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좇아 왕이 된 아비멜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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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도 왕이 되어야겠다
구 |
약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미디안에게서 이스라엘을 건져낸 정말 큰 용사였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의 손에서 건져낸 후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나와서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라고 하였다. 그렇게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권유받았지만,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리라.” 하면서 왕이 되기를 거부하였다. 사사기 8장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기드온은 아내가 많아서 아들을 70명이나 낳았다. 세겜 족속에서도 첩을 하나 얻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아비멜렉이었다. 어느 날 아비멜렉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왕이 될 수 있는데도 거절한 아버지가 어리석어 보였다.
‘우리 아버지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에게서 건져 주었고 분명히 왕이 될 수 있었는데, 왜 왕이 되기를 거절하지?’
그러면서 아비멜렉 마음에 ‘나라도 왕이 되어야겠다’는 욕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드온에게는 아들이 70명이 있고 자신은 세겜 족속의 첩에게서 난 자식이기 때문에, 어느 면으로 보아도 자기가 왕이 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세겜의 자기 가족들을 찾아가서 “여룹바알(기드온)의 아들 칠십 인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 중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임을 기억하라.” 하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세겜 족속 가운데 퍼뜨리게 했다. 세겜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우리 친척 가운데서 왕이 나겠구나! 왕이 나면 우리가 잘살게 되고, 왕의 혜택을 입을 수도 있고, 정말 좋겠다!’ 하는 마음이 들어서 아비멜렉과 마음을 같이하게 되었다.
물론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드온의 아들 70명이 있기 때문에, 아비멜렉이 왕이 되려면 먼저 그들을 제거해야 했다. 세겜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비멜렉을 왕이 되게 하기 위하여 기드온의 아들 70명을 죽일 수 있도록 지원해 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알부림 묘에서 은 70개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었고, 아비멜렉은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좇게 했다.
만약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로 자기를 좇게 한다면, 그들은 기드온의 아들 70명을 죽이는 데 참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건져낸 위대한 사람인데,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그 아들 70명을 죽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비멜렉은, 지혜롭고 덕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미디안의 손에서 건져낸 기드온의 아들 70명 죽이는 것을 틀림없이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경박하고 방탕한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던 것이다.
방탕한 사람들은 성실하게 노력해서 그 대가를 얻으려 하기보다 쉽게 한탕주의로 흘러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방탕한 사람들이라야 아비멜렉의 말에 잘 이끌려 가고, 아비멜렉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아비멜렉이 시키는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해서 자기를 좇게 했다. 그리고 서서히 자기 목적을 그들에게 전달해서 그들의 마음이 자기 마음과 하나가 되었을 때, 어느 날 오브라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쳐들어가서 자기 형제 70명을 잡아 한 반석에서 죽였다. 그렇게 해서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욕망에 취하면
성경을 보면 성경 속에 많은 이야기들이 나타나는데, 그것들은 그냥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일들이 그 당시의 중요한 뉴스 거리였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중요한 사건이나 이야기라서 성경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세계를 보여 주기 위해서 기록하셨다. 여룹바알, 즉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지만 왕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고 많은 권한을 갖게 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다른 사람에게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왕이나 장관 같은 높은 지위를 갖게 되길 원한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왕을 구했을 때 기뻐하시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사람에게 권한을 주어서 그 사람의 다스림을 받기 원했지만, 하나님은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보다 당신이 직접 다스리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면 정말 은혜롭고 복되다. 그런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으려면 그들의 마음을 꺾어야 하고 마음을 기울여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다스려 주시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마음을 비우고 깨끗하게 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했던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도 다스림 받게 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귀로도 들을 수 있는 인간을 왕으로 삼기 원했던 것이다.
기드온은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자기가 왕이 되어서 많은 사람을 다스리고 많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려 주시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왕 되기를 거부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려 주시기를 바랐다.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꺾고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마음이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길 원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세겜 족속에게서 얻은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 속에 왕이 되어야겠다는 욕망이 들어간 것이었다. 그 욕망이 아비멜렉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바라는 욕망이 순탄하게 이루어진다면 욕망을 버려야 할 이유가 없다. 욕망이 나쁜 것은, 우리 마음을 어떤 세계 속으로 강하게 이끌어서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어떠한 죄도 서슴치 않고 짓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아비멜렉이 왕 되기를 바라고 기다리다가 왕이 되었다면 욕망의 종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왕이 되면 되는 것이고 안 되면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아비멜렉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때, 그는 왕이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꼭 왕이 되어야 했다. 그 일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의 아들 70명을 한 자리에서 죽이는 악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다.
사단은 우리를 범죄 속으로 끌어넣기 위하여 그냥 우리에게 ‘도둑질해라. 간음해라. 남을 미워해라. 살인해라’고 시키지 않는다. 또 사단이 그렇게 시킨다고 해서 우리가 사단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지도 않는다. 사단은 우리 인간들을 잘 알고 있는데, 죄를 짓게 하기 위해 먼저 인간들 속에 욕망을 집어넣는다. 사람에게 어떤 욕망이 하나 들어가면 그는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죽이거나 거짓말하거나 도적질하는 일을 쉽게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점잖고 품위가 있는 사람이, 어느 날 술을 마셔 술에 취하면 정상적일 때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을 하는 것과 같다. 욕망에 취하면 술에 취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하고 더러운, 생각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다.
아비멜렉은 사단이 넣어 준 ‘왕이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의 아들 70명을 쉽게 죽였다. 또 세겜 사람들도 자기 친척 가운데서 왕이 된다는 욕망에 사로잡히니까, 아비멜렉을 도와 돈을 주어서 경박하고 방탕한 사람들을 끌어 모으게 했다. 아비멜렉은 그들을 통하여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을 죽이고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욕망의 끝
옛날 우리 나라가 가난할 때에, 겨울이 되면 신문에서 종종 ‘복어 알을 끓여 먹고 한 가족이 죽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었다. 원래 복어는 참 맛있는 고기인데, 그 알에는 무서운 독이 있어서 절대로 복어 알을 먹어서는 안 된다. 그 당시 부잣집에서 복어를 사서 먹으면, 알은 전부 끄집어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버려진 복어 알을 보고 먹음직하고 좋아 보이기 때문에 주워 갔다. 가난한 사람들은 복어가 너무 비싸 감히 사 먹을 엄두도 못내기 때문에, 복어 알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너무나 먹음직하고 좋은데, 부자들이 왜 이 좋은 것을 버렸을까?’ 생각하면서 집에 가지고 가는 것이다. 생전 고기를 먹어 보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다가 아버지가 알을 가져오니까, 가족들은 무를 썰어 넣고 국을 끓여 맛있게 먹는다. 그러고는 온 가족이 죽는 것이다. 옛날 우리 나라에는 겨울이 되면 종종 그런 불쌍한 일들이 신문에 나곤 했다.
복어 알 속에 들어 있는 독에 대해서 모를 때 너무나 맛있어 보이고 좋아 보인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아무리 맛있게 보이고 좋아 보여도 절대로 먹지 않는다. 그것을 먹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가져다가 쓰레기통에 버려 버린다. 그런데 복어 알 속에 독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보기에 좋고 맛있어 보이는 이 알을 누가 버렸을까?’ 하고 쓰레기통에서 주워다가 먹고 죽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것이 복어 알과 같다. 욕망은 그냥 볼 때에는 참 좋아 보이고 아름답게 될 것 같은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욕망은 목적한 것만 성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나 도둑질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하도록 하는 무서운 것이다.
어느 날 아비멜렉의 마음 속에 그런 욕망이 들어왔다. 그는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 하나 때문에 자기 아버지의 아들 70명을 한 반석에서 죽이는 무서운 악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었다. 그는 악을 저지름으로 말미암아 악한 방법으로 왕이 되었다. 사사기는 아비멜렉이 왕이 된 것까지만 이야기하지 아니하고, 왕이 된 후에 일어난 일들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지 삼 년에 악한 신을 아비멜렉과 세겜 족속에게 보내셨다.
그로 인해 불의한 방법으로 왕이 되고 악한 탐욕에 매여 있던 그들 속에 결코 평안과 참된 만족이 있을 수 없었다.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이 한 반석에서 죽임을 당했을 때에 말째 아들 요담은 도망갔는데, 후에 그는 세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너희가 오늘날 여룹바알과 그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과 의로움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을 인하여 즐길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를 인하여 즐기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에게서도 불이 나와서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삿 9:19,20)
요담의 저주대로 불과 3년이 지난 뒤에 세겜 족속과 아비멜렉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서, 세겜 족속이 세워 준 아비멜렉이 세겜 족속을 죽이고, 아비멜렉 자신도 세겜 족속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욕망을 좇아감으로 인해 두개골이 깨어져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우리를 욕망에서 건져 주는 힘
나는 죄 사함을 받은 후 성경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그냥 읽었지만 한 번 두 번 읽는 동안에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안에 있는 욕망들을 하나 하나 씻어내 주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구원받고도 내 마음 속에는 ‘훌륭한 목사가 되어야겠다. 정말 잘살아야 되겠다. 남들에게 인정을 받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욕망들이 많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욕망들이 오랫동안 나를 끌고 다녀서 나는 욕망에 종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주님 앞에 기도하며 말씀을 가까이하다 보니까, 훌륭한 목회자가 되는 것도 싫어지고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이나 존경받는 것이나 잘살게 되는 것도 싫어졌다. 그런 것이 내 마음의 소망이 아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죄에 빠져 고통하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게 되었고, 그 것으로 내 마음에 소망을 삼게 되었다.
그 뒤에도 사단은 종종 내 마음 속에 때를 따라 욕망을 집어넣어 욕망 속에 사로잡혀 그것에 종이 되도록 하려고 유혹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거기서 건져 주시는 것을 경험했다. 내가 훌륭하게 되거나 유명한 사람이 되거나 위대한 목사가 되거나 돈을 많이 모아서 잘살아 봐야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면서, 내가 어떤 욕망에 이끌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이끌림 받게 되었다. 내가 욕망에서 벗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내 삶을 평안하고 복되게 이끌어 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만일 내가 위대한 종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실 것이고, 내가 부자가 되는 것을 기뻐하신다면 그렇게 만드실 것이다. 하나님이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알아서 인도하시는데, 내가 구태여 그런 욕망에 사로잡혀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부터 성령이 나를 인도해 주시는 은혜를 느낄 수 있었고, 하나님이 내 마음에 힘있게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반대로 사단은 어떤 욕망을 우리 속에 넣어서, 욕망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어 갖가지 추하고 악한 죄를 범하도록 한다. 불행하게도 아비멜렉은 그 욕망이 들어왔을 때 왕이 되면 한평생 평안하고 만족하게 살 것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왕이 되기 위해서 세겜 족속들과 마음을 같이하고, 경박하고 방탕한 사람들을 이용해서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을 죽였다. 그렇게 해서 아비멜렉은 왕이 되었지만, 정말 자기가 바랐던 평안과 만족은 오지 않았다. ‘세겜 족속에게서 불이 나와서 아비멜렉을 사르고,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세겜 족속을 살랐다’는 요담의 저주처럼 결국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욕망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 마음을 지배할 때 먼저 우리 마음을 속인다. 사단은 아비멜렉에게 욕망을 넣어 줄 때 ‘네가 내 말을 듣고 내 말을 따른다면 네가 결국 세겜 족속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욕망을 따라가면 결국 패망한다고 가르쳐 주지 않고, ‘네가 왕이 되면 평화롭고 즐겁고 복되게 살 것이다’고 속였다. 아비멜렉은 그 욕망에 속아서 정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아버지의 아들 70명을 죽이고 세겜 사람들을 수없이 죽였다. 욕망에 속은 아비멜렉은 악한 사람으로 그 일생을 비참하게 마치고 말았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욕망은 우리를 속이고 있다. 욕망을 따라가는 결과가 좋다면 왜 우리가 욕망이 나쁘다고 말하겠는가? 욕망은 임시 보기에는 좋지만, 결국 우리를 망케 하는 것이다. 욕망에 사로잡히면 욕망에게 이끌려서 그 뒤에 일어날 일을 생각지 않고 살다가, 결국 비참한 종말을 맞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 욕망을 버리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을 버리고 욕망을 취해서 망케 하는 일을 한다. 내일을 내다볼 수 없는 경박한 사람들은 욕망을 따라가면서 자기가 복되고 아름답게 될 것처럼 속고 있다. 오늘날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욕망의 종이 되어서 그것을 섬기면서, 비참한 저주의 앞날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마음을 겸비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때,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그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서 욕망을 씻어 준다. 그로 인해 우리가 정말 복되고 은혜로운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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