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경배와 찬양이란?

열려라 에바다 2011. 10. 18. 18:45


찬양과경배의 목적 찬양예배의형태

찬양이란?

찬양 : 찬양이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방법은 노래나 기도뿐만 아니라 선포도 포함된다.

그것은 찬양 속에 '자랑'이라는 의미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할렐루야의 어원이 되는 '할랄'에는 자랑하다, 뽐내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미친체하다라는 의미까지도 포함되어있다. 즉 찬양은 얌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열광적으로 하는 것이다.


경배란?

원래는 예배와 같은 말이다. 성경 원어상으로는 예배와 경배가 모두 같은 말이다. 우리나라 성경 번역시 번역자들의 불일치로 일부 성경(요한복음, 사도행전등)에서만 예배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배라고 하면 회중예배를 의미하고 경배라고 할 때는 본래적인 의미의 경배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경배의 본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찬양과 예배 모두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 경배는 너무나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서있을 수 없어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하고 선포하는데 초점이 있고 경배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데 초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낮춤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표시,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찬양과 경배의 시간에 높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표하고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결단이 없다면 그것은 참된 찬양과경배라고 할 수 없다.


찬양과경배의 목적
어떤 사람들은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부르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온전히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할 시간에 자신의 고백이나, 간증, 또는 간구의 내용을 담은 복음성가는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 대부분이 요즘 나오는 복음성가들에 대해 무지함을 볼 수 있다.

그들 대부분은 미국 신학계의 주장을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다. 그들의 배경도 모른체...

미국에서도 가스펠 송은 예배시간에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의 복음송의 의미와 미국의 가스펠 송의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찬송가에 들지 않은 대중적인 기독교 음악 전체를 복음성가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미국은 가스펠 송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 물론 넓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기독교 음악 전체를 가리키지만 좁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팝송'을 넓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록이나 메탈 같은 것까지 포함하는 대중음악 전체를 가리키지만 '팝'이라는 음악 장르가 따로 있는 것과 비슷하다.) 좁은 의미에서 가스펠 송이라 할 때는 세상을 향한 노래, 즉 안 믿는 사람의 전도를 목적으로 한 노래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곡에서는 복음이 상당히 은유적으로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음악 또한 파격적이어서 안 믿는 자들도 크게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복음성가는 여기에 해당될 만한 곡이 별로 없다. 우리나라에서처럼 기독교인을 위한 복음성가는 '가스펠 하모니'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아직 이러한 분류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찬양인도자는 예배시간에 적합한 곡과 적합치 못한 곡을 분별할 수 있어야한다.

예를 들자면 '예수 믿으세요'는 전도할 때 부를 노래지 예배용으로는 부적합하다. '돈으로도 못 가요'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배우기 위한 곡이지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므로 부적절하다. 심지여 찬송가에도 부적절한 곡이 있다.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성도를 향해 주의 일군이 되자는 내용과 우리나라가 하나님 안에서 발전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성경에 대한 무지로 '계명성 동족에 밝아'라는 표현까지 있다.(성경에서 계명성은 사단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찬양의 내용이 담기지 않은 곡들은 찬송가라도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찬양의 내용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부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찬양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찬송가 102장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같은 곡에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과 세상 것을 버리겠다는 다짐이 있을 뿐 찬양하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예수 보다 귀한 것이 없다는 고백, 예수를 위해 세상 모든 것을 버렸다는 이러한 고백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표현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선곡시에 생각할 것은 이 곡이 찬양의 목적,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합당한가를 생각하고 결정해야한다.


찬양예배의 형태

첫째는 말씀보다는 철저하게 찬양이 주가 되는 진정한 의미의 찬양예배이고 두 번째는 일반적인 예배 형태에 찬양을 많이 넣은 형태이다. 편의상 앞으로 전자는 일반형, 후자는 절충형이라고 부르겠다.

1. 일반형 찬양예배

이 형태는 기존의 예배 형식을 완전히 탈피한 자유로운 예배형식으로 찬양 자체가 예배이자 찬양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형태이다. (말씀 선포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경우 찬양은 예배를 돕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예배이다. 이러한 예배의 경우는 일정한 틀이 없기에 형태를 분류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굳이 나눈다면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찬양도 마치 소설이나 음악처럼 도입 - 전개 - 절정 - 결말의 형태를 띠는 데 ① 절정 뒤에 말씀을 선포하고 결말을 짖는 방법과 ② 절정 뒤에 말씀을 선포하고 다시 한번 절정을 거친 뒤 결말을 짓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③ 전개 뒤에 말씀을 선포하고 절정 - 결말로 가는 방법도 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여기서 결말은 설교에 있어서 결론과는 다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뒤에 가사의 진행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두란노 경배와 찬양의 경우는 찬양 인도자와 말씀 선포자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어서 ①번의 형태를 띄는 경우가 많다.

②번의 형태는 다드림 선교단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데 다드림 선교단의 목요찬양 경우는 찬양 인도자와 말씀 선포자가 대부분의 경우 일치하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가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다. 다드림 선교단은 이러한 자유로움으로 인해 ③번의 형태를 가끔 사용하기도 하며 ①번의 형태도 자주 사용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여기 서술한 모든 형태를 벗어난 자유로운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위의 분류는 편의상의 분류일 뿐 인도자와 회중이 찬양예배에 익숙해지고 하나님 안에서의 참된 자유를 누리며 예배한다면 이러한 형태의 분류는 무의미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찬양인도에 익숙지 못한 인도자라면 이러한 형태에 관심을 가지고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배워나가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2. 절충형 찬양예배

두 번째 형태는 너무나 큰 변화에는 잘 적응치 못하는 기성 세대를 위한 일종의 절충형 찬양 예배라고 할 수 있는 데, 예배의 앞부분에 찬양을 몰아 넣거나 말씀 선포 뒤에 찬양을 몰아 넣는 방법이다. 이 형태는 찬양보다도 말씀이 주가 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찬양예배라고 보기 어려우나 보수적인 신앙인 들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나라사람들 특히 40대 후반부터는 유교적인 사고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이러한 유교적 사고가 자유로운 형태의 찬양예배를 거부하게 하기도 한다. 이것이 옳은 생각은 아니지만 인간의 연약함으로 생각하고, 바울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육식을 절제했듯이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양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 형태는 목요 찬양이나 금요 찬양 같은 젊은 이들이 많이 참석하는 찬양예배 보다는 주일 저녁 찬양예배의 형태로 권장할 만하다.

이 형태는 사실상 두개의 별개의 예배가 될 위험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찬양을 앞에 몰아놓고 뒤에 말씀을 선포하는데 앞부분의 찬양과 뒷부분의 말씀에 연속성이 상실되기 쉽다. 사실 이 형태를 취하는 많은 교회들이 찬양과 말씀이 연결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말씀 선포자와 찬양인도자 간의 보다 긴밀한 협조가 요구된다.

주의 : 찬양과 말씀이 별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찬양이 말씀에 종속된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일부 교회는 찬양을 예배할 분위기 돋구는 도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찬양은 그 자체가 예배이지 예배를 돕는 도구가 아니다. 분위기 돋구는 찬송은 이미 찬양이 아니다. 찬양과 말씀이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뒤에 다시 설명하겠다.

3. 인도자에 따른 분류

앞의 분류는 예배의 구조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인도자의 역할 분담에 따른 분류를 할 수도 있다.

첫 번째 형태는 찬양인도자, 예배 인도자, 말씀 선포자가 모두 다른 경우이다. 이 형태는 절충형 찬양예배에 적합한 방법이다. 예배 인도자가 예배의 시작을 선포하고 기도한 뒤 찬양인도자가 찬양을 인도한다. 그리고 찬양이 마무리되었을 때 다시 예배 인도자가 나와서 예배를 인도하고 순서가 되었을 때 말씀 선포자가 말씀을 선포한다. 이 경우 주의할 점은 찬양 인도자와 예배 인도자의 역할 분담이다. 서로의 협의에 따라 예배 시작부터 찬양이 마쳐질 때까지 예배시작의 선포와 중간중간의 기도까지도 모두 찬양 인도자가 인도할 수도 있다. 반대로 찬양만 찬양인도자가 인도하고 중간중간의 기도는 예배인도자가 인도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별 문제가 없지만 후자의 경우는 서로의 긴밀한 협조가 요구된다. 후자의 형태가 더 어려운데도 후자의 형태가 쓰이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예배인도자가 찬양도 인도해야 하지만 음악성이 부족한 경우이다. 이 경우 사실상의 찬양인도는 예배인도자이고 찬양인도자는 보조자의 역할만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곡의 진행은 찬양인도자가 맡지만 중간중간의 짧은 메시지와 기도의 인도는 예배 인도자가 하게 된다. 이 경우는 선곡도 함께하는 것이 좋다. 또 찬양인도자의 영성이 부족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앞의 경우는 예배 인도자의 부족을 찬양인도자가 보충한다는 개념이지만 이 경우는 찬양인도자의 부족함을 예배 인도자가 보충해 주는 것이다. 이 두 경우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다. 그러나 선곡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따라서 분류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앞의 경우는 찬양인도자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예배 인도자가 선곡을 하고 찬양예배 전반을 계획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찬양인도자가 선곡을 하고 찬양의 전반적인 흐름을 계획하지만 자신의 영성의 부족을 예배인도자를 통해 도움 받는 것이다. 물론 영성이 부족하지 않아도 분담의 차원에서 그렇게 할 수도 있다. 또 보수적인 교회의 경우 찬양인도자가 어리다면 영성에 관계없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유교적인 사고의 연약함으로 인한 판단도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두 번째의 형태는 찬양인도자와 예배인도자가 같고 말씀 선포자만 다른 경우이다. 이 형태는 일반형 찬양예배에서 많이 쓰인다. 절충형에서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흔하지는 않다. 이 경우는 찬양인도자와 예배 인도자가 같으므로 역할 분담에 대해 주의할 점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찬양인도자는 선포될 말씀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있는 것이 좋다. 그래서 말씀과 어울릴 수 있는 찬양인도를 해야한다.

세 번째 형태는 예배인도자와 말씀선포자가 같고 찬양인도자만 다른 경우이다. 이 형태는 사실상 모든 순서의 인도자가 말씀 선포자이지만 설교자의 음악성 부족으로 인해 찬양인도자를 세운 경우이다. 이 경우 선곡은 설교자가 주도하는 것이 좋다. 또 다른 경우도 있는 데 예배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한사람이 다 하기는 힘들기에 찬양인도자를 세울 수도 있다. 이 경우는 단순히 예배시간의 피로만 생각한 경우와 예배준비의 문제까지 생각한 경우가 있는 데 후자의 경우는 예배인도자의 인도방침에 따라 찬양인도자가 선곡을 하고 예배 인도자와 역할 분담을 한다.

네 번째 형태는 세 가지 모두를 한사람이 인도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예배의 전체 흐름은 매우 자연스러우나 예배가 한시간을 넘어설 경우 인도자의 육체적인 피로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경우 보조 찬양인도자를 세우기도 한다. 보조 찬양인도자는 찬양의 도입부, 또는 전개부까지만 인도하고 임무를 전체 인도자에게 넘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