성격 등이 섞여 있다. 때로는 역사적인 사건을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때로는 시적인 상징과 은유를 사용한다. 성경의 어떤 구절은 쉽게 이해되지만, 어떤 구절은 겉으로 드러난 표현 뒤에 원래의 뜻이 숨어있다.

신학적 기초가 없으면 성경에 대한 지식이 모자이크식이 된다. 성경 전체를 통일성 있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성경 각 구절의 충돌되는 부분이나 다양한 표현 밑에 들어있는 의미를 조화롭게 볼 수 있다. 성경의 내용을 전체적이고 조화 있게 보지 못하면 많은 교리적 의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예를 들어보자. 세례를 받은 후 죄를 지으면 용서 받을 수 있는가. 이혼은 어떤 경우에 허용되는가. 죽은 후에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까. 신자들은 수도 없이 많은 교리적 질문을 가진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성경에 모두 있지만,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면 답을 찾을 수 없다. 신학의 첫 번째 역할이 여기에 있다.

설교의 내용, 삶과 연결

신학은 설교의 ‘내용’을 충실하게 만들어 주고, 설교를 삶과 ‘연결’시켜준다. 개신교에서 예배의 중심에는 설교가 있다. 설교가 대단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설교는 제한된 시간에 이루어질 뿐 아니라, 성경을 삶과 충분히 연결시키지 못할 때가 많다. 설교는 주로 ‘믿음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결신을 선포한다. 어떤 설교는 내용은 없으면서, ‘믿어라!’는 결신의 요청만 반복한다.

물론 상당수 신자들은 설교를 듣고 ‘믿음대로 살겠다’는 결신에 이른다. 그러나 교회의 문을 떠나 삶으로 돌아오면, ‘믿음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자신이 들었던 설교에 내용이 없거나 삶과 믿음을 구체적으로 연결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교가 삶과 연결되지 못하면 신앙은 활기를 잃고 만다.

만약 어떤 신자가 ‘내용 없는 설교’를 지속적으로 듣게 된다면 매우 답답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 믿기로 결단을 했지. 나도 믿음대로 살고 싶어. 그런데 어떻게 해야 되지?’ 한국교회에서 내용 없는 설교로 인해 많은 교인들이 힘들어한다. 신학은 설교의 내용을 채워주고, 설교를 삶과 연결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자 모두를 위한 것이다. 나아가 신학은 삶과 연관된 많은 문제들에 답한다. 낙태를 해도 되는가. 안락사는 어떤 경우에 허용할 수 있는가. 기독교인의 직업관은 무엇인가. 정치에 관여해도 되는가. 이런 질문들에 답하지 못하면 결국 신앙과 삶은 분리된다. 신학의 두 번째 역할이다.

세상을 신앙의 눈으로 해석한다

신학은 자신이 사는 세계를 신앙의 눈으로 보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특정한 시대 속에서 산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떠나 구름 위에서 생활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세계와 자신이 속한 시대 사이의 ‘긴장’을 가진다.

각 시대는 그 문화가 주는 가치관, 세계관, 우주관을 가지고 있다. 가치관이나 세계관은 인간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큰 ‘틀’이다. 누구도 그 시대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그 시대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성경의 가치관과 괴리가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혼란에 빠진다.

예를 들면, 학생들은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배운다. 진화론은 과학적 세계관의 일부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창조론을 가르친다. 학생들은 진화론과 창조론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모르기 때문에 혼란할 수밖에 없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가 주는 세계관이나 우주관으로 인해 많은 의문을 가지고 산다. 인간복제가 가능하다면 창조신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자녀교육에서 성경의 가치관과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한 가치관 중 어느 것을 가르쳐야 하는가. 신학은 이런 주제들에 답변을 준다. 각 개별적인 사안에 대한 답변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와 우리가 속한 세계 사이의 긴장을 해소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신학의 세 번째 역할이다.

기독교의 역사를 볼 때, 어느 시대이건 평신도가 신학적으로 탄탄할 때 교회가 건강하였다. 평신도가 신학적 토대가 없으면 신앙과 삶이 분리되고,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상실하며, 이단에 쉽게 휩쓸리면서 교회가 약해진다.

신학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판단하라. 필자는 한 가지 당부를 하는 것으로 오늘 강좌를 마치겠다. 많은 신자들이 위에서 필자가 제기한 그런 질문들에 답을 얻지 못하고 답답해하며 교회를 떠난다. 독자 여러분, 쉽게 신앙을 포기하지 말라. 쉽게 교회를 떠나지 말라. 여러분이 고민하는 대부분의 질문에 이미 신학적 대답이 있다. 신학은 추상적이거나 우리 삶과 멀리 떨어진 공허한 것이 아니다.

김동건 교수<영남신대 조직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