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안드레의 믿음

열려라 에바다 2011. 10. 18. 19:08

안드레의 믿음
 

믿음의 사람들이 부딪혔던 문제

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 속에서,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님께 가서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 6:9)라고 하였다. 물론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 있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린아이의 점심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오천 명을 먹이는 데에 맞지 않았다. 안드레의 말은, 주님이 역사하시면 그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고 남음이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앙 생활을 시작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 생각을 말씀과 정반대되는 쪽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경험이나 생각, 눈에 보이는 형편을 따라 살아왔다. 그렇게 생각을 따라 살던 우리가 어느 날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면, 말씀이 우리 생각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혼돈에 빠진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고 있는 우리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일은 나에게도 많았고, 성경을 읽어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한 문제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어느 날 자기를 불신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지식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는 믿음의 세계에 도달했다. 그 때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고 능력을 베푸셔서, 그들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렇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그러면서 조금씩 믿음을 배워갔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지는 못했다. 한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고 말씀하셨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였다. 아브라함이 사라나 자기를 볼 때, 자신은 너무 늙었고 사라는 이미 경수가 끊어졌기 때문에 자식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아들을 나으리요? 사라는 구십 세니….” 하면서 웃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눈에 보이는 형편이나 자기가 알고 있던 지식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히 11:11)
사라가 나이 늙어 단산했지만 잉태하는 힘을 얻은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런데 사라가 처음부터 그런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사라 스스로는 ‘나는 이제 아기를 낳을 수 없어. 나는 너무 늙었어. 젊어서도 아기를 못 낳았는데 늙어서 어떻게 아기를 낳아. 게다가 경수가 끊어졌기 때문에 아기 낳는 것은 불가능해.’라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렇게 확실히 알고 믿고 있었는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각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사라는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 18:14)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사라 마음에 새로운 믿음이 일어났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그로 인해 사라는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민족을 낳는 어머니가 된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다윗 등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라가다가 한 번씩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따라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그들은 그로 인해 잠시 방황하다가, 자기 눈에 보이는 경험이나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믿음으로 달려갔고,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역사하셨다.

믿음을 가르쳐 준 간증

하나님은 나에게도 그런 간증들을 허락하셨다. 내가 선교학교에 들어가 하나님의 종들 아래서 처음 훈련을 받을 때, 나는 눈에 보이는 것 자체를 신앙으로 생각하였다. 양심에 거리낌없는 생활을 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 신앙 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의 삶을 보면서, 양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선한 그 이상의 어떤 믿음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정결하게 살아도, 아무리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도,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으로는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도달할 수 없었다.
우리를 훈련하고 교육했던 선교사님들은,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 어떠하든지 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내 생각이 전혀 달랐을 때에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훈련하고 인도해 가셨다. 그분들의 아름다운 믿음, 살아있는 믿음의 세계를 보면서 나도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그것이 내게는 너무 어려웠다. 그런데 성령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셔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갈 수 있는 길로 나를 이끌어 주셨다. 그런 일들이 내 생애 속에 참 많았다.
그 중에 내게 가장 강하게 와 닿았던 것이 배가 아팠을 때의 일이었다. 내가 이 간증을 여러 번 했지만 다시 한 번 하고 싶은 것은, 믿음의 세계를 깊이 가르쳐 준 간증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배가 너무 아파서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위궤양으로 3개월 정도 고통하는 동안에 체중이 7㎏이나 빠졌다. 나는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 없었다. 무엇이든지 먹으면 설사를 했기 때문에 제산제를 먹어 가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주님 앞에 병을 낳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치고 나니까 내 마음에 마가복음 11장 24절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 내 배가 낳게 되길 기도했으니까 내 배가 다 나았다고 믿으면 그대로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 때 내 형편은, 물 같은 미음만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돼서 설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배가 다 나았다고 믿는다면 나는 밥도 먹고 고기도 먹고 김치도 먹고 된장도 먹어야 하는데, 그러면 금방 배가 터져서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먹는 것은 정말 무모한 짓 같고, 죽을 것만 같았다. 특히 의사가 나에게 ‘조심하십시오. 잘못하면 배가 터집니다. 그러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기 때문에, 나는 지극히 조심해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차거나 신 것을 먹으면 설사하고 속이 따갑고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내 배가 다 나았다고 믿는다면 커피도 마시고 김치도 먹고 해야 하니, 그러면 금방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 문제 앞에서 주님의 귀한 은혜를 입었다. 내가 말씀을 믿으려고 하니까 죽을 것 같고, 만일 안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까 굉장한 어려움이 찾아왔다. 다시 마가복음 11장 24절을 펴 놓고 깊이 생각했다. ‘내가 이 말씀을 믿고 음식을 먹는다면 정말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만일 그렇게 해서 죽는다면 성경은 거짓말이고 하나님은 사기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하나님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씀을 믿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말씀을 믿기로 하였다.
“하나님, 믿습니다. 내 배를 낫게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나는 내 배가 다 나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날 아침부터 정상적으로 김치도 먹고 된장도 먹었다. 처음에는 설사도 나고 어려웠지만, 그 형편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았다고 믿었다. 놀랍게도 하루만에 위계양이 깨끗하게 나았다. 그런 일들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나는 내가 보아 왔던 생각이나 지식이나 판단이 옳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 판단이나 경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 내가 그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달려나갔을 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빌립과 다른 안드레의 믿음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빌립과 안드레가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빌립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셨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요 6:5)
빌립과 안드레는 똑같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따라다니며 주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거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등의 많은 역사를 보았다. 그런데 빌립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갖지 못해 예수님이 그 마음 안에 자리잡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믿음이 아닌 인간의 계산으로 살아갔다. 예수님은 자기 계산이나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빌립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빌립을 깨닫게 하려고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고 물으셨던 것이다.
빌립 속에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면, “떡을 사올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역사하시면 오천 명인들 못 먹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육십만 명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이셨는데, 당신이 하나님이신데 오천 명 먹이는 데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당신이 하시면 능히 됩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빌립이 그런 믿음을 가졌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셨겠는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빌립은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역사를 보았으면서도 그러한 역사를 일으키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자기 계산 안에 머물러 있었다. 어떤 일에 봉착했을 때, 주님이 계셨지만 주님이 그 일을 해결해 주시리라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생각과 계산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빌립 속에는 항상 자기 계산, 자기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했다. 여기 빌립이 한 말 속에 ‘조금’이란 말과 ‘부족’이란 말이 나온다. 인간의 계산은 항상 그런 것이다. 제자들에게는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없을 뿐더러, 돈이 있다고 해도 그 돈으로 떡을 사오는 것도 문제가 되며, 또 떡을 사왔다 할지라도 각 사람들이 먹기에는 부족했다. 항상 부족하고 연약한 것, 바로 그것이 우리 계획과 생각으로 하는 일들의 결과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선을 쌓으려고 노력한다면, 그 일 속에 예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이 함께하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 노력과 수고로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되려 하면, 우리는 항상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넘어지고 쓰러질 수밖에 없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니이다.”라는 빌립의 대답과 같이 되는 것이다.
나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참 오랫동안 빌립과 같은 삶을 살았다. 구원을 받은 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계산, 경험, 판단 등을 버리지 못하고 항상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인생을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형편이 좋으면 기뻐하고 형편이 어려우면 절망했다. 모든 것이 좋아보이면 좋아하고 어려워 보이면 어려워했다. 나는 형편에 따라 요동하는 사람이지 주님에 의해 사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님은 빌립을 안타깝게 여기신 것처럼 나를 안타깝게 여기셨다. 그리고 빌립이 거기에서 벗어나길 원하셨던 것처럼, 주님은 나도 내 경험이나 형편, 내 판단과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속으로 옮겨지길 원하셨다. 주님은 나를 그렇게 인도하시려고 역사하셨다.
안드레는 빌립과 같지 않았다. 그가 가진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는데, 그것은 한 어린아이의 점심에 불과했다. 안드레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그 자체를 보지 않고, 거기에 역사하실 주님을 보았다. 주님이 역사하시면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안드레는 그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서 “여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나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나이까?”라고 했다. 빌립은 그런 안드레에 대해 ‘안드레는 무식해서 탈이야.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어떻게 먹여? 말도 안 돼. 예수님은 제자를 뽑을 때 잘 뽑지, 저런 무식한 사람을 뽑았을까. 계산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안드레의 마음 속에는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주님이 그것으로 오천 명을 능히 먹이실 것을 확신했다.

반드시 벗어나야 할 일

나는 어린아이가 걸음을 배우듯이 때론 넘어지기도 하고, 때론 비틀거리기도 하면서 믿음의 걸음을 내디뎠다. 방안에서만 놀던 아이가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가고, 뜰로 나가고, 마당으로 나가고, 거리로 나가 뛰어놀면서 자라는 것처럼, 내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 그것만을 믿고 그것만을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내가 거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옛날에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무서워하고 뜰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던 아이가 자라나면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뛰어다니고 공을 차고 산에도 오르는 것처럼, 아주 서툴게 “의인은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따라서 현재 보이는 형편이 어떠하든지 주님께서 내게 역사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때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내 속에 역사하셔서 놀랍게 믿음을 따라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신앙의 삶을 사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하나 벗어나야 할 일이 있다. 마치 병아리가 그 알을 깨고 알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듯이, 우리는 생각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머물러 있던 생각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마음의 세계로 들어오도록 우리를 이끌고 계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고 하셨다. 아브라함이 그 때까지 살고 있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여행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평안하게 머무르던 경험과 생각에서 벗어나서 내가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마음을 옮기라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세계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인정은 하지만, 그것이 내 형편과 안 맞고 환경과 다를 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이건 안 돼.’ 하고 자기 형편을 따른다. 사단은 그것을 굉장히 기뻐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형편에 매이게 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계속 이끌고 있다. 그로 인해 자기 계산 안에, 자기 형편 안에 머물러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안드레는 그렇지 않았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주님의 역사와 능력을 눈으로 보면서 주님의 세계 속으로 그의 마음이 옮겨져 있었다.
‘물론 이것은 인간적으론 말도 안 돼. 하지만 사랑하는 주님이 계시니까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 문제는 능히 해결할 수 있어. 주님은 이걸 하실 거야.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이시라면 이 문제를 능히 해결하실 거야!’
안드레의 마음에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드레는 들판 가운데에서 보리떡 다섯 개밖에 없었지만 오천 명의 식사를 인하여 염려하지 않고, 그 문제를 주님 앞에 가져와서 맡기고 마음에 쉼을 누릴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빌립처럼 나의 계산이나 경험 속에 앉아 있기를 원치 아니하신다. 내 생각을 떨쳐버리고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줄 믿는 쪽으로 마음을 옮기길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시고,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이루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고 할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우리 생각이 미치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종들이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믿음으로 발을 내딛길 원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일이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같이하길 바라신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 흐르면서 그 때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빌립에서 안드레로

구원을 받고 주님 앞에 감사한 것은, 안드레가 주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실 것을 믿었던 것처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을 믿었던 것처럼, 내 마음에도 그런 마음이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주님이 하실 수 있어. 또 주님이 이건 꼭 하실 거야.’ 그런 마음이 내 마음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빌립과 같은 내 마음을 안드레와 같은 마음으로 옮기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전에는 모든 것이 준비된 것을 보고 일을 하려고 나섰지만, 점차 내게 갖춰진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주님을 보면서 ‘주님, 내 형편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시면 이 일도 능히 될 줄 믿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럴 때마다 인간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역사를 주님이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해외에 선교사를 보낼 때, 공산권 국가에서 수양회를 할 때, 수양관을 짓고 방송 설교를 시작할 때, 인터넷 선교를 할 때…. 그 어떤 일도 모든 것이 갖추어져서 한 것이 없다. 다만 ‘이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루신다’는 믿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은 내가 더 큰 것을 믿게 되길 원하실 뿐 아니라, 지금도 나를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이끌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뿐 아니라 당신의 모든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눈에 보이는 인간의 세계를 보고, 그 믿음으로 발을 내딛길 정말 원하고 계신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빌립과 같이 자기 계산 안에 갇혀서 형편과 계산에 맞게 모든 것이 갖추어졌을 때 일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고, 안드레처럼 가진 것은 보리떡 다섯 개밖에 없지만 주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는 마음으로 발을 내딛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형편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발을 내디뎌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뜻을 이루게 하시려고, 우리를 안드레와 같은 신앙인으로 이끄신다.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마음껏 일하신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불렀을 때, 기드온은 겁쟁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드온을 계속 이끄셔서 불과 삼백 명으로 십일만오천 명이나 되는 수많은 적군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일으키셨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삼백 명은 십일만오천 명 앞에서 순식간에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삼백 명이라는 군사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달려나갔을 때, 하나님이 기드온으로 하여금 승리케 하셨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안드레의 믿음을 보이시면서, 하나님이 안드레에게 역사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역사하실 것임을 가르쳐 주신다. 우리가 가진 것이 적고 우리 모습은 추하지만, 주님이 역사하시겠다는 생각만이 아니라 그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달려나갔을 때 주님이 우리를 크고 거룩하게 이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 믿음을 주기 위하여 주님은 오늘도 우리 마음을 이끌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